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 2011년)

베를린 필하모닉 내한공연-말러9번 /2011.11.15.화/예술의전당

나베가 2011. 11. 15. 10:13
베를린 필하모닉 내한공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는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민주적인 자치제도로 운영되고 있어서 지금도 상임 지휘자, 오케스트라 매니저, 오케스트라 단원을 모두 단원들의 투표에 의해 선정한다. 선정된 단원은 1년간의 수습 기간을 거친 뒤에 정단원이 되며, 10년간 일한 단원은 연금 혜택을 받는다. 베를린 필은 1년에 약 100회의 콘서트를 하는데 외국 연주도 많이 한다. 운영은 콘서트 티켓 판매, 음반 녹음, 방송 등을 통해 얻는 수입으로 충당한다.

현재 총 114명의 멤버로 구성된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 속에 작은 단위로 활동하는 악단이 포함되어 있다. 2002년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에서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연주하여 화제가 된 '12 필하모닉 첼리스트'(Twelve Philharmonic Cellists)를 비롯하여 브란디스 쿼텟(Brandis String Quartet), 웨스트팔리안 쿼텟(Westphalian String Quartet), 필하모닉 옥텟(Philharmonic Octet) 등도 들어있다. 또 몇 멤버들은 빈 필하모닉의 멤버들과 비정기적으로 빈-베를린 앙상블을 만들어 활동한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1862년 벤야민 빌제(Benjamin Bilse)가 만든 빌제의 악단(Bilsesche Kapelle)이 그 시작이다. 처음 50명으로 구성된 이 악단은 대단한 인기 속에서 20년간 약 3천 번의 콘서트를 했으나 재정 문제와 지도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882년 폴란드 공연을 하면서 단원들은 빌제에게 불만이 커졌다. 기차 좌석은 약속했던 3등칸이 아니라 4등칸이었고 보수도 깎였다. 이에 대해 단원들은 계약 만기일이던 4월 30일 전까지 보상할 것을 요구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45명의 단원이 빌제에게서 떨어져 나와 5월 1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sches Orchester)라는 새로운 이름의 자치단체를 결성하였고 당시 루빈스타인과 한스 폰 뷜로우를 데리고 흥행하던 에이전트 헤르만 볼프(Hermann Wolff)에게 찾아가서 '몸을 맡기고' 1882년 9월 17일 바그너의 '마이스터징어' 서곡으로 첫 연주를 시작했다. 당시는 음악회에서 가벼운 식사를 주는 것이 관례였고 관객들은 식사하면서 연주를 감상했다. 그러나 베를린 필은 식사를 주지않았다. '음악에 집중하라'는 표어를 내걸었지만 실제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헤르만 볼프가 재정과 운영을 맡기는 했으나 초기에는 그만큼 어려움이 많았다. 순회공연을 갔던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악기가 모두 타버리기도 했고 수입도 형편없었다. 그 시기에 지휘를 맡았던 루드비히 폰 브레너(Ludwig von Brenner)는 힘들게 이 단체를 음악적으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베를린 필의 본 모습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진짜 베를린 필의 시작은 초대 상임 지휘자로 꼽히는 한스 폰 뷜로우(Hans von Bulow) 부터다. 뷜로우는 재능있는 피아니스트로 리스트에게 인정 받았으며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미국에서 초연했다. 그러나 스승이자 대선배인 바그너를 만나면서 피아노를 떠나 지휘자라는 '딴 길'을 걷게 됐다. 결국 그는 바그너 작품의 지휘를 하게 됐지만 그 대신 바그너에게 부인 코지마(Cosima)를 뺏겼다.

그런 상태로 뮌헨을 떠난 뒤의 뷜로우는 마이닝겐 궁정극장의 음악감독을 맡은 채 가끔 유럽과 미국까지 다니면서 오직 음악에만 정열을 쏟았다. 마침 그의 에이전트를 하던 볼프는 손에 들어온 베를린 필의 전권을 뷜로우에게 맡겼고 두 사람은 배짱 좋게 고집스런 음악을 시작했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혁신적으로 꼽히던 '혁명 지휘자' 뷜로우는 1887년 상임 지휘자가 된 후 5년간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품을 택하여 음악의 수준을 최고로 올려놓았다. 뷜로우는 협주곡을 포함한 모든 '달콤한 음악'은 과감히 내던지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에서 현대에 이르는 교향곡만 연주했다. 보통 하루 저녁에 교향곡 세 편을 연주했는데, 한 번은 베토벤 9번 연주에 대해 관객 반응이 시원치 않다고 '객석의 출입문을 다 잠그고' 다시 한 번 연주한 적도 있었다. 뷜로우는 그는 당시 브람스, 그리그 등과 교류하며 차이코프스키, 말러, 리하르트 쉬트라우스 등을 객원 지휘자로 초대하여 (원래 롤러 스케이트장을 개조하여 만든)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장을 진정한 예술의 전당으로 바꾸었다. 1892년 뷜로우가 건강이 나빠 은퇴하고 2년 뒤 사망했을 때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의 장례식에서 연주했다.

