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판시팡트래킹&여행(2015.12)

14.베트남/하노이 투어-호치민 묘& 생가...명물 식당-'꽌안응온' 찾아 하노이 삼만리...

나베가 2016. 1. 16. 04:00

12월8일 저녁....

 

하롱베이 투어를 마치고 잽싸게 버스에 올라 좋은 자리를 선점해 갈때 통로의 간이 의자에 앉았던 설움을 토해냈다.

갈때는 조금 빨리 갈 수 있으려나~

신나는 하롱베이에서의 여정이었지만 이 작은 버스로 5시간을 또 이동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슬며시 잠입한다.

그래도 졸기도 하고, 갈때 들렸던 휴계소에서 커피도 한 잔 하며 오다보니 생각보다는 훨씬 빨리 하노이에 도착했다.

 

저녁이 조금 늦은감이 있지만, 그래도 사전 조사 리스트에 오른 하노이의 유명 식당- 분보남보(Quan Bun Bo Nam Bo)를 찾아갔다.

사실 이 집 간판이 분보남보여서 간판 이름인 줄 알았는데, 분보남보는 베트남의 대표 음식인 쌀국수와 분짜와 함께 음식 이름이란다.

분보남보는 숙주와 바삭하게 튀긴 양파, 땅콩과 허브를 고명으로 얹어주어 칠리 소스를 넣어 먹는 일종의 베트남식 비빔면이라고 할까....

 

이 집은 분보남보뿐 아니라 그외에도 여러가지 음식을 팔고 있어 메뉴판을 보고 무엇을 먹을까...골라먹는 재미도 있다.

가격대는 베트남 대부분 식당이 우리가 보기엔 황홀할 지경이다.

그러니 맥주와 콜라...등 음료를 비롯해 맘껏 시켜 먹어도 부담이 없어 행복한 기분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다.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밤이었어서 였을까...

아니면 하롱베이에서의 행복함의 연장선이었을까....

평소보다는 많은 음식과 술을 마셨다.

 

 

 

 

 

 

 

12월 9일 오전.....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그래도 비행기 시간이 담날 1시 45분이니 하루 온 종일 투어를 하고도 충분히 남는 시간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짐을 완벽하게 챙기고, 아침 식사 전에 운동삼아 '호안끼엠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며칠 전에 왔을때의 한적한 분위기는 어디가고 초입부터 단체로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해 조금은 놀라웠다고 할까...

잠깐 최도사님이 이들 뒤에 합류해 운동을 따라해서 한바탕 웃음을 자아내고...

우린 빠른 걸음으로 호숫가를 걸었다.

 

몇걸음 건너 운동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이곳도 역시 중국 공원에서 보았던것과 같이 낚시도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도 있고...

단체로 운동을 지도하는 곳도 여러곳에서 눈에 띄었다.

재미있는 것이 단체 운동하는 팀들의 연령대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ㅎㅎ

알고보니, 중년들은 공원에서 주로 스포츠 댄스를 즐긴다고 한다.

일명 베트남의 사회체육이다.

비단 이곳에서뿐만이 아니라 어느 공원에서든 사람들이 모여서 살사, 왈츠, 탱고 등을 추고 있는데, 강습도 하고, 실력들도 줄충하다고...

 

그들을 피해 사잇길로 걷다시피 호숫가를 돌았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굉장히 빠른 속보로....

여행을 와서 이처럼 아침 운동을 하고나니 상쾌한 기분이 가슴을 뚫고 나온다.

 

호텔로 들어서니 일행들이 아침식사를 하느라 한참이다.

우리도 합류해서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열대과일-'패션 프릇'도 눈치껏 맘껏 가져다 먹으며.....

 

 

 

 

 

 

오늘 일정은 오전에 '호치민 묘'와 생가를 방문하고, 시내 관광을 하다가 점심을 먹은 후엔

베트남의 하노이의 명물인 인형극을 보기로 했다.

 

호치민 묘를 가기 전에 먼저 인형극장에 들러 티켓팅을 한 뒤에 호치민 묘로 향했다.

극장 옆을 보니, 멋진 까페테리아가 있다.

이따가 난 인형극을 보는 대신 저 까페테리아 바깥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며 거리 구경이나 해야겠단 생각이다.

