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 2011년)

아쉬케나지&시드니 심포니(예프게니 키신 협연)2011.1.17.목/예술의전당

나베가 2011. 11. 18. 13:14

 

 

프로그램

쇼팽 - 피아노 협주곡 1번

라흐마니노프 - 교향곡 2번

 

 

지휘자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애정과 신뢰가 흐르는 건강한 지휘, 온화한 통솔력의 소유자
1937년 구소련 고르키에서 태어났다. 1955년 쇼팽 콩쿠르 2위, 1956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 1962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공동 우승을 차지한 명피아니스트이다. 1970년부터 지휘에 입문해 1974년 지휘자로 첫 녹음을 실시했다. 입문 당시 필하모니아, 런던 심포니, 로열 콘서트헤보,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작업을 함께 했고 1987년 로열 필 음악 감독에 취임해 1994년까지 직위를 유지했다. 1989년 로열 필을 이끌고 소련에 들어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역사적인 귀향 공연을 가졌다.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체코 필하모닉, NHK 교향악단의 음악감독과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다. 리사이틀 피아니스트로 은퇴를 선언한 이래 현재는 시드니 심포니와 유럽연합 유스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지휘에 중점을 두고 있다. 러시아 레퍼토리와 베토벤, 시벨리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관현악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고 있으며 이 가운데 1980년 로열 콘서트헤보와 함께한 라흐마니노프 교향곡은 지휘자 아쉬케나지의 존재를 세계적으로 알린 작품으로 평가 된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는 1955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국제 쇼팽 콩쿨을 통해 세계 무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후 뛰어난 피아니스트뿐만이 아닌 음악계의 폭넓은 활동으로 놀랄만한 경력을 쌓아왔다. 지난 20년간 지휘는 그의 활동의 큰 부분을 차지해 왔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는 체코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를, 2004~2007년에는 동경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직을 맡았으며 오는 2009년 1월에는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겸 예술 고문직을 맡게 되었다. 시드니를 주기적을 방문해온 아쉬케나지는 이미 오케스트라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들과 작곡, 음악회, 음반 녹음, 세계 투어 등의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와 더불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오랜 관계를 지속해왔으며 2000년에는 명예지휘자로 임명 받았다. 매 시즌 오케스트라와 함께 런던과 그 외 영국을 다니며 공연하는 것 외에 세계투어도 다니고 있으며, 2003년 쾰른, 뉴욕, 비엔나,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시대의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와 2002년 뉴욕 링컨 센터에서 ‘라흐마니노프를 재고하다’ 등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아쉬케나지는 유럽 연합 유스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직을 맡고 있어 매년 투어를 다니며 아이슬란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명예 지휘자이기도 하다.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전 수석 객원 지휘자),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베를린 필하모니(1988~96년 상임 지휘자 겸 음악감독)와도 함께 했으며 다른 여러 세계 일류 오케스트라와도 함께 무대에 올랐다. 2007년 10월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봉을 다시 잡기도 했었다.
지휘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편이지만 피아노 연주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 1999년 그래미상을 받은 쇼스타코비치 ‘전주곡과 푸가’, 라우타바라의 피아노 협주곡 3번(아쉬케나지가 의뢰), ‘라흐마니노프 트랜스크립션즈’를 녹음하며 보기 드물 정도로 포괄적인 본인만의 음반 리스트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가장 최근 음반으로는 바하의 ‘평균율’과 2007년 6월 발매한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이 있다.
바쁜 공연 스케줄 외에도, 폭넓은 클래식 음악 관객층을 확보하기 위해 아쉬케나지는 방송 프로그램에도 참여한다. 많은 이들이 저명한 감독인 크리스토퍼 누펜과 함께 한 프로그램 중 상해에서 촬영된 1979년 작 ‘마오 후의 음악’과 1960년대 러시아를 떠나 1989년이 되어서야 고국을 다시 찾은 아쉬케나지의 모습을 담은 ‘모스크바의 아쉬케나지’를 기억할 것이다. 최근 NHK TV와 교육 프로그램을 몇 개 제작하였는데 여기에는 런던 중심부의 저소득층 주거지역의 아이들과 함께한 1999년 ‘슈퍼티쳐스’와 그의 ‘스탈린 시대의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 프로젝트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포함된다.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

 

 


