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 2013년)

2013 교향악축제/부산시립/리 신차오 지휘,김다솔 협연/4.12.금/예술의 전당

나베가 2013. 4. 12. 14:38

 

A.Bruckner-Symphony No.9 in D min
"Den Lieben Gott"

브루크너 교향곡 9번


안톤 브루크너-교향곡 제9번(거룩하신 주님의 사랑)
 
부르크너의 교향곡이 그의 아홉 번째 교향곡이 아니라는 사실은 애호가들이라면 다 아는 일이다. 제1번(1866년)과 제2번(1872년)사이의 작품을 제0번 이라 부르는 예는 다른 작곡가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드보르자크처럼 예전에는 제5번(신세계에서)이라 부르던 곡을 지금은 제9번이라고 고친 사실을 따르지 않은 이유는 이미 종래 번호로 익숙해진곡에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1863년에 작곡한 또 하나의곡, 번호가 붙지 않은 F단조의 교향곡이 있으므로 브루크너에 익숙지 못한 사람은 좀 당황할지 모른다.
  
브르크너의 교향곡에는 이렇듯 번호와 작품의 관계 이외에 좀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 악보의 개정판이 많다는 점이다. 작곡가 자신이 판본과, 작곡가 이외의 사람의 판본이 있다. 각기 작품마다 여러 가지 악보에 대한 비교론이 생겨났다. 지휘자에 따라 채용하는 판본이 다르게 마련이고 일괄적으로 누가 어느 판본을 썼으니까 그의 브루크너관은 어떻다고 논하기가 어렵다. 브루크너의 다른 교향곡은 접어 두고 제9교향곡에 촛점을 맞추어 보자. 이교향곡은 미완성이다 그러나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같이 제2악장으로 끝나지 않고  휘날레만이 결여되어 있다. 슈베르트와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슈베르트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실제 사실은 알수 없지만)작품완성을 망설이며 후에 다른 교향곡을 완성한 데 비해 브루크너는 어떻게 해서든지 전 곡을 완성하고 싶어 애썼으나 건강과 수명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펜을 멈춘 부분에서 악보가 끝났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이 교향곡의 제3악장 아다지오가 너무 심원한 "고별의 편안함"을 나타낸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대로 충분하며 더 이상 아무것도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어떤 이의 의견이 있지만, 브루크너 자신은 끝까지미완성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브루크너가 작곡에 착수한 때가 67세라는 노령이며 제3악장까지 완성한 것은 3년 후인 70세 때였다 이미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있던 그는 자기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제3악장완성(1894년)1년전인 1893년에 유서를 썼다. 그속에는 유명한 그의 소망(시체를 성 홀로리안 사원 지하실의 대 오르간 밑에 안치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있다.

 

1. Feierlich, Misterioso (장중하고 신비롭게)

2. Scherzo. (스케르초) Bewegt, lebhaft (가볍고 쾌활하게) - Trio. Schnell (빠르게)

3. Adagio. (아다지오) Langsam, feierlich (느리고 장중하게)

 

 

브루크너 교향곡 9번 D단조 작품해설

이 글에서는 일반적인 이 코너의 형식과는 달리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만한 사고의 방향들을 제시하면서 곡의 해설을 대신하고자한다. 먼저 작품에 대한 고찰이 수반된 뒤에 다시 내부적으로 곡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브루크너 교향곡의 의미와 특히 9번이 차지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분명 초기의 교향곡 작품들은 아직 고전주의(베토벤, 모차르트 등의 작곡기법)등의 구조들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브루크너의 개성이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개성적인 면들이 작곡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오하게 복잡해져 가는데, 이 과정에서 바그너의 영향이 실제보다 더 과장되게 이해되는 것과 함께 다른 작품 외적인 요소들보다 두드러지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작품 내면 본질에 대한 왜곡이 일어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우리가 역사의 뒤편에서 브루크너를 재평가하면서 어떤 규정이라는 틀 속에 넣기 위한 편리하고도 위험한 도구임을 솔직히 인정해야만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어떠한 음악적 산물이 홀로 독립된 창조물이 아니라 과거의 훌륭한 전통으로부터 이룩되어진다. 그러므로 브루크너 또한 예외가 아니며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추구 방향을 설정하고 독자적인 언어를 통해서 더욱 확대시켰다. 후기로 접어들면서 드디어 이러한 면들은 확실히 브루크너와 일체감을 형성하게 된다. 바그너는 단지 그가 생각하는 진보적인 음악(또한 베를리오즈, 리스트)의 전형으로 간주된다.(이는 형이상학적인 면과 특히 미학에 관한 관점 자체로써 존중했다는 뜻이다.)