 

 

 

 

 

 

 

 

 

 

 

 

호치민 묘에 도착했다.

들어서기도 전부터 일렬로 주욱 줄을 선 모습에 흠짓 놀라움이 인다.

역시 베트남 민족의 영웅 호치민 이라는게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호치민 묘는 년중 참배를 할 수 있는것이 아니다.

1년중 6개월만 묘소 참배가 가능하고, 참배 가능한 날이 아닐 때는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어서 주변에 가까이 갈 수도 없단다.

그리고 입장할 때에는 반바지나 짧은 치마는 절대 입고 입장할 수가 없다.

 

 

호치민  (Ho Chi Minh , 胡志明)은 30여 년 간 베트남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끈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공산주의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1919년에 베르사유 회의에 8개 조항의 탄원서를 보내 인도차이나 식민지 국민들에게 통치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줄 것을 요구했고,

1930년 2월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으며, 10월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1941년 귀국해 독립동맹 베트민을 구성했고, 1945년 프랑스와 일본이 무너지자 9월 2일에 베트남의 독립을 공표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은 프랑스가 베트남 남부를 장악하면서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8년간의 전쟁 끝에 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 협정을 통해 남북으로 분할되었고, 이에 북베트남에 공산 정권을 수립하며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초기생애

호치민은 지방의 가난한 학자인 구엔 신 후이의 아들로 태어나 킴리엔이라는 마을에서 자랐다.

어린시절을 비참하게 보냈지만 14~18세에 휴에 있는 문법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며, 그뒤에 판티에트에서 교사로 지냈고

이어 사이공에 있는 기술훈련원 견습생이 되었다.

 

 

 

 

 

 

 

외국 여행과 공산주의 신조의 성숙

1911년 그는 바(Ba)라는 가명으로 프랑스 증기선의 요리사 자리를 얻어 3년 이상을 선원으로 지내면서

아프리카의 여러 항구와 보스턴이나 뉴욕 등 미국의 도시를 여행했다.

 

1915~17년 런던에서 생활한 다음 제1차 세계대전 중반에 프랑스로 옮겨 그곳에서 정원사, 청소부, 웨이터, 사진 수정자, 화부(火夫)로 일했으며,

1917~23년 프랑스에서 지내는 6년 동안 그는 구엔 아이 쿡('애국자 구엔')이라는 이름으로 적극적인 사회주의 활동을 폈다.

그곳에 사는 베트남인들을 조직화했고, 1919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모인 강대국 대표들 앞으로 8개 조항의 탄원서를 보냈다.

탄원서에서 호치민은 프랑스 식민정권이 인도차이나와 식민지 국민들에게 통치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줄 것을 요구했다.

평화회의 중재자들로부터 아무런 반응도 얻어내지 못했지만 이 일로 인해 그는 정치의식이 있는 많은 베트남인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았다.

 

다음해 러시아 공산혁명의 성공과 레닌의 반제국주의 정책에 자극을 받아 1920년 12월에 사회당을 탈당하고 프랑스 공산당에 가담했다.

그후 자신이 발간하는 잡지 〈파리아 Le Paria〉('추방자')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주의 정책의 해악을 고발했다.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노동자 계층의 많은 지도자들과 사귀었는데, 그곳에서 수년 간 투쟁 활동을 벌이고 나서 1923년말 모스크바로 갔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은 뒤 그는 〈프라우다 Pravda〉지에 레닌에 대한 감동적인 고별사를 실었다.

그뒤 그해 6월 17일부터 7월 8일까지 열린 제5차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회에 적극 참여했다.

이때 그는 프랑스 공산당이 식민주의 정책을 좀더 맹렬히 반대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대회에 제출한 그의 성명서 본문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 이유는 압박받는 농민들(산업 노동자들과 대치되는 계층)의 혁명적 역할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신념이 최초로 공식 표명되었기 때문이다.

 

1924년 12월 호치민은 리 투이(Ly Thuy)라는 가명으로 공산주의의 요새인 광저우[廣州]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베트남 민족주의운동의 첫 간부 요원들을 모집하여 베트남 혁명청년협회를 조직했다.