후세에 전설로 기록될 쇼팽 스페셜리스트
1971년 모스크바 태생으로 2세에 귀로 들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해 6세에 모스크바 그네신 음악학교에 입학해 안나 파블로프나 칸토르를 사사했으며 10세에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해 데뷔했다. 1년 후 첫 솔로 리사이틀을 모스크바에서 가졌고 10대부터 베를린 필(카라얀), 런던 심포니(게르기예프)등과 협연했으며 유럽 각지에서 리사이틀과 투어를 거듭해 전세계의 주요 음악상과 기념상을 수상했다. 아바도, 바렌보임, 줄리니, 레바인, 마젤, 메타 등 저명 지휘자들과 무수한 협연을 했고 소니와 EMI에서 주로 발매한 음반들이 주요 음반상을 석권했다. 특히 해석의 깊이와 시인의 면모,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초절기교로 21세기 피아니즘을 선도하고 있다. 이번 내한공연에 연주할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은 키신에게 남다른 곡이다. 지금도 음악사에 회자되는1984년 키신이 13세의 나이에 남긴 전설적인 모스크바 연주회에서 연주한 곡이 바로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다. 첫사랑과 조국 폴란드에 보내는 열렬한 연애편지 같은 쇼팽 협주곡을 가공할 힘과 유려한 테크닉, 뜨거운 열정으로 연주하는 키신의 연주에 소련 모스크바 청중은 그만 넋을 잃게 됐다. 3악장의 마주르카, 크라코비아크, 에피소트에서 너무도 화려해서 눈이 부실 만큼 빛나는 키신. 그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을 드디어 한국에서 볼 수 있다.

 


피아니스트 에프게니 키신     Pianist Evegeny Kissin

1971년 10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예프게니 키신은 두 살 때 음악을 귀로 듣고 그대로 즉흥적으로 피아노로 연주를 하며 천재적 재능을 일찌감치 드러냈다. 여섯 살에 모스크바 그네신 음악원 부설 영재특수학교에 입학하여 안나 파블로브나 선생의 제자로 입문했다. 그녀는 아직도 키신 인생의 유일한 스승으로 남아 있다. 10열에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K466을 연주하며 콘서트 무대에 데뷔한 키신은 그로부터 1년 뒤 모스크바에서 데뷔 리사이틀 무대를 가졌다.1984년 3월, 열두 살이 되던 해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 드미트리 키타옌코가 지휘하는 모스크바 시립 오케스트라와 함께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을 연주하며 처음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콘서트 실황은 이듬해 멜로디야 레이블에 의해 녹음되어 두 장짜리 LP 앨범으로 출시되었다.

 

그 후 2년 동안 멜로디야는 키신의 모스크바 공연 실황을 모두 녹음, 다섯 장이 넘는 LP 음반에 수록하여 출시했다.

1985년 처음으로 러시아 바깥으로 진출해 동유럽에서 공연을 가진 키신은 이듬해 일본에서 첫 순회공연을 가졌다.

1987년에는 베를린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서유럽 무대에 데뷔했으며, 1988년에는 모스크바 출신의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

 블라디미르 스피바코프와 함께 유럽 투어에 나서는 한편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런던 데뷔 무대를 성공리에 치렀다. 그해 12월, 그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신년 음악회 무대에 섰는데, 이 콘서트는 전 세계에 방영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 공연은 이듬해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에서 한 차례 다시 재연되기도 했다.

매년 신년 음악회는 도이치 그라모폰 사에 의해 녹음 및 녹화되고 있다.

1990년 키신은 런던 BBC 프롬나드 콘서트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으며 같은 해 주빈 메타가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을 연주하며 북미 지역에 데뷔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그는 자신의 스펙터클한

데뷔 리사이틀을 통해 카네기 홀의 1백 번째 시즌 오픈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 실황은 BMG 클래식스를 통해 소개되었다.

키신이 전 세계로부터 받은 각종 음악상과 찬사는 이루 셀 수가 없다. 1986년 키신의 오사카 심포니 홀 공연은 그 해 최고의

 공연으로 꼽혀 1987년 그에게 크리스탈 상을 안겨주었다(이 공연은 키신의 일본 데뷔무대이기도 했다). 1991년에는

이탈리아 시에나의 치지아나 음악원으로부터 올해의 음악인 상을 수상했으며, 1992년 그래미 상 시상식에는 특별 게스트로

초청되었다. 이 당시 그의 연주는 1백만이 넘는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1995년에는 ‘올해의 미국 최연소 기악 연주가’상을 수상했으며, 1997년에는 러시아 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점을

높이 사 <Prestigious Triumph>상을 수여했다.

