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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가 연주한 영국 음악>

나베가 2008. 11. 28. 03:57

<글렌 굴드가 연주한 영국 음악>
질문자: 김남숙

글렌 굴드의 음반은 대다수가 바흐의 작품이지만,
그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음반이 바로
영국 작곡가인 윌리엄 버드와 오를란도 기번스의 작품을 녹음한
음반인데요. 바흐 음반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음반이
궁금하다고 질문 주신 분은 청취자 김남숙 님입니다.
김남숙 님은 예전에 음악 잡지를 통해서 이 음반을 알게 되었는데,
보다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다고 홈페이지에 글을 남겨 주셨어요.
 
먼저 궁금하다고 하신 음반은 윌리엄 버드와 오를란도 기번스의
버지널을 위한 춤곡들이 수록된 것으로,
1967년부터 1971년 사이에 이 곡들을 녹음했다고 하는데요.
1970년에 소니에서 발매한 음반에는 버드와 기번스의 작품
여덟 곡이 수록되어 있고,
‘글렌 굴드 에디션 시리즈’의 다섯 번째로 발매된 음반에는
버드와 기번스의 곡 외에 네덜란드 작곡가 스벨링크의 ‘판타지아’가 추가 되어서
모두 아홉 곡이 수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윌리엄 버드와 오를란도 기번스는 모두 셰익스피어와 동시대 인물로,
16세기 영국에서 활동한 음악가들이었는데요.
두 사람 모두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소형 건반 악기인
버지널을 위한 음악의 대가들이었죠.
이들은 섬세하고 예민하면서 경쾌한 버지널의 음색을 잘 살린
파반느와 갈리아드 같은 춤곡을 주로 작곡했는데요.
느리고 우아한 파반느와 경쾌하고 발랄한 갈리아드는
당시에 짝을 이뤄서 연주되는 인기있는 조합이었습니다.

버지널을 위한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한다는 것은
좀처럼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이고 신선한 시도였는데요.
굴드는 버지널만의 독특한 음색과 뉘앙스를
현대 악기인 피아노를 통해서도 성공적으로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음반을 들어보면 평소에 듣던
피아노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느낌이 전해지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연주 하는 동안 흥얼거리거나 중얼거림을 반복했던
굴드의 목소리와 함께 전해지는 색다른 느낌의 버지널 음악,
직접 들어볼까요.


좋고 싫음이 분명했던 굴드는 평소 버드와 기번스를
좋아하는 작곡가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었다고 하는데요.
굴드의 이러한 관심은 한 순간이 아니라 오랫 동안 이어져 온 것으로,
음반을 녹음하기 훨씬 전인 데뷔 초기에는
연주 무대에서 버드와 기번스의 작품을 자주 선보였다고 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굴드와 르네상스 시대의 영국 작곡가는
잘 안 어울리는 조합 같기도 하지만, 굴드의 음악 세계를
찬찬히 살펴보면, 둘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굴드가 평생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전념하면서
관심을 가졌던 바로크 시대의 대위법이나 주제와 변주 기법은
거슬러 올라가면 그 뿌리가 르네상스 시대의 춤곡에 맞닿아있습니다.
특히 버드와 기번스의 춤곡은 그라운드 양식에 바탕을 둔 것으로,
그라운드는 네 마디에서 여덟 마디의 되풀이 되는 베이스 성부와
그 위를 장식하는 선율의 변주가 이어지는 양식이었는데요.

바로크 시대 바소 콘티누오의 영국식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기법을 사용한 춤곡에, 글렌 굴드가 관심을 가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죠.
더구나 영국의 독특한 정서를 품고 있는 버드와 기번스의 작품에
특별한 매력을 느낀 굴드는 버지널을 피아노로 바꾸어
르네상스 음악의 화려한 부활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서른네 살 이후로 레코딩 작업에만 전념하면서,
다양한 음반을 남겼던 굴드의 디스코그래피를 잘 찾아보면,
이 음반 외에도,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 등
후기 바로크 시대에 활약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녹음한 음반도
함께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런 음반들은 굴드의 다른 음반에 비해
구하기는 조금 어려운 희귀 음반이지만,
굴드의 폭넓은 연주 영역과, 숨겨진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의미있는 음반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