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일주 배낭 30일(2011.8~

41.잠비아/리빙스톤-게스트 하우스 졸리보이...

나베가 2011. 11. 22. 04:20

 

리빙스톤에 도착했다.

숙소-JOLLY BOYS까지는 그리 멀지않아 10분정도 걸었다.

미야씨가 너무나 좋아하는 숙소라더니

정말 젊음의 혈기가 왕왕 느껴지는 그런 숙소였다.

 

리셉션 앞의 넓다란 형형색색의 원시적인 색감으로 된 방석과 쿳션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일행들 기인 여정에 지쳐있던 터

털푸덕이 주저 앉았다.

안락해 보인다.

나도 앉아야지~

피곤치 않아도 앉고 싶은 곳이야~

 ㅋㅋ

 

 

 

 

 

 

 

 

 

 

 

 

 

 

 

 

 

 

오옷~이곳 수영장...근사한데??

전체적으로 어제 묵은 루사카 숙소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시설도 더 좋은듯~

맘에 들어~ ㅋㅋ

 

미야씨 말대로 근사한 수영장도 있고, Bar도 있고 식사를 해먹을 수 있는 넓직한 식당도 있다.

이곳에 머무는 투숙객들은 대부분 젊은 학생들로 식사를 직접 해먹기 때문에 주방도 아주 넓었고,

사다놓은 식재료들로 커다란 냉장고를 비롯 주방곳곳이 빼곡했다.

 

 

인포메이션앞엔 멋스런 넓직한 room이 있어  투숙객들이 편안하게 쉬면서 책도 보고, 친구들, 연인들과 담소도 나누는.....

보기만 해도 낭만이 저절로 흐르는 곳이었다.

더우기 가득 꾸며진  쿳숀과 방석의 패브릭이 얼마나 매혹적으로 이쁜 지...

아프리카의 뜨거운 열기와 열정과 패기가 자유분망한 패턴과 색감에도 넘쳐나는 듯 하다.

계단으로 오르면 다락방이 있고 천창이 있어서 누워서 하늘의 별을 볼 수 있다니, 쟁탈전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좋아~오늘밤 그곳은 우리가 사수한다!!

모두들 접근금지!!

  근사한 맥주 파티를 벌일거야~ㅋㅋ

 

 

 

 

 

 

울창한 숲길로 이루어진 방갈로형 숙소에는 방마다 각기 동물 이름이 붙어져 있는....

빨리 들어가고픈 아주 낭만적인 방이었다.

 

미야씨 방은 허니문.....(ㅠㅠ 짝도 없는 싱글녀를...)

상호, 의진씨 방은 코끼리 .

성여와 내방은 기린..ㅋㅋ

 

이곳 투숙객들은 대부분 도미토리 방을 쓴다.

한방에 많은 침대를 놓고 자기가 쓰는 침대값만 내는....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도 도미토리 방을 쓰지않고 방갈로형 room을 배정해 주었다.

오오~~연거푸 터지는 이 복~

정말 기분이 짱이다.

 

 

 

 

 

 

 

 

 

 

아침도 굶은데다 점심도 거의 굶고.....

숙소에 들어서니 그제서야 배가 고파 아사직전이다.

곧바로 식사를 하기 위해 우린 시내로 나섰다.

오늘은 맛있는 스테이크 집으로 안내를 한다고 했는데....

일단 기대만땅이다.

 

헐~그런데 길목에 리빙스턴 박물관이 눈에 띈다.

의진씨가 특히 박물관을 좋아해서 자신은 점심을 나중에 먹을테니 우리보고 먼저 가서 먹으란다.

문닫을 시간인 4시가 얼마남지 않았기때문....

 

그런데 나도 박물관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나역시 천천히 먹겠다고....

겨우 4명인데...ㅎㅎ

결국 모두 함께 움직이기로 하고, 박물관에 들어섰다.

 

 리빙스턴

리빙스턴

1813. 3. 19 스코틀랜드 라나크셔 블랜타이어~ 1873. 5. 1 바로체랜드 치탐보.

스코틀랜드의 선교사·탐험가.

