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GRAM
28일 | 베토벤 교향곡 5번 (Beethoven Symphony No. 5,)
말러 교향곡 1번 ( Mahler Symphony No. 1 ’Titan’)
ABOUT THE CONCERT
유럽을 능가하는 미국 오케스트라의 자존심과 실체!
‘미국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넘어 빈 필, 베를린 필에 견주는 최고의 사운드를 이어온 시카고 심포니(CSO)가 3년 만에 두 번째 내한(2013 로린 마젤)을 음악 감독 리카르도 무티와 함께 한다. 2013년 시카고 심포니의 첫 내한공연을 지휘하기로 했던 무티는 당시 급성 독감으로 포디엄에 오르지 못해 큰 아쉬움을 남긴바 있다. 하여 CSO 창단 125주년을 기념해 완전체로 한국을 찾는 최강의 조합 ‘무티 & 시카고 심포니’를 향한 기대가 고조되고 있다. 리카르도 무티 개인으로선 12년 만의 네 번째 내한(1985 필라델피아, 1996, 2004 라 스칼라 필하모닉)이다.
1월 28일에는 베토벤 교향곡 5번, 말러 교향곡 1번이 준비됐다. CSO 감독으로 장기 집권하는 동안 게오르그 솔티가 ‘시카고 사운드’를 완성하며 남긴 대표작, 베토벤 ‘운명’을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일가를 이룬 무티는 어떤 색채로 꽃 피울지 관심을 모은다. 일사분란하게 악기군의 특성을 재배열하는 무티의 마법 같은 손놀림이 극치를 이룰 말러 1번 ‘거인’도 놓칠 수 없다.
1월 29일에는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1번 ‘고전적’, 힌데미트 현과 관을 위한 협주음악,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이 준비됐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감독 시절 필립스에서 남긴 ‘고전적’ 교향곡에서의 명석한 해석은 세월이 지나 어떻게 영글었을까. 재기 넘치는 프로코피예프의 감각을 노회한 지휘자가 어떻게 풀어낼지, 아시아 투어에서 같은 곡을 공연하는 일본에선 가장 기대하는 작품이다. CSO의 라이벌 악단 보스턴 심포니의 창립 50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힌데미트 작품은 라 스칼라 시절 벨칸토 발성처럼 맑게 울리던 무티의 사운드가 CSO와 함께할 땐 어떻게 예술의전당을 채울지 브라스와 스트링의 묘기를 기대케 하는 작품이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은 1996년 라 스칼라 필과 함께한 이후 20년 만에 한국팬과 다시 만나는 곡이다. 역시 청년 시절 필라델피아의 금관 사운드와 비교해 CSO는 어떤 기량을 보일지 관심을 모은다.
2016년 한국에서 열리는 최고의 오케스트라 공연은 무엇인지, 이 시대를 대표하는 마에스트로 리카르도 무티와 시카고 심포니가 그 해답을 제시할 것이다.
ABOUT THE CONDUCTOR
리카르도 무티 | Riccardo Muti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리카르도 무티는 1941년 나폴리 태생으로 현 시카고 심포니 음악감독이자 빈 필 명예 단원이다. 1967년 청년 지휘자를 시상하는 귀도 칸텔리상을 수상했고, 1972년 클렘페러의 후임으로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됐다. 1980-1992년 까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1985년 한국도 방문했다. 1986-2005년 까지 밀라노 스칼라 극장의 예술 감독을 맡았고, 1987년 밀라노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스칼라 사임 후 특정 감독급 포스트에 취임하지 않고 객원 지휘자로 활약하다가 2010년 5월, CSO 음악 감독에 취임했다.
무티는 베를린 필과 빈 필도 정기적으로 객원지휘하고 있는데, 특히 빈 필과는 1973년 이후 거의 매년 포디움에 오르며 깊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1993, 1997, 2000, 2004년 빈 필 신년 음악회를 지휘했으며, 2005/06 시즌에는 30 회 이상 지휘대에 올랐다. 빈 필 중추 멤버로 구성된 빈 궁정 악단의 초대 명예 음악 감독을 맡았으며, 2011년 7월 28일 잘츠부르크 음악제 개최 중 70세를 맞아 빈 필 명예 단원 칭호를 받았다. 1971년 이래 정기적으로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참여하여 많은 오페라와 콘서트 무대도 지휘하고 있다.
