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 2013년)

금호 아름다운 목요일 시리즈/Baroque & Beyond - 5. 강혜선 Violin/5.9.목/금호아트홀

나베가 2013. 5. 13. 10:41

 

 

 

[기획공연] [아름다운목요일] Baroque & Beyond - 5. 강혜선 Violin

 

Profile

강혜선 (Violin)

 

“강혜선의 초인적인 스태미너와 정확성, 무결점의 인토네이션, 수정같이 맑고 아름다운 소리, 놀라운 음악적 창조성은 나에겐 계시나 다름 없다. (진은숙)
 
강혜선은 현대음악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바이올리니스트이다. 관객은 물론이고 작곡가들의 존경을 받는 그는 많은 곡들을 헌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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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에 바이올린을 잡은 그는 15세부터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공부하였으며, 이프라 니만, 프랑코 굴리, 볼프강 슈나이더한, 헤르만 크레버스, 요제프 긴골드, 예후디 메뉴인 등을 사사하고, 이탈리아의 로돌포 리피처 콩쿠르, 뮌헨 ARD 국제 콩쿠르, 런던  플레시 콩쿠르, 파리 예후디 메뉴인 콩쿠르에서 입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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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파리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되어 활동하던 강혜선은 피에르 불레즈의 발탁으로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 독주자로 합류하였다. 강혜선은 파스칼 뒤사팽, 이반 페델레, 미하엘 야렐의 작품을 초연하였고, 진은숙, 마티아스 핀처, 베아트 푸러의 협주곡을 자주 연주하고 있다. 1997년에 불레즈의 ‘송가 2’ 도나우에싱엔에서 초연하였으며,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하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 파리 시테   뮈지크, 뉴욕 카네기홀 등에서 공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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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선은 작곡가들이 자신을 위해 작곡해준 곡들을 자주 연주한다. 마르코 스트로파의 ‘Hist Whirt’  모나코 프렝탕 데자르에서 연주한 것을 비롯하여 베아트 푸러의 작품을 베를린 울트라샬 페스티벌에서, 진은숙의 ‘이중 구속?’ 파리에서 연주하였으며, 조르주 아페르기스의 작품을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연주하였다. 강혜선은 메시앙 페스티벌 무대에서 새로운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데 2009년에는 브루노 만토바니의 ‘All’ungarese’ 플로랑 보파르의 반주로 초연했으며, 2010년에는 후지쿠라 다이 작곡의 ‘Samarasa’ 세계 초연하였다.

 

최근에는 마누리 작곡의 무반주 바이올린과 전자장치를 위한 파르티타 II 2012 7월에 메시앙 페스티벌에서 초연하였으며 그에 이어 루체른 페스티벌에서는 스위스 초연으로 다시 연주하였다. 전자장치가 없는 버전은 파르마에서 열린 트라이토리에 페스티벌에서 초연되었고  곳에서 2회의 초청 독주회를 가졌다. 2013 2 강혜선은 브리스 포제의 ‘Vita Nova’ 피에르 불레즈의 지휘로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과 함께 연주할 예정이다.

 

 

강혜정 (Cembalo)

 

쳄발리스트 강혜정은 서울예술고등학교를 거쳐 프랑스로 유학파리국립고등음악원, 파리고등사범음악원(에콜 노르말) 쳄발로, 피아노, 실내악 과정을 졸업하였다. 퐁텐블로 음악원, 이화여자대학교, 숭실대학교 강사를 역임한 강혜정은 국내 독주회는 물론, 협연  듀오, 실내악  다양한 무대에서 활발하게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있다.

