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 2011년)

베를린 필하모닉 내한공연-브루크너교향곡 9번/2011.11.16.수/세종대극장

나베가 2011. 11. 17. 16:38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는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민주적인 자치제도로 운영되고 있어서 지금도 상임 지휘자, 오케스트라 매니저, 오케스트라 단원을 모두 단원들의 투표에 의해 선정한다. 선정된 단원은 1년간의 수습 기간을 거친 뒤에 정단원이 되며, 10년간 일한 단원은 연금 혜택을 받는다. 베를린 필은 1년에 약 100회의 콘서트를 하는데 외국 연주도 많이 한다. 운영은 콘서트 티켓 판매, 음반 녹음, 방송 등을 통해 얻는 수입으로 충당한다.

현재 총 114명의 멤버로 구성된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 속에 작은 단위로 활동하는 악단이 포함되어 있다. 2002년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에서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연주하여 화제가 된 '12 필하모닉 첼리스트'(Twelve Philharmonic Cellists)를 비롯하여 브란디스 쿼텟(Brandis String Quartet), 웨스트팔리안 쿼텟(Westphalian String Quartet), 필하모닉 옥텟(Philharmonic Octet) 등도 들어있다. 또 몇 멤버들은 빈 필하모닉의 멤버들과 비정기적으로 빈-베를린 앙상블을 만들어 활동한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1862년 벤야민 빌제(Benjamin Bilse)가 만든 빌제의 악단(Bilsesche Kapelle)이 그 시작이다. 처음 50명으로 구성된 이 악단은 대단한 인기 속에서 20년간 약 3천 번의 콘서트를 했으나 재정 문제와 지도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882년 폴란드 공연을 하면서 단원들은 빌제에게 불만이 커졌다. 기차 좌석은 약속했던 3등칸이 아니라 4등칸이었고 보수도 깎였다. 이에 대해 단원들은 계약 만기일이던 4월 30일 전까지 보상할 것을 요구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45명의 단원이 빌제에게서 떨어져 나와 5월 1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sches Orchester)라는 새로운 이름의 자치단체를 결성하였고 당시 루빈스타인과 한스 폰 뷜로우를 데리고 흥행하던 에이전트 헤르만 볼프(Hermann Wolff)에게 찾아가서 '몸을 맡기고' 1882년 9월 17일 바그너의 '마이스터징어' 서곡으로 첫 연주를 시작했다. 당시는 음악회에서 가벼운 식사를 주는 것이 관례였고 관객들은 식사하면서 연주를 감상했다. 그러나 베를린 필은 식사를 주지않았다. '음악에 집중하라'는 표어를 내걸었지만 실제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헤르만 볼프가 재정과 운영을 맡기는 했으나 초기에는 그만큼 어려움이 많았다. 순회공연을 갔던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악기가 모두 타버리기도 했고 수입도 형편없었다. 그 시기에 지휘를 맡았던 루드비히 폰 브레너(Ludwig von Brenner)는 힘들게 이 단체를 음악적으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베를린 필의 본 모습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진짜 베를린 필의 시작은 초대 상임 지휘자로 꼽히는 한스 폰 뷜로우(Hans von Bulow) 부터다. 뷜로우는 재능있는 피아니스트로 리스트에게 인정 받았으며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미국에서 초연했다. 그러나 스승이자 대선배인 바그너를 만나면서 피아노를 떠나 지휘자라는 '딴 길'을 걷게 됐다. 결국 그는 바그너 작품의 지휘를 하게 됐지만 그 대신 바그너에게 부인 코지마(Cosima)를 뺏겼다.

그런 상태로 뮌헨을 떠난 뒤의 뷜로우는 마이닝겐 궁정극장의 음악감독을 맡은 채 가끔 유럽과 미국까지 다니면서 오직 음악에만 정열을 쏟았다. 마침 그의 에이전트를 하던 볼프는 손에 들어온 베를린 필의 전권을 뷜로우에게 맡겼고 두 사람은 배짱 좋게 고집스런 음악을 시작했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혁신적으로 꼽히던 '혁명 지휘자' 뷜로우는 1887년 상임 지휘자가 된 후 5년간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품을 택하여 음악의 수준을 최고로 올려놓았다. 뷜로우는 협주곡을 포함한 모든 '달콤한 음악'은 과감히 내던지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에서 현대에 이르는 교향곡만 연주했다. 보통 하루 저녁에 교향곡 세 편을 연주했는데, 한 번은 베토벤 9번 연주에 대해 관객 반응이 시원치 않다고 '객석의 출입문을 다 잠그고' 다시 한 번 연주한 적도 있었다. 뷜로우는 그는 당시 브람스, 그리그 등과 교류하며 차이코프스키, 말러, 리하르트 쉬트라우스 등을 객원 지휘자로 초대하여 (원래 롤러 스케이트장을 개조하여 만든)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장을 진정한 예술의 전당으로 바꾸었다. 1892년 뷜로우가 건강이 나빠 은퇴하고 2년 뒤 사망했을 때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의 장례식에서 연주했다.

