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PREVIEW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음악의 휴머니스트들,
다니엘 바렌보임과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
유정우(의사, 음악 칼럼니스트)
괴테가 1819년, 칠순 가까운 나이에 오리엔트 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서동시집(West-Eastern Divan: 서동이란 동양의 서쪽지방, 즉 중동을 가리킨다.)>은 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하피스의 시세계에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노시인의 이국취향에 의한 결과물만은 아니었다. 19세기 유럽 사회의 오리엔트 세계에 대한 관심은 그것이 과거 터키의 침략에 따른 공포의 기억에 기인한 과장된 피해의식의 발로이거나 새로운 식민지의 개척에 따른 제국주의적 우월의식이거나 어느 쪽이든 유럽중심적 시각이었던 반면에 식민 정책과 같은 정치, 경제적 관심에서 멀었던 괴테의 오리엔트 연구는 좀더 자유로운 시각을 보이고 있다. 괴테는 동,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을 극복하고 이국문화에 대한 호의적 태도를 보였다. 1935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카이로에서 성장한 후 미국에서 교육 받고 콜럼비아대 교수로 활동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1935~2003)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영문학자로 20세기 가장 뛰어난 문명 비평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사이드는 그의 대표적 저서인 <오리엔탈리즘(1981)>에서 괴테의 서동시집을 가리켜 ‘유럽인이 오리엔트를 이해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수용하려 노력한 첫 시도’라고 평가하고 있다.
신동 피아니스트에서 어느 새 거장 지휘자로 자리매김한 다니엘 바렌보임은 지난 1990년대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의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거침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바렌보임은 1967년 2차 중동 전쟁 당시에는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조국으로 달려가 연주를 하기도 했던 애국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는 약자로서 핍박 받았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강자의 입장이 되어 피지배 민족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탄압하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면서 조국을 서슴없이 비판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 바렌보임은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만남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만남이었다.
바렌보임과 사이드는 1992년 처음 만나 바로 친구가 될 정도로 의기 투합하였으며 이들의 우정은 2003년 사이드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98년 두 사람은 늘 생각하던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한 문화 운동의 첫 단추로 “웨스트이스턴 디반 프로젝트”를 구상하였고, 그 첫 번째 워크샵이 1999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개최되었다. 이 때 탄생된 것이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집트, 스페인 등에서 선발된 젊은 음악가들로 구성된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이다. 사이드가 칭송해 마지 않았던 괴테의 “서동 시집”에서 이름을 딴 오케스트라가 탄생한 것이다.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는 매년 여름, 유럽과 미국에서 순회 연주를 하며 높은 예술적 평가를 받게 된다. 2005년 8월 21일, 그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커리어에서 가장 의미 있는 연주회를 열게 된다. 바로 아랍과 이스라엘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화약고, 요르단강 서안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중심도시인 라말라에서 연주를 하게 된 것이다. 사이드의 사후 그의 유지를 받들어 바렌보임이 실현시킨 이 콘서트는 연주가들의 안전조차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도전이었지만 바렌보임의 의지와 젊은 예술가들의 용기로 결국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바렌보임은 이 연주회를 앞두고 단원들에게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지역인만큼 이 연주회 참가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라말라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으나 단원들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라말라로 들어가 연주회에 참여했다.
필자와 친분이 잇는 연주가 중 마침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있어 그 때의 심정을 직접 들어 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이집트 출신의 오보이스트 모하메드 살레(Mohamed Saleh)다. 2006년 봄 베를린에서 한 콘서트가 끝난 뒤 필자는 모하메드를 만나게 되었다. 근 1년 만의 재회였다. 라말라 콘서트의 DVD를 본 감상을 말하며 “라말라로 들어가는 일에는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아. 솔직히 두렵지는 않았어?”라는 필자의 우문에 모하메드는 “인간은 언젠가는 죽게 돼. 다만 죽음에는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이 있다고 생각해. 라말라에서 연주를 하다가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분명 좋은 죽음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라는 가슴 뭉클한 현답으로 가르침을 주었다.