 

Program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바이올린과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 4 D장조, HWV371

Georg Friedrich Händel  Sonata for Violin and Cembalo No.4 in D Major, HWV371

 

Affettuoso

Allegro

Larghetto

Allegro

 

 

마르티노 트라베르사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레드

Martino Traversa  Red for Solo Violin

 

 

후지쿠라 다이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사마라사 

Dai fujikura  Samarasa for Solo Violin

 

 

조지 벤저민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개의 미니어쳐

George Benjamin  Three Miniatures for Solo Violin

 

A Lullaby for Lalit

A Canon for Sally

Lauer Lied

 

 

외젠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3 ‘발라드’, Op.27/3

Eugène Ysaÿe  Sonata for Solo Violin No.3 ‘Ballade’ , Op.27/3

 

Lento molto sostenuto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바이올린과 건반악기를 위한 소나타 2 A장조, BWV1015

Johann Sebastian Bach  Sonata for Violin and Keyboard No.2 in A Major, BWV1015

 

(Untitled)

Allegro assai

Andante un poco

Presto

 

 

 

외젠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3 ‘발라드’, Op.27/3 듣기

http://cafe.daum.net/monarija0172/9NNq/2315?docid=4049663380&q=%C0%CC%C0%DA%C0%CC+op.27&re=1

http://blog.naver.com/huhkhee/70059836248

Eugene Ysaye, 1858 ~ 1931

벨기에의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작곡가. 당시 프랑스·벨기에 작곡가들의 현악 작품들을 훌륭히 해석해냈다. 베를린의 한 관현악단에서 1년간 지휘자 활동을 한 뒤 노르웨이·러시아·프랑스 등지를 순회공연했다. 1886~97년 브뤼셀 음악원에서 바이올린 교수로 활동했고, 1894년 브뤼셀에서 새로운 음악들을 소개하는 일련의 관현악 연주회를 열었으며 같은 해 이자이 4중주단을 조직해 클로드 드뷔시로부터 현악4중주를 헌정받았다. 1918~22년 신시내티 (오하이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일했다. 기교적인 연주와 표현성, 강렬한 비브라토 등으로 유명했다. 초기 양식에 영향을 준 세자르 프랑크와 카미유 생 상스, 뱅상 댕디, 가브리엘 포레에게 영향을 받았다. 자작곡 중의 하나인 6곡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에는 새로운 화음 효과와 피치카토 주법이 사용되었다. 또한 8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실내악곡, 오페라 〈광부 피터 Piér li Houïen〉(1931) 등을 작곡했다.

1858년 7월 16일 벨기에의 리에주에서 태어난 이자이는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로부터 첫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의 나이 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신동이 아니었기에 분더킨트(Wunderkind)의 찬란한 미래가 보장되지는 못했으며, 비록 겉으로는 오만한 비르투오조로 비춰졌지만 죽을 때까지 이자이 자신은 스스로의 재능에 대해 의심해 왔다. 이자이는 1873년 브뤼셀 음악원에서 비에니아프스키에게 열 두 번의 레슨을 받으며 비장의 슬러 스타카토(slur staccato)를 전수받았고, 1886년 비외탕의 후광에 힘입어 부다페스트로 떠난 후바이(Jeno Hubay, 1858~1937)의 바이올린 교실을 이어받게 된다. 그 사이 1878년 독일로 첫 번째 연주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클라라 슈만의 소개로 요제프 요아힘 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동안에 일취월장한 이자이의 실력은 요아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87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피아니스트 요아힘 라프(Joachim Raff, 1822~1882)와 함께 베토벤의 ‘c단조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했고 1881년 노르웨이, 1882년 러시아, 1883년에는 파리 음악원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1890년 빈에서 가졌던 콘서트의 경이적인 성공은 연주가로서의 커리어에 결정적인 명성을 알리는 시발점이었다. 32살의 완숙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한 그는 180cm의 신장과 100kg이 넘는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로 넘쳐 났고, 그의 마력적인 음색과 정열적인 연주는 성공을 향한 무한질주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1891년 런던에서의 베토벤 연주는 엄청난 화제를 불러 모았고, 이제 바야흐로 이자이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1894년 이자이는 아메리카에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개최하는데, 이로써 비외탕과 비에니아프스키가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던 바로 그 비르투오조의 영예를 이어가게 되었다. 그의 콘서트 파트너는 안톤 루빈슈타인·아네트 애쉬포바·이브 나트도 함께 했지만 지속적으로 그와 유대관계를 맺었던 라울 퓌뇨(Raoul Pugno)가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피아니스트다.