한스 폰 뷜로우가 떠난 뒤, 헤르만 볼프는 그 후 7년간 한스 리히터(Hans Richter), 리하르트 쉬트라우스(Richard Strauss) 등 여러 유명 지휘자들을 초대하더니 1895년에야 헝가리 출신의 아르투르 니키쉬(Arthur Nikisch)를 상임 지휘자로 선정했다. 성격도 차분하고 지휘봉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조용한 지휘자' 니키쉬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낭만주의 작품들을 연주하며 그 서정성을 잘 표현하여 명성을 더욱 높였고 레퍼토리도 넓혔다. 브루크너, 차이코프스키, 베를리오즈, 리스트 등과 교류하면서 당시로는 혁신적이던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와 말러의 작품도 연주했다. 초대한 독주자 중에는 부소니(Ferruccio Busoni), 바카우스(Wilhelm Backhaus), 카잘스(Pablo Casals), 하이페츠(Jascha Heifetz) 등도 있다. 니키쉬는 27년간이나 베를린 필을 이끌다가 1922년 사망했다.

니키쉬가 사망한 1922년 그 뒤를 이어 지휘봉을 받게 된 것은 베를린 출신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 ngler)였다. '불같은 열정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니키쉬의 전통을 따라 낭만주의 작품들에 주력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제 1차 세계대전과 바이마르 시대, 음악적으로는 후기낭만파와 아방가르드의 갈등 시대를 넘어갔다. 푸르트벵글러는 주로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의 작품들을 연주했으며 특히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의 독특한 해석은 큰 찬사를 받았다. 그리면서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 쇤베르크의 작품에도 정성을 들였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베를린 필은 많은 순회 연주를 했고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오스카 프리트(Oskar Fried),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같은 지휘자들을 초대하였다. 뛰어난 솔로이스트 초대도 아주 활발하여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도 협연했고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은 12살에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하며 음악계에 데뷔하였다.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이 세계를 휩쓸던 어려운 시기에 베를린 필하모닉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 시, 독일 정부, 베를린 라디오 방송국의 후원 덕분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푸르트벵글러는 공개적으로 힌데미트를 두둔하여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Goebbels)와 마찰을 빚었고 그 결과 상임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1935년 다시 지휘대에 서게 된 것은 정치와의 싸움에서 예술이 승리한 사례로 꼽힌다.

베를린 필의 더 어려운 시련은 1944년부터 찾아왔다. 1월의 폭격으로 연주회장이 파괴된 상태에서도 베를린 필하모닉은 다른 장소를 빌려서 연주를 계속했다. 베를린이 함락된 것은 1945년 4월 말이었는데 베를린 필하모닉은 나치 치하의 4월에도 연주회를 했고 연합군 치하의 5월에도 연주회를 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단원들을 모아 두 음악회의 지휘를 맡았던 것은 모스크바에서 출생한 독일인 레오 보샤르트(Leo Borchard)로 알려졌다. 1945년 푸르트벵글러가 나치동조 죄로 억류되자 5월에 보샤르트가 상임지휘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8월 23일 베를린의 한 검문소에서 운전사가 정지 신호를 무시하는 바람에 미군 병사의 총격을 받아 보샤르트는 사망하였다.

푸르트벵글러가 구금되고 보샤르트가 죽자 다음 지휘자로 선정된 것은 루마니아 출신의 33세 청년 세르기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였다. 이때 첼리비다케와 함께 물망에 올랐던 것이 바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무척 견제했으며 그 때문에 첼리비다케를 선호했다고 한다. 울름과 아헨의 오페라하우스를 거쳐 빈 필, 암스테르담 콘체르트헤보, 베를린 국립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하며 무섭게 성장한 신예 카라얀이 자신과 동등하게 취급되는 것을 푸르트벵글러는 참을 수 없는 자존심의 상처로 받아들인 것이다. 카라얀을 제치고 지휘봉을 잡은 '괴팍한 지휘자' 첼리비다케는 히틀러 시대에 단절되었던 외국 음악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그동안 금지되었던 현대작품들을 많이 연주하여 찬사를 받았으며 외국 순회연주도 시작했다. 1947년 푸르트벵글러가 석방된 뒤로 두 사람은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했다. 그런데 첼리비다케는 중요한 수입원인 녹음을 못하도록 거부했고 또 폭군적이고 완벽주의 성향으로 단원들에게 복종을 요구했으며 맘에 들지 않는 단원에게 폭언도 서슴치 않아서 단원들로부터 신임을 잃었다고 한다.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자, 첼리비다케의 놀라운 지휘 능력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은 1955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을 상임지휘자로 선정했다. 빈과 런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얻은 카라얀의 명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음반 녹음에 대해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폴 로빈슨이 쓴 카라얀 전기를 보면 1955년 베를린 필 단원들은 미국 순회연주를 위한 지휘자로 카라얀을 최우선으로 뽑았다고 한다. 그러자 카라얀은 이를 수락하면서 '그 대신 나를 종신 상임 지휘자로 선발해 달라'고 조건을 달았다는 것이다. 그런 거래(?)에 의해 순회연주를 다녀 온 뒤 카라얀은 정식으로 상임 지휘자가 됐다고 한다.