 초기생애

리빙스턴은 독특한 스코틀랜드 가정 환경 속에서 개인적 신앙심·가난·중노동·교육열·포교정신 등을 체험하며 자랐다. 그의 선조는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의 울바 섬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었으며 어머니 로랜더는 장로회 투사의 집단인 콘베난터스가(家)의 후예였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가난했기 때문에 리빙스턴은 클리드 강변에 있는 면화공장 노동자 아파트의 맨 꼭대기층 단칸방에서 7명의 형제들과 함께 생활했다. 어려운 가계를 도와야 했기 때문에 10세 때부터 면화공장에 나가 일했던 그는 첫 주의 임금을 받아 라틴어 문법책을 샀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칼뱅주의 신앙 속에서 자란 그는 성년이 되자 그의 아버지처럼 독립 그리스도교 모임에 참여했다. 그때 이미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정신적·신체적 조건을 갖추었다.

1834년 영국과 미국 교회에서는 중국에 공식 의료 선교단을 파견할 것을 호소했는데, 리빙스턴은 이를 계기로 의료선교단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공장에서 시간제 근무를 계속하면서도 한편으로 선교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글래스고에서 2년간 그리스어·신학·의학 등을 공부했다. 그는 마침내 1838년 런던 선교회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1839~42년의 아편전쟁으로 중국에 갈 꿈은 포기했으나 남아프리카에서 유명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버트 모펏를 만난 뒤 아프리카를 자신이 일할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840년 11월 20일 선교사로 임명된 리빙스턴은 그해 마지막 날 배를 타고 남아프리카로 출발해 1841년 3월 14일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초기탐험

이로부터 15년간 리빙스턴은 계속해서 아프리카 내륙으로 이동했다. 긴 여정 속에서 그는 선교에 대한 의지를 더욱 굳게 다지고 지리적 발견의 즐거움을 느꼈으며, 보어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을 만났을 때에는 아프리카인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로써 그는 헌신적인 그리스도교인이자 용감한 탐험가로서, 동시에 열렬한 노예제 폐지 운동가로서 명성을 남겼다. 이처럼 아프리카에 대한 그의 헌신이 너무나 열정적이었던 만큼 남편이나 아버지로서의 의무는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나 있었다.

1841년 7월 31일 케이프 경계의 쿠루만에 있는 모펏 선교구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다시 개종자를 찾기 위해 곧바로 북쪽으로 떠났다. 이곳에는 거주민이 보다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원주민 중개자'를 이용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의 목적에 꼭 알맞는 조건이었다. 1842년 여름에는 백인의 출입이 어려운 칼라하리에서 어느 누구보다 더 북쪽까지 진출했으며 지방어와 문화에도 익숙해졌다. 그의 기질은 1844년 극적인 시험을 받았다. 당시 그는 선교국을 건설하기 위해 마보차로 여행하는 중이었는데 사자에게 상처를 입은 것이다. 이때 입은 왼팔의 상처는 또다른 사건으로 더욱 악화되어 결국 다시는 왼손으로 총신을 받칠 수 없게 되자 왼쪽 어깨에 총을 올려 놓고 왼쪽 눈으로 겨냥해야 했다.

1845년 1월 2일 리빙스턴은 모펏의 딸 메리와 결혼했다. 그는 많은 여행을 아내와 동행했지만 그녀의 건강이 나빠지고 가족의 안전과 교육문제가 시급해지자 마침내 1852년 아내와 4명의 아이들을 영국으로 보냈다. 가족과 처음으로 헤어질 무렵 그는 이미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었다. 소규모 탐험대의 측량사이자 과학자였던 그는 1849년 8월 1일 응가미 호(湖) 발견을 도운 공로로 영국왕립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과 상금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평생 이 학회와 관계를 가졌다. 학회는 줄곧 탐험가로서의 그의 야망을 격려했고 영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활동하도록 지원했다.