또 다른 실내악 파트너로 페루치오 부조니·휴고 베커와 함께 피아노 트리오를 결성했는데, 이는 20세기 중반 하이페츠가 아르튀르 루빈슈타인·엠마누엘 포이어만과 백만불 트리오로 활동하기 이전 가장 화제를 모았던 드림팀이다. 그는 이 시점부터 지휘활동을 병행하기 시작했고, 마티외 크리크붐 · 레온 반 후트 · 요제프 야콥과 함께 현악 사중주를 연주하기도 했다. 1901년에서 5년 사이 러시아에서 파블로 카잘스와 함께 브람스의 더블 콘체르토를 연주했던 이자이는 1910년이 되기 전에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자신의 공식적인 커리어를 중단하기에 이른다. 사실, 이자이의 연주 능력은 1905년부터 급속히 떨어졌다. 40대 중반에 이미 일급 솔리스트로서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 이자이의 심리적 변화는 연주라는 행위에서 작곡이라는 행위로 전이하게 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물론 이자이는 17세기부터 시작된 바이올리니스트-작곡가(compositeur et violoniste)의 범주에서 가장 마지막 시기인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아티스트이기 때문에 그에게서 작곡은 연주와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지향성을 가진 서로 다른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등장했던 하이페cm는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요구되었던 최소한의 작곡능력(즉 카덴차)을 입증해야했던 마지막 세대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연주가들에게 작곡은 연주 이상으로 중요한 행위로 인식되었고, 심한 경우 작곡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연주가(Camillo Sivori, Ole Bull)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음악가의 자질을 의심받기도 했다. 칼 플레쉬는 1930년 ‘작곡가로서의 이자이의 위치는 아직 최정상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가 작곡한 7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완전히 무시되었고,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몇 개의 소품을 제외한 스무 곡 이상의 다른 작품들도 악보 위의 음표로만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무대에 올려지지 않은 희곡의 가치와 거의 동일하다. 즉, 불완전한 가치밖에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공연되지 않은 악보와 희곡은 그것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는 절반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을 출판 하던 1923년, 요제프 시게티가 연주하는 바흐의‘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듣고 있던 이자이는 새로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를 생각했고, 자신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걸 생각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신열(身熱)과 감동으로 들뜬 상태에서 거의 하룻밤 사이에 대부분의 스코어를 완성시켰다. 그 다음 해에 악보로 출판된 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Op.27은 이 곡을 연주하는 사람에게 악몽 같은 경험과 함께 끝없는 환희의 도취를 모두 던져준다. 우선 오스카 셤스키의 연주(Nimbus/1982)를 보자. 아우어의 마지막 제자로 러시안 주법의 모든 것을 전수 받은 그의 레코딩은 고전적인 기품과 명확한 아티큘레이션, 그리고 폴리포니적인 효과가 뛰어나다.

이 점은 이자이가 꿈꾸었던 세계를 직선으로 가리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마력적인 음색과 찬연히 빛나는 테크닉으로 호흡과 운궁 사이의 새로운 긴장관계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4번 소나타의 2악장 사라방드에서 4개의 리듬으로 구성된 오스티나토 리듬을 살려내는 그의 보잉과 스타카토는 고전과 모던의 두 가지 방향성을 동시에 표출해내고 있다. 가장 이상적인 프레이징과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왼손의 폭넓은 활용은 이 곡에 뜨거운 숨결을 부여했으며 비길 데 없는 역작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기돈 크레머의 연주(Melodiya-JVC/1978)는 텍스트를 낱낱이 분해하는 과정 속에서 피부 위로 돋는 소름의 느낌을 선사하는데, 그의 귀기서린 스트로크는 이 곡의 정체성을 새롭게 환기시킨다. 여기에는 호프만(E.T.A. Hoffman)적 환상과 존재의 불협화음이 극도로 예민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 음반에는 아직 20대의 젊은 크레머가 팽팽한 긴장감과 그로테스크함을 넘어 존재하는 의식의 확장을 보여주고 있다. 크레머의 음색은 아주 차갑지만, 그 차가움의 이면에 존재하는 은근한 열기를 표현할 줄 알기 때문이다.