한스 폰 뷜로우가 떠난 뒤, 헤르만 볼프는 그 후 7년간 한스 리히터(Hans Richter), 리하르트 쉬트라우스(Richard Strauss) 등 여러 유명 지휘자들을 초대하더니 1895년에야 헝가리 출신의 아르투르 니키쉬(Arthur Nikisch)를 상임 지휘자로 선정했다. 성격도 차분하고 지휘봉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조용한 지휘자' 니키쉬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낭만주의 작품들을 연주하며 그 서정성을 잘 표현하여 명성을 더욱 높였고 레퍼토리도 넓혔다. 브루크너, 차이코프스키, 베를리오즈, 리스트 등과 교류하면서 당시로는 혁신적이던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와 말러의 작품도 연주했다. 초대한 독주자 중에는 부소니(Ferruccio Busoni), 바카우스(Wilhelm Backhaus), 카잘스(Pablo Casals), 하이페츠(Jascha Heifetz) 등도 있다. 니키쉬는 27년간이나 베를린 필을 이끌다가 1922년 사망했다.

니키쉬가 사망한 1922년 그 뒤를 이어 지휘봉을 받게 된 것은 베를린 출신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 ngler)였다. '불같은 열정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니키쉬의 전통을 따라 낭만주의 작품들에 주력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제 1차 세계대전과 바이마르 시대, 음악적으로는 후기낭만파와 아방가르드의 갈등 시대를 넘어갔다. 푸르트벵글러는 주로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의 작품들을 연주했으며 특히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의 독특한 해석은 큰 찬사를 받았다. 그리면서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 쇤베르크의 작품에도 정성을 들였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베를린 필은 많은 순회 연주를 했고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오스카 프리트(Oskar Fried),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같은 지휘자들을 초대하였다. 뛰어난 솔로이스트 초대도 아주 활발하여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도 협연했고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은 12살에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하며 음악계에 데뷔하였다.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이 세계를 휩쓸던 어려운 시기에 베를린 필하모닉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 시, 독일 정부, 베를린 라디오 방송국의 후원 덕분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푸르트벵글러는 공개적으로 힌데미트를 두둔하여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Goebbels)와 마찰을 빚었고 그 결과 상임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1935년 다시 지휘대에 서게 된 것은 정치와의 싸움에서 예술이 승리한 사례로 꼽힌다.

베를린 필의 더 어려운 시련은 1944년부터 찾아왔다. 1월의 폭격으로 연주회장이 파괴된 상태에서도 베를린 필하모닉은 다른 장소를 빌려서 연주를 계속했다. 베를린이 함락된 것은 1945년 4월 말이었는데 베를린 필하모닉은 나치 치하의 4월에도 연주회를 했고 연합군 치하의 5월에도 연주회를 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단원들을 모아 두 음악회의 지휘를 맡았던 것은 모스크바에서 출생한 독일인 레오 보샤르트(Leo Borchard)로 알려졌다. 1945년 푸르트벵글러가 나치동조 죄로 억류되자 5월에 보샤르트가 상임지휘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8월 23일 베를린의 한 검문소에서 운전사가 정지 신호를 무시하는 바람에 미군 병사의 총격을 받아 보샤르트는 사망하였다.

푸르트벵글러가 구금되고 보샤르트가 죽자 다음 지휘자로 선정된 것은 루마니아 출신의 33세 청년 세르기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였다. 이때 첼리비다케와 함께 물망에 올랐던 것이 바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무척 견제했으며 그 때문에 첼리비다케를 선호했다고 한다. 울름과 아헨의 오페라하우스를 거쳐 빈 필, 암스테르담 콘체르트헤보, 베를린 국립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하며 무섭게 성장한 신예 카라얀이 자신과 동등하게 취급되는 것을 푸르트벵글러는 참을 수 없는 자존심의 상처로 받아들인 것이다. 카라얀을 제치고 지휘봉을 잡은 '괴팍한 지휘자' 첼리비다케는 히틀러 시대에 단절되었던 외국 음악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그동안 금지되었던 현대작품들을 많이 연주하여 찬사를 받았으며 외국 순회연주도 시작했다. 1947년 푸르트벵글러가 석방된 뒤로 두 사람은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했다. 그런데 첼리비다케는 중요한 수입원인 녹음을 못하도록 거부했고 또 폭군적이고 완벽주의 성향으로 단원들에게 복종을 요구했으며 맘에 들지 않는 단원에게 폭언도 서슴치 않아서 단원들로부터 신임을 잃었다고 한다.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자, 첼리비다케의 놀라운 지휘 능력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은 1955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을 상임지휘자로 선정했다. 빈과 런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얻은 카라얀의 명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음반 녹음에 대해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폴 로빈슨이 쓴 카라얀 전기를 보면 1955년 베를린 필 단원들은 미국 순회연주를 위한 지휘자로 카라얀을 최우선으로 뽑았다고 한다. 그러자 카라얀은 이를 수락하면서 '그 대신 나를 종신 상임 지휘자로 선발해 달라'고 조건을 달았다는 것이다. 그런 거래(?)에 의해 순회연주를 다녀 온 뒤 카라얀은 정식으로 상임 지휘자가 됐다고 한다.