'황제 지휘자' 카라얀의 길고 화려한 재임기간 중 베를린 필하모닉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품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주요 20세기 작품들을 빠트리지 않았고 매 시즌 중 다섯 번의 콘서트는 20세기 작품으로 연주하며 10여 편의 현대 작품들을 초연하였다. 카라얀과 함께 순회공연과 음반을 녹음하면서 베를린 필하모닉은 세계적 명성과 베를린 필하모니커(Berliner Philharmoniker)라는 애칭도 얻었다. 새 연주회장도 지었다. 1963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 세워진 켐퍼플라츠의 필하모닉 홀(Philharmonie on Kemperplatz)은 건축가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이 디자인한 것으로 좌석 2천 석에 인상적인 슈케(Schuke) 오르간까지 설치되었으며 1987년에는 챔버 뮤직홀이 증축되었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2년 여성 클라리넷 주자 자비네 마이어 사건 때문이다. 카라얀은 최초로 이 여성 주자를 정식 단원으로 뽑자고 했으나 보수성향이 강한 단원들은 이에 반발하였다. 화가 난 카라얀은 '종신 상임 지휘자의 역할을 수행하되 녹음을 비롯한 수익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1년간의 수습으로 자비네 마이어를 활용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지만 카라얀과 단원들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35년 가까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끈 카라얀이 1989년 지휘대에서 내려와 세상을 떠나자 지휘봉은 그 해에 이탈리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로 넘어갔다. 아바도는 전통적인 고전 낭만 작품들과 함께 20세기 작품을 더 많이 연주하였고 '파우스트', '고대 그리스 드라마', '셰익스피어' 등 주제가 있는 콘서트를 시작했으며 처음으로 오페라도 콘서트에 포함시켰다. 아바도 시기에 유럽의 클래식 유행 중 하나는 원전악기와 정격연주였다. 이것은 통상적인 연주에서 벗어나 작곡가의 의도와 작품 자체에 더욱 접근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움직임은 아바도에게 영향을 주었고 베를린 필은 작품에 대해 더 세밀하게 분석하고 그에 맞는 연주법을 찾아내어야 했다.

12년을 이끈 아바도에 이어 2002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봉을 잡도록 선정된 것은 영국 출신의 사이먼 래틀 경(Sir Simon Rattle)이다. 오케스트라를 철저히 통제하여 좀 더 세밀한 음악을 표현한다는 사이먼 래틀이 12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베를린 필하모닉과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음악을 들려줄 지는 세계의 모든 음악 팬들이 궁금하게 기다리고 있다.

 

Symphony No.9 in D major

 

        말러 / 교향곡 제9번 D 장조,  "이별"

 

          Gustav Mahler, 1860∼191

 

                    Vaclav Neumann / Gewandhausorchester Leipzig

 

 



Gewandhausorchester Leipzig / Vaclav Neumann

  

                                             


1악장 (Andante comodo)
Gewandhausorchester Leipzig / Vaclav Neumann

                                              


2악장 (In Tempo eines gemachen)
Gewandhausorchester Leipzig / Vaclav Neumann

                                               


3악장 (Rondo Burleske)
Gewandhausorchester Leipzig / Vaclav Neumann

 


4악장 (Adagio)
Gewandhausorchester Leipzig / Vaclav Neumann

 

 

교향곡 제9번 D장조 "이별" (Symphony No.9 in D Major)

 

말러는 이 「제 9번」교향곡에서 또다시 성악을 제외하고 순기악곡을 작곡하였다. 구성적으로는 4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는데 전통을 벗어나 제1과 제4악장을 느릿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기법적으로도 이제까지의 교향곡보다 진취적이며 선적(線的)인 대위법을 교묘하게 사용했고, 화성법을 확대하여 새로운 화성 감각을 내는 등, 그러한 것들로 하여금 균형을 넓혀 음체계의 개혁마저도 보이려 했다. 여기에는 조성 조직상 음악의 하나의 한계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말러는 이 곡을 작곡하고 있을 무렵, 체력적으로 무척 지쳐있어서 죽음까지도 종종 생각했었다. 이 곡의 바로 앞에 쓴 「대지의 노래」를 「제 9번」교향곡으로 해야되는 것을 흔히 「제 9번」이라는 작품 주변에 일고 있는 숙명적인 선배 작곡가들의 생애를 참작해서 「제 9번」이라 부르는 것은 기피할 정도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번에 작곡된 「제 9번」교향곡에는 말러의 죽음에의 직관적인 자세가 없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제 1악장의 전개풍 부분에 대해 「오! 나의 사라져 버린 젊은 나날들이여. 오! 모두 흘러가 버린 사랑이여...」라고 쓰기도 했고 제 3악장의 첫 머리에는 스케치 할 때 「아폴로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라고 기록했고 제 4악장의 최후를 「죽는 것처럼」끝내고도 있다. 이와 같이 이 곡에는 죽음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많은 말러 연구가들도 그 점을 인정하고 있으며, 알반 베르크까지도 부인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 곡의 악곡 분석(아날리제)에 즈음해서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1909년 여름, 이 「제 9 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하여 다음 해 4월1일에 완성했다. 주로 토프라하에서 가까운 알트 슈르델바하에서 피서 중에 작업했으나 10월에 뉴욕에서 지휘자로서의 바쁜 생활의 사이사이에 진행시켜 결국 완성한 셈이다. 그리고 말러는 그 다음해 5월 11일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말러의 사후 1년쯤 후 1912년 6월 12일에 빈에서 제자인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초연 되었다.