리디아 모르드코비치의 연주(Chandos/1986)는 팽창하는 에너지와 탄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을 이루고 있다. 프레이징과 프레이징 사이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면서 전체적으로 가장 드라마틱한 연주로 마치 아마겟돈의 전쟁터처럼 분노와 광기로 뒤덮여 있지만, 각각의 음들은 명확하게 통제되어 있다. 특히 2번과 3번 발라드의 연주는 격정적인 환희, 핏줄을 타고 빠르게 전달되는 불안감이 충격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보다 놀라운 것은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는 프레이징이다. 레오니다스 카바코스의 연주(Bis/1999)는 이완된 템포 속에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이자이는 감각의 제국처럼 끈적거리며 미끈한 무엇을 던져주는데 톤의 섬세한 변화와 활의 탄력을 이용한 음색이 매우 신선하다. 벤야민 슈미트의 연주(Arte Nova/1998)는 오브제를 흔들지 않으면서 대단히 지적이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더블스톱에서 배음의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비범한 연주다. 타카요시 와나미의 연주(Somme/1997)는 대단히 감성적인데, 이자이와 시적 감수성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음표와 상상력 사이의 적절한 밀도감을 조절할 줄 아는 미덕이다.

그가 리스트에게 영향을 받아 작곡한 시곡(Poem)은 모두 8곡이나 되지만 ‘엘레지 시곡’ No.12만이 자주 연주되고 있다. 1902년에 작곡되었고 포레에게 헌정된 이 곡은 그의 장례식에 연주되었다. 이 곡의 레코딩은 10여 종이 있지만, 스테판 그라팽의 극도로 예민한 톤의 연주(Hyperion)가 대단히 좋으며, 쉬프팅이 좋은 캐서린 마누키안(Marquis Classics)의 연주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두 곡을 제외한 6곡의 시곡을 한 장의 음반에 담으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바이올리니스트 제롤드 루벤슈타인이 멘디 로당이 지휘하는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레코딩(Koch-Schwann)이다. 이자이가 두 대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오랫동안 망각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1937년 아직 10대의 나이로 이자이(퀸 엘리자베스) 콩쿨에 출전했던 레오니드 코간과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길레스에 의해 부활되기까지 그 생명력을 얻지 못했다. 쌍둥이 형제 지앙의 음반(Eroica)도 좋지만, 제라르 자리와 코지 도요다의 음반(Koch-Schwann)에는 페데릭 로데동이 연주하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피아노 트리오‘포엠 녹턴’이 커플링 되어 있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이자이를 듣고 싶은 욕구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에 속할 것이다. 물론 아주 없지는 않다. 다행스럽게도 오이스트라흐 부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아미티에’ Op.26 연주가 라이브(BBC)로 있고,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도 ‘엑스터시’를 레코딩(EMI) 했다. 그의 소품 중 가장 사랑 받는 ‘아이의 꿈’(Reve d'enfant) Op.14는 당연히 레코딩도 많은데 갈루스토프·그라팽·침머만·리치·그뤼미오·엘만의 레코딩과 결정적으로 이자이 자신의 음반도 있지만 미도리(Sony Classical)의 연주가 모든 레코딩을 가볍게 압도하고 있다.‘겨울의 노래’(Chant d'hiver) Op.15는 아론 로잔드의 레코딩을 권하고 싶다.

