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탈리아 여자가 아니라 나폴리 여자다. 둘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 (Non sono italiana, sono napoletana! E un'altra cosa!) 언젠가 이탈리아의 국민배우 소피아 로렌이 남긴 이야기다. 아마 우리나라의 대표 여배우가 저런 말을 했다면(‘나는 한국 여자가 아니라, ㅇㅇ도 여자야!’) 모르긴 해도 이래저래 큰 난리가 났을 꺼다. 이탈리아에서는 어쨌든 가능한 이야기다.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 대한 강렬한 애착 그리고 문화적인 면으로, 혹은 역사 및 정치사회적인 면에서도 다양한 지역적 배경을 지닌 이 사람들은 ‘이탈리아’라는, 이제 겨우 150년 된 국가가 아니라 자신이 태어나 자란 그 땅에서 정체성을 찾기 마련이다. 그들이 ‘이탈리아’의 깃발 아래 뭉치는 건 겨우 축구 국가대항전 정도랄까. 그래서 이탈리아의 지인들에게 최고의 와인을 물어봐야 별무소용이다. 다들 자신이 자라난 고향 땅 와인이 세계 최고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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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명배우 소피아 로렌. 활화산 같이 정열적인 이미지의 그녀는 실제로 이탈리아 여성들이 가장 흠모하는 분위기의 여배우이기도 하다.) |
<해바라기>라는 영화가 있었다.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1970년 작품이다. 소피아 로렌과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라는 이탈리아 최고의 대배우 두 명이 등장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나폴리 여자 조반나(소피아 로렌)와 밀라노 남자 안토니오(마스트로얀니)가 사랑에 빠진다(앞서 이야기한대로, 나폴리와 밀라노 사람간의 사랑. 그건 조금 긴장감 넘치는 운명적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2차 대전의 와중에 징집되어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떠난다. 그리고 전쟁통에 실종되어, 사실상 전사했을 거란 소식이 도착한다. 여자는 밀라노에 혼자 남았다. 남자의 어머니, 그러니까 시어머니는 아들을 잃었다는 절망 속에 울부짓지만 강인한 나폴리 여자는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낱같은 희망도 있었다. 그녀는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냉전시대 그 철의 장막을 뚫고 남편을 찾아 소련 땅 우크라이나로 떠난다. |
(조반나는 모스크바에서 다시 우크라이나 땅으로, 남편의 사진을 보여주며 애타게 그의 소재를 찾는다.) |
남자는 살아 있었다. 반쯤 기억상실에 빠진 채로. 그리고 그곳에서 우크라이나 여자 마샤를 만나 결혼도 했다. 아이도 있었다. 나폴리 여자는 절망에 빠진다. 영화의 제목이 왜 <해바라기(I Girasoli)>인지는 첫 장면부터 명확하다. 서부 우크라이나의 장대한 평원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그 흐드러지게 피어난 해바라기 벌판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거기에 헨리 맨시니의 애잔한 음악이 더해져 실로 가슴을 아리게 하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해바라기 밭’은 나중에 한번 더 나온다. 소피아 로렌이 기차를 타고 광활한 우크라이나 땅을 가로지르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덜컹이는 낡은 기차의 느낌을 그대로 재현했다. 절로 보는 이를 뭉클하게 만드는,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다. |
(영화 <해바라기> 오프닝씬과 테마 음악) |
요즘 들어 우크라이나가 세계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그럼 내게 우크라이나는 어떤 이미지일까 - 더듬어보니 역시나 영화 <해바라기>가 전부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만 해도 소련하면 얼어붙은 동토의 땅이라는 생각 뿐이었다. 어딜가나 눈이 쌓여 있고, 모든 사람들이 곰 가죽같은 모자와 옷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뭐 그런 이미지. 그걸 없애준 게 바로 이 영화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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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바라기> 중 조반나와 안토니오의 서글픈 재회와 이별 장면) |
우크라이나에 대한 나의 딱히 근거 없는 애틋한 마음은 역시나 비토리오 데 시카의 이 영화 한 편 때문일 것이다. 옛날 영화이니 딱히 내 취향을 건드리지도 않았고, 사실 줄거리도 지금은 감감하다. 오직 기억에 남는 건 그 사정없이 피어난 해바라기. 이 압도적인 첫 인상이 십 수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건 역시나 예술이 지닌 위대한 힘 때문일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기원하며, 오늘도 데 시카 영화의 바로 그 장면,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 밭을 떠올려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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