 

1. 말러 교향곡 9번

 

- 작곡 과정 -

 

        1909년의 여름, 알마는 그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말러를 토블라흐에서 조끔 떨어진 슬루더바흐로 데려갔다. 알마는 건강에 약간 문제가 있어 치료를 위해 레비코로 떠났고 말러는 수년만에 처음으로 여름을 홀로 보내게 되었다. 결혼 이후 늘 알마가 여름 휴가 작곡의 조수 노릇을 해 온 터라, 이때 시작된 9번 교향곡의 작업에서는 수년만에 혼자 일을 하게 된 셈이다. 문제는 작업 조수의 부재가 아니라, 전해지는 말러의 교향곡 작곡 과정이란 것이 대부분 함께 여름을 보낸 사람들, 즉 결혼 전에는 나탈리 바우어-레히너, 결혼 후에는 알마 말러의 일기나 기록에 의존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교향곡에 대해 기록 자체가 거의 남겨지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전화가 아직 발명되지 않아 역사의 여러 위인들과 마찬가지로 말러 부부가 열심히 편지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들이 컴퓨터 통신이라든가 휴대용 전화를 이용했더라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정보의 10분의 1도 남겨지지 못했을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 Death and Life>

       오랜만에 여름을 따로 지내게 된 이들 부부들이 편지를 통해 나눈 내용은 역시 감탄을 자아낸다. 그들의 대화 내용은 범인들처럼 복남이네 어린아이 감기 걸렸다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라, 괴테와 파우스트, 삶의 궁극적인 목적, 교향곡 8번의 해석 등에 대한 의견과 토론이 주를 이룬다. 작곡에 관한 소식으로는 이 편지에서 지독한 날씨가 계속되는 한 작곡을 위해 작업 오두막으로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러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8월에 테오도르 슈피링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요한 작품'을 시작했고 완전히 이 작업에 '파묻혀 있다'라고 기술한 것을 보면 실제로는 이 편지가 오고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교향곡의 작업에 몰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초고(草稿)의 완성을 알리면서 브루노 발터에게 보낸 편지를 들여다봐도 말러가 새로운 작품에 관해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말러는 이 작품에 대해,

 

       "미친 듯이 빨리 썼고,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의 눈으로는 해독이 불가능할 것이다. 겨울이나 되어야 알아볼 수 있도록 깨끗하게 정리할 여유가 올 것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말러의 말은 괜한 허풍이 아니어서 실제로 말러가 얼마나 날려 썼는지 학자들은 이 초고가 거의 읽기 불가능하다는 공통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 교향곡을 작곡할 때 대개 두 해의 여름을 이용한 말러가 이렇게 까지 짧은 시간 내에 이 정도 규모의 곡을 작곡한 경우는 거의 없다.  남겨져 잇는 기록과 말러의 말에만 의존한다면, 이 교향곡은 그야말로 모차르트가 한 교향곡을 작곡하는데 걸린 시간에, 길이는 모차르트의 세 배쯤 되는 작품을 쓴 셈이 된다.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판독 불가능한 스케치가 정말로 8월에 완성되었다면 알마 말러의 말처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 스케치가 그 전년도의 여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불행히도 분명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알마 말러의 회상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은, 그녀가 말러에 관한 가치 있는 기록을 숱하게 남기고 잇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쩔 수 없이 자기 방어적인 인간이라 자신과 말러의 관계에 대해 매우 미화하고 있고, 누구나 그렇듯이 과거의 시간을 추보식으로 재구성하는 데 많은 실수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내용에 관해 브루노 발터에게 보낸 같은 편지에서 말러는, "이 작품은 오랫동안 혀끝에 걸려있던 무엇을 말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4번 교향곡과 나란히 놓을 수 있지만 역시 많이 다르다."고 털어놓았다. 이 두 곡이 어떤 유사성이 있는 지에 관해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두 곡 모두 네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단순하고 투명한 개념을 형상화시키려고 했다는 것 정도일까? 주목할 만한 것은 3번이나 8번 교향곡 등 새로운 곡을 소개하면서 예전에 그가 보여준 허장성세가 이번에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지의 노래'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계속 자의식과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음악 안에서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 많은 개인적인 사건들 이후 적어도 외적으로 그는 풀이 많이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 해 10월 가을 시즌을 위해 말러는 뉴욕으로 출발하면서 9번 교향곡의 초고를 가지고 갔다. 하지만 그 해 겨울이 되면 깨끗한 복사본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말러의 희망과는 달리 바쁜 일정 때문에 그는 이 작품에 바로 몰두할 수 없었고 1910년 4월, 유럽으로 다시 돌아갈 때쯤 되어서야 브루노 발터에게 총보의 완성을 알릴 수 있었다.