레퍼토리는 우선적으로 모국 작곡가를 많이 소개한다. 전속 계약은 아니지만 주로 도이치 그라모폰, EMI레이블과 레코딩을 진행하고 있으며, 청년 시절에는 필하모니아와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앨범을 출반했다. 베르디 오페라 대부분은 EMI와 SONY에서 녹음했으며, 전집을 남긴 것으로는 베토벤 교향곡(EMI), 브람스 교향곡(Philips), 슈만 교향곡(EMI), 슈베르트 교향곡(EMI) 차이콥스키 교향곡(EMI), 스크랴빈 교향곡(EMI)이 있다.
ABOUT THE ORCHESTRA
시카고 심포니 | Chicago Symphony Orchestra
1891년 창설된 시카고 심포니(CSO)는 2016년에 125 주년을 맞는다. 유럽 메이저 오케스트라를 능가하는 연주력과 조직력으로, 지금도 세계 관현악계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주시하는 대표적인 오케스트라이다.
미국 오케스트라는 음질과 레퍼토리 면에서 각각의 지역성을 갖고 있는데 원만하고 뛰어난 균형 감각이 돋보이는 보스턴 심포니나 엄선된 음악감독들과 함께 꾸준히 중부 유럽 사운드를 유지하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에 비해 시카고 심포니는 화려한 음색을 자랑한다. 현지에선 스테이지의 폭이 좁은 심포니 센터 홀에 맞춰 천장을 향해 음을 울리는 습관이 지금의 ‘시카고 사운드’를 만들었다는 견해도 있다.
125년에 걸쳐 10명의 음악감독을 배출한 CSO의 역사는 6대 프리츠 라이너, 8대 게오르크 솔티 재임기 동안 두 번의 황금시대를 거친다. 헝가리 출신의 라이너는 CSO의 기초를 구축한 지휘자로 평가된다. 수석 연주자를 적극적으로 교체했고 한때 첼리스트 야노스 슈타커를 영입하려 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CSO 사운드는 급격한 발전을 경험했고 라이너는 RCA에서 엄청난 양의 녹음을 통해 명반을 양산했다. 라이너는 단원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투어에서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1962년 감독직을 사임했다.
장 마르티농에 이어 CSO를 물려받은 게오르그 솔티가 지금 CSO가 누리는 악단의 현재를 닦은 인물이다. 활발한 해외 투어를 실시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앙상블이라는 찬사를 곳곳에서 얻었다. 1969-1991년까지 음악감독을 지냈고 1997년 타계할 때까지 거장형 지휘자와 메이저 오케스트라의 상생 모델을 제시했다. 솔티 시절 CSO 사운드는 강인한 앙상블과 파워풀한 사운드로 지칭되면서 베를린 필, 빈 필에 뒤지지 않는 역량을 보였다. 솔티는 아바도, 줄리니처럼 자신과는 다른 유형의 지휘자를 CSO에 수석 객원 지휘자로 영입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1991년 바렌보임이 감독에 취임해 새 심포니 센터를 개설했다. 2010년 무티를 새 감독으로 맞이한 CSO는 “빈 필, 베를린 필과 비교해 충실하고 안정감이 있다”는 평가를 얻으며 또 다른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BEETHOVEN, Symphony No. 5 in C minor
만약 외계인이 방문해 모든 클래식 음악 가운데 단 한 곡만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곡을 선택하겠는가?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을 택할 것이다. 아홉 곡의 베토벤 교향곡 가운데, 아마도 세상의 모든 곡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졌으면서 저마다의 뇌리에 굵고 뚜렷하게 아로새겨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교향곡 구조인 4악장으로 되어 있는데, 악장 하나하나가 애매한 구석이 전혀 없고 역동성과 긴장감을 더욱 극대화하는 악기들의 운용이 돋보인다. 베토벤의 모토인 ‘암흑에서 광명으로’ ‘투쟁으로부터 승리로’ 나아가는 고난과 극복의 모습이 먹구름 낀 날씨와 화창한 날 청명한 대기처럼 뚜렷하다.