 

 

내륙개발

가족이 안전하게 스코틀랜드에 있었기 때문에 리빙스턴은 마음놓고 남아프리카의 경계를 넘어 북쪽으로, 그리고 내륙의 중심부까지 그리스도교·상업·문명을 전파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그는 이 3가지 전파가 반드시 아프리카를 개발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1853년의 유명한 연설에는 그 목적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그는 연설에서 "나는 내륙으로 가는 길을 개척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 길밖에 없다"라고 선언했다. 1853년 11월 11일 린얀티에서 잠베지 강으로 접근해가면서, 또 그가 선교사업을 하기엔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마콜롤로인(人)들의 한 가운데를 향해 나아가면서, 그는 장비도 거의 갖추지 않고 단지 몇 명의 아프리카인만을 동반한 채 북서쪽으로 출발했다. 그의 목적은 대서양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이었다. 이 길을 개척하여 합법적 상업만을 허가함으로써 노예무역을 근절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또 보어인의 영토를 지나는 길보다도 이 길이 마콜롤로에 도달하기에는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미 1852년 보어인들이 콜로벵에 있는 그의 집을 파괴하고 아프리카인 동료들을 공격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약한 인간이었다면 좌절했을 만큼 힘들었던 긴 여정을 거쳐, 마침내 그들은 1854년 5월 31일 서부 해안 루안다에 도착했다. 리빙스턴은 동료 마콜롤로인을 고향으로 데려다주고 잠베지 강에서의 계속적인 탐험을 위해 건강이 회복되자 곧 귀향여행을 시작했다. 이때는 1854년 9월 20일이었으며 이로부터 1년 뒤인 1855년 9월 11일에는 린얀티에 도착했다. 다시 11월 3일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면서 잠베지 강 유역을 탐험하고 1856년 5월 20일 모잠비크 켈리마네에 도착했다. 1855년 11월 17일 잠베지 강에 도착했을 때, 강에는 뇌성이 울리고 연기가 자욱했는데 이는 대탐험중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찾은 가장 볼 만한 장관이었다. 이곳에는 폭포가 있었는데, 애국심이 투철했던 리빙스턴은 이를 여왕의 이름을 따 빅토리아 폭포라고 명명했다. 1856년 12월 9일 그는 국가의 영웅으로 추대되어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기 전 3년 동안 그가 직접 전한 소식이나 그에 대해 들려오는 소식들은 전례없이 모든 지역 영어권 주민들의 상상을 자극했다.

리빙스턴은 자신이 이룩한 성과들을 겸손하게 그러나 효과적으로 기록에 남겼다. 그 기록은 〈남아프리카에서의 선교여행과 조사 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1857)라는 책으로 출간된 뒤 7만 부 이상 팔려 탐험과 선교노력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출판 역사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그에게는 명예가 잇따라 주어지고 수입도 풍부해졌다.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돌아온 뒤 줄곧 가난한 생활을 해왔는데 이젠 필요한 것을 충분히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그는 런던 선교회에서도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을 완성한 뒤에는 6개월간 영국 곳곳을 다니며 강연을 했다. 리빙스턴은 1857년 12월 4일 케임브리지대학교 이사회관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자신은 아프리카에서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젊은 대학인들에게 자신이 시작한 일을 계속해 줄 것을 부탁했다. 〈리빙스턴 박사의 케임브리지 강연 Dr. Livingstone's Cambridge Lectures〉(1858)은 그의 다른 저서들 만큼이나 흥미를 끌었다. 케임브리지 방문이 끝난 뒤인 1860년 대학생 선교단의 중앙아프리카 파견 문제가 대두되자 그는 자신의 2차 아프리카 탐험중의 희망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내부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

입구에 걸려있는 몇점 안되는 미술작품만 찍을 수 있었다.

잠비아의 전반적인 역사(구석기 시대부터~인류 최초의 민족이라는....)를 보여주는 역사관이 있었고, 리빙스턴에 관한 전반적인것들이 그림과 함께 상세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의진씨는 어렸을 적,위인전을 읽고 리빙스턴에 대해 좋은 기억이 있어 꼭 와보고 싶었다고 했다.미리 공부도 다 해오고... 그리고 내게도 상세하게 설명까지 해주었다.