그럼 과연 명확하게 어떤 부분이 브루크너와 바그너가 일치하는가에 대해서 간단히 생각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바그너를 우상으로 생각한 브루크너는 실질적으로 바그너 음악 자체와 유사하기보다는 기존의 보수적인 음악(그가 평생토록 배워온 음악들이 바로 이러한 고전적이거나 바로크적인 음악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그너 음악을 접하므로써 새로운 영감과 부딪히게 된다.)과는 다른 방법으로 머리 속의 생각을 음악으로 구체화시켰다. 그래서 엄밀히 말한다면 이러한 표현 방법의 철학 자체만이 바그너와 유사하다는 의미이다. 바그너는 신화, 죽음, 사랑, 증오를 토대로 음악적 언어를 구사한 반면 브루크너는 종교적인 색채의 합창과 신을 배경으로 한 언어로써, 엄격하게 두 작곡가의 음악은 매우 다르다. 우리가 브루크너를 교향곡이란 장르를 베토벤 이후에 더욱 발전시켰다 라는 말은 단순히 그가 곡의 크기만을 부풀렸기 때문에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가 대위법이란 작곡 기법과 소나타 양식에 충실하면서 바그너적인 방법들까지 융화시켜서 금관악기들의 합창곡처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후대에서 바라보여지는 부분을 잠시 접어두고 브루크너 당시,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베토벤과 항상 비교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심리적 상황으로 그는 이 곡이 베토벤 9번처럼 마지막 악장은 합창을 수반하는 거대한 곡으로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그토록 그가 오랜 시간을 투자하면서 고심하던 부분도 바로 이런 점이 이었으며 마지막 미완으로 남겨질 자신의 곡에 대해서 그는 " 테 데움"이 대신 연주되기를 원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브루크너가 합창을 동반한 거대한 곡으로 완성하리라 생각한 이 교향곡은 베토벤 9번과는 음악적 성격이나 주제가 다르다. 음 하나하나를 짙게 눌러서 표현하는 브루크너 음악은 오르간의 음을 연상케 하며, 선율이 점층적이고도 분명하며 반드시 강렬한 투티를 통해 정서적인 분출을 시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음향 자체도 베토벤보다 더욱 밀도가 높다. 이러한 음악적 특징을 통해서 그가 최종적으로 결말을 짓고 있는 것은 투쟁적이고 혁명적인 면보다는 당연히 종교적인 동화와 아울러 영속적인 평화로 귀의함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역시 그의 마지막 교향곡답게 그를 끝까지 잡고 있던 종교적인 신앙의 고백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2. 이 교향곡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한 방향으로 연주가 이루어져야 하는가?
흔히 트럼펫은 종교 음악적인 분위기에는 가장 높이 있는 신을 상징한다. 이는 매우 당연한 음악적 건축물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의미처럼 오케스트라의 최정상(튜티에서 역할을 일컬음)을 차지하는 이 악기의 특색과 역할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될 것으로 안다. 대부분의 지휘자나 연주자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특히 브루크너가 항상 투티의 마지막까지 어떤 악기를 고집하고 있던가? 다른 금관악기들은 상당히 장식적인 면이나 음의 집속도를 높이고 고조되는 상승 분위기를 나타낸다. 하지만 최고의 순간에는 반드시 이러한 분위기 속에 뻗어 나오는 표현의 핵심이 존재한다. 이를 제대로 살려내느냐? 못 내느냐? 하는 부분이 이 교향곡을 바라보는 진정한 시각이 된다. 이는 스코어 상에 지시된 포르티시시모(fff) 말고도 진정 작품의 핵심을 꿰뚫는 혜안이 있다면 반드시 볼 수 있는 것이다.