        곡의 초연은 말러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12년 6월 26일 브루노 발터의 지휘에 의해 비엔나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편자들이 이 자리에 참석했고, 오스트리아의 신문과 잡지에서만 17개의 리뷰가 실렸다는 점은 이 연주회에 모린 관심을 잘 이야기한다. 평가는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이 곡이 전달하고 있는 이별에 대한 느낌이다. 어떤 이는 이 곡을 '대지의 노래'에 비유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브루크너의 마지막 교향곡에 비교하기도 하면서 이들은 연주회에서 느낀 곡의 인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은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는, 이 곡이 그리는 죽음과 이별에 간한 논의가 이미 초연 당시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부분의 평자들이 1악장을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마지막 악장이 특히 많은 인기를 모으고 있는 오늘날과는 생각이 좀 달랐던 모양이다.

죽느냐 사느냐

 

        지난달에서 얘기되었던 바와 같이 말러는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강박관념과도 같은 두려움 때문에 '대지의 노래'를 교향곡으로 인정하고도 9번이라는 번호를 붙이지 않았다. 여러 선배 교향곡 작곡가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9번이라는 숫자가 그에게 부담을 준 것이다. 말러가 9라는 숫자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은 유명하다. 쇤베르크는 명백히 말러를 의식하면서 1912년 다음과 같은 강연을 남겼다.


        "9번이라는 것은 하나의 한계로 보인다. 그 너머로 가려고 하는 이는 반드시 그 숫자를 통과할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우리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알 필요가 없는 무엇이 10번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처럼 보인다. 9번을 쓴 사람은 내세에 이미 너무 가까이 서있는 셈이다."