'황제 지휘자' 카라얀의 길고 화려한 재임기간 중 베를린 필하모닉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품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주요 20세기 작품들을 빠트리지 않았고 매 시즌 중 다섯 번의 콘서트는 20세기 작품으로 연주하며 10여 편의 현대 작품들을 초연하였다. 카라얀과 함께 순회공연과 음반을 녹음하면서 베를린 필하모닉은 세계적 명성과 베를린 필하모니커(Berliner Philharmoniker)라는 애칭도 얻었다. 새 연주회장도 지었다. 1963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 세워진 켐퍼플라츠의 필하모닉 홀(Philharmonie on Kemperplatz)은 건축가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이 디자인한 것으로 좌석 2천 석에 인상적인 슈케(Schuke) 오르간까지 설치되었으며 1987년에는 챔버 뮤직홀이 증축되었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2년 여성 클라리넷 주자 자비네 마이어 사건 때문이다. 카라얀은 최초로 이 여성 주자를 정식 단원으로 뽑자고 했으나 보수성향이 강한 단원들은 이에 반발하였다. 화가 난 카라얀은 '종신 상임 지휘자의 역할을 수행하되 녹음을 비롯한 수익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1년간의 수습으로 자비네 마이어를 활용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지만 카라얀과 단원들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35년 가까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끈 카라얀이 1989년 지휘대에서 내려와 세상을 떠나자 지휘봉은 그 해에 이탈리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로 넘어갔다. 아바도는 전통적인 고전 낭만 작품들과 함께 20세기 작품을 더 많이 연주하였고 '파우스트', '고대 그리스 드라마', '셰익스피어' 등 주제가 있는 콘서트를 시작했으며 처음으로 오페라도 콘서트에 포함시켰다. 아바도 시기에 유럽의 클래식 유행 중 하나는 원전악기와 정격연주였다. 이것은 통상적인 연주에서 벗어나 작곡가의 의도와 작품 자체에 더욱 접근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움직임은 아바도에게 영향을 주었고 베를린 필은 작품에 대해 더 세밀하게 분석하고 그에 맞는 연주법을 찾아내어야 했다.

12년을 이끈 아바도에 이어 2002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봉을 잡도록 선정된 것은 영국 출신의 사이먼 래틀 경(Sir Simon Rattle)이다. 오케스트라를 철저히 통제하여 좀 더 세밀한 음악을 표현한다는 사이먼 래틀이 12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베를린 필하모닉과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음악을 들려줄 지는 세계의 모든 음악 팬들이 궁금하게 기다리고 있다. 

 

Ravel

 'Alborada del gracioso' from Miroirs

<라벨/어릿광대의 아침노래>

 

1900 년 빠리에서 활동하던 젊은 예술가 그룹  Les Apaches에 가입한 라벨은 1904년 그룹의 회원들을 위하여 피아노 조곡 Miroirs(거울에 비친 像) 쓰기 시작하여 다음 해에 완성하였다. 이 작품을 구성한 5 개의 곡 " Noctuelles (밤나방)" "Oiseaux tristes (슬픈 새)"  "Une barque sur l'océan  (대양의 조각배)"  " Alborada del gracioso  (어릿광대의 아침노래 )"  "La vallée des cloches . (계곡의 종소리) 들은 각기 그 그룹의 회원에게 헌정 되었는데, 4 번째 작품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 " (Alborada del gracioso)는 음악가이며 음악 평론가이었던 깔보꼬레시( Michel Calvocoressi)에게헌정되었다. 이후 라벨이 오케스트라로 편곡한 은 3, 4 번 작품은 오리지날 피아노 작품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된다.  

 

 Alborada del gracioso

 
A.Bruckner-Symphony No.9 in D min
"Den Lieben Gott"

안톤 브루크너-교향곡 제9번(거룩하신 주님의 사랑)


 
부르크너의 교향곡이 그의 아홉 번째 교향곡이 아니라는 사실은 애호가들이라면 다 아는 일이다. 제1번(1866년)과 제2번(1872년)사이의 작품을 제0번 이라 부르는 예는 다른 작곡가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드보르자크처럼 예전에는 제5번(신세계에서)이라 부르던 곡을 지금은 제9번이라고 고친 사실을 따르지 않은 이유는 이미 종래 번호로 익숙해진곡에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1863년에 작곡한 또 하나의곡, 번호가 붙지 않은 F단조의 교향곡이 있으므로 브루크너에 익숙지 못한 사람은 좀 당황할지 모른다.
  
브르크너의 교향곡에는 이렇듯 번호와 작품의 관계 이외에 좀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 악보의 개정판이 많다는 점이다. 작곡가 자신이 판본과, 작곡가 이외의 사람의 판본이 있다. 각기 작품마다 여러 가지 악보에 대한 비교론이 생겨났다. 지휘자에 따라 채용하는 판본이 다르게 마련이고 일괄적으로 누가 어느 판본을 썼으니까 그의 브루크너관은 어떻다고 논하기가 어렵다. 브루크너의 다른 교향곡은 접어 두고 제9교향곡에 촛점을 맞추어 보자. 이교향곡은 미완성이다 그러나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같이 제2악장으로 끝나지 않고  휘날레만이 결여되어 있다. 슈베르트와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슈베르트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실제 사실은 알수 없지만)작품완성을 망설이며 후에 다른 교향곡을 완성한 데 비해 브루크너는 어떻게 해서든지 전 곡을 완성하고 싶어 애썼으나 건강과 수명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펜을 멈춘 부분에서 악보가 끝났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이 교향곡의 제3악장 아다지오가 너무 심원한 "고별의 편안함"을 나타낸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대로 충분하며 더 이상 아무것도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어떤 이의 의견이 있지만, 브루크너 자신은 끝까지미완성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브루크너가 작곡에 착수한 때가 67세라는 노령이며 제3악장까지 완성한 것은 3년 후인 70세 때였다 이미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있던 그는 자기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제3악장완성(1894년)1년전인 1893년에 유서를 썼다. 그속에는 유명한 그의 소망(시체를 성 홀로리안 사원 지하실의 대 오르간 밑에 안치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있다.
 