 

3. 연주의 창조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역사는 바로 창조에 대한 시도로 이루어져왔다. 그러므로 예술이란 장르도 이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이러한 점은 발전이라는 표어 하에서 자행되는 퇴행적인 방향이 아니라 순수한 의도로 빚어내는 진실한 마음과 진리를 추구하여야 함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곡에 대한 해석방향도 창조적인 시도나 새로운 의도가 더욱 돋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단지 돋보이고 싶어서 남들과 다르기만 하다고 해서 진정한 창조성의 표출인가 하는 물음은 어렵고도 힘든 문제인가? 해답은 간단하게 결코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작곡가의 그 당시 절대적인 진리의 상황을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하지만 이에 근접한 상황을 연주자가 간접적으로나마 진실에 근접하게 표현만 하더라도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음악을 듣고 이해함에 있어서 귀중한 것은 이러한 느낌들을 구체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연주가 중요하다. 이런 역할을 소홀히 하는 연주들은 자연스레 훌륭한 연주의 대열에서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위의 질문에서 내포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바로 브루크너 음악을 낭만주의로 볼 것인가 아니면 고전주의나 바로크로 볼 것이냐 하는 중요한 문제와 접하고 있다. 그는 항상 창조적인 자신의 능력 배양을 위해서 평생토록 공부를 하였다. 그러므로 고전주의에만 안주할 수 없었던 브루크너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다른 작곡가들이 교향곡을 작곡할 나이에도 그는 아직도 더 많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브루크너의 이런 면을 통해서 단순히 그의 음악적 유산이 단순히 고전주의를 계승하였다 라고 보기보다는 낭만적인 내적 갈망(주로 신에 대한 귀의나 평화)을 보다 바그너적인 수법을 통해서 차분하게 낭만주의를 실현하였다 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렇게 종교 음악적인 분위기가 포함된 낭만성이 가득한 음악은 어떠한 흑백논리의 범주 즉 우리의 편의적인 틀에 귀속시키려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여기서 다루고 있는 교향곡이란 장르에서는 낭만성이 가득한 음악으로 생각한다.

 

4. 브루크너 곡을 연주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다른 무엇보다도 각 단원들의 연주실력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 물론 지휘자의 역할도 있지만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 일단 곡 자체가 필요로 하는 것은 굉장히 밀도 높은 음색과 특유의 빛깔이다. 브람스의 음악적 색깔과는 판이하게 다른 황금빛이 요구된다. 이런 색채 감각에 가장 적합한 오케스트라는 존재하는가? 이에 대한 물음은 쉽게 답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연주들의 녹음으로도 알 수 있듯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가장 적격이다. 오케스트라의 바탕색 자체가 회색이나 검은색의 느낌이 강하면 일단 곡이 필요로 하는 뉘앙스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5. 꼭 빈 필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브루크너가 8개의 호른과 3개씩의 트럼펫, 튜바를 쓰면서 같은 악기 종류라도 스코어에서 진행되는 음은 각자 다른 선율을 부르게 된다. 같은 호른 파트이면서도 4가지의 다른 선율이 사용된다. 이를 본다면 단순한 음색의 정갈한 빛깔이 요구되겠는가? 아니면 다양한 음색의 선율이 요구되겠는가? 이에 알맞은 해결책이며 근접한 선택법으로서 빈필이 적임이며 이는 음반으로써도 증명된다. 브루크너 곡에 대해서는 빈필이 필요충분 조건이다. 그리고 브루크너의 음악은 독일, 오스트리아 계통에서만 자주 연주될 뿐 다른 지역에서는 자주 연주되지 않는다. 그리고 빈이라는 도시의 색채감은 아주 브루크너적인 영상미를 짙게 함유하고 있다.

 

6. 마지막으로 브루크너는 어떤 사고의 소유자였는가?
곡을 이해하는데는 그 작곡가의 심리적 상황이나 갈등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면 매우 놀라운 감수성을 우리들에게 부여한다. 그래서 단편적인 조각들이나마 브루크너의 그 당시 심리적 상태를 알아 보고자한다. 물론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인간에 대한 투영은 오류다. 단편적인 조각으로 한 인간 내면까지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단지 외부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유추적인 생각이 전부다. 그렇지만 조심스럽게 한번 접근해 보기로 한다. 일단 그는 일반적인 세속적인 삶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삶 속에서 카톨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착실함이란 외부적인 표정과 내부적으로는 강렬한 끈기나 열정이 도사리고 있는 이원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는 인생의 모든 것을 포괄적인 한가지로 초점을 맞추었다. 이것에는 여러 가지 부분이 포함될 수 있겠으나 먼저 자신의 음악적 식견을 넓히는 것이나 숭고한 음악을 헌정하는 일로 압축된다. 항상 진보적인 심리적 긴장상태를 유지하다보니 자연스레 건강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특히 그를 향해 비난하던 빈의 한슬릭(분명 시대착오적인 형식주의론자이지만 이 때문에 더욱 브루크너의 음악적 견해가 튼튼해질 수 있는 토대가 된다.)을 위시한 브람스 옹호주의자들에 의한 스트레스도 가세한다. 또한 강력하게 반대파에게 논박하지 못한 면과 작곡된 뒤에도 꼼꼼하게 다시 재수정을 가하는 면들을 통해서 상당히 유약한 심성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유약하다면 어떻게 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 9번 교향곡까지 작곡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진실한 음악적 완성을 신과 함께 완성되기를 바랬으며 최종적인 그 결과가 신에게 되돌려지기를 간절히 원하던 천진하면서도 강인한 인간일 뿐이었다.