한편, 비평가들은 ‘운명’ 교향곡의 특징을 ‘불규칙성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베토벤이 당시 곡을 구성하기 위해서 으레 지켜지던 모티브의 구성이라든지 리듬의 진전, 악장의 구성 규칙을 넘어서서 그로부터 벗어나 뛰어난 곡을 썼기 때문이다. 프레이즈나 리듬의 구성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뒤바뀌기도 하고 끝악장에서 발휘되는 놀라운 힘도 큰 의미에서 리듬의 불규칙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베토벤은 “더 아름다운 것을 위해서 파괴하지 못할 규칙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이는 고전주의를 넘어서 낭만주의로 다가선 베토벤의 혁신을 대표하는 하나의 슬로건이 되었다.
교향곡 4번이 5번보다 먼저 완성되기는 했지만 교향곡 4번 작곡이 착수되기 전부터 교향곡 5번의 스케치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시기는 늦어도 교향곡 3번 ‘에로이카’를 완성한 후인 1804년 4월경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곡은 1808년 완성됐다.
1805년부터 1808년은 베토벤 창작 중기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여러 편의 걸작이 작곡된 반면, 귓병이 악화돼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도 힘들어졌다. 반면 작곡가로서 베토벤의 명성은 확고해지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이루었다. 창작에 대한 의욕도 강하게 일어났다. 교향곡 4번 글에서 언급했듯이 1807년경 요제피네와의 사랑도 끝이 났다. 베토벤이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격렬한 투쟁과 승리를 노래한 곡을 쓰기에 충분한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이 곡의 부제인 ‘운명’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 제목은 제자 쉰틀러가 1악장 도입부 네 음의 동기를 묻는 질문에 베토벤이 “운명은 이처럼 문을 두드린다”고 답했다는 일화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첫머리 동기를 ‘운명의 동기’라고 부르게 됐다.
한때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운명’이라 부르는 것은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통용된다고 부정적으로 얘기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어 해설서에도 ‘Schicksalsymphonie(운명교향곡)'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으며 요즘은 영미권 음반이나 프로그램에도 ’Destiny'라고 표기돼 있는 경우가 많으니, ‘운명’은 세계인의 보편적인 명칭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작품의 초연은 1808년 12월 22일 빈의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에서 이루어졌다. 이 때 교향곡 6번 ‘전원’도 함께 초연되었는데(당시 교향곡 5번과 6번은 번호가 바뀌어 있었으나 출판할 때 현재의 번호로 자리잡았다), 미사 Op.86, 피아노 협주곡 4번, 합창 환상곡 Op.80도 함께 연주되었다고 한다. 요즘으로 쳐도 마라톤 음악회다. 너무 많은 곡을 한꺼번에 연주했고 예정됐던 출연자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초연은 실패로 기록됐다.
초연 당시 베토벤은 이 곡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고 악보가 인쇄된 뒤에도 여기저기 수정이 가해지고 추가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리허설을 할 때에도 그 수정작업이 끈질기게 계속되었으므로 초판본은 쓸모없이 되었고 1809년 3월에야 수정본이 나왔다. 후원자였던 로프코비츠 후작과 라주모프스키 백작에게 헌정되었다.
1악장 도입부 ‘자자자 잔!’ 하는 강렬한 ‘운명의 동기’는 전 작품을 통해 일관되는 통일성을 갖게 한다. 마치 모든 것을 생성시키는 근본과도 같은 의미심장함을 품고 있다. 베토벤 이전에도 이것과 유사한 동기가 수난곡이나 오라토리오, 오페라에서 이따금 등장했었다. 베토벤 이후에는 슈베르트의 가곡, 바그너나 베르디의 오페라, 브람스 교향곡 1번이나 가곡 등에도 이런 종류의 동기가 사용됐다. 그러나 ‘운명’에서 베토벤만큼 효과적으로 이 동기를 쓴 경우는 드물다. 베토벤은 자신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 동기를 시험했다. 피아노 소나타 ‘열정’ 1악장, 교향곡 3번, 피아노 협주곡 4번, 바이올린 협주곡 등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2악장은 조용하고 명상에 잠긴 듯한 선율이 느긋하게 세 번의 변주를 거쳐 코다에 이른다.