  

1. Feierlich, Misterioso (장중하고 신비롭게)

2. Scherzo. (스케르초) Bewegt, lebhaft (가볍고 쾌활하게) - Trio. Schnell (빠르게)

3. Adagio. (아다지오) Langsam, feierlich (느리고 장중하게)


Junge Suddeutsche Philharmonie Esslingen
Conductor: Bernhard Guller
Live-Mitschnitt 24 September.1989, Basilika Weingarten
 
 

말러와 브루크너.
그들은 모두 19세기 말 교향곡이라는 장르는 새로운 형태로 부흥시킨 위대한 심포니스트였지만, 사실 그 두 사람의 성격이나 음악은 매우 달랐다.
말러의 제자 브루노 발터는 말러와 브루크너의 차이에 대해 '브루크너는 이미 신을 찾았고, 말러는 끊임없이 신을 찾고 있다' 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음악적 차이점을 잘 말해준다.

확실히 브루크너의 음악 속에서는 인간적인 고통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오르간 사운드를 연상 시키는 객관적인 음향, 집요하게 반복되는 악구. 그의 음악은 그저 초연하게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신을 찾지 못한 말러의 음악에는 인간적인 고통과 기쁨의 드라마가 끊임 없이 펼쳐진다. 장송행진곡과 천상의 음악이 뒤섞여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음악. 그것이 말러의 바로 교향곡이다.

그런데 그 상반된 성격의 두 사람은 아주 좋은 친구 사이였다. 브루크너는 말러보다 36년 연상이 었지만 워낙 천진난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보다 한참 어린 말러와 세대 차를 뛰 어넘는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877년 12월 16일, 브루크너가 교향곡 제3번을 초연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날 브루크너는 쓰라린 패배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의 교향곡 초연이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당시 브람스 편에 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한슬릭 일파들이 기라성같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바그너에게 헌정된 브루크너의 교향곡 3번의 초연이 순조롭게 진행될 리 없었다. 브루크너의 엉성한 지휘에 화가 난 오케스트라, 그리고 한슬릭 일파의 방해 공작으로 공연장에는 썰렁한 냉기가 감돌았다. 그나마 연주회에 참석했던 몇 안되는 청중들도 연주가 진 행되는 동안 하나 둘씩 자리를 뜨고, 간간이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연주가 끝날 무렵 객석에 는 10명 남짓한 브루크너의 추종자들만이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켰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17세의 청년 구스타프 말러도 끼여 있었다.

비록 브루크너의 교향곡 3번의 초연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지만, 말러는 이 교향곡에 크게 감명 을 받아 이 곡을 네 손을 위한 피아노 곡으로 편곡하여 이듬해인 1878년에 출판했다. 브루크너 는 말러의 편곡에 아주 만족하여 그 답례로 말러에게 자신의 교향곡 3번의 총보를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그들은 좋은 친구이자 동료가 되었으며 서로를 열렬히 숭배했다. 브루크너는 항상 자신 보다 한참 어린 말러에 대해서 항상 깊은 존경심을 나타내곤 했다. 그래서 말러가 그를 방문할 때마다 모자를 손에 든 채 계단을 뛰어 내려가 이 젊은이를 맞이할 정도였다. 그는 말러를 만날 때마다 그에게 자신의 작품을 연주해 보이며 이 신출내기 음악가에게 인정받기를 원했다. 후에 말러는 브루크너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어느 상쾌한 아침, 대학 수업 시간 도중에 그는 나를 강당으로 불러냈다. 그는 먼지가 잔뜩 쌓인 둔탁한 피아노 앞에 앉아 훌륭한 아다지오 테마를 연주해주었다. 지금까지도 이것은 내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 당시 그는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유쾌함과 젊음을 지니 고 있었으며 항상 진실했기 때문에 우리는 격의 없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삶과 이상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가와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나는 나 자신을 그의 '제자'라 부르고 싶다. 또한 언제까지나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할 것이다."

그러나 말러가 실제로 브루크너의 제자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 문제는 말러의 전기 작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말러의 전기작가 슈라이버는, 말러가 비인 음악원에서 공부할 당시 그가 브루크너의 강의를 빠짐 없이 수강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슈테판은 말러가 브루 크너의 강의를 들었는지는 약간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또한 미첼은 말러의 편지를 예로 들어 말러가 실제로 브루크너의 제자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말러가 실제로 브루크너의 제자였든 아니든, 말러는 항상 브루크너를 그의 스승으로 생각하며 깊이 존경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후에 말러가 지휘자로서 활동하게 되었을 때 스스 로 브루크너 음악의 전도사임을 자청하며 당시에 잘 연주되지 않던 브루크너의 음악을 자주 연주했던 것을 보면, 브루크너에 대한 그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891년, 말러가 함부르크의 오페라 극장에서 브루크너의 '테 데움'을 성공적으로 연주한 후 브루크너에게 써보낸 편지를 읽어보자.
"드디어 제가 당신의 작품을 연주하게 되었다는 편지를 쓰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어제 저는 당신의 놀랍고도 강렬한 음악, 테 데움을 지휘했습니다. 연주자들이나 청중들 모두 그 압도 적인 음악과 고귀한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연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청중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은 채 깊은 감동에 전율하고 있었습니다.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폭풍과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말러가 브루크너의 음악에 대해 항상 만족스러워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휘자로서의 말러는 브루크너의 음악을 세상에 전파하기에 힘썼지만, 작곡가로서의 말러는 브루크너의 음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말러는 비엔나 필하모닉 연주회에 서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연주할 당시 자신의 취향대로 브루크너 교향곡의 상당 부분을 삭제 하고 연주하곤 했다.