이 상은 러시아 국가가 부여하는 최고의 문화적 명예 중 하나이며, 그는 이 상을 수상한 최연소 수상자가 되었다.

 

그는 BBC 프롬스에서 리사이틀 초대를 받은 최초의 피아니스트였으며(1997) 또한 2000년도 시즌에는 프롬스 오프닝 콘서트에 최초로 협주를 위한 솔리스트로 초청되었다. 2001년 5월 키신은 맨해튼 음악원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 12월에는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최고의 음악상 중 하나인 쇼스타코비치 상을 수상했다.

2005년 6월에는 런던 왕립 음악원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키신은 레코딩 분야에서도 각종 상을 휩쓸었다. 그 중에는 네덜란드의 ‘에디슨 클라세이크’ 상을 비롯해 프랑스의 ‘디아파송 도르’ 및 ‘그랑프리 라 누벨 아카데미 뒤 디스크’등 세계 각국의 음악 잡지들이 수여하는 음악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스크랴빈, 메트너, 스트라빈스키 녹음한 음반은 2006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그에게 최고 기악 솔리스트 상을 안겨 주었다. 2002년에는 에코 클라식으로부터 올해의 솔로이스트로 선정되기도 했다.?그의 첫 스튜디오 레코딩은 1998년 RCA 레드 씰(Red Seal)로 발매되었는데,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에튀드-타블로 Op.39가 수록되어 있다.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
영연방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한 호주 제1의 오케스트라
시드니 심포니(Sydney Symphony Orchestra)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오케스트라로 1934년 결성되었다. 그 해 유명한 아일랜드 지휘자 해밀튼 하티가 호주를 방문해 시드니 심포니 창단을 요청했고 1936년에는 단원수 45명, 연간 70회 공연을 소화하는 악단이 되었다. 2차 대전 종전 후 시드니 시의회와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간 합의로 시드니시를 대표하는 공식 오케스트라로 인정받아 1946년 1월 82명 단원 편성으로 공식 창단되었다. 지휘자 유진 굿센스가 1947년 정지휘자로 악단에 합류했고 굿센스는 야외 콘서트와 현대음악의 호주 초연을 실시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1948년 “시드니에는 오페라하우스가 절실하다”고 한 것도 시드니 심포니 음악감독 굿센스의 입에서 나왔다. 굿센스의 뒤를 이어 딕슨, 아츠몬 등이 음악감독을 맡았고 오테로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헤이그를 비롯해 1974년 2개월에 걸친 유럽 투어로 악단의 명성을 유럽에 알렸으며 1975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로 본거지를 옮겼다. 1982년 찰스 메케라스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는 처음 음악감독이 되었고 1985년 병고로 메케라스가 자리를 비우자 스튜어트 첼렌다가 대체 음악감독이 되어 1991년까지 음악감독을 이었다. 1991년 사망한 첼렌다의 지휘봉이 여전히 시드니 심포니에 보관 중이다. 1996년과 2006년 일본 공연을 가졌으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의 음악을 연주했다. 현재는 연간 150여 회의 연주에 관중 35만 명이 관람하고 있으며 2009년부터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수석지휘자와 예술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라흐마니노프 / 교향곡 2번 E단조, Op.27
Rachmaninov / Symphony No. 2 in E minor, Op. 27