 

작곡과 초연
브루크너는 마지막 교향곡인 미완성 9번을 위해서, 8번을 작곡한지 6주 뒤부터 죽기 전까지 10년이나 작업했다. 9번은 그의 마지막 최후의 삶에 대한 결정체이다. 숨을 거두는 그날에도 마지막 악장을 잠시 작업하다 숨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굳건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신에게 이 곡을 바치고 싶어했었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염원을 간직하고 있다. 이 곡의 음악적인 형상에 대해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점은 그 음의 구성에서 나타나는 생소함과 대담성에 대한 놀라움이다. 선율의 처리 방법은 복음정을 각별히 많이 구사하였으며, 풍부한 하모니는 바그너적인 반음계법이 침투하여, 음의 장대한 흐름은 아주 개성적인 면모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또한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브루크너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이제 브루크너는 그의 교향곡을 통해서 더욱 베토벤의 교향곡적인 형식을 발전시킨 셈이 된다.

9번의 최초의 스케치는 63세 때인 1887년 9월이며 그후 병세가 점점 심각해지고 나이가 들면서 3악장까지 작곡하고 200페이지 분량의 피날레 스케치를 코다까지 남겨둔 상태로 서거하게 된다. 이 피날레를 가지고 브루크너의 의도와 비슷하게 다시 완성하려는 시도는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마지막 코다 부분은 브루크너의 영면과 함께 엄숙한 세계로 완결 지어졌기 때문에 굳이 피날레 부분에 손을 델 필요는 없다고 본다. 브루크너는 마지막에 이 피날레가 완성되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테 데움이 대신 연주되기를 바랬었다.

곡의 초연은 그의 사후인 1903년 2월 11일 빈에서 Ferdinand Lowe 지휘로 당시 막 창단된 빈 콘체르트페라인 오케스트라 (Wiener Konzertvereinsorchester)에 의해 행해졌다. 이 오케스트라는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전신에 해당한다. 뢰베는 작품의 연주를 원활히 한다는 미명하에 브루크너의 악보를 수정했으며 그 수정본이 Doblinger에 의해 이듬해 출판된다. 1934년에야 Alfred Orel이 편집한 오리지날 악보가 출판되게 된다. 크나퍼츠부쉬 (1950)를 비롯해 푸르트벵글러 (1944), 아벤트로트 (1951) 등은 모두 이 오리지날 악보를 쓰고 있다. 반면 현대의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1951년에 출판된 Leopold Nowak판을 이용하고 있는 추세다.

 

- 김성익
글쓴 날짜: 2000/01/20

 

 

 

Piano Concerto No.1 in Bb minor, Op.23

차이코프스키 / 피아노협주곡 1번

Pyotr Ilich Tchaikovsky 1840∼1893

Van Cliburn(1934 - ), Piano / Kirill Kondrashin, Cond.
RCA Symphony Orchestra (Recorded in 1957)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Op.23

 

이 작품은 민족주의적 낭만시대에 살았던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가로서의 면모를 잘 들어내고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처음부터 이 곡을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에게 헌정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1875년(35세) 2월에 이 곡을 완성하자 곧 그 초고를 들고 루빈시타인을 찾아갔다.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은 피아노의 거장으로 유명한 안톤 루빈시타인의 동생이며 형에 못지않은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당시 차이코프스키가 몸담고 있던 모스크바 음악원 원장이었는데, 차이코프스키에게는 은인이요 선배일 뿐만 아니라 아주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다.

 

이 곡을 시청하는 자리에는 동료교수인 후버트도 함께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당시 모스크바 악단의 중진인 이 두 사람에게서 좋은 평이 나오기를 기대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전기를 쓴 바 있는 카슈린은 그 때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악보 표지]에는 니콜라이에게 드리는 헌정사가 씌어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의 성과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니콜라이에게서 큰 칭찬이 나올 것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니콜라이는 피아니스트도 아닌 차이코프스키가 이 곡을 씀에 있어서 자기에게 한 마디 의논도 하지 않은데 대해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으로 처음부터 적의와 편견으로 대했다.