 

수재가 확실하다. ㅎㅎ 

 

 잠베지 탐험

리빙스턴은 1858년 3월 12일 다시 영국을 떠나 1864년 7월 23일까지 여행을 계속했다. 그는 원래 켈리마네에 영국 영사로 떠난 것이었는데, 이는 동부해안 및 내륙의 독립구(獨立區)를 관할하고 아프리카 동부·중앙부를 탐험하는 탐험대의 지휘자로서 노예무역을 폐지하기 위해 상업과 문명을 확산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탐험은 그가 행한 이전의 외로운 여행들보다는 훨씬 더 조직적이었다. 외륜선을 갖추었으며 많은 물품들을 비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10명의 아프리카인과 6명의 유럽인이 동행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그의 동생 찰스와 에든버러의 의사 존 커크도 있었다. 그때까지 전설적이었던 리빙스턴의 지도력은 곧 한계를 드러냈다. 유럽인들 가운데 싸움이 일어나 몇 사람이 해고당한 것이다. 탐험대의 대원들을 비롯해, 중앙아프리카까지 그들을 따라왔던 미성숙한 대학 선교단원들 사이에서는 리빙스턴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환멸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배를 타고 잠베지 강을 순항하는 것은 불가능함이 밝혀졌고, 또 포르투갈 영역을 우회하는 로부마 강을 따라 니아사 호(말라위 호) 주변지역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2차례의 시도를 했으나 그것 역시 비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1859년 9월 17일 리빙스턴과 대원들은 식민화가 약속된 이 구역에 영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도착했다. 많은 어려움들을 겪었던 리빙스턴은 아내까지 잃고 말았다. 다시 함께 아프리카에 오자고 약속했던 그의 아내는 1862년 4월 27일 잠베지 강 수팡가에서 죽었다. 첫째 아들 로버트는 1863년 아버지 리빙스턴과 합류하기로 했으나 결국 그에게 오지 못하고 미국으로 가 1864년 12월 5일 남북전쟁에서 북군으로 싸우다 전사했다.

영국정부는 1863년에 탐험대를 소환했다. 당시 잠베지 지역의 경제적·정치적 발달에 대한 리빙스턴의 낙관은 성급한 판단이었으나 리빙스턴은 자신의 끈질긴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훈련되지 않은 선원들과 얼마 안 되는 연료만을 싣고 인도양으로 떠났다. 작은 배 '레이디 니아사'를 이끌고 약 400km 가량의 위험한 항해를 감행한 뒤 봄베이에서 이 배마저 팔아버려, 이후 30년간 잠베지 강 탐험은 재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의 탐험은 귀중한 과학지식을 축적했으며, 니아사 호 지역과 관련한 그의 명성과 그가 상상했던 식민화의 전망 등은 1893년 영국이 중앙아프리카 보호령을 이루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지역은 1907년 니아살랜드로 되었다가 1966년 말라위 공화국이 되었다. 1864년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동생 찰스와 함께 2번째 책을 썼는데, 제목은 〈잠베지 강과 그 지류 탐험에 대한 이야기 Narrative of an Expedition to the Zambesi and Its Tributaries〉(1865)였다. 당시 그는 첫번째 아프리카 여행 이후로 자신을 괴롭혔던 치질 때문에 외과수술이 필요하다는 충고를 받았지만 거절했는데, 가장 규모가 컸던 3차 아프리카 여행을 마치면서 그가 죽은 것도 아마 출혈이 심했던 치질 때문으로 추정된다.