1900년 1월 28일에 열린 제 6회 필하모닉 콘서트에서 말러가 브루크너 교향곡 4번의 2악장과 4악장의 몇 군데를 삭제하고 연주하자, 당시 비인의 브루크네리안들은 심한 반발을 하고 나섰다. 그들의 대표자 격인 테오도르 헬름은 '말러가 자기 멋대로 템포와 다이내믹을 고치고 악센트를 과장했으며 파렴치하게도 작품에 가위질을 해 시적이며 음악적인 이 작품을 조각조각 잘라버렸 다'고 비난했다. 항상 새로운 스캔들을 찾았던 비인의 음악계에서 말러의 '배은망덕'은 좋은 가십거리가 되었다. 졸지에 배은망덕한 음악가라는 낙인이 찍힌 말러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의 리허설에서 브루크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나는 브루크너에게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의 인품과 작품 모두를 열렬하게 숭배 하는 사람입니다...나는 나의 방식대로 브루크너를 기념하려 했고,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가능한 한 모든 존경심을 담아 이를 연주하여 영광스럽게 하려 한 것입니다."

문제는 말러가 '그의 방식대로' 브루크너를 존경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는 브루크너의 음악을 사랑했지만 브루크너 음악의 어떤 악구와 주제들은 자연스럽게 흐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말러가 보기에 브루크너의 음악은 어떤 면에서 논리적 구조가 결여된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말러에게 고통을 주었고, 어떻게든 브루크너 음악의 '공허하고 부적절한 부분'을 삭제하고 연주하려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스를 대지 않고서는 브루크너 음악을 연주할 수가 없어요. 원래 상태로는 브루크너를 절대 레퍼토리에 포함시킬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당시 평론가들은 말러의 이런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브루크너의 제자인 체 하지만 브루크 너의 천재성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말러가 브루크너의 음악을 '그의 방식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브루크너의 천재성을 이해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브루크너와는 전 혀 다른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말러와 브루크너. 그들은 서로를 존경하고 숭배했으면서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극단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그토록 존경 하고 숭배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열망하므로

  

참고로 말러는 브루크너 교향곡 6번을 초연했습니다.

요즘들어 말러와 브루크너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두 작곡가의 작품을 열렬히 연구되고 그리고 녹음되고 연주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매니아 층도 생겨났죠. 이들의 추종자들을 "말러리안" "브루크네리안"이라고 부릅니다.

 

세기말의 정서를 삶과 죽음이라는 고뇌로 표현한 말러, 엄숙하고 경건함속에 장중함을 추구했지만 누구보다 외로웠던 브루크너,, 저는 후세사람들을 고생시키는 이 두 작곡가들이 너무 얄밉습니다. 초보수준에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공통점을 살펴보기로 하죠.. 교향곡을 본다면 흔히 알려진 9번까지 작곡을 했습니다. 그러나 말러는 미완성인 10번이 있고, 교향곡이라고 불러도 되는 대지의 노래가 있습니다. 브루크너는 9번이 미완성입니다. 3악장까지 완성이 되었는데, 4악장은 자신의 테데움으로 대체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습작교향곡이라고 부르는 0번과 00번(?)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작인 교향곡 이외에 말러는 가곡, 부르크너는 가톨릭 종교음악(미사,모테트,테데움)이 유명합니다.

또 작품에 많은 수정을 한 작곡가입니다. 부르크너는 한 교향곡에 2번 이상을 자기 스스로 수정해서 그의 작품을 감상할 때에는 어디서 나온 버젼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출판사가 수정을 한 작품도 있죠.)

그들의 교향곡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기본이 1시간) 지휘자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등은 가장 필요한 것이 체력과 집중력입니다. 말러 교향곡 6번 4악장이나 브루크너 교향곡 8번 3악장은 거의 30분정도 소요됩니다.

살아생전 그들의 작품이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한것도 공통점입니다. 특히 말러의 작품은 너무 시대를 앞서나간 탓이 크다고 봅니다. 둘다 천재작곡가이지만 말러는 뛰어난 지휘자로서 인정을 받았고, 부인과 자식까지 두었지만, 브루크너는 40넘은 나이에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교향곡 7번이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어서 그의 이름이 알려졌지만 그때에는 그는 너무 늙었습니다.

말러는 평생동안 삶과 죽음 문제에 집착했다면, 브루크너는 수도원에서 오르간 주자로 활약하면서 신에 대한 신앙생활에 온평생 다바쳐서 살았습니다. 아마 벨기에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인 세자르 프랑크가 브루크너처럼 살았다고 봅니다.