 

그래서 루빈스타인은 이 곡이 피아노에는 부적당하다느니, 칙칙하다느니, 독창성이 없다느니 하면서 격렬하게 까내렸다. 차이코프스키는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루빈시타인의 충고에 애정과 진의가 깃들어 있었다면 차이코프스키도 그의 말을 경청하고 개작했을지도 모른다. 내성적이었던 차이코프스키는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악보 하나라도 변경하지 않고 출판하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모처럼 썼던 헌정사를 찢어버리고, 얼마 전부터 알게된 한스 폰 뷜로에게 헌정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그토록 친했던 두 사람 사이는 벌어지고 말았다. 이 곡은 뷜로에 의해 1875년 10월 25일 미국 보스턴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루빈시타인은 이 곡이 초연된 3년 후에 차이코프스키에게 사과하고 그 뒤로는 그 자신의 연주회에서 이 곡을 자주 연주함으로써 두 사람의 우정은 다시 회복되었다.

이 곡은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이 지적하여 말하였듯이, 피아노 독주부에 꽤 어려운 기교가 요구되고 있다. 물론 이 곡이 작곡된 그 때와 현재를 비교해 보면 피아니스트의 기교도 장족의 진보를 하고는 있으나 꽤 숙달된 피아니스트가 아니고서는 완전히 쳐내지 못한다. 특히 격렬한 춤곡 가락이 난무하는 제3악장에서 그렇다.

 

이 작품은 세련된 서구적 협주곡과 달리 러시아적인 어둡고 서정적인 선율과 슬라브적인 거칠고 중후한 화음, 색채적인 관현악, 고도의 기교를 요하는 솔로 피아노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엔 피아노 협주곡의 최고 인기작의 하나로 4년마다 열리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피아노 본선 지정곡으로 비르투오조적 피아니스트의 끊임없는 도전의 대상이 되어왔다.

 

전곡 중 4개의 혼에 의해 유도되는 제1악장 도입부의 주제도 인상적이지만 독주 플루트에 의한 목가적인 제2악장 안단테 주제와 현에 의한 제3악장의 가요풍의 제2주제가 특히 아름답다.

 

악기편성 : 독주 피아노,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4, 트럼펫2, 트롬본 3, 팀파니,

                현악 5부

제1악장 b단조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3/4.

 


1.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Vladimir Samoylovych Horowitz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1903~1989, 우크라이나출신 미국인)

 

4대의 호른이 제1주제의 동기를 느닷없이 도입하고 이윽고 독주 피아노의 요란한 화음을 뒤따르게 하면서 바이올린과 첼로가 호쾌하게 제1주제를 제시하여 간다. 곡은 고조되어 피아노의 카덴차로 옮겨가서 다시 제1주제가 피아노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재현, 전개된다. 그러나 제1주제의 악상은 이후에는 전개부에도 재현부에도 나타나지 않고 여기서 그만 모습을 감추고 만다. 극히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이다. 이어 피아노에 새로운 Allegro Con Spirito의 주제가 나타나고 기분을 새롭게 하면서 경과부로 들어간다. 이 주제는 전개부에서 활약하지만 재현부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어 클라리넷이 약간 우수를 띤 Poco meno mosso의 제2주제를 제시하고 피아노가 반복한다. 이후 다시 부차 주제가 현으로 연주되고 관으로 전개되어 가는데 전개부나 코다에서 중요한 역할을 완수하는 듯한 악상이다. 전개부는 피아노를 중심으로 추이한다. 또다시 피아노가 재현부를 도입하고 카덴차를 지나서 코다로 찬란하게 끝난다.

 

 

제2악장 Andantino Semplice D flat장조 6/8.


2. Andantino semplice 

Vladimir Samoylovych Horowitz  

 

세 도막 형식으로 제1부의 주제는 피치카토를 수반하는 플루트로 제시되고 피아노가 이 것을 받는다. 목가적인 아름다운 악상인 것으로 이후 다시 첼로, 오보에로 이어진다. 중간부는 프레스티시모로 바뀌어 수선스러운 랩소디 풍의 악상이 전개되는데, 다시 피아노가 제1부주제를 재현하여 제3부로 들어간다. 여기서 주제는 장식적으로 변주되고 있다.