 

 

 

 

 

 나일 강 탐험

리빙스턴은 다시 한번 봄베이를 잠시 들른 뒤, 1866년 1월 2일 공·사 단체의 지지와 함께 영국 영사의 지위를 맡아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그의 기본적인 목표는 복음을 확장하고 아프리카 동부 연안의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것이었지만 새로운 목표는 중앙아프리카 분수계(分水界)를 탐험하고 나일 강의 근원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이번엔 유럽인 부하를 거느리지 않고 오직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들만 동행했다. 그러나 또다시 부하대원들 사이에서는 문제가 발생했고, 오랜 탐험의 역경으로 일찍 노쇠해 있었던 그는 이에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동부 연안 미킨다니에서는 힘차게 전진했지만 이번엔 응고니의 습격 때문에, 포르투갈 영토를 피하고 니아사 호 북부를 가로질러 탕가니카 호 주변으로 가려던 계획은 결국 포기해야 했다. 탐험대는 남쪽으로 향했고 9월에는 대원 몇 명이 그를 버리고 떠났다. 그 대원들은 잔지바르에 도착한 뒤 처벌이 두려워 리빙스턴이 응고니에게 살해당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비록 다음해에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탐험에 대한 소문은 더 부풀려진 채 해외까지 퍼졌다.

그가 니아사 호 남단에서 다시 북쪽으로 이동했을 때 소문은 극에 달했고, 1867년초에는 한 도망자가 의료상자까지 가져가버렸지만, 그는 계속 중앙아프리카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1867년 11월 8일 므웨루 호를 발견하고 1868년 7월 18일엔 방궤울루 호를 발견했으며, 마침내 1869년 2월 아랍 무역상의 도움으로 탕가니카 호에 도착했다. 그는 몸이 점점 약해지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전진해 1871년 3월 29일 북서부의 마지막 목표지점 니앙궤에 도달했다. 니앙궤의 위치는 콩고 강으로 들어가는 루알라바 강 유역이었다. 결국 그들은 아프리카에 간 유럽인들 가운데 가장 서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것이었다.

1871년 10월 23일 탕가니카 호 동쪽 기슭 우지지에 이르렀을 때 리빙스턴은 병들고 말았다. 이때 그를 찾기 위해 파견된 〈뉴욕 헤럴드 New York Herald〉의 특파원 헨리 M. 스탠리가 도착해 당시 절박하게 필요했던 식량과 의약품을 전해주었다. 리빙스턴은 탕가니카 호 북부유역을 탐험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해졌다고 느껴 동쪽으로 320㎞ 떨어진 우니아니엠베까지 스탠리와 함께 동행했다. 스탠리는 그에게 아프리카를 함께 떠나자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하자 1872년 3월 14일 데이비드 리빙스턴에 대한 무용담을 쓰기 위해 신문기자의 열정으로 영국으로 떠났다.

스탠리가 공급해준 물품들로 새롭게 준비를 갖춘 리빙스턴은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나일강의 근원을 찾고 노예무역을 폐지하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병마로 1873년 5월 그는 현재 잠비아에 해당하는 일랄라 지역 치탐보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아프리카 하인이 그를 찾아냈을 때 그는 침대 곁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은 채 죽어 있었다. 그의 시체를 썩지 않게 보존하기 위해 심장과 내장을 제거한 뒤 아프리카 땅에 묻었다. 그뒤 사람들은 9개월의 힘든 여행 끝에 그의 시체를 해안까지 운반해 영국으로 옮겨가서 성대한 빅토리아 풍의 장례식을 치르고 1874년 4월 1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었다. 그 해에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마지막 일지 The Last Journals of David Livingstone〉가 출간되었다.

영향

30년간 남부·중앙·동부 아프리카에서 펼친 그의 여행과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은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의 태도에 전례없이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탐험한 지역은 유럽인의 발길이 1번도 닿지 않은 곳도 있었다. 그의 지리적·기술적·의학적·사회적 발견은 다양한 지식을 제공해 아직도 그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가족주의와 빅토리아조 풍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아프리카가 근대사회로 발전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믿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의 유럽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민족주의에서도 선구자였다.

G.A. Shepperson 글

 

 

 

 

시장통을 지나 식당가를 찾았다.

역시나 근사한 레스토랑은 아니었고...ㅋㅋ

시장통에서 파는 바베큐집....

 

보기엔 여전히 좀 지저분해 보인다.

파리가 사방에 날아다니고....ㅠㅠ

몇집을 둘러보다가 처음 집으로 다시 왔다.

석쇠위에 구워져 있는건 그냥 전시용이고,

바로 신선한 고기로 구워준단다.