<원글보기/http://blog.daum.net/user0429/383>

 

브루크너 교향곡 9번 D단조 작품해설

이 글에서는 일반적인 이 코너의 형식과는 달리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만한 사고의 방향들을 제시하면서 곡의 해설을 대신하고자한다. 먼저 작품에 대한 고찰이 수반된 뒤에 다시 내부적으로 곡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브루크너 교향곡의 의미와 특히 9번이 차지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분명 초기의 교향곡 작품들은 아직 고전주의(베토벤, 모차르트 등의 작곡기법)등의 구조들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브루크너의 개성이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개성적인 면들이 작곡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오하게 복잡해져 가는데, 이 과정에서 바그너의 영향이 실제보다 더 과장되게 이해되는 것과 함께 다른 작품 외적인 요소들보다 두드러지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작품 내면 본질에 대한 왜곡이 일어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우리가 역사의 뒤편에서 브루크너를 재평가하면서 어떤 규정이라는 틀 속에 넣기 위한 편리하고도 위험한 도구임을 솔직히 인정해야만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어떠한 음악적 산물이 홀로 독립된 창조물이 아니라 과거의 훌륭한 전통으로부터 이룩되어진다. 그러므로 브루크너 또한 예외가 아니며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추구 방향을 설정하고 독자적인 언어를 통해서 더욱 확대시켰다. 후기로 접어들면서 드디어 이러한 면들은 확실히 브루크너와 일체감을 형성하게 된다. 바그너는 단지 그가 생각하는 진보적인 음악(또한 베를리오즈, 리스트)의 전형으로 간주된다.(이는 형이상학적인 면과 특히 미학에 관한 관점 자체로써 존중했다는 뜻이다.)

그럼 과연 명확하게 어떤 부분이 브루크너와 바그너가 일치하는가에 대해서 간단히 생각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바그너를 우상으로 생각한 브루크너는 실질적으로 바그너 음악 자체와 유사하기보다는 기존의 보수적인 음악(그가 평생토록 배워온 음악들이 바로 이러한 고전적이거나 바로크적인 음악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그너 음악을 접하므로써 새로운 영감과 부딪히게 된다.)과는 다른 방법으로 머리 속의 생각을 음악으로 구체화시켰다. 그래서 엄밀히 말한다면 이러한 표현 방법의 철학 자체만이 바그너와 유사하다는 의미이다. 바그너는 신화, 죽음, 사랑, 증오를 토대로 음악적 언어를 구사한 반면 브루크너는 종교적인 색채의 합창과 신을 배경으로 한 언어로써, 엄격하게 두 작곡가의 음악은 매우 다르다. 우리가 브루크너를 교향곡이란 장르를 베토벤 이후에 더욱 발전시켰다 라는 말은 단순히 그가 곡의 크기만을 부풀렸기 때문에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가 대위법이란 작곡 기법과 소나타 양식에 충실하면서 바그너적인 방법들까지 융화시켜서 금관악기들의 합창곡처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후대에서 바라보여지는 부분을 잠시 접어두고 브루크너 당시,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베토벤과 항상 비교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심리적 상황으로 그는 이 곡이 베토벤 9번처럼 마지막 악장은 합창을 수반하는 거대한 곡으로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그토록 그가 오랜 시간을 투자하면서 고심하던 부분도 바로 이런 점이 이었으며 마지막 미완으로 남겨질 자신의 곡에 대해서 그는 " 테 데움"이 대신 연주되기를 원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브루크너가 합창을 동반한 거대한 곡으로 완성하리라 생각한 이 교향곡은 베토벤 9번과는 음악적 성격이나 주제가 다르다. 음 하나하나를 짙게 눌러서 표현하는 브루크너 음악은 오르간의 음을 연상케 하며, 선율이 점층적이고도 분명하며 반드시 강렬한 투티를 통해 정서적인 분출을 시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음향 자체도 베토벤보다 더욱 밀도가 높다. 이러한 음악적 특징을 통해서 그가 최종적으로 결말을 짓고 있는 것은 투쟁적이고 혁명적인 면보다는 당연히 종교적인 동화와 아울러 영속적인 평화로 귀의함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역시 그의 마지막 교향곡답게 그를 끝까지 잡고 있던 종교적인 신앙의 고백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2. 이 교향곡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한 방향으로 연주가 이루어져야 하는가?
흔히 트럼펫은 종교 음악적인 분위기에는 가장 높이 있는 신을 상징한다. 이는 매우 당연한 음악적 건축물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의미처럼 오케스트라의 최정상(튜티에서 역할을 일컬음)을 차지하는 이 악기의 특색과 역할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될 것으로 안다. 대부분의 지휘자나 연주자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특히 브루크너가 항상 투티의 마지막까지 어떤 악기를 고집하고 있던가? 다른 금관악기들은 상당히 장식적인 면이나 음의 집속도를 높이고 고조되는 상승 분위기를 나타낸다. 하지만 최고의 순간에는 반드시 이러한 분위기 속에 뻗어 나오는 표현의 핵심이 존재한다. 이를 제대로 살려내느냐? 못 내느냐? 하는 부분이 이 교향곡을 바라보는 진정한 시각이 된다. 이는 스코어 상에 지시된 포르티시시모(fff) 말고도 진정 작품의 핵심을 꿰뚫는 혜안이 있다면 반드시 볼 수 있는 것이다.