이 협회는 탄 니엔(Thanh Nien)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 협회의 회원들 거의 모두가 정치적 신념 때문에 인도차이나에서 추방되었던 사람들로서 조국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에 대항하는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함께 모인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광저우가 인도차이나 민족주의의 첫 본거지가 되었다.

중국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장제스[蔣介石]가 1927년 4월 광저우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추방하자 호치민은 다시 소련으로 피신했다가 1928년 브뤼셀과 파리를 거쳐 시암(지금의 태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동남아시아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표로 2년 동안 지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중국 남부에 남아 있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

베트남 혁명청년협회의 단원들은 1929년 5월 홍콩에 모여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하노이나 휴, 사이공 같은 베트남 시에 있는 사람들은 적극적인 조직활동을 펴기 시작했으나 호치민의 부관들 가운데 몇 사람은 지도자의 부재 속에 소극적으로 임했다. 이때 호치민은 모스크바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었다.

 

1930년 2월 3일 호치민은 시암에서 돌아온 후 공산당 창당을 주관했다. 처음에는 베트남 공산당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1930년 10월 이후 호치민은 소련의 충고를 받아들여 인도차이나 공산당(PCI)이라는 이름을 수용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국제적으로 더 폭넓게 인정받았고 베트남 공산당이라는 이전 이름에 내포된 소시민계급 민족주의의 인상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국면에서 볼 때 호치민은 주도적인 역할보다는 오히려 혁명활동의 조직을 생각하면서

여러 파당간에 벌어지는 갈등을 중재하는 일을 더 많이 한 사람이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그의 신중함,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분별력, 모스크바를 멀리하지 않으려는 배려,

그리고 베트남 공산주의자들 가운데서 이미 이룩한 그의 영향력 등을 엿볼 수 있다.

 

PCI는 베트남의 폭력적인 반란운동과 동시에 발족되었다.

프랑스의 탄압은 잔인했다. 호치민 자신도 부재중에 혁명분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였다.

그는 처음에는 홍콩으로 피신했다가 그곳 프랑스 경찰이 도망범 인도에 대한 승인을 영국 정부로부터 받자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곳을 빠져나와 상하이[上海]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7차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회에 호치민은 PCI의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이 대회는 호치민이 오랫동안 주장했던 정책인 인민전선(Popular Front:파시즘에 대항하는 비공산당 좌파와의 동맹)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36년 인도차이나의 공산당원들은 이 전략에 맞추어 자신들의 반식민주의 입장을 누그러뜨리고 '반파시즘 식민주의자들'과의 협력을 고려했다.

같은 해에 프랑스 총리인 레옹 블룸(Léon Blum)의 인민전선 정부는 인도차이나에 있는 좌파 세력들이 좀더 자유롭고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호치민은 1930년에 받은 사형선고 때문에 망명생활을 끝내고 돌아갈 수 없었다.

 

1937년 블룸의 인민전선 정부가 무너지자 인도차이나에 대한 탄압이 되살아났다.

1938년에 이르러 인민전선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국가의 탄생

1938년에 호치민은 중국으로 돌아가 옌안[延安]에서 마오쩌둥[毛澤東]과 2개월 정도 같이 지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했을 때 호치민과 그의 부하인 보 구엔 지아프, 팜 반 동은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상을 진척시킬 계획을 꾸몄다.

이무렵부터 그는 호치민('깨우치는 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3인조·5인조 동지들이 1941년 1월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들어가 5월에 베트민이라는 조직을 구성했다.

이 단체의 결성으로 베트남 고유의 민족주의가 다시 강조되었다.

 

이 새 기구는 중국에서 장제스 정부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공산주의자인 호치민을 믿지 않았고 그를 체포해버렸다.

따라서 호치민은 중국에서 18개월 동안 구금을 당했다. 이 기간에 그는 〈감옥으로부터의 비망록 Notebook from Prison〉이라는 유명한 책을 집필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한문 단시 모음으로 우울한 단상, 금욕적인 사고, 혁명을 주창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동료들이 중국 남부의 최고 사령관인 장 파쿠에이와의 타협을 통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에 반대하고 장 파쿠에이의 권익을 지지하겠다는 조건에 동의해 그의 석방을 얻어냈다.