라말라 콘서트에서 본 프로그램이 끝나고 바렌보임은 청중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 오케스트라를 가리켜 ‘평화를 위한 오케스트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한 마디만 하죠. 우리의 음악이 지금 당장 이 땅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여러분도 압니다. 오늘 우리의 연주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 그것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바렌보임은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9번째 곡인 “님로드”를 앙코르로 들려준다. 님로드라는 별명을 가진 엘가의 친구의 품성을 묘사한 곡이기에 한 없이 서정적인 곡이긴 하지만, 고대 바빌론의 왕 님로드는 바로 바벨탑을 건설한 것으로 알려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인류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게 됨으로써 ‘소통’의 문제가 생기게 된 근원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이기도 하기에 곡이 끝난 뒤 듣는 이의 가슴에 남겨지는 울림은 자못 남다르다.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의 단원들 역시 각자의 조국에 대한 애정이 있고 서로간에 의견이 맞지 않는 일도 당연히 있다. 심지어 단원들 중에는 그들의 아버지들이 실제로 중동 전쟁 당시 서로 적군으로서 총부리를 겨누었던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기에 앞서 먼저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인다. 서로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말에 귀를 기울이고, 결국에는 서로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애호가로서 필자는 “과연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나?”라고 가끔씩 스스로에게 반문해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필자에게 하나의 답을 제시해 주는 것이 바로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의 존재이다. 라말라 콘서트는 예술이 인류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를 통해 동시대에서 어떤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귀한 증거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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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2번 D장조 Op.36 베토벤이 귀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1798년 무렵부터다. 여기저기서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베토벤은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머물면서 요양했다. 그는 이곳에서 10월 6일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썼다. 베토벤이 동생들에게 보내려고 쓴 유서로 일반적인 유서와는 달리 죽기 직전에 쓴 것이 아니라 베토벤의 비통한 심정과 분노에 찬 마음을 절절하게 밝히는 글이었다. 이 이전인 1800년 무렵부터 교향곡 2번 1악장의 서주와 주요부를 스케치해놓고 있던 베토벤은 이 곡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완성했거나, 최소한 빈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완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음악가로서는 가장 치명적인 귓병. 그로 인해 고뇌하던 시기에 작곡된 곡이다. 이로 인한 비극적인 어두움이 1악장의 서주나 2악장의 일부에서 느껴진다. 그러나 곡 전체를 봤을 때 따스한 온기가 자리하고 있고 희망적인 성격이 지배적이다. ‘암흑에서 광명으로’ 혹은 ‘고뇌를 극복한 후의 기쁨’이라는, 베토벤의 트레이드마크를 찾아볼 수 있다. 또 다른 맥락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 곡의 스케치를 시작할 무렵 베토벤은 경제적으로 매우 순조로운 상태였다. 1800년 이후 카를 리히노프스키 후작으로부터 연금을 받고 있었으며 악보 출판 전망도 좋은 상태였다. 게다가 하일리겐슈타트는 조용하고 마음에 드는 마을로 베토벤이 좋아하던 자연의 아름다움이 넘치는 곳이었다. 그러한 곳에서 베토벤은 요양하며 귀를 치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아래 베토벤은 격렬한 곡을 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교향곡과 나란히, 혹은 전 후에 작곡된 (교향곡 아닌) 작품들은 어둡고 격정적이기보다는 밝은 분위기의 장조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 베토벤의 이성관계도 알아둘 만하다. 당시 베토벤 주변의 여인으로는 먼저 브룬스비크 집안의 딸로 동생 요제피네와 함께 1799년 5월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된 테레제를 들 수 있다, 그리고 테레제의 사촌이며 1800년 베토벤의 제자로서 줄리에타 귀차르디가 있었다. 요제피네는 곧 다임 백작과 결혼해 유부녀가 됐기 때문에 이 곡과 연관된 문제의 여인 후보에서는 탈락이다. 줄리에타는 피아노 소나타 ‘월광’을 헌정받은 여인이다. 어쨌든 1799년부터 베토벤의 주변에는 화사한 연애의 냄새가 났다. 그러므로 이런 화사한 감정이 이 시기의 작품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이따금 격렬한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32세의 젊은 나이였기에 예술적 열망과 더불어 여인에 대한 관능적인 욕망도 불타올랐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삶에 대한 의욕은 그의 머리로 파고들었다. '불행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에 열중하는 것'이란 경구를 새기며 베토벤은 작곡에 열성을 다하는 것으로 자신의 불행에 맞섰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양식 면에서 놀랄만한 진보를 성취한다. 연달아 작곡한 교향곡 1번과 2번 사이에도 양식적인 변화가 충분히 나타난다. 외관적으로도 1악장의 서주가 매우 장대해졌다. 3악장에서 미뉴에트 대신 스케르초를 사용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더구나 서주는 교향곡 1번보다 훨씬 깊은 내용과 풍부한 감정을 보여주며 소재면에서도 이어지는 주요부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게 된다. 교향곡에서 스케르초는 여기서 처음 사용하지만 다른 장르, 피아노 소나타나 실내악곡에서는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아직 훗날에 볼 수 있는 교향곡에서의 스케르초의 특성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지는 않지만 악기 사용법이 가볍고 묘한 변화를 보여주며 셈여림의 급작스러운 변환, 조성 변화, 쉼표의 활용 등 일찍이 스케르초적인 효과를 내는데 성공한다. 악기편성은 교향곡 1번과 완전히 같지만 용법에서는 목관악기, 특히 클라리넷의 활약이 눈에 띈다. 낭만적인 도취감이나 따스한 감정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작품은 리히노프스키 후작에게 헌정됐으며, 1803년 4월 5일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초연됐다.