3. 연주의 창조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역사는 바로 창조에 대한 시도로 이루어져왔다. 그러므로 예술이란 장르도 이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이러한 점은 발전이라는 표어 하에서 자행되는 퇴행적인 방향이 아니라 순수한 의도로 빚어내는 진실한 마음과 진리를 추구하여야 함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곡에 대한 해석방향도 창조적인 시도나 새로운 의도가 더욱 돋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단지 돋보이고 싶어서 남들과 다르기만 하다고 해서 진정한 창조성의 표출인가 하는 물음은 어렵고도 힘든 문제인가? 해답은 간단하게 결코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작곡가의 그 당시 절대적인 진리의 상황을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하지만 이에 근접한 상황을 연주자가 간접적으로나마 진실에 근접하게 표현만 하더라도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음악을 듣고 이해함에 있어서 귀중한 것은 이러한 느낌들을 구체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연주가 중요하다. 이런 역할을 소홀히 하는 연주들은 자연스레 훌륭한 연주의 대열에서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위의 질문에서 내포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바로 브루크너 음악을 낭만주의로 볼 것인가 아니면 고전주의나 바로크로 볼 것이냐 하는 중요한 문제와 접하고 있다. 그는 항상 창조적인 자신의 능력 배양을 위해서 평생토록 공부를 하였다. 그러므로 고전주의에만 안주할 수 없었던 브루크너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다른 작곡가들이 교향곡을 작곡할 나이에도 그는 아직도 더 많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브루크너의 이런 면을 통해서 단순히 그의 음악적 유산이 단순히 고전주의를 계승하였다 라고 보기보다는 낭만적인 내적 갈망(주로 신에 대한 귀의나 평화)을 보다 바그너적인 수법을 통해서 차분하게 낭만주의를 실현하였다 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렇게 종교 음악적인 분위기가 포함된 낭만성이 가득한 음악은 어떠한 흑백논리의 범주 즉 우리의 편의적인 틀에 귀속시키려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여기서 다루고 있는 교향곡이란 장르에서는 낭만성이 가득한 음악으로 생각한다.

4. 브루크너 곡을 연주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다른 무엇보다도 각 단원들의 연주실력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 물론 지휘자의 역할도 있지만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 일단 곡 자체가 필요로 하는 것은 굉장히 밀도 높은 음색과 특유의 빛깔이다. 브람스의 음악적 색깔과는 판이하게 다른 황금빛이 요구된다. 이런 색채 감각에 가장 적합한 오케스트라는 존재하는가? 이에 대한 물음은 쉽게 답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연주들의 녹음으로도 알 수 있듯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가장 적격이다. 오케스트라의 바탕색 자체가 회색이나 검은색의 느낌이 강하면 일단 곡이 필요로 하는 뉘앙스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5. 꼭 빈 필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브루크너가 8개의 호른과 3개씩의 트럼펫, 튜바를 쓰면서 같은 악기 종류라도 스코어에서 진행되는 음은 각자 다른 선율을 부르게 된다. 같은 호른 파트이면서도 4가지의 다른 선율이 사용된다. 이를 본다면 단순한 음색의 정갈한 빛깔이 요구되겠는가? 아니면 다양한 음색의 선율이 요구되겠는가? 이에 알맞은 해결책이며 근접한 선택법으로서 빈필이 적임이며 이는 음반으로써도 증명된다. 브루크너 곡에 대해서는 빈필이 필요충분 조건이다. 그리고 브루크너의 음악은 독일, 오스트리아 계통에서만 자주 연주될 뿐 다른 지역에서는 자주 연주되지 않는다. 그리고 빈이라는 도시의 색채감은 아주 브루크너적인 영상미를 짙게 함유하고 있다.

6. 마지막으로 브루크너는 어떤 사고의 소유자였는가?
곡을 이해하는데는 그 작곡가의 심리적 상황이나 갈등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면 매우 놀라운 감수성을 우리들에게 부여한다. 그래서 단편적인 조각들이나마 브루크너의 그 당시 심리적 상태를 알아 보고자한다. 물론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인간에 대한 투영은 오류다. 단편적인 조각으로 한 인간 내면까지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단지 외부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유추적인 생각이 전부다. 그렇지만 조심스럽게 한번 접근해 보기로 한다. 일단 그는 일반적인 세속적인 삶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삶 속에서 카톨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착실함이란 외부적인 표정과 내부적으로는 강렬한 끈기나 열정이 도사리고 있는 이원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는 인생의 모든 것을 포괄적인 한가지로 초점을 맞추었다. 이것에는 여러 가지 부분이 포함될 수 있겠으나 먼저 자신의 음악적 식견을 넓히는 것이나 숭고한 음악을 헌정하는 일로 압축된다. 항상 진보적인 심리적 긴장상태를 유지하다보니 자연스레 건강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특히 그를 향해 비난하던 빈의 한슬릭(분명 시대착오적인 형식주의론자이지만 이 때문에 더욱 브루크너의 음악적 견해가 튼튼해질 수 있는 토대가 된다.)을 위시한 브람스 옹호주의자들에 의한 스트레스도 가세한다. 또한 강력하게 반대파에게 논박하지 못한 면과 작곡된 뒤에도 꼼꼼하게 다시 재수정을 가하는 면들을 통해서 상당히 유약한 심성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유약하다면 어떻게 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 9번 교향곡까지 작곡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진실한 음악적 완성을 신과 함께 완성되기를 바랬으며 최종적인 그 결과가 신에게 되돌려지기를 간절히 원하던 천진하면서도 강인한 인간일 뿐이었다.