 

우린 자리를 잡아 앉았다.

치킨과 쇠고기, 그리고 음료를 시켰다.

젊은 청년...통에서 정말 싱싱한 고기를 꺼내더니 귀신같은 솜씨로 고기를 굽는다.

 

아~~ 하루 종일 쫄쫄 굶었는데....

그런데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두통때문에 괴로움은 연속선상에 있었다.

 아무래도 심한 두통으로 구토증세까지 있어서 식사를 할 수 없을것만 같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어제 저녁부터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는걸 떠올렸다.

그냥 먹어보자....

헐~ 그런데 이게 왠 일??

세상에 이렇게 고기가 맛있을 수가 없다. 완전 T본 스테이크....

언제 두통이 있었고, 구토가 났었는 지....기억도 없이 싹쓸어 먹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이 모든 증세가 영양실조?? ㅠㅠ

 

오늘 저녁은 의진씨가 몽땅 쐈다.

우리 다섯명이 음료까지 먹은거 다 합해서 81000콰차 (17000원정도...ㅋㅋ)

실로 어메이징한 가격이 아닐수 없다.

그리하여 쏜사람도 얻어 먹은 사람도 다 기분좋고 행복했던....ㅎㅎ

여행중 먹은 음식중 단연 최고였다. 맛으로나 가격으로나~~

아놔~ 또 먹고싶당~~

                  

 

 

 

 맛있는 점심겸 저녁도 얻어 먹었겠다~

의기양양 시장통을 한바퀴 돌며 구경했다.

완전 타임머신 타고 몇십년 전으로 간 삶의 현장.

오오~ 저 위의 사진속 밍크담요~

저거 나 어렸을 적에 덮던 이불이었는데...ㅋㅋ

여기와서 저 밍크이불을 보고있자니 왜케 새로운 지...옛생각도 훤히 나고...

얼마나 저 이불이 따듯한 지 그대로 그 느낌 살아나~~ㅎㅎ

 

헐~

저건 또 뭐얏~

신발을 한짝씩만 주우욱~ 나열해놨어.

한짝씩만 놓은거야~ 아님 그냥 무작위로 주우욱 놓은거야~ 저 짝 어케 찾아서 사??

복걸 복??

ㅋㅋ

 

낼 아침과 점심거리를 사기위해서 슈퍼에 들렀다.

신기한 것이 이들의 삶이 무척 어려워보이는데,

슈퍼는 우리나라의 다국적 기업의 대형 슈퍼와 똑같다는 것이다.

없는거 없이 다 있다.

수입품목들 부터~ 물론 수입품은 엄청 비싸다.

 

먹거리들과 밤에 먹을 안주거리등을 샀다.

슈퍼장은 내가 쐈다.ㅋㅋ

 

미야씨는 그 사이에 또 보틀샵에 가서 맥주를 한박스 사왔다.

미야씨가 쏜다는걸 맥주는 상호와 성여씨가 쐈다.

이렇게 대포를 한방씩 빵빵 쏜다음 다락방 사수!!

 

 

 

 

 

 

 

 

난 겨우 맥주 반병만 마신 채 커다란 방석,쿠숀에 누워서 그만 잠들어 버렸다.ㅠㅠ

어느 사이에 왔는 지, 루사카 숙소에서 헤어졌던 세계일주 친구들이 우리와 합류했다.

이야기 꽃은 또 활짝피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보냈다.

나는 자며 깨며 했지만...ㅋㅋ

 

 

 

 

 

 

 

늦은 시간에 내려와 그제서 씻기 시작했다.

더운 물도 나오고, 물도 콸 콸 잘 나오고...

실컷 호사를 누렸다.

세상에~ 평소엔 너무나 당연시 했던 사실이 여기선 호사를 누렸다란 말이 저절로 나온다니~~

 

 

 

 

 

 

 

 

 

 

 

 

 

 

 

내일은 9시반 출발이다.

시간도 여유롭다.

 

아~~ 커피가 마시고 싶다.

난 맥주보다 커피가 좋아~~

커피가 고파서 미야씨 방에 가서 포트를 빌려와 12시에 커피를 진하게

한잔 내려서 마셨다.

