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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디토씨의 음악여행수첩⑥ 리하르트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

나베가 2014. 10. 9. 00:30

 

 

6월의 두 번째 이야기 : 파리 볼테르가 19번지 (19 Quai Voltaire)

친절한 디토씨의 음악여행수첩⑥ 리하르트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

오르세 미술관을 나와 시테섬 방향으로 몇 걸음만 옮기면 파리의 문화여행자들이 열광하는 카페 겸 레스토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 이름은 ‘볼테르’(Le Voltaire). 계몽주의 철학자이자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구축했던 대문호 볼테르(본명은 프랑수아-마리 아루에)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것이다. 실제로 이 건물 2층에 볼테르가 살았었고, 지금은 아예 이 일대 강변도로 전체를 ‘볼테르 거리’(Quai Voltaire)라 부르고 있어 애써 이곳을 찾는 이들의 감동은 더욱 각별해지기 마련이다.

도심 곳곳에, 심지어는 지저분한 뒷골목 어귀에도 수많은 예술가와 문필가들의 고뇌어린 흔적들이 남아 있는 문화도시 파리지만, 카페 볼테르 주변은 정말이지 ‘예술가 명당’이라고 불러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나란히 붙어 있는 바로 옆 건물 19번지에도 실로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여럿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은 시인 샤를 보들레르, 핀란드의 작곡가 쟝 시벨리우스이며, 오늘의 주인공인 리하르트 바그너와 탐미주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역시 이 건물에서 파리의 예술 방랑자 생활을 경험했다. 그러니 예술의 향기를 찾아 파리로 온 이들에게 이곳은 차라리 성지(聖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은 호텔로 변해있는데, 별 세 개짜리 주제에(?) 가격은 꽤나 비싸서 찾는 이들을 끙끙거리게 만든다. 그래도 어쩌나. 세느 강이 훤히 보이고, 오르세 미술관과 루브르가 바로 옆에 있으며, 시테 섬에서도 가깝다. 파리 한 가운데에 있어 여행지 숙소로는 최적인 것이다.

그러나 보들레느나 바그너가 살던 당시의 이곳은 교통의 요지도, 볼테르의 지성이 넘실거리는 뭐 그런 거리도 아니었을 거다. 그저 좁고 작은 다락방들이 다닥거리며 붙어 있는 원룸촌이었다고나 할까. 인근 라틴 지구(카르티에 라탱)와 여기가 한데 묶여 대학생들과 가난한 예술가들의 홈그라운드 역할을 하는 곳이었으니, 위대한 예술은 고단한 일상 속에서 피어난다는 진리 아닌 진리가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볼테르가 19번지에는 이 곳에 살았던 위대한 예술가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청운의 꿈을 품고 파리에 도착했다. 젊어서부터 약간의 과대망상이 더해진 예민하고 천재적인 기질의 소유자였던 그는, 20대 초반부터 북독일 일대의 소도시에서 지휘자 생활을 했으나 무분별한 소비생활로 큰 빚을 지게 된다. 바그너와 여배우 출신 부인 민나가 택한 건 ‘야반도주’였다. 그들은 배를 타고 험난한 북해를 건너 파리에 도착한다. 바그너는 자신만만해했다. 위대한 천재 작곡가인 자신이 아직도 사람들의 주목을 못 받고 있는 건 그저 자신이 뛰놀던 동네가 독일 소도시여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세계의 수도’ 파리에 도착했으니 그가 유럽 최고의 예술가로 등극하는 건 시간문제라 여겼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하고 고달팠다. 화려하고 오만한 세련미를 지닌 파리는 독일 출신의 가난하고 촌스런 작곡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하긴 무슨 대단한 작품을 쓴 적도 없었고, 유창한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었다. 작은 키에 큰 머리, 유난히 솟아오른 매부리코만큼이나 지독할 정도의 자존심만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결국 바그너는 생계를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하게 된다. 이런저런 행사형 음악회에 참석해 리뷰를 쓰는 일, 유명작곡가들의 악보를 필사하고 교정해주는 일 등등을 말이다. 이때 파리에서 겪은 좌절감과 열패감은 평생 바그너를 힘들게 했다. 그는 오페라 <리엔치>로 고국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금의환향하지만 파리에서 겪었던 수모를 잊지 않았다. 아니, 잊지 못했다.

결국 수십 년이 지난 후 바그너는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그때는 스위스에서 망명객 생활로 있었을 때지만 젊은 시절 빚쟁이를 피해 파리로 도망오던 때와는 처지가 달랐다. 유럽 예술계에서 ‘바그너’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이는 없었고, 파리의 왕실과 (알고보면 같은 하숙집 출신이자) 위대한 시인인 보들레르도 열렬한 바그너의 팬으로서 그의 파리 재입성을 돕고 있었다. 그래서 바그너는 <탄호이저>라는, 지금껏 자신이 쓴 오페라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이고 파리지앙들의 취향에 가장 잘 들어맞을 것 같은 작품을 골라서왔다. 심지어 파리 청중들의 취향을 고려해 자존심을 확 죽여서 작품도 잔뜩 고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였다. 그것도 참혹하고도 비참한 실패였다. 공연예술 역사상 가장 기록적인 참패일 것이다.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 크리스티안 틸레만 지휘, 뮌헨필)

바그너는 다시 한번 좌절한다. 파리 오페라 청중들의 속물 근성과 외국인 배척주의에 분노했다. 그러나 이건 그에게 전화위복이 된다. 독일의 예술가가 프랑스에서 경우 없는 비참한 모욕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인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결국 그에게 사면령이 내려지고 십년이 넘게 지속됐던 망명객 생활도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때 바그너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끝내 자신을 외면하고 조롱했던 파리지앙들을 원망했을까, 아니면 고국으로 돌아가는 계기를 마련해 준 이 도시에 조금은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을까?

 

(볼테르 거리와 건너편 루브르 박물관의 모습)

파리를 찾을 때면 세느 강변을 따라난 이 길을 한번씩 걷게 된다. 요즘은 골동품 상점들이 늘어선 ‘안티크 거리’로 변해 더욱 운치 있어졌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파리를 수놓았던 위대한 예술가들의 흔적을 눈으로, 또 마음으로 더듬어본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라는 말은 이곳에서도 엄연히,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