 

1945년에 베트남 혁명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길을 연 2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첫째, 일본군이 인도차이나를 완전히 점령한 뒤 모든 프랑스 관리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했다. 둘째, 6개월 후에 미국이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은 이로 인해 철저히 패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써 베트남 독립동맹과 호치민의 가장 강력한 두 적이 무너진 것이다.

호치민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개월이 못 되어 그는 미국 군대와 접촉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OSS:미국의 첩보기관)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베트남 독립동맹의 게릴라들이 중국 남부 산지에서 적과 싸웠다.

그와 동시에 보 구엔 지아프의 요원들로 구성된 특별 기습부대가 호치민의 지휘를 받으며 1945년 봄에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후인 8월 19일에 그들은 하노이에 들어갔다.

 

마침내 9월 2일 바딘 광장에 구름같이 모여든 수많은 군중 앞에서 호치민은 묘하게도 미국의 독립선언을 연상시키는 말을 사용하여

베트남이 독립되었음을 공표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창조주는 우리에게 불가침의 권리들과 생명·자유·행복을 주었다……!"

 

그러나 베트남 독립동맹의 장애물이 모두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연합군의 협정조항에 따르면 중국의 장제스 군대가 일본군을 대신하여 16°선 북쪽을 장악하도록 되어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당시 드골 장군의 영도하에 해방된 프랑스가 독립 베트남이라는 기정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베트남의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려 든 점이다.

10월 6일 자크 르클레르 장군이 사이공에 내린 뒤 2~3일이 지나자 중무장한 기갑사단이 도착했다. 3개월도 안 되어 그는 남베트남을 장악했다.

호치민은 계속 싸워야 할지 협상을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결국 협상하기로 결정했으나 언젠가는 싸워야 할 것에 대한 대비는 철저히 했다.

호치민의 전략은 프랑스 군대로 하여금 북쪽에 있는 중국 군대를 퇴각시키게 하고 나서 독립의 승인, 르클레르 군대의 철수, 베트남의 재통일을 보증할 프랑스와의 협약을 맺는 데 주력하자는 것이었다.

 

1945년 10월말에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프랑스 군대가 독립에 대한 대화를 거절하자 호치민과 프랑스 군대 양측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3월이 되어서야 교착상태가 풀렸다. 호치민 편에서는 프랑스군에 제시한 요구에 대해 보다 폭넓은 지지기반을 얻으려는 생각에서 베트남 독립동맹 이외의 당들도 새로운 정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쪽에서는 중국 군대의 철수를 얻어내기 위해 외교사절단을 중국에 보냈다.

이런 조처가 취해지고 나서 르클레르 군대 일부도 북쪽 하이퐁에서 물러났다.

 중국 군대의 철수가 확정된 뒤 호치민은 3월 6일에 프랑스군과의 협정에 조인했다.

 

협정조항에 따르면 베트남은 '자치정부·군대·재원(財源)을 가진 자유국'으로 인정되었으나

계속해서 파리가 주도적인 역할을 행사하는 프랑스 연방에 통합되어 있었다.

12일 후 르클레르가 얼마 안 되는 군대를 이끌고 하노이로 들어갔고 군대는 제한구역에서만 활동하게 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양측의 극단주의자들은 그 협정에 대해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호치민은 일련의 회의(1946. 6~9)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고 프랑스 정부와 2차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하이퐁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1946. 11. 20~23)로 깨지고 말았다.

이때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군대 사이에 충돌이 있은 후 프랑스 순양함이 하이퐁에 포격을 가했다.

거의 6,000명에 가까운 베트남인이 죽는 바람에 우호적인 화해에 대한 기대도 무너졌다.

병든 몸에 환멸을 느낀 호치민으로서도 좀더 호전적으로 보복하자고 나서는 추종자들의 요구를 물리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12월 19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몇 개월 후 북베트남의 한쪽 구석에 피신해 있던 호치민은 다시 파리와 접촉해보려고 했으나 파리에서 제시한 조건은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948년 프랑스군은 1945년 8월에 혁명을 지지하여 사임했던 전(前) 안남인(베트남인) 황제 바오 다이를 다시 제자리에 앉혀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조건은 2년 전 호치민에게 제안했던 것보다는 유리했다.

