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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마에스트로들 /정준호 | 칼럼니스트

나베가 2008. 4. 5. 15:13
젊은 마에스트로들
  Special Theme of CREDIA
  정준호칼럼니스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스무 살 되던 해에 뮌헨 필하모닉(당시 카임 오케스트라)을 이끌고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을 지휘했다.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를 지휘한 1929년에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 사이먼 래틀은 열아홉 되던 1974년에 본머스 심포니의 부지휘자가 되었다. 비교적 늦은 클라우디오 아바도 역시 스물여덟에는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데뷔 무대를 치른다. 물론 그도 앞서 쿠세비츠키 콩쿠르와 미트로풀로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였다. 전현직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장이 첫 걸음을 떼던 모습이다. 지휘는 과연 노장의 전유물일까? ‘젊은 마에스트로’라는 호들갑스러운 말이 굳이 필요할까?
음악을 창작하는 작곡가와 그것을 해석하는 지휘자의 역할이 분화된 19세기 말 이후, 그리고 레코딩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등장한 이후 지휘자의 존재감은 종종 작곡가의 위상을 넘어선다. 머리가 허연 노대가가 눈을 지그시 감고 또는 발을 굴러가며 악단을 독려하고 통제하는 모습은 음악과 그 해석에 마치 연륜이 필수적인 듯한 인식을 무의식중에 주입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지휘의 대가들뿐만 아니라 작곡가들조차 젊은 날에 이미 삶의 무게가 깃든 걸작을 쏟아낸 경우가 허다하다. 모차르트가 서른다섯에 세상을 떠났고, 슈베르트가 '겨울 나그네'를 작곡한 것도 겨우 서른 살의 일이었으며, 브람스도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깊이 있는 '독일 레퀴엠'을 30대에 작곡했다. 바흐가 20대에 작곡한 칸타타가 원숙기의 작품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음악의 세계에서 나이테는 숫자에 불과하다.


21세기 초, 향후 금세기 전반을 책임질 젊은 거장들의 면면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이미 지난 세기 끝자락에서부터 자신의 이력을 시작했다. 그 선두주자는 역시 다니엘 하딩이다. 영국 출신의 하딩은 1975년생이다. 그가 사이먼 래틀의 부지휘자로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을 처음 지휘한 것이 1994년 열아홉 살 때의 일이다. 이제 서른을 넘겼지만 아직도 앳된 미소년 같은 얼굴이기에 '신동(神童)'이라는 이미지를 채 벗지 못했다.
하딩은 래틀의 발탁으로 지휘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1996년부터는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보조하며, 그해 베를린 페스티벌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을 처음 지휘한다. 또한 1997~2003년 스웨덴의 노르쾨핑 오케스트라의 수석 부지휘자를 역임했으며, 역시 같은 기간에 브레멘 도이치 카머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2003년 아바도는 자신이 조직한 말러 유스 오케스트라의 성인이 된 단원들을 모아 조직한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에 하딩을 앉힌다. 그는 올 시즌부터 런던 심포니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임명됐고, 2007년 1월부터는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한다. 앞으로 그가 어느 메이저 악단의 감독으로 발표가 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준비와 평가가 끝난 마에스트로다.


그와 더불어 요즘 가장 주가를 올리고 있는 것은 베네수엘라 태생의 구스타보 두다멜이다. 두다멜은 이제 겨우 나이 스물일곱이며, 그가 이끄는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교향악단은 10대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다. 놀라운 것은 이들의 데뷔 음반이 '옐로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정통 레퍼토리인 베토벤의 교향곡 5번과 7번을 첫 프로그램으로 선택했다.
남미의 베네수엘라가 석유로 국부를 쌓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국민 대부분이 빈민 출신이었기에 어린이들은 일찍부터 폭력과 마약 등에 노출됐다. 그러나 막대한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베네수엘라 음악 교육 재단이 운영되면서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게 되었다. 두다멜과 그의 악단 역시 제3세계의 사회 교육 프로그램 중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이 교육 제도의 수혜자다.
두다멜은 어릴 때 손에 쥐어진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숙명처럼 생각했고, 장난감 병정들을 세워놓고 이 곡을 지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놀이였다. 이런 그는 2004년 밤베르크에서 열린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젊고 실력 있다고 해서 모두 도이치 그라모폰과 같은 음반사에서 레코딩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뭔가 특별한 것이 필요했다.
음반을 듣는 순간 그 뭔가의 정체는 드러난다. 교향곡 5번 운명을 이토록 혈기왕성하게 해석한 예가 근래에 있었던가? 포효하는 듯한 사운드를 만들어낸 두다멜과 그의 악단에게 전통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기존에 그려진 안전한 항로를 가는 대신 남들이 가보지 못한 길을 처음으로 가는 오지 탐험가와 같이 연주한다. 춤의 향연인 교향곡 7번에 가면 심장 박동은 더욱 빨라진다. 부분적으로 앙상블이 일그러지는 부분도 있지만, 이는 오히려 일부러 의도한 바와 같이 자연스럽게 처리된다. 그칠 줄 모르는 에너지는 환희의 순간을 향해 짜릿한 질주를 계속한다.
물론 두다멜에게 과거의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같은 세련미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에겐 그런 정제된 손길 대신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길들일 수 없는 야성미가 그득하다. 음악과 삶이 하나 된 경지를 두다멜과 그의 동료들은 몸소 실현하고 있다. 그는 2009년부터 에사 페카 살로넨의 뒤를 이어 로스앤젤레스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을 부임한다.