        하지만 말러가 죽음이라는 불가사의한 존재를 피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1907년에 있었던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들 이후 실제로는 '대지의 노래'의 길고 벅차고 슬픈 마지막 악장에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번호를 붙였건 그렇지 않았건 말러는 이 곡이 자신의 마지막 곡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그토록 멋지고, 누구의 눈에서도 혼란스러운 눈물을 자아낼 만한 음악을 구상하게 되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지의 노래'를 마치고 나서도 말러가 세상을 떠나야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작곡과 자서전 편찬을 크게 달리 보지 않았던 말러는 다음 교향곡에서 다시 한번 죽음을 준비해야만 했다. 결국 그의 교향곡 9번에(드디어 그는 9번이라는 번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놓인 그 레퀴엠과도 같은 놀라운 마지막 악장을 보고 사람들은 이제 정말로 말러가 세상에 대한 고별을 분비한 것이라고 확신했다(이후 그는 10번 교향곡에서도 또 이별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의 후기 교향곡들이 공통적으로 이별과 죽음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9번은 분명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작곡되었다. '대지의 노래'와는 달리 9번 교향곡이 작곡될 당시 말러의 생활을 살펴보면 그가 여러 고통으로 인해 무너져 가고 있던 인물이라고 간주하기는 어렵다. 말러가 여전히 죽음이라는 혼란스러운 유령에게 사로잡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활동적인 시기를 가졌다. 비엔나 오페라의 자리를 사직한 이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자리를 맡으면서 그는 일년의 반을 유럽에서, 나머지 반은 미국에서, 오페라와 여러 연주회를 지휘하면서 보냈다. 열심히 두 대륙을 오고간 셈인데, 이 때는 콩코드의 음속 비행은커녕 린드버그가 대서양 위를 날아가기도 전이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뿐만 아니라 다음 가을부터는 뉴욕 필하모닉 협회의 지휘자도 맡기로 했기 때문에, 곡이 작곡되는 1909년의 여름 동안 그는 뉴욕 필하모닉과의 첫 시즌을 위해 새로운 악보를 공부하느라고 상당히 바쁜 시간을 보냈다. 실제로 그는 이어진 시즌, 60여 개의 프로그램을 이끌었다. 이 빠븐 일정이 상당한 체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던 것은 당연하고 건강한 몸이 아니었던 말러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대지의 노래'에 관한 글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심장에 문제가 있던 말러는 수영, 보트, 산악 도보, 사이클링 등 많은 그가 좋아했던 많은 스포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가 자신은 책상 앞에 앉아서 작곡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했듯이 숲이나 들의 산책을 통해 곡에 대한 많은 영감을 얻어 왔던 말러였던지라 이런 점은 그에게 많은 안타까움을 주었다. 의사의 경고 후 처음에는 산책을 나갈 때마다 걸음 수를 헤아릴 정도로 그는 주의를 기울였지만, 시간이 지나 9번 교향곡을 작곡할 무렵에는 별장 주변에서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산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말러의 9번 교향곡이 그의 분주한 생활이나 새로운 일에 대한 의욕과 관계없이 이별이나 죽음에 관한 내용으로 중심을 이루는 것이 사실이다. 초연 후 많은 학자들이 이 점을 지적해 왔다. 앞에서 잠깐 말한 바와 같이 초기에는 마지막 악장보다 첫 악장에의 이별의 분위기로 주목을 끌었다. 대부분 이 악장이 '대지의 노래'를 연상시키며 세상에 대한 이별을 그리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더 나아가 윌리암 리터라는 말러의 지지자는 이 곡의 첫 악장과 마지막 악장을 '죽음과 정화'의 개념으로 해석하면서, 첫 악장을 여는 붙점 리듬(곡을 지배하는 메인 리듬)이 문제 있는 심장의 불규칙한 고동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파울 베커는 좀더 은유적인 표현으로 말러의 3번 교향곡 악장들에 붙여진 제목들과 비교하여 이 곡을 '죽음이 내게 들려준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물론 브루노 발터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 역시 첫 악장을 지적하며, 떠다니는 환상이 아니라 실제 감정으로서, 이별의 슬픔과  하늘의 빛에 대한 영감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빌렘 멩겔베르크의 해석이다. 몇 달 전 5번 교향곡을 다루는 차례에서 멩겔베르크가 아다지에토 악장에 대해 악보에 써 놓은 것을 얘기한 바 있는데, 이 곡에 대해서 그는 한결 더 강도 높은 해석을 소개하고 있다. 우선 그는 말러의 '대지의 노래'가 친구(혹은 인류)에 대한 이별이라면, 9번 교향곡은 사랑한 모든 이에 대한, 세계에 대한, 그이 예술, 삶, 음악에 대한 이별이라고 시작한다. 다음 그는 모든 악장을 조목조목 나누어,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이별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2악장 같은 경우는 '죽음의 춤'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등 역시 남다른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섬세한 해석을 들라면 알반 베르크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될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악구를 예로 들면서 이 곡에 대한 애정과 이별과 말러가 추구 헸던 것들을 기술하고 있다. 이들의 반응이 단순히 감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고한 악보의 첫 에디션(초연 전 1912년 출판)에서 말러의 연주지시는 '분노를 가지고', '그림자를 드리워', '엄숙한 장례 행렬처럼' 등 감정적인 것이 많았다. 특히 나중에 별견딘 그의 자필 악보에는 '아, 젊음이여, 사라졌구나! 아, 사랑이여, 떠나갔구나!', '아, 세계여, 이별을!' 등의 격앙된 감정이 쓰여져 있기도 하다. 빌렘 멩겔베르크와 알반 베르크의 곡 해석이 다른 평자들보다 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것은 그들이 이 자필 악보를 살펴보았기 대문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말러의 이별이 현실적인 의미라기보다는 보다 은유적인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말하자면 곡이 작곡되던 1909년에 말러는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아프지도 않았고(말러가 세상을 떠난 것도 애초의 심장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새로운 활동을 정력적으로 펼쳐 나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드 라 그랑쥬는 이 이별의 의미를 유한 존재인 인간으로서는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에 간한 명상이라고 표현하였다.

 

- 작품의 구성 -

 

        후기 혹은 말기 작품의 개성과 특징이 말러만큼 뚜렷하게 발견되는 작곡가는 베토벤 이후 거의 없다는 것을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대지의 노래'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교향곡 9번과 교향곡 10번은 말러가 남겼던 예전의 교향곡과는 그 음악 어법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슈베르트(그의 짧은 생애를 말년으로 구분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정도를 유일하게 이 두 작곡가와 비교할 수 있을까 교향곡보다는 현악 사중주곡과 피아노 소나타에서 강하게 발견되는 베토벤 후기 작품들의 기묘한 화성이(아마도 귀가 너무 오랫동안 먹어서 기본적인 화성 체계가 조금씩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도 되지만) 독일의 전통적인 형식의 틀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듯이, 말러의 경우 내용 면에서는 열정적이고 질풍노도 적이었던 전의 작품에 비해 휙 작품들은 훨씬 체념적이고 초월적이며, 기교 면에서는 쇤베르크 등이 제2비인 악파가 시작한 현대 음악 어법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곡의 배치에 있어 9번 교향곡의 특이한 점은 느린 악장으로 시작되고 느린 악장으로 끝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느린 악장이 마지막에 놓인 3번 교향곡을 작곡할 무렵 이미 그는 알레그로에 비해 아다지오를 더 고급스러운 형태로 간주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곡은 시작도 안단테라는 느린 악장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런 점에서 굳이 카를 H. 뵈르너 같은 학자들의 지적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쉽게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비창'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두 곡은 악장의 순서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묘하게 닮아 있는데, 이 곡에 대해 오히려 말러는 1901년 경 "수준이 얕고 외향적이며, 형편없이 단조롭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악장의 배치뿐만 아니라 역시 지적할 만한 점은 곡의 조성이다. 흔히 D 장조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D 장조의 조성을 가진 악장은 1악장 밖에 없고, C 장조와 a 단조인 중간 악장을 거쳐, 마지막 악장은 D 플랫 장조로 시작된다. 말하자면 중심 조성이 없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전통적인 교향곡의 틀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그렇다고 각 악장들이 완전히 서로 독립된 것은 아니다. 첫 악장과 마지막 악장이 리듬 동기로 연결되어 잇고, 3악장과 마지막 악장은 서로 같은 삽입구를 공유하고 있다.