Ivan Fischer, cond.
Budapest Festival Orchestra


1. Largo-Allegro Moderato (18:22)


2. Allegro Molto (10:12)


3. Adagio (14:02)


4. Allegro Vivace (14:13)


라흐마니노프가 평생에 걸쳐 남긴 3곡의 교향곡은 1895년에 작곡되어 글라주노프의 지휘로 1897년 초연된 제1번 D단조 Op.13을 시작으로 2번 교향곡은 1907년에 작곡되고 이듬해인 1908년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됩니다.
이 곡은 장대한 스케일의 관현악곡으로 마지막 부분에서 교향곡 1번과 같은 종결부의 위협감이 사라지고 밝고 경쾌한 마지막 악장의 주요 테마로 장식을 하며 끝이납니다.
그는 피아노 곡들을 가리켜 스스로 피아노 교향곡 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만큼 피아노 음악을 사랑했던 훌륭한 연주자요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교향곡들은 피아노 작품들에 비해 대중적인 인기는 많이 얻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이라면 제2번을 손꼽으며 그중 3악장 아다지오가 최고의 사랑을 받는 악장입니다.
강렬하면서도 러시아적 센티멘탈리즘이 꿈틀거리는 교향곡 제2번 3악장의 아다지오는 연주시간 14분을 약간 넘으며 마치 클라이막스 와도 같은 전율이 지나고나서 잠시 쉬는듯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또다시 3악장의 처음 부분과 같은 낭만적 선율이 다시 시작되면서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꿈결같이 아름다운 감흥을 새롭게 일으킵니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 op. 11

 

1. Allegro maestoso - 전악장 연주

2. Romance (Larghetto)

3. Rondo (Vivace)

Krystian Zimerman, piano

스무 살의 쇼팽이 살던 폴란드 바르샤바는 독립을 위한 민중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혼란스러움을 벗어나고자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그는 가족과 마지막 휴가를 보낸 뒤 1830년 10월 11일 폴란드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열었고, 바로 이 자리에서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를 초연했다. 환송식이 열린 자리에서, 폴란드의 흙이 담긴 은잔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11월 2일, 쇼팽은 “죽기 위해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라는 느낌을 뒤로 한 채 다시는 밟아보지 못할 폴란드의 땅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1829년 8월 빈에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마치고 바르샤바로 돌아온 쇼팽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바르샤바 음악원 졸업과 빈에서의 성공은 쇼팽이 본격적으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의 미래를 계획하고자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자신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렵 열 아홉 살의 쇼팽은 처음으로 여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쇼팽의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끝이 났지만, 처음 느끼는 강렬한 기분과 뜨거운 가슴이 고스란히 음악으로 녹아들어 바르샤바 시대의 절정을 장식하는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폴란드 '쇼팽의 집'정원에 있는 쇼팽 조각상. 쇼팽은 조국에서의 마지막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초연했다.

 

  그의 친한 친구인 티투스 보이체코프스키(Tytus Woyciechowski)에게 1829년 10월 3일에 쓴 편지에 [피아노 협주곡 2번]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숭배할 수 있는 이상형을 찾았다네. 매일 밤 그녀 꿈을 꿀 정도야. 그러나 그녀를 처음 본 지 6개월이 지나도록 나는 한 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있네. 협주곡 f단조의 느린 악장을 작곡하면서 그녀를 떠올리곤 하지.”

  그 상대는 폴란드 음악원의 학생이었던 성악가 콘스탄치아 글라드코프스카(Konstancja Gladkowska)였다. 그녀는 자신을 짝사랑한 쇼팽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고, 쇼팽이 세상을 뜨고 난 뒤 모리츠 카라소프스키(Moriz Karasowski)가 쓴 쇼팽 전기를 접하고서야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곧 잊어버리게 된 이 풋사랑에 대한 감정이 [피아노 협주곡 2번] f단조의 라르게토 악장과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의 로망스 악장에 충분히 표현되어 있음을 쇼팽 생전에 알고 있었던 사람은 오직 친구 티투스 보이체호프스키뿐이었다. 그의 소심한 마음 때문인지 이 [2번 협주곡]은 글라드코프스카에게 헌정되지 않고, 몇 해 뒤 파리 시절 친교를 맺은 미모의 백작 부인 델핀 포토카에게 헌정되었다는 아이러니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은 낭만주의 협주곡 양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작품으로 평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불균형이 단점으로 오랫동안 지적받아 왔다. 쇼팽 스스로도 오케스트라 반주 없이 솔로 파트만 연주했던 것을 미루어본다면, 그가 오케스트라 부분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파리 시절에도 주위에서 폴란드 고유의 양식을 대변할 만한 오페라를 작곡하라고 부추겼지만, 자신의 미숙한 관현악 기법을 알고 있었던 쇼팽은 솔로 피아노를 위한 작품에 더욱 집착했다. 그러나 이를 안타깝게 여겼던 많은 작곡가들이 그 관현악 파트를 보강하고자 했다. 그 대표적인 개정판으로 쇼팽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 칼 타우지히(Karl Tausig)가 교정한 [1번 협주곡]과 카를 클린트보르트(Karl Klindworth)의 [2번 협주곡]을 꼽을 수 있다.