 

 

제3악장 Allegro con fuoco b flat단조 3/4.

 


3. Allegro con fuoco  

Vladimir Samoylovych Horowitz

 

자유로운 론도 형식. 짧은 도입 뒤 피아노가 슬라브 풍의 선이 굵은 론도 주제 A를 연주한다. 이어지는 부주제 B는 바이올린 가요풍의 감미로운 악상으로 특징있는 리듬을 나타낸다. 이 론도는 이상 2개의 주제로 구성되고 부주제 C에 해당하는 것은 없다. 부주제 B는 코다의 앞에서 재현, 반복되는데 거기에서는 크게 솟아 오르면서 고조되어 이 호쾌하고 화려한 협주곡의 끝곡에 어울리는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Evgenij Kissin, piano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Berliner Philarmoniker 

 

Van Cliburn

 

1958년 미소의 냉전 시기에 소련으로 달려가 당당히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우승한 반 클라이번. 곧 국민적인 영웅이 된 반 클라이번은 카네기홀에서 키릴 콘드라신과 연주회를 열면서 온 미국인의 가슴에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모든 음표를 새겼다. 23살의 정열과 패기 그리고 무한정 솟구치는 에너지와 현란한 테크닉은 가히 전율적이다.

 

1958년 구 소련에서 개최된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클 우승후

니키타 후르시초프(1894~1971)의 축하 영접을 받는 반 클라이번.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에게서 기초를 배우고 4세에 공개석상에서 연주했다는 그는 레벤트리트 콩쿠르 우승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지만 인정받지 못하다가 1958년 아직 국교가 없던 러시아에서 처음 개최된 제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젊은 거장으로서 일약 미국의 영웅적인 존재가 되었다.
스케일이 크고 서정과 낭만의 향기 높은 피아니즘을 보였지만 최근에는 연주활동에서 떠나 있다가 90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무렵부터 연주를 재개했다. 그 콩쿠르는 그를 기념하여 62년에 텍사스 주 포트워스에서 창설된 것이다.
출신교: 줄리어드 음악학교(로지나 레빈),

수상: 1954년 레벤트리트 국제 콩쿠르 제1위, 1958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제1위.

 

Vladimir Samoylovych Horowitz (1903~1989)

 

러시아출신의 미국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1903-1989)라는 피아니스트가 20세기의 수 많은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고 그 위치는 어느 정도일까? 굉장히 극단적이고 편협한 비교가 되겠지만 음악가, 연주자로서의 호로비츠는 결코 리히터나 제르킨에 견줄만한 인물은 못 된다.

연주자로서 성장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미국 청중들을 열광시켰던 호로비츠의 음악에는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게 또 어느 정도는 고의적으로, 당시 만연하고 있었던 미국식 상업주의의 영향이 깃들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으며 이후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입김까지 호로비츠의 음악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전쟁 중, 혼란스러웠던 유럽대륙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호로비츠의 행운이었다면, 평생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펼쳤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호로비츠의 불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호로비츠에 대한 찬사의 이면에는 항상 개운치 않은 그림자가 따라 다녔고 유명한 평론가인 마이클 션버그는 '악기에 대한 놀라운 재능이 음악적 이해와 항상 같이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호로비츠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매스컴이나 대중의 관심도로 비추어 봐도 그를 능가할 인물은 찾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가 갖고 있는 독창적인 연주 스타일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투명하면서도 찬란한 음색, 그리고 다이내믹한 터치와 색채의 뉘앙스는 그만의 전매 특허였다.

특히 스크리아빈의 곡에서 보여 준 힘과 세기의 변화는 이 작곡가의 위대함을 온 세계에 알려 준 독보적인 것이었다.

호로비츠는 그 자체로서 극히 카리스마적인 존재였고 청중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조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었으므로, 음악을 통하여 자신이 가진 그대로를 고스란히 보여주었을 뿐 자신의 음악이 상업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었다.

 

1930년대의 청중들에게는 거의 상상도 하기 힘든 정도임에 틀림없었던 놀라운 손가락 기교에 피아노 전체가 진동하는 듯 한 큰 음량, 여리고 서정적인 부분에서 흘러 나오는 티 없이 맑은 소리 등등 그에게는 청중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완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벨칸토야 말로 피아노 연주의 미학이다'라고 말하면서 레가토의 개념을 해석에 전용시키고 있어 힘이 넘치는 가운데서도 줄곧 노래를 부르는 듯한 유연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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