평생 바흐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던 이자이는 1924년에 그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의 연장으로 무반주 첼로 소나타를 작곡했다. 바흐의 기억으로 물들어 있는 이 곡은 대단히 어려운 연속 피치카토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제 1바이올린을 담당했던 이자이 현악 사중주단의 첼리스트 모리스 당브와(Maurie Dambois)에게 헌정되었다. 이 곡의 레코딩도 시중에서 보기가 쉽지 않은데 피아티고르스키의 제자인 에를링 블뢴달 벵그트손의 격렬한 비브라토와 화려한 음색의 연주(Danacord)를 권하고 싶다. 그가 30년 가까이 연주한 레퍼토리는 수없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곡들을 다 소화해 내었던 만능 연주가는 아니었다. 선택과 집중의 원리는 여기서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자작곡과 그에게 헌정된 작품들을 우선적으로 연주했으며, 브람스의 협주곡, 비에니아프스키의 ‘협주곡 2번’, 비외탕의 ‘협주곡 4·5번’과 발라드·폴로네이즈, 생상스의 ‘에튀드 카프리스’, 브루흐의 ‘협주곡 1·2번’과 ‘스코틀랜드 환상곡’, 랄로의 ‘협주곡 1번’과 ‘스페인 교향곡’, 멘델스존의 협주곡, 엘가의 협주곡,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 바흐의 ‘샤콘느’, 제미니아니의 ‘소나타’, 에른스트의 ‘헝가리의 선율’ 등을 주요 레퍼토리로 연주했다. 실내악으로는 이자이가 제 1바이올린을 맡은 이자이 현악 사중주단과 함께 드뷔시를, 또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트리오도 부조니, 베커와 함께 연주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은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단 한번도 연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인 앙트안(Antoine Ysaye)과 베르트랑 래츠클리프(Bertam Ratchcliffe)가 공저한 이자이에 대한 거대한 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는 란 저서를 보면 그는 이들 레퍼토리에 단 한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보다 조금 앞선 세대의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사라사테에게 동시대의 많은 작곡가들이 작품을 헌정했던 것처럼 자기 세대의 가장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인정받은 이자이에게도 수많은 작품들이 헌정되었다. 이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쇼송의 ‘시곡’이 있다. 이 밖에 포레·르꾀·마냐르·라프·로파르츠·생상스 등 그에게 작품을 헌정한 작곡가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이자이는 대부분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그러하듯이 여러 대의 명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중 1734년산 허큘리스 스트라디바리우스(Herculis Stradivarius)를 가장 즐겨 사용했지만 애석하게도 러시아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연주회장의 탈의실에서 도난당했다. 그의 또 다른 바이올린으로는 데뷔 초기에 사용했던 과다니니 그리고 과르네리(G. F. Andreae)·마기니·조르주 샤노(George Chanot) 등이 있으며 모던 악기로는 로버트 질러(Robert Giler)를 주로 사용했다.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자이 소유의 명기가 있는데 그것은 G현의 아름다움과 강력한 사운드의 1741년산 과르네리우스 델 제수(del Gesu)이며 1965년부터 아이작 스턴(Isac Stern, 1920~2001)이 죽기 직전까지 애용하던 악기였다. 내부에는 ‘내 생애의 가장 신뢰하는 동반자’라는 이자이 자신이 써 놓은 문구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이 점은 스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활은 투르트·피카트·피크와 뉘른베르거를 사용하였고, 말년에 그가 사용했던 활은 두꺼운 고무 손받침이 사용된 사르토리였다. 현은 토마스티크-인펠트(Tomastik-infeld)사의 도미넌트(dominant)를 주로 사용했다.

 

헨델 / ♬바이올린 소나타 4번 (Violin Sonata No.4 in D major, Op.1, No.13/HWV371) - Arthur Grumiaux/듣기

http://blog.daum.net/scam416/12406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