 

<1악장. 안단테 코모도>

        필자로서는 말러의 9번 교향곡이 가지고 있는 많은 점들 중에서 가장 지적하고 싶은 것이 바로 곡을 여는 동기이다. 간단히 9번 교향곡은 '대지의 노래'가 끝난 바로 그 곳에서 출발하고 있다. '대지의 노래'를 끝맺는 바로 그 동기, 봄의 아지랑이와도 같은 나른함과 절의 풍경(風磬)과도 같은 내세적인 느낌을 주는 첼레스타의 살랑거림을 배경으로 위로하듯이 이어지는 그 동기, 해결음이 없는 두 음으로 이어지는 바로 그 'ewig' 동기는, 비올라의 부드러운 웅얼거림을 배경으로 제2바이올린에서 등장하는, 우아한 슬픔을 가진 9번 교향곡의 첫 주제와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이 'ewig' 동기와 함께, 곡을 여는 첼로의 붙점 리듬(윌리암 리터가 불규칙한 심장 박동이라고 표현한), 비올라의 웅얼거림이라고 표현한 '상승 단 3도-하강 장 2도' 동기는 1악장 전체를 지배한다. 왜 말러가 '대지의 노래'를 마친 바로 그 곳에서 교향곡 9번을 시작하고 있는지에 대해 작곡가 스스로의 설명을 찾을 수 없는 지금 그 이유를 제시한다고 해도 단지 추측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이 동기가 나타내는 것이 이별이라는 추측은 아주 설득력 없는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못갖춤음의 동기는 '대지의 노래'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 말러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6번 op. 81a '이별'이 1악장 '이별'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구조는 말러식 소나타 형식이다. 두 주제가 제시부를 구성하고 제2주제는 같은 으뜸을 단조로 등장한다. 말러는 이 두 주제와 함께 제시부의 종결부도 발전부에서 다루고 잇는데(이는 브람스가 자주 사용한 수법이기도 하다), 사실 종결 주제는 부분적으로 제2주제와 같은 소재를 이용한 것이다. 말러의 교향곡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장례 행진은 발전부의 마지막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팀파니가 '3도' 동기를 변형해 느린 장례 행진 분위기를 잡아가고 이를 배경으로 트럼펫의 기상나팔과 벨의 '3도' 동기가 울리는 듬 말러 특유의 혼란스러운 정신 상태를 맛볼 수 잇다. 제현부는 '죽음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예의 붙점 리듬으로 시작하며 코다를 지나, 말러의 후기 작품들의 특징 중 하나인 '모렌도(점점 여리게)'로 끝난다.

 

<2악장. 편안한 렌틀러 템포로, 조금 서두르고 매우 거칠게>

        아도르노, 멩겔베르크 등을 포함해 여러 학자들이 이 악장을 일컬어 '죽음의 무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 곡은 크게 세 가지 무곡 주제로 이루어졌는데, 첫 부분의 편안한 렌틀러(템포 Ⅰ), 거친 왈츠(템포 Ⅱ), 그리고 느린 렌틀러(템포 Ⅲ)이다. 이 세 무곡은 번갈아 가며 등장하고, 중간에는 왈츠 주제에 두 렌틀러 주제가 조금씩 섞여 나오기도 한다. 전체를 보면 '서투르고 거칠게'라는 지시로 시작되어 여러 무곡들을 거친 후에 매우 세심한 피아니시모로 종결되기 때문에, 브루노 발터는 이를 일컬어 '무도는 끝났다('잔치는 끝났다'이 말러 식?)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3악장. 론도-블를레스크(알레그로 아사이, 매우 완고하게)>