1악장 아다지오 몰토 - 알레그로 콘 브리오 느린 템포의 장엄한 서주에는 서정적인 윤기가 흐르며 극적인 힘도 존재한다. 주부는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대담하면서 명랑하며 신선한 맛이 풍기는 경쾌한 악장이다. 코다는 악장 전체의 클라이맥스를 구축한다.
2악장 라르게토 절묘한 아름다움을 지난 악장으로 특히 그 선율은 빈의 춤곡과 관련 있다. 제1주제는 대위법적인 풍부한 울림을 수반하며 먼저 현이 풍부한 정서를 지니고 노래한다. 이것이 목관으로 옮겨져 발전하며 경과부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제 2주제를 바이올린이 애정어린 선율로 연주한다. 발전부는 제 1주제를 주로 취급하고 있으며 격렬함을 보여준다. 재현부는 두 개의 주제를 차례로 보여주지만 음색에 대위법적 처리 면에서 제시부와는 약간 다르다. 부드러운 감촉에 낭만적인 서정미가 풍긴다.
3악장 스케르초 알레그로 기존의 미뉴에트와는 분명 다른, 스케르초의 해학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분방한 청년 베토벤의 독창성을 보여준다. 중간부에 해당하는 트리오는 교향곡 1번의 미뉴에트처럼 기본 조성이 D장조이다. 목관에서 부드럽게 시작하며 잠시 후 현의 격렬한 움직임으로 옮겨간다.
4악장 알레그로 몰토 소나타 형식인데, 주제가 두드러지며 자주 모습을 드러내며 론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극도로 예리한 제1주제로 시작하며 잠시 후 첼로에 부드러운 선율이 나타난다. 그리고 다시 힘을 증대시켜 가면서 그 클라이맥스에서 제시부가 끝나도 곡은 발전부로 들어간다. 이 발전부는 제1주제를 이용하여 유머러스한 효과와 극적이고 강력한 힘을 드러낸다. 그리고 제 1주제가 본래의 모습대로 등장하여 재현부로 들어간다. 재현부는 제시부처럼 진행하면서 화려하고 정열적으로 곡이 마무리 된다. 극적인 환희에 차 있으며 유머와 환희, 행복감에 넘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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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_교향곡 제9번 D단조 Op. 125 ‘합창’ BEETHOVEN_Symphony No. 9 in D minor Op. 125 ‘Choral’ 베토벤이 교향곡 9번을 썼을 때 그의 나이는 쉰 둘이었다. 교향곡 8번을 쓴지 10년 뒤. 원숙기의 베토벤이 작곡한 교향곡 9번은 3번 ‘영웅’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듯이 혁명적이었다. 이 ‘합창’을 들으면 마치 바그너나 말러가 활약하던 19세기 후반 작품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이 곡을 듣다 보면 베토벤을 낭만주의자로 여기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이 곡은 19세기 말보다 약 170년 전인 1822년 작품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향기가 가시지 않았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고전의 시대에 낭만주의를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베토벤의 힘이었다. 베토벤의 모든 음악지식이 이 70분 내외 길이의 작품 속에 총집결해 있다. 비극과 희극, 서정성, 춤에다가 노래도 들어 있다. 오라토리오와 오페라의 특징도 두루 갖추고 있다. 첫 악장은 마치 비극이 시작되는 듯 비장하다. 공허한 시작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며, 코다는 충실하고 장대하다. 악마의 춤 같은 스케르초는 통상적인 3악장이 아니라 2악장에 위치해 있다. 소나타 형식과 푸가토를 혼용하는 대규모의 구성법이 돋보인다. 고전적인 멋을 낸 느린 3악장은 두 개의 주제를 지닌 변주곡이면서 자유롭게 정돈된다. 이어서 4악장의 합창은 승리의 기쁨으로 1악장의 절망과 확연한 대비가 된다. 앞의 3개 악장은 이 4악장의 전제로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의 3개 악장을 총괄하는 새로운 방법이 음악적으로 내용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형식도 다양하다. 레치타티보,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단순한 주제, 성가, 코믹한 행진곡, 압도적인 피날레 등등. 