이때 프랑스가 이런 조건을 낸 것은 베트남의 전통 지배계층을 지지하여 베트민을 약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 지압의 지휘를 받는 베트민 군대가 게릴라 전법과 테러 행위를 동원해 프랑스군과 바오 다이의 군대를 봉쇄해버렸기 때문이다. 1953년말 대부분의 베트남 지방이 베트민에게 장악되었고 좀더 큰 도시들도 사실상 포위상태에 있었다.

프랑스군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결정적으로 패하게 되자 협상하는 수밖에 없었다(디엔비엔푸 전투)

 

 

 

 

 

제네바 협정과 제 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54년 5월부터 7월 21일까지 8개국 대표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트남 대표들과 함께 제네바에 모였다.

이때 베트남 대표는 2개 대표단, 즉 호치민 지지자들로 구성된 대표단과 바오 다이 지지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8개국 대표들은 베트남이 따르기로 되어 있는 1가지 협정을 체결하고서 회의를 끝냈다.

그 협정의 내용은 1956년에 실시하기로 예정된 선거 전까지는 베트남을 17°선의 경계로 나누었다가

선거 후에는 베트남인들이 통일된 정부를 세우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제네바 협상에서 호치민이 행사한 역할을 평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를 대신하여 충실한 친구인 팜 반 동이 대표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국토의 분할이라는 조건과 자기들이 전쟁중에 정복했던 것보다 작은 영토를 통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베트남 독립동맹이 보여준 온건함은 일찍이 1946년 프랑스와의 협정에 조인했던 호치민이 세운 모범을 따르는 것이었다.

융통성 있는 이런 태도는 실상은 소련과 중국의 압력을 의식한 데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태도를 보였다고 베트남 독립동맹이 모든 면에서 성과를 올린 것은 아니다.

베트남의 재통일을 보장할 수 있었던 선거가 미국과, 그당시 실제적인 기반 위에 세워진 남베트남에 의해 무기한 연기되자 하노이 쪽이 실패하고 만 것이다.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이 장악한 북베트남은 남쪽의 광대한 농업지역과는 단절된, 자원이 빈약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영토가 더 넓은 동맹국들인 중국과 소련에게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호치민의 통치는 탄압적이고 철저히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55~56년 농업개혁은 무지에서 나온 만행·탄압과 함께 시행되었다.

북베트남인들에게 '호 아저씨'로 알려졌듯이 호치민은 마음만 먹으면 대단한 인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45~46년에 행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전의 혁명활동들을 돋보이게 했던 자신의 인간성을 포기했다. 이 늙은 정치가는 외교분야에서는 그래도 나은 행운을 누렸다.

그는 강대한 공산주의 두 동맹국 사이에서 능숙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모스크바와 베이징[北京](1955), 뉴델리와 자카르타(1958)를 오갔다.

심지어 1960년 모스크바를 여행할 때는 동맹국 사이에 중재자 역할까지 했다.

호치민은 경력으로나 선호도로나 소련과의 관계가 긴밀했지만 아시아 혁명 당시 중국이 맡았던 초기 역할을 잊지 않았다.

 

한편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모스크바와의 관계를 활용하는 일에 몰두하며 무엇보다도 베트남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런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는 두 공산주의 강대국 사이에서 노련하게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결과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그는 양쪽으로부터 똑같은 양의 원조를 받았다.

 

1959년경부터 북베트남은 다시 전쟁에 개입했고 남 베트남에서도 고 딘 디엠정권에 대한 게릴라(베트콩으로 알려짐)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1959년, 북베트남의 사회주의 건설이 통일운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라오동(노동자의 당)의 입장표명이 있었으며,

그후 호치민은 정계의 제1선에서는 물러났지만 계속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6년 7월 17일 호치민은 북베트남인의 표어가 된, 다음의 메시지를 보냈다.

"베트남 국민의 가슴에 독립과 해방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또한 1967년 2월 15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의 친서에 대해 그는

 "우리는 폭격의 위협 아래서는 절대로 협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그는 긴 협상의 초반에 죽었고 그럼으로써 신속한 타협의 기회는 분명 감소되었다.

(발췌/다음 백과)

 

 

 

<대통령 관저앞에서...>

 

 

 

 

호치민 묘에는 카메라는 아예 들고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입구에 맡겨놓으면 나갈때 찾아갈 수 있도록 그들이 옮겨놓는다.