        부를레스크는 '농담'을 일컫는 말이다. 장난스러운 음악을 얘기하지만 이 음악이 장르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구체적인 형식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R. 쉬트라우스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부를레스크'가 가장 유명한 곡 정도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말러의 부를레스크는 농담으로 들리기에는 너무 거칠고 그야말로 '완고'하며 무시무시하다. 또한 론도라고 붙어 있는 만큼 부를레스크 주제는 대주제 사이에 계속 등장한다. 이와 더불어 중간에서 만나는 것은 세 번의 푸가토이다. 이들은 독립된 푸가 주제를 가진 것은 아니고 부를레스크 주제를 이용해 구성한 것이다. 대위 주제와 푸가 주제가 동시에 등장하다 보니 아마 이 부분만 듣는다면 무엇이 푸가 주제인지 혼동되어 3주제 푸가로 간주할 수도 잇을 것이다. 정교하지만 복잡한 전개 방식을 가지고 있고, 특히 주제가 퉁명스러운 점 때문에 R. 쉬트라우스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 등장하는 푸가가 연상되기도 한다. 정신 없이 치고 빠지는 이 악장의 중간에는 4악장을 예고하는 고요한 부분이 놓여 있어 잠시 숨을 돌릴 수도 있다.

 

<4악장. 아다지오>

        웅변적인 이별을 다루고 잇는 이 악장은 대조된 두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주제가 소나타 형식처럼 발전하고 재현된다기보다는 모습을 조금씩 바꾸면서 번갈아 등장한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은 일일 듯 한데, 이런 형식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두 주제의 변주 형태로 쓰여진 4변 교향곡과 6번 교향곡의 느린 악장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중간에는 웅변적인 클라이맥스가 놓여있고 그 후에는 점차 규모가 줄어들며 실내악 형태의 현악 합주로만 끝난다. 역시 모랜도이다. 이 초월적이고 명상적인 마지막 부분에 대해 마이클 틸슨 토마스는 '세상 구경을 다한 말러가 내려와 날개를 접는 것'이라는 묘사를 하기도 했다. 또한 이 부분에서 예민한 몇 학자들은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의 네 번째 곡이 숨어 잇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제1바이올린은 다음 가사 부분을 조용히 노래한다.

 

        "저 위에서는 좋은 날이 되겠지."


2. 음  반 


        말러의 완성된 마지막 곡인 교향곡 8번은 특별히 어렵지도 않고 처음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기 때문인지 그의 후기 교향곡 중에는 비교적 일찍부터 녹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지의 노래'만큼 모노 녹음이 많지는 않고 대부분의 녹음은 1960년대 초부터 이루어졌다. 현재 음반으로 구할 수 잇는 것 중 가장 오래된 녹음은, 또한 가장 유명한 녹음이기도 한 브루노 발터의 1939년 실황 음반이다. 이 음반은 뒤에 소개되어 있다. 이 교향곡이 3악장만 제외한다면 기교적으로 그리 연주하기 어렵지는 않아서인지, 분위기가 잘 살려져 잇는 좋은 연주들이 많아서 그 중에서 6개 정도만 고른 것은 단지 지면의 한계 정도 대문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콜롬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브루노 발터의 1962년 녹음(Sony)도 느슨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며, 1970년대의 DG의 1변 교향곡을 제외한다면 특별히 인상적인 말러 연주를 들려주지 못했던 세이지 오자와(Philips)도 보스턴 심포니의 부드러운 소리에 실어 아담하고 우아한 연주를 펼치고 있다. 역시 빠뜨릴 수 없는 음반 중에 하나는 줄리니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것(DG)이다. 특별히 웅변적인 연주를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쓸쓸하고 유연한 흐름이 돋보이는 1악장은 이 연주의 백미이다. 게다가 이 연주는 2 for 1 이라는 점이 또 다른 매력이다.

 

        기타 다른 연주 중에는 유럽 평론가들이 꾸준히 좋아하고 있는 인발의 연주(Denon)가 있다.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것인데, 글쎄 마지막 악장의 낙낙한 흐름은 듣기 좋지만 개인적으로 이 연주는 그 텁텁한 Denon의 녹음과 함께 너무 탄력 없이 느껴진다. 비슷한 느낌의 연주로는 데 바르트가 네덜란드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것(RCA)을 들 수 잇을 것이다. 이 연주는 특이한 몇 성부가 드러나는 장점은 있으나 역시 녹음이 탁하고 초점이 없으며 연주는 너무 묵지근하다. 하이팅크의 콘서트헤보 연주(Philips) 역시 잘 빻은 가루를 만지는 듯한 느낌의 바이올린 소리가 듣기 좋고 하이팅크 특유의 중후함과 무거운 진지함이 돋보이지만 그 외 두드러진 특징이 없어서인지 별로 재미가 없다. 시노폴리의 연주(DG)는 다른 그의 말러 연주와 마찬가지로 반복해 듣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연주다.

 

       번스타인의 연주는 뒤에서 소개하는 것말고도 두 가지가 더 있는데, 뉴욕 필하모닉과 연주한 1965년의 연주(Sony)가 가장 섬세하며 안정적이지만 표현의 폭이 넓지 않다.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연주(DG)는 이보다 거칠고 충동적이다. 그의 세 연주 중에서는 뒤에서 소개하고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실황 연주가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다.

원글 출처/ http://pathetick.blog.me/60101459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