  쇼팽은 피아니스트로서 단 30여 회의 대중 연주회를 가졌다. 이 가운데 절반 정도는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특히 1번을 자주 연주했다. 1830년 11월 폴란드를 떠난 그는 빈, 브레슬라우, 뮌헨, 파리를 경유하며 개최한 연주회에서 [1번 협주곡]을 연주했지만 그 이전에 작곡한 [2번 협주곡]만큼 뜨거운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고 한다. 1832년 2월에 가진 정식 파리 데뷔 연주회에서야 비로소 [1번 협주곡]은 그가 기대했던 수준의 찬사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이후 성공적인 평가를 받은 [1번 협주곡]은 파리에서의 쇼팽의 위상을 확고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2번 협주곡]은 1830년 3월 17일 바르샤바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이 공연은 쇼팽의 바르샤바 정식 데뷔 무대이기도 했다. 당시 관습에 따라 1악장 연주를 마치고 난 뒤 호른과 현악기를 위한 즉흥곡을 한 곡 연주하고 2, 3악장을 연주했다. 초연 당시의 여러 신문들은 이 협주곡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쇼팽의 뛰어난 연주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특히 당시 비평 중에 오케스트라 튜티 부분이 피아노와 잘 어우러지며 협주곡의 정신을 완벽하게 전달했다는 비평이 이채롭다. 현재 작품번호는 제1번 e단조가 Op.11로 앞서 있지만, 사실은 제2번 f단조 Op.21이 한 해 먼저 작곡되었다. 이렇게 작곡 순서와 출판번호가 뒤바뀐 이유는 쇼팽이 먼저 작곡한 2번에 비해 나중에 쓴 1번을 더 만족스러워했기 때문에 이를 먼저 출판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쇼팽이 파리에 머물던 시절에 사용하던 피아노. 쇼팽은 자신의 연주회에서 [1번 협주곡]을 자주 연주했다.

 

 

   

 

 

피아노협주곡 1번을 작곡하면서 쇼팽이 친구에게 썼던 편지

이 곡을 작곡할 때쯤에 십대의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 성악과 여학생인 콘스탄쩨 글라드코브스카(Konstanze Gladkowska)를 남몰래 사모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쇼팽은 섬세한 내면을 지닌 내성적인 청년이었고, 끝내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였다.

고민 끝에 그는 차라리 그녀 곁을 영원히 떠나리라 마음먹고 20세가 되던 1830년에 세계 여행길을 오르며 10월 11일 고별연주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작곡하면서 그가 친구에게 썼던 편지에는 그의 괴로웠던 심사가 솔직하게 드러나고 있다.

"새 협주곡의 아다지오악장은 E-단조일세.

이 악장에서 어떤 힘이 담겨있는 위력을 보여주려고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조용하고 멜랑콜리적인 로망스를 나타내려고 했네.

이 로망스는 수많은 달콤한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장소를 부드러운 눈길로 자아내는 것 같이 표현하며,

아름다운 달빛 찬란한 어느 봄날 밤에 꿈을 꾸듯이 나타내야만 하네.

그렇기 때문에 반주도 역시 약음기로 연주한다네."

 "나는 이상형을 만났어, 그러나 아무런 감정도 표현하지 않은 채 벌써 6개월전부터 내 마음을 주고 있지. 나는 그녀에 대한 꿈을 꾸지.

그리고 그녀에 대한 인상속에서 나의 새 협주곡의 아다지오 악장이 탄생했다네.

... 한 사람을 압박하고 있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야.

내가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지 자네는 알고 있을 것이야.

그럴 때면 나는, 자네에게 가끔씩 얘기하기도 했지만,

피아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곤 하지."

     

F.Chopin 피아노 협주곡 제1번 Op.11-2 Romance, Larghetto 

연주자 :  에프게니 키신

 

 

 

 

 

아쉬케나지의 아기같은 미소는 그 순수함이 백만불짜리다...

 

 

 

 

 

 

 

 

 

 

 

 

 

 

 

Evegeny Kissin 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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