3악장은 이제 자리를 잡은 스케르초이다. 이 악장에서 시시각각 임박해오는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주제는 두 개 있는데 빠른 템포의 춤추는 듯한 리듬이 즐겁기보다는 비통하게 절규하는 듯한 역설로 다가선다. 자체적으로 맺힘과 풀림을 반복해가며 4악장으로 끊김 없이 넘어간다.
마지막 악장에서는 편성된 악기의 종류가 훨씬 많아져 폭넓은 음색과 음량을 내준다. 교향곡 사상 최초로 피콜로, 콘트라 바순, 세 개의 트롬본 등이 보강되어 당당한 울림을 선보인다. 암흑에서 광명으로 진군하는 대군처럼, 이 기념비적인 교향곡의 최후를 장식한다.
베를리오즈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두고 “베토벤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내적인 사상이며, 그의 남모를 고뇌이기도 하고, 억압된 분노이자 실의 속 몽상과 환영이며 그의 환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에게 크나큰 영향과 뛰어넘을 수 없는 좌절을 함께 준 인류 불멸의 역작,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이다.
Beethoven Symphony No.5 (Mov.1)- Riccardo Muti, La Scala Philharmonic
Mahler, Symphony No.1 in D major 'Titan'
말러 교향곡 1번 ‘거인’
Gustav Mahler
1860-1911
음악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한데 애써 경계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것을 ‘허위적 관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대중가요를 종종 듣곤 했는데 그런 제 모습을 보고 후배가 한마디 툭 던지더군요. “이제 음악적 노선을 바꾸는 겁니까?” 물론 장난삼아 던진 말이겠지요. 한데 그 농담 속에도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 이를테면 클래식과 대중음악 사이에 놓인 견고한 장벽이 있습니다. 극단적으로는 클래식만을 ‘들을 만한 음악’으로 여기는 순혈주의자들도 종종 눈에 띕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면의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심리에 가깝지 않을까요?
음악에는 경계가 없다
정작 음악에서 중요한 것은 개성과 깊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르 불문하고 그 두 가지를 품고 있는 음악은 훌륭합니다. 저는 최근에 싱어송라이터 한대수의 옛날 노래를 몇 번인가 들었습니다. 18세의 천재가 뉴욕 롱아일랜드의 다락방에서 작곡했던 ‘바람과 나’를 혼자 흥얼거렸습니다. 신중현이 작곡한 ‘나뭇잎 떨어져서’라는 노래도 따라 불러봤습니다. 참 좋은 노래들입니다. 내친 김에 그리스 태생의 팝가수 나나 무스쿠리의 노래를 들으면서 회상의 감정에 젖어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요즘 젊은 세대들이 보기엔 ‘완전 아저씨 취향’이겠지요. 그래도 저 같은 50대들에게는 한 시절을 동행했던, 지금 들어도 여전히 좋은 노래들입니다. 이런 노래들을 듣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근육과 신경이 서서히 이완되고 마음도 착해집니다.
자, 그러면 이번에는 더 어린 시절의 노래 한 곡을 떠올려볼까요? 혹시 이런 노래가 기억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 불렀던 동요 가운데 ‘아 유 슬리핑, 아 유 슬리핑, 브라더 존~’ 하면서 시작하는 노래가 있지요. 영어로 써보자면 ‘Are you sleeping, are you sleeping, brother John~’이 되겠지요. 아마 기억나는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여러 명이 함께 부르던 돌림노래 형식의 동요인데, 주로 영어 가사로 많이 불렀습니다. 뒷부분 가사는 이렇습니다. ‘Morning bells are ringing, Morning bells are ringing, Ding-dang-dong, Ding-dang-dong.’ 구글에서 검색하면 귀여운 애니메이션과 함께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소녀가 잠꾸러기 동생을 깨우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군요. 제목은 ‘Brother John’입니다.
사실 이 노래는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불렸습니다. 아마 18세기 초반 무렵이었을 겁니다. 원래의 제목은 ‘프레르 자크(Frère Jacque)’입니다. 이어서 오스트리아에서도 유행했지요. 제목이 ‘Bruder Martin’으로 바뀝니다. 또 이것이 영어권으로 건너가면서 ‘Brother John’으로 다시 한 번 바뀝니다. 한데 이 제목은 ‘동생 마르틴’이나 ‘동생 요한’이 아니라, ‘마르틴 수사’ 혹은 ‘요한 수사’로 번역되는 게 맞습니다. 수사란 가톨릭의 수도자들을 일컫는 말이지요. 말하자면 애초에는 게으른 수사들을 빈정대며 부르는 노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남동생’으로 해석해 불러도 별 무리는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꾸러기 동생을 깨우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 외려 더 친근합니다. ▶말러가 어린 시절을 보낸 체코의 소도시 이흘라바. 모라비아 지방과 보헤미아 지방 사이에 있다.