최근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라는 이름은 같은 러시아의 선배인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옛 기세를 떠올리게 한다. 유로프스키는 1972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겐나디 로주데스트벤스키의 부지휘자였던 미하일 유로프스키였다. 소련이 개방되면서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한 그는 베를린과 드레스덴에서 음악 수업을 마쳤다. 그는 1993년 아버지를 대신해 베를린 코미셰 오페라에서 지휘하면서 데뷔했고, 웩스퍼드 페스티벌에서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5월 밤'을 지휘했다. 이를 눈여겨본 로열 오페라의 관계자는 '나부코'의 지휘를 그에게 맡기면서 런던 무대에 서게 했다. 그 때가 1996년으로 아직 스물다섯도 안 된 나이였다. 그는 그 해에 야코프 크라이츠베르크의 부지휘자로 베를린 코미셰 오페라에 승선했고, 이듬해부터 2001년까지 풀타임으로 시즌을 소화했다. 2000~03년에는 볼로냐 시립 극장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2001년부터 활동하게 된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의 음악감독 자리다. 이를 발판으로 그는 같은 해 12월부터 런던 필하모닉과 인연을 맺었고, 2003년에는 수석 객원 지휘자가 된다. 그가 이 악단의 열한 번째 상임 지휘자로 발표된 것은 2006년 5월이었고, 마침내 지난 가을부터 그 임기가 시작됐다. 바로 그 위용을 내년 3월 서울 무대에서 확인할 기회가 온 것이다.
소개한 바와 같이 유로프스키의 강점은 그가 러시아 지휘자임에도 서유럽의 오페라 레퍼토리에 정통하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그는 음반보다 DVD를 통해 더 많은 녹음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확인케 한다. 현재 펜타톤 레이블로 차이코프스키의 모음곡과 스트라빈스키의 <디베르티멘토> 그리고 프로코피예프의 작품들을 녹음하고 있지만 이보다는 글라인드본에서 지휘한 푸치니의 <잔니 스키키>, 라흐마니노프의 <비참한 기사>, 로시니의 <체네렌톨라>,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가 더욱 팬들에게 알려져 있다.


1970년대에 태어난 하딩과 두다멜, 유로프스키와 더불어 최근 들어 급부상한 두 사람의 1960년대 음악가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여름 뉴욕 필하모닉은 로린 마젤의 후임으로 앨런 길버트라는 다소 생소한 지휘자를 지목한다. 음반이 많지 않아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길버트의 입지와 명성은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확고하다. 그는 1967년 생으로 지난해 마흔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 마이클 길버트와 일본인 어머니 요코 다카베가 모두 뉴욕 필의 단원이었고, 어머니는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모의 영향으로 앨런 길버트도 일찍부터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고, 하버드 대학과 커티스 음악원, 줄리어드 음악 학교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다. 그러고는 뉴멕시코의 산타페 오페라에서 부악장으로 오케스트라 생활을 시작한다. 길버트는 이후 2000년부터 그는 스웨덴의 왕립 스톡홀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올해부터는 이 자리를 사카리 오라모에게 물려준다.
길버트가 미국 지휘자로서 특별한 재능을 인정받는 것은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무대에서 동시에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2003년에 자신이 몸담았던 산타페 오페라의 첫 번째 음악감독으로 부임한다. 산타페 오페라는 사막에 지은 야외무대에서 펼치지는 페스티벌로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전통 있는 오페라 축제다. 힌데미트나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인물도 일찍이 이곳을 다녀간 바 있다. 이렇게 유서 깊은 축제이지만 그동안은 음악감독 없이 이끌어왔다. 그런 음악제가 마흔도 채 안 되었던 길버트를 음악감독으로 임명했으니 그의 역량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앨런 길버트는 뉴욕 필과 시카고 심포니, 세인트루이스 심포니, 애틀랜타 심포니, 보스턴 심포니 등 미국 최고의 악단을 객원 지휘했고, 2004년부터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가 감독으로 있는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 중이다. 부모가 모두 몸담았던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게 되는 길버트가 이 말 많고 탈 많은 미국 최고의 오케스트라에서 어떤 활약을 펼칠지 자못 기대된다.
길버트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지휘자는 중국의 롱 유다. 1964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아시아의 게르기예프’라는 평가를 받으며 중국 음악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차이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설하고 베이징 음악제를 주도하는 그의 카리스마가 마린스키 극장의 차르로 군림하는 게르기예프의 위용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롱 유는 일찍이 독일 베를린 음대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베이징 중앙 오페라 극장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2005년 자신이 창설한 차이나 필하모닉과 함께 북미 순회 연주를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롱 유는 2006년에는 모차르