알렉산더 볼코프(Alexander Volkov)는 역사적이고 혁명적인 주제에 의한 무대 작품들의 제작이 이상적인 이유로 인해 장려되던 1930년 초에 스파르타쿠스를 위한 그의 가사 대본를 작곡했다. 박해에 항거하는 스파르타쿠스의 영웅적 투쟁에 대한 그의 대본은 젊은 아르메니아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Aram Khachaturian)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하차투리안은 "나는 항상 스파르타쿠스를 우리 시대의 현재, 독재에 항거하는 우리의 투쟁, 어디에나 존재하는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인물로 여길 만큼 정신적으로 친근하게 생각해 왔다"고 언급한 바있다. 하차투리안의 광대하고 활기찬 음악적 '벽화'는 20세기 발레의 가장 위대한 클래식의 하나로 스파르타쿠스를 등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작품은 1956년에 레닌그라드 키로프극장에서 레오니드 야콥슨(Leonid Yakobson)에 의해 처음 무대에 올려졌다. 1962년에 볼쇼이극장으로 옮겨져서 이고르 므와세예프(Igor Moiseyev)에 의해 그다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던 1958년의 버전이 다시 올려졌으나 단 여섯 차례 공연 후에 레퍼토리에서 제외되었다. 야콥슨의 무대는 커다란 스케일의 역사적인 캔버스에서 옛 이야기를 재현하였으나 므와세예프 버전과 비교하여 그다지 성공하진 못했다. 스파르타쿠스를 볼쇼이발레에 새로운 시대를 연 극적이고 강력한 원동력으로 세워놓은 이는 바로 1968년의 유리 그리가로비치(Yuri Grigorovich)였다.
그리고로비치의 혁명적인 스테이지는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였으며 심리적인 깊이에 대한 추구와 연결된 광대한 스케일은 현대발레의 토대를 흔들었다. 강력하고 드라마틱하고 장인적이고 흥미진진했던 표현의 주도적인 요소는 솔로("Monologues"), 듀엣, 군무 등 각기 다른 형태에서의 다양하면서도 빛을 발했던 고전적인 댄스였다. 솔로들은 4명의 주역-스파르타쿠스, 크라수스, 르리기아, 아에기나-들에게 확대된 춤의 형태로 그들의 가장 내적인 감정과 열망을 표한하게 하는 "모놀로그"를 통해 그리가로비치가 발레에서의 표현의 범위를 팽창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스파르타쿠스의 첫번째 공연들은 블라디미르 바실리예프(Vladimir Vasiliev)와 미하일 라프로프스키(Mikhail Lavrovsky) 가 주역이었는데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이 두 개의 대조적인 해석- 바실리예프, 열망적인 꿈꾸는 사람, 라프로프스키 용기있는 리더-은 마리스 리에파(Maris Liepa)의 빛나는 악역, 크라수스에 의해 표현된다. 이러한 캐릭터들은 발레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현상이었고 이 남성이 주도적으로 지배하는 발레에서 놀라운 댄서들에 의해 창조된 기억에 남은 인물들은 똑같이 놀라운 여성 헤로인, 니나 티모페예브나의 강력하고 지적인 고급 정부인 아에기나와 에카테리나 막시모바의 시적으로 드라마틱한 프리기아, 나탈리아 베세메르트노바의 비극적으로 멸망하는 헤로인인 두 명의 매우 다른 프리기아, 들을 거의 압도했다. 이 첫번째 위대한 공연자들은 이후 역할에 대한 모든 해석에 있어서 그 전형을 세웠다.
그리고로비치와 바르살라즈의 스파르타쿠스 버전에서 고대 세상에 대한 표현물들은 무대 막, 의상의 디테일, 테이블보로 최소한으로 축소되었다. 그리하여 액션들은 고대 로마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듯이 인간성을 구원할 수 있는 강력한 타이탄의 등장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버린 르네상스 이태리에서 펼쳐진 듯하다. 이 스파르타쿠스는 문명과 세대가 오고 가는 보편화된 비극에 대한 세팅이다. 행운의 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 Music
아람 하차투리안(Aram Khachaturian 1903-1978)
아람 하차투리안은 소련시대의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작곡가 중의 하나였다. 아르메니아의 후예로서 티블리시(Tblisi)에서 태어나 그는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인 30세 모스크바에서의 유학을 마쳤고 5년안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가장 선두에 선 작곡가 중 한 명으로 등장했다.
하차투리안은 "현대적이고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음악적 테크닉"을 사용함으로써(쇼스타코비치나 프로코피에프가 그러했듯) "반인민적 예술"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1948년에 공식적인 징계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작곡가, 교사, 그리고 지휘자로서의 그의 경력은 장수하였으며 화려했다. 작곡가로서 그의 성공은 민족적인 아르메니아의 민속연구를 위대한 러시아의 음악적 전통 안에서 리드믹한 생생함, 선동적인 멜로디, 화려하고 이국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의 특징적인 음악 속으로 녹여내는 능력에 있었다.
하차투리안의 가장 성공적인 작업들 가운데 표제음악적인 주악장들-발레, 영화, 그리고 연극을 위한 우연한 음악-이 있다. 그의 두 발레작품, 가이아네(Gayanech, 유명한 사브르 댄스가 1940년대 하차투리안을 국민적 음악가로 만들었던)와 스파르타쿠스(이 작품에서 작곡가는 4개의 오케스트라 콘서트 작품들을 뽑아냈다)의 생생한 스코어들과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세 개의 거장적이고 표현적인 콘체르토들은 러시아 밖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빈번하게 연주되는 작품들 중에 하나다. 그의 다른 작품들은 수많은 영웅적이고 대중적인 노래 뿐 아니라 심포니, 피아노, 챔버뮤직 등이 있다.
하차투리안은 대다수 음악가들이 나라 밖을 여행할 수 없었던 시기에 수 회의 국제적인 투어에서 스스로 작곡한 작품의 지휘자로서 나라를 대표하였던 USSR의 뛰어난 국제적 음악계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결실에 대해 명예와 훈장을 받았으며 75세에 모스크바에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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