근대의 음악가들 중에서 음악에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 인물로 구스타프 말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낭만주의 시대의 마지막에 자리하는 이 음악가는 자신의 몸속에 저장된 많은 음악을 교향곡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다시 말해 음악가로서 그가 보여준 태도는 ‘경계의 벽’에 갇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그는 어린 시절에 들었던 군대의 행진곡, 아버지가 운영하던 선술집에서 흘러나오던 유행가 가락, 농부들의 소박한 춤곡, 거리를 떠도는 장돌뱅이들의 음악을 과감하게 자신의 교향곡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졸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에서 말러를 일컬어 ‘혼종의 음악가’, ‘융합의 음악가’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말러 이전에도 기존의 어떤 선율을 차용하는 작곡가들은 종종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그랬습니다. 낭만시대의 작곡가들에게서도 이런 식의 차용 기법은 종종 발견됩니다. 하지만 말러처럼 세속적 선율을 교향곡 속으로 과감히 끌어들인 작곡가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감수성이 활짝 열린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음악들, 그래서 자신의 몸속에 저장돼 있던 그 익숙한 선율들을 ‘교향악적 재료’로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 혼종성 혹은 성속(聖俗의 구분 없음이야말로 그의 음악이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봅니다.
말러는 흔히 낭만주의 교향곡의 마지막 방점을 찍은 작곡가로 기억되지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음악의 경계를 허물면서 모더니즘의 전망을 보여준 음악가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돼야 할 겁니다. 베토벤이 고전과 낭만을 동시에 품었던 것처럼, 말러의 음악도 낭만과 현대를 함께 끌어안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완전히 종합되지 못한 채 때때로 분열의 양상으로, 다시 말해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당대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말러가 혹평 받았던 이유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고상함과 퇴폐, 서정과 광기, 공포와 안식, 세속적 갈등과 영원함에 대한 갈망 같은 것들로 뒤범벅된 그의 음악에 많은 이들이 마음을 뺏기고 있습니다.
51세에 세상을 떠난 말러는 생전에 모두 9곡(<대지의 노래>까지 포함하면 10곡)의 교향곡을 완성했지요. 첫 번째 교향곡을 구상한 것은 20대 중반부터라고 합니다. 본격적인 작곡은 1888년 초에 이뤄졌습니다. 앞에서 길게 설명한 ‘Bruder Martin’의 선율은 이 교향곡의 3악장 첫머리에서 들려옵니다. 한데 좀 이상합니다. 선율이 괴기스럽게 비틀려 있습니다. 원래 이 노래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을 뿐더러, 어린 아이들이 딱 좋아할 만한 유쾌하고 코믹한 돌림노래였지요. 하지만 말러의 교향곡에서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팀파니가 둥둥거리는 가운데 콘트라베이스가 연주하는 선율이 음산하고 비감합니다. 말러는 애초에 D장조였던 선율을 d단조로 바꿔 괴기스러운 느낌의 장송(葬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첫 번째 교향곡에서부터 희극을 비극으로 치환하는 독특한 패러디를 선보였습니다. 물론 지금의 감각으로 듣노라면 그 장송은 아름답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대에는 어땠을까요? 1889년 11월 부다페스트에서 말러의 지휘로 이 곡이 초연됐을 때, 청중이 느꼈을 당혹감이 충분히 짐작됩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어린 시절의 말러는 선술집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베른하르트가 군부대 근처에서 운영했던 술집에서는 매매춘도 일상사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어린 말러는 동생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했지요. 말하자면 술 취한 남자와 여자들이 드나들던 선술집 문으로 동생들의 시신을 담은 관들이 떠나가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특히 바로 아래 동생이었던 에른스트의 죽음은 말러에게 오래도록 상처로 남았던 기억이었다고 합니다. 그 동생은 말러가 열다섯 살이었을 때 세상을 뜨지요. 아마 형제는 ‘Bruder Martin’을 함께 불렀을 겁니다. 어쩌면 말러는 류머티즘 고열로 시달리던 동생의 머리맡에서 이 노래를 불러줬을지도 모릅니다.