 

버스에서 7시간 내내 자서 그런 지, 진한 커피 때문인 지,

아까 술마시면서 졸아서 인 지....ㅋㅋ

잠이 오지 않는다.

성여씨는 피곤해서 인 지, 술기운때문인 지 잘도 잔다.

하긴 성여씨왈~ 예민해서 잠을 못잔다고 생각했는데, 피곤하니까 잠이 쏟아져서 걍 누우면 잘도 잔다고....ㅋㅋ

 

심한 두통과 구토증세는 가라앉았지만, 아직도 띵한것이 왠지 감기기운이 있는것 같다. 감기약을 먹고 자야겠다.

 

 

 

 

내일은 드디어 빅토리아 폭포이다.

빅토리아 폭포를 보기위해 너무나 기~인 시간과 여정을 거쳤다.

아침에 또 빅폴까지 이동...

그리고

대망의 빅토리아 폭포를 보고,

그곳에서 곧바로 국경을 넘어간다.

짐바브웨로....

빅토리아 폭포는 이렇게 잠비아와 짐바브웨 양국을 끼고 있다.

 

저녁땐 짐바브웨...그곳에서도 또 멋진 썬셋 쿠르즈가 있다.

모든게 너무나 기대된다. 

 

 

 

 

어젯밤 늦게 잠들어 새벽에 알람을 듣지 못했다.

7시20분 기상...

미야씨가 맛있게 밥을 하고 짜장을 넣은 감자 조림까지 만들고 있었다.

 

완전 요리사 삘이 난다.

나는 그 사이 카메라를 가지고 나와 인증컷 하나 날린다. ㅎㅎ

 

탄자니아 쌀로 지은 밥은 진짜 완전 맛있고, 고추장에 오이,김자반까지 꺼내놓고 먹으니

아침부터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더우기 야외식탁에 앉아서 아침 식사를 하다니....분위기까지 죽여준다.

마지막 디저트로 누룽지 탕.....헐~~~

어제 T본 스테이크 먹고 원기를 회복했는데, 오늘 아침으로 완전 원기 회복된듯~

그러고 보니 포카리스웨이트 분말도 가져갔는데 이제껏 그걸 먹을 생각을 못했다.

포카리 스웨트까지 마셨다.

정말 컨디션이 급상승하는것 같다. 푸하하~~

 

이 맛있는 아침을.....

상호, 의진씨는 아침을 먹으러 시내로 나갔다.

덕분에 이들의 분량을 세계일주 친구들이 먹었다는....

그들도 복덩이인것 가텨~~ㅋㅋ

 

 

 

 

 

 

 

 

 

이렇게 멋진 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프리카 여행은 트럭킹하는 친구들도 많다.

그들은 도미토리 방도 쓰기도 하지만,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것 같다.

이곳 졸리보이에도 야영하는 친구들이 아주 많았다.

 

아~~

어젯밤엔 몰랐는데, 아침에 씻을 때 보니 이곳의 투숙객 연령대가 대충 어떤 지 알 수 있었다는....

공동 욕실과 화장실 앞 표기가...

Boys...Girls...로 되어 있더라는...ㅋㅋ

아놔~ 나 충격 먹었잖아~~

푸하하~

                     

 

 

 

 

 

 

 

 

 

 

 

 

 

 

 

 

 

 

 

 

 

 

 

친구들은 도미토리 방을 쓴다.

이곳에서 3일을 묵을 예정이란다.

3일에 18$ 이라니까...

침대 하나에 하루 얼마지?? 6$....

싸구나~~

암튼 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여유로와 보여서 부럽당~

 

우린 그동안 정들었던 이들과의 헤어짐이 섭섭했다.

서로 아쉬운 작별에 대문밖까지 나와서 보이지 않을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다.

 

ㅋㅋ

그런데 이들의 편한 옷차림이....마치 주인장같다~?? 푸하하~

그래서 우린 또 가던 걸음을 멈추고 사진찍으며 배꼽 빠져라 웃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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