 

작곡과 초연
브루크너는 마지막 교향곡인 미완성 9번을 위해서, 8번을 작곡한지 6주 뒤부터 죽기 전까지 10년이나 작업했다. 9번은 그의 마지막 최후의 삶에 대한 결정체이다. 숨을 거두는 그날에도 마지막 악장을 잠시 작업하다 숨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굳건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신에게 이 곡을 바치고 싶어했었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염원을 간직하고 있다. 이 곡의 음악적인 형상에 대해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점은 그 음의 구성에서 나타나는 생소함과 대담성에 대한 놀라움이다. 선율의 처리 방법은 복음정을 각별히 많이 구사하였으며, 풍부한 하모니는 바그너적인 반음계법이 침투하여, 음의 장대한 흐름은 아주 개성적인 면모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또한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브루크너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이제 브루크너는 그의 교향곡을 통해서 더욱 베토벤의 교향곡적인 형식을 발전시킨 셈이 된다.

9번의 최초의 스케치는 63세 때인 1887년 9월이며 그후 병세가 점점 심각해지고 나이가 들면서 3악장까지 작곡하고 200페이지 분량의 피날레 스케치를 코다까지 남겨둔 상태로 서거하게 된다. 이 피날레를 가지고 브루크너의 의도와 비슷하게 다시 완성하려는 시도는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마지막 코다 부분은 브루크너의 영면과 함께 엄숙한 세계로 완결 지어졌기 때문에 굳이 피날레 부분에 손을 델 필요는 없다고 본다. 브루크너는 마지막에 이 피날레가 완성되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테 데움이 대신 연주되기를 바랬었다.

곡의 초연은 그의 사후인 1903년 2월 11일 빈에서 Ferdinand Lowe 지휘로 당시 막 창단된 빈 콘체르트페라인 오케스트라 (Wiener Konzertvereinsorchester)에 의해 행해졌다. 이 오케스트라는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전신에 해당한다. 뢰베는 작품의 연주를 원활히 한다는 미명하에 브루크너의 악보를 수정했으며 그 수정본이 Doblinger에 의해 이듬해 출판된다. 1934년에야 Alfred Orel이 편집한 오리지날 악보가 출판되게 된다. 크나퍼츠부쉬 (1950)를 비롯해 푸르트벵글러 (1944), 아벤트로트 (1951) 등은 모두 이 오리지날 악보를 쓰고 있다. 반면 현대의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1951년에 출판된 Leopold Nowak판을 이용하고 있는 추세다.

 

- 김성익
글쓴 날짜: 2000/01/20

 

악기편성

플루트 3, 오보에 3, 클라리넷 3, 파곳 3, 호른 8, 트롬본 3, 트럼펫 3, 콘트라베이스 튜바(3악장에서는 4개의 호른 대신에 테너 튜바 2, 베이스 튜바 2), 팀파니 3, 현5부

 

악장구성

- 1악장 Feierlich, misterioso, 2/2 박자,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 제1 주제 - 제2 주제 - 제3 주제 - 전개부 - 재현부 - 코다 의 형식임.

- 2악장 Scherzo. Bewegt, lebhaft - Trio. Schnell, 3/4 박자, 복합 3부 형식. 트리오는 제1 주제와 제2 주제(A-B-A-B-A)로 구성됨.

- 3악장 Adagio. Langsam, feierlich, 4/4 박자, 변형된 소나타 형식. 제1 주제 - 제2 주제 - 전개부 - 코다로 구성됨.

펌<원글보기/http://pathetick.blog.me/60094812686>

 

 

 

 

브루크너 9번 교향곡 참고/http://blog.daum.net/beutiful_life/15710273

 

연주가 끝나고....

어제 공연과는 연주자들이 많이 바뀌었다.

 

 

 

 

 

 

 

 

 

 

 

 

 

 

 

 

 

 

 

 

 

 

 

 

 

 

 

 

 

 

 

 

오늘의 협연자-Stefan Hohr (Horn 연주자)

 

 

 

 

 

 

 

 

 

싸이먼 래틀뒤로 오늘 첼로 악장을 대역했던 <마르틴 뢰허>

 

 

 

 

 

 

 

 

 

 

 

 

 

 

 

 

 

 

 

 

 

 

 

 

 

 

 

 

 

 

 

 

 

 

 

 

 

12첼리스트 공연으로 반가운 첼리스트들..

 

 

 

오케스트라의 꽃...천상의 연주...목관 주자들...

 

 

부럽기만 한 금관파트...

 

 

 

플릇 연주자-임마누엘 파후드....옆 연주자와 뭔 얘기를...ㅋㅋ

리사이틀로 너무나 친숙한...홀로 무대에 선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있으니

반가우면서도 조금은 낯선...ㅋㅋ

판타스틱한 연주자가 오케단원이니 이들이 만들어 내는 음악이야~~그대로 천국...

 

 

 

 

 

 

 

 

 

 

 

 

 

 

 

항상 멋진 팀파니 연주자...

 

 

 

 

 

 

 

 

 

 

 

 

 

 

 

 

매혹적인 연주를 들려준 파곳 연주자...

 

  싸인회.....

                                                   Sir SIMON RATTLE  과 STEFAN DOHR (horn주자)

 

래틀의 싸인회가 열리다니....세상에나~

미리 정보를 입수해서 알려준 덕분에 무거운 카메라를 가지고 기꺼이 달려가다.

그것도 단 30분만 한다기에 연주가 끝나고 양껏 커튼콜도 하지 못하고 튀어 나온.... 

 

 

 

 

 

 

 

 

 

 

 

 

 

 

 

 

 

  

 

 

 

 

 

 

 

SIMON RATTLE 의 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