가방에 먹을거리도 넣고 들어갈 수가 없어 역시 맡겨놓았다가 나올때 맡긴곳에서 찾는다.

 

 

 

 

 

 

 

30여 년 간 베트남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끈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공산주의 지도자.....호치민...

비단 베트남 시민이 아니어도 이 대단한 지도자의 묘에 방문해 생생히 살아있는 듯 안치되어 있는 '호치민'을 보고 있자니,

엄숙함을 떠나 경외심 마저 들었다고 할까...

발걸음 조차 얼어붙어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경비원의 지시에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호치민 묘 입구를 나오니 바딘 광장  옆으로 '호치민의 생가' 가 이어져 있었다.

나는 그곳에 들어 그가 살았을 때의 방과 가구, 자동차...등을 보고 있자니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끈 이 대단한 지도자의 굳고 고지식한 삶이 온 몸으로 느껴지는것 같다.

 

 

 

 

 

 

 

 

 

     

 

 

 

 

호치민은 대통령 관저보다는 대부분의 업무를 이 생가나 주위 집에서 보았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생가의 내부를 보니, 안락한 모습의 가정 집이 아니라 사무실 같다.

평생을 나라와 국민 생각 뿐이었을  호치민...

가장 영향력있는 20세기 공산주의 지도자 다운  삶의 모습이다.

 

 

 

     

 

 

 

 

 

 

 

 

 

 

 

 

 

 

 

 

 

 

 

 

 

 

 

 

 

 

 

 

 

 

 

 

 

 

이 길은 호치민이 거주하면서  운동이나 산책을 하며 가장 아끼고 즐겨 찾던 길이라고 한다.

이름은 망고길(Mango Road)...

이름 그대로 과거에 이 길 옆으로는 망고 나무가 무척 많았다고 한다.

 

 

 

 

 

 

 

 

 

 

 

 

 

 

 

 

 

 

 

 

 

 

1958년 5월 17일 부터 이곳에 거주하였다고 하는 호치민의 집이다.

이곳은 아까 본 생가보다는 조금은 가정집 다워 보였지만 여전히 가장 검소한...정말 필요한 것만 딱 갖추고 사는 모습이다.

 

 

 

 

 

 

 

 

 

 

 

 

 

 

 

 

 

 

 

 

 

 

 

 

 

 

 

 

 

 

 

 

         

 

 

 

 

호치민 생가를 나와서 '일주사'로 가며 보이는 호치민 묘 건물을 보고 있자니, 처음 들어섰을 때와는 달리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에도 호치민 처럼 모든 국민이 영웅시 하는 민족의 지도자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에서....

 

 

 

 

 

 

 

 

 

 

 

 

호치민 묘소 바로 옆에 있는 베트남 국보 1호인 '일주사( one Pillar Pagoda)'에 도착했다.

1049년 Ly Thai Tong왕이 꿈속에서 아이를 점지해 준 관세움보살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이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프랑스 식민지배 시절 한 번 파괴되었지만 곧 재건되었고, 지금은 하노이를 상징하는 사찰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건물을 자세히 보니, 일주사란 이름에 맞게 아슬 아슬하게도 기둥 하나에 세워진 사원이다.

 

 

 

 

 

 

 

 

 

 

 

 

 

 

 

 

 

 

 

 

 

 

 

 

바딘 광장 주변에 있는 호치민 박물관이다.

들어가지는 않고 그냥 앞에서 기념 촬영만....

 

 

 

 

 

 

 

 

 

 

 

 

 

 

 

 

 

 

 

 

 

 

호치민 묘와 생가, 박물관이 있는 바딘 광장을 나와 잠시 쉬면서 과일을 먹었다.

일행들 모습엔 그저 함박미소가 가득하다.

 

 

 

 

 

 

 

 

 

 

 

 

 

 

 

 

 

 

점심을 먹으러 하노이 탑 리스트에 오른 식당을 찾아 나섰다.

모두들 기운이 넘쳐나니 무조건 걸어서 가잔다.

아닌게 아니라 매번 이렇듯 걸어서 다니니 하노이 시내 투어는 거저 하게 되 일석 이조가 아닐 수 없다.