베토벤 교향곡 9번은 그야말로 인간의 감정과 이상이 절묘하게 결합돼 나타난, 클래식 곡 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일컬어질 만하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이 ‘합창’이라 불리는 까닭은 마지막 4악장에 실러의 송가 ‘환희에 부쳐’ 가사에 따른 합창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실러의 송가 전체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 사용했다. 프랑스 혁명 직전 1785년 씌어진 ‘환희에 부쳐’는 봉건적 정치 형태와 전제적인 군주제로 괴로워하던 청년 실러는 인류애와 단결로 인간 해방을 기원하는 이상을 노래했다. 원래 ‘자유에 부쳐’였던 시는 당국의 검열 때문에 ‘환희’로 고쳐졌다. 베토벤이 ‘환희의 송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 본 대학에서 강의하던 시인 루드비히 피체니히의 영향을 들기도 하며, 1790년 베토벤이 작곡한 ‘레오폴트 2세 대관식 칸타타’에서 4악장에 ‘엎드려라 수백만의 사람들이여’가 등장하는 것도 교향곡 9번과 유사성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1824년 5월 7일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서곡과 ‘장엄미사’ 와 같은 프로그램으로 빈의 케른트나토어 궁정극장에서 초연됐다. 타이에르 포르베스라는 사람이 당시 초연을 기록한 글에 초연 당시 장면이 나와 있다. “... 드디어 4악장의 피날레가 끝나자 수많은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청중들이 큰 소리로 외치면서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베토벤은 그 장면을 보기 위해 돌아서지 않고 있었다. 환호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독창자 가운데 알토가 그의 옷자락을 끌어서 박수를 치고 모자를 던지며 손수건을 흔드는 청중을 보게 했다. 그제서야 그는 청중들에게 돌아서서 인사를 했다...” 베토벤을 다룬 영화 ‘불멸의 연인’에도 등장하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베토벤은 긴 기악적 교향곡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성악을 도입할 경우에 생길 기악과 성악의 부조화에대한 우려로 상당히 고심했다고 한다.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는 끝악장에 특이한 형식을 선택했다. 짧고 소란스러운 서주에 이어서 앞 악장들의 주제를 기악적으로 훑어보고 일단 거절한다. 그리고 환희의 주제를 넌지시 암시한 다음에 이를 받아들인다. 네 연의 주제를 관현악으로 제시하고 더 소란스러운 불협화음의 시작 마디들 ‘친구들이여, 이러한 곡조를 그만 두고 좀더 즐겁고 기쁜 노래를 부릅시다’라는 바리톤의 레티타티보가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 카핑베토벤 중 - Symphony No. 9 in D minor 'Choral', Op. 125 4악장 중 일부
| 베토벤이 후대의 교향곡에 끼친 영향은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표준적인 고전형식에 의거한 절대음악의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적인 형식을 벗어나는 여러 가지 형식의 표제음악이다. 혁신적인 방향인 표제음악을 다시 둘로 나누면, 하나는 6번 ‘전원’과 같은 표현적인 표제음악, 다른 하나는 9번 ‘합창’과 같은 교향곡에 사람의 목소리를 도입해 텍스트를 표현하는 것 등이다. 이 전통은 나중에 성악이 딸린 말러의 교향곡 2번, 3번, 4번, 8번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장엄미사’에서 내적인 평안을 확신한 베토벤은 교향곡 9번을 통해 비로소 외적인 평화에 대한 외침을 마무리짓고 있다. ‘암흑에서 광명으로’ ‘고뇌를 통한 환희’와 같은 베토벤의 모토는 교향곡 9번의 작곡 과정에서도, 그리고 곡 자체에서 드러나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베토벤의 위대한, 총체적인 걸작으로 지구를 넘어 우주를 향하는 가치를 지닌 교향곡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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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공연의 최고였던 합창단 (국립합창단,고양시립합창단,모테트합창단) 과 솔리스트(조수미,이아경,박지민,함석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