오스트리아의 어린이들에 좋아하는 이야기를 그림에 담은 화가 모리츠 폰 슈빈트의 목판화 <사냥꾼의 장례 행렬>(1850)은 교향곡 1번 작곡에 영감을 주었다.
1번 교향곡의 표제인 ‘거인(Titan)’은 작곡가 스스로 붙인 제목입니다. 연주시간 약 50분으로 말러의 교향곡 중에서는 비교적 길이가 짧다고 할 수 있겠지요. 말러의 교향곡을 처음 듣는 분들은 이 곡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작곡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말러의 서정성이 짙게 배어 있는 곡입니다. 지휘자 브루노 발터(1876-1962), 말러의 제자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그는 이 곡을 일컬어 “말러의 베르테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요.
1악장: 느리고 완만하게, 자연의 소리처럼, 매우 여유롭게
1악장은 느릿하게 막을 올립니다. ‘Langsam, Schleppend’(느리고 완만하게), ‘Wie ein Naturlaut-Im Anfang sehr gemachlich’(자연의 소리처럼, 매우 여유롭게)라는 지시어가 붙어 있지요. 현악기들이 A의 지속음을 길게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서서히 먼동이 터오는 새벽의 느낌입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팡파르, 또 꾀꼬리 같기도 하고 뻐꾸기 같기도 한 새소리들도 들려올 겁니다. 이어서 첼로가 말러의 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중 두 번째 곡인 ‘아침 들판을 거닐 때’의 선율을 연주합니다. 매우 인상적인 주제입니다. 마지막에는 팀파니가 강렬하게 작열하면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2악장: 힘차게 움직여서, 하지만 지나치게 빠르지 않게
2악장에서는 빨라집니다. ‘Kraftig bewegt, doch nicht zu schnell’(힘차게 움직여서, 하지만 지나치게 빠르지 않게)입니다. 현악기들이 표정 있고 활기찬 화성을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아주 리드미컬한 렌틀러 춤곡 풍의 선율이 펼쳐집니다. 이어서 음악이 잠시 멈추는 듯싶다가 목관과 바이올린이 주도하는 왈츠 풍 선율로 넘어갑니다. 앞의 춤에 비해 좀 더 세련된 도회풍의 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악장: 엄숙하고 장중하게, 그러나 느긋하지 않게
3악장은 ‘Feierlich und gemessen, ohne zu schleppen’(엄숙하고 장중하게, 그러나 느긋하지 않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콘트라베이스가 ‘Bruder Martin’을 선율을 장중하고 서글프게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이어서 하프의 피치카토가 잠시 들려오다가 길거리 악사들이 연주하는 듯한 스타일의 음악이 펼쳐집니다. 약간 휘청거리는 듯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애잔한 분위기의 선율입니다. 인생의 희비극을 암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요. 이어서 바이올린이 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중에서 네 번째 곡인 ‘그녀의 푸른 눈동자’의 선율을 연주합니다. 젊은 말러의 서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아름다운 멜로디입니다.
4악장: 태풍처럼 움직여서
4악장은 3악장에서 쉬지 않고 연결됩니다. ‘Sturmisch bewegt’(태풍처럼 움직여서). 거의 잦아드는 것처럼 3악장이 끝나자마자 폭풍 같은 총주가 터져 나옵니다. 말러가 왜 이 교향곡의 표제를 ‘거인’으로 지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연주시간 약 20분으로 교향곡 1번에서도 가장 긴 시간을 차지하는 악장입니다.
글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경향신문 문화부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문화웹진 채널예스에 음악 칼럼 ‘내 인생의 클래식 101’, 서울시향의 기관지 SPO에 ‘20세기 음악 산책’ 등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에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돌베개, 2013), <더 클래식: 바흐에서 베토벤까지>(돌베개, 2014)가 있다.
출처: 문화웹진 채널예스>칼럼>음악>‘내 인생의 클래식 101’ 2015.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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