 

 

 

 

 

 

 

하노이 사람들의 교통수단은 자동차가 아니라 스쿠터가 월등히 앞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온 도로가 스쿠터 부대로 꽉 차 자동차가 제대로 달리기는 커녕 끼어들 자리 조차 없을것만 같다.

나같아도  차라리 자동차 보다는 스쿠터가 더 편할것 같다는 생각 조차 든다는.....

 

 

 

 

 

 

 

 

빼곡히 들어선 낡은 건물들과 그 건물앞을 거미줄 처럼 지나고 있는 전선줄들...

도로를 빼곡히 메우고 있는 차량들과 스쿠터와 인력거까지...그리고 매연...

이 복잡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하노이가 너무나 매력적인 것은 건물들을 다 뒤덮을 기세로 서있는 가로수들 때문이다.

 

 

 

 

 

 

 

 

 

 

 

 

 

 

 

 

 

 

 

 

 

 

 

 

 

 

 

길가에서 이처럼 플라스틱 간이탁자와 의자를 놓고 쌀국수 등 쉽게 한 끼 때울 수 있는 간이 식당이 즐비하다.

베트남 사람들의 소박한 생활상의 단면이랄까....

 

 

 

 

 

 

 

 

 

 

 

 

 

 

 

 

 

 

 

 

 

 

 

 

 

 

 

 

 

 

 

 

 

 

 

 

 

 

 

 

 

점심을 먹기 위해 하노이의 명물 식당-꽌안응온(Quan An Ngon)을 찾아 가는 중이다.

핸폰 네비를 들고 걸어서 찾아가자니 하노이 시내 투어는 처음 도착 날부터 제대로 하고 있다.

 

 

 

 

 

 

 

 

 

 

건물을 다 뒤덮을 기세로 흐드러지게 서 있는 가로수들 때문에 도시가 더욱 운치가 있어 보인다.

녹음이 푸르른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예쁜 까페들도 앙증 맞아 보이고....

 

 

 

 

 

 

그 앞을 지나는 박 배낭을 멘 여행객들도....

스쿠터 부대도 ...

호젖이 홀로 유유자적 바퀴를 굴리며 지나고 있는 인력거도....

내 발걸음을 잡는다.

 

 

 

 

 

 

 

 

 

 

 

 

 

 

 

 

우와~

신호등에 걸렸나?

일제히 멈춰 서 있는 스쿠터 부대를 보니, 경주선에 선 모터 사이클 선수들 같은것이

여행자의 눈엔 정말 베트남 하노이의 볼거리가 아닐 수 없다.

 

 

 

 

 

 

가로수가 이 정도로 울창한 길이라면 이건 뭐~ 도로라기 보단 공원 길에 더 가깝다.

 

 

 

 

 

역시 울창한 가로수 뒤로 보이는 붉은 벽돌의 성당 건물이 멋드러진다.

어느 나라를 가나 성당은 건축물의 최고봉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유난히 가로수가 흐드러지게 울창하다고 했더니, 바로 옆이 '레닌 광장' 이다.

베트남과 구 소련....

호치민과 레닌...그리고 그의 친구이자 제 2대 주석인 Ton Duc Thang

이들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2003년 10월7일에 만들어진 인공호수 공원이다.

 

이곳 역시 아침 저녁으로 많은 인파들이 운동을 하러 찾아오며,

낮에는 돈없는 젊은 연인들이 벤치에 앉아 사랑을 나누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는 그냥 사진 한 컷 찍고 식당찾아 삼만리길로....

 

 

 

 

 

 

 

 

 

 

 

 

 

 

 

헐~

아무리 하노이가 스쿠터 부대로 유명하지만, 이렇듯 스쿠터를 침대삼아 누워 쉴줄이야~

참으로 편안한 자세구만~

 

 

 

 

 

 

 

 

 

 

 

 

 

 

오호~

가로수가 엄청나다 했더니, 이렇듯 어마무시한 지게 차량을 타고 가지치기 할 줄은 몰랐다.

여행객에게 하노이...하면 떠오르는것들 중 하나가 가로수 일지니 이렇듯 정성을 다해 가꾸지 않으면 안될 터이다.

 

 

 

 

 

 

 

 

 

 

 

 

 

1,2 층을 꽉 메운 마네킹 가게가 먼 발치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갖가지 형상과 모습들...

여러가지의 컬러가 어우러져 마치 재미있는 예술작품을 보는것도 같다.

 

 

 

 

 

 

 

 

 

 

 

 

헐~

이 구두가게도 넘 재미있네~

내 생전에 처음 보나??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면 밖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구두 가게...ㅋㅋ

 

순간 웃기기도 하고 재밌어서 가게 앞에 서 있었더니,이를 본 주인이 잽싸게 우리 앞에 선다.

'어서 오시라고....'ㅎㅎ

 

 

 

 

 

 

 

 

 

 

 

 

 

 

 

 

 

와우~

드디어 이 식당을 찾아 하노이 삼만리를 헤멘 '꽌안응온' 에 도착했다.

 

 

 

 

 

 

 

 

 

 

 

 

 

식당안으로 발을 디미는 순간 악! 소리가 절로 터진다.

 

세상에~~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다 몰려들었단 말인가~

혹시 하노이를 방문하는 세상 모든 여행객들이 마치 유명 관광지를 필하듯 이곳에 들리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곳엔 자리가 없어서 안내원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넓은 2층 한 방에 우리 8명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지...

하마터면 하염없이 기다리던 지, 삼만리를 걸어 찾아왔거늘 그냥 돌아갈 수도 있었을 뻔 하였다.

 

암튼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펼쳐 일사천리로 주문을 했다.

무엇이 맛있는 지 미리  사전 리스트를 작성해 왔기에...ㅋㅋ

 

 

 

 

 

 

수십가지의 쌀국수가 있는 베트남에선 글쎄...한 달 내내 먹어도 모든 메뉴를 다 맛보지 못할 지도....

우린 이번엔 족발이 들어있는 쌀국수-'분보후에'와 이곳에서 너무도 유명한 '반쎄오' 그리고 '넴(짜조)'을 주문했다.

 

 

아래 사진속 튀김 롤( 넴)도 너무 맛있었고, 족발이 들어있는 쌀국수도 얼마나 맛있는 지....

그런데 우리 팀원들은 족발을 다 건져내고 안먹어서 내가 다 싹쓸이 해서 먹었다는....ㅋ~

쫄깃해서 매운 베트남 칠리 소스에 찍어 먹으니 쫄깃하고 담백한것이 얼마나 맛있던 지....

간이 너무 진하게 배어 있는 우리나라 족발과는 완전히 다른 맛으로 매운 소스가 정말 압권이었다는...

일석이조로 족발이 맛도 맛이지만 피부와 관절에 좋다는거...ㅋ~

 

 

 

 

 

 

아!!

그리고 이 식당에서 가장 맛있었던건 바로 이 종업원이 일일이 하나씩 싸서 주는 '반쎄오' 다.

서비스 받는 맛도 맛이지만 정말 맛이 황홀하다.

어떻게 이리도 얇게 전병을 붙일 수 있는 지...노랑색과 야채의 초록이 매치되어 눈앞에 음식이 놓아지는 순간 탄성이 먼저 터진다.

마치 계란 지단을 노오랗게 붙인 듯 종이장 처럼 붙여 속 내용물을 넣어 반을 접은 것을

라이스 페이퍼에 야채와 함께 싸서 소스를 찍어 먹는것인데, 참새가 엄마가 싸주는 먹이를 기다리다 받아먹듯 그 기다림이

너무 힘들었을 정도...ㅋㅋ 

 

 

 

 

 

 

 

베트남에 다시 가고싶은 이유중 하나라고 할까...

우리가 하노이에 도착해서 먹은 이제까지의 음식들이 그리워서... 

가격은 또 얼마나 우리들을 행복하게 하는 지.....

 

 

 

 

 

 

 

이제까지 중 가장 우아한 식사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아직도 사람들로 가득한 식당을 보고 있자니, 이곳이 왠지 우아한 2층보다 더 분위기가 좋은것도 같다.

행복에 겨운 투정....ㅎㅎ

 

 

 

 

 

Outside the Opera, Paris (1879)

Saint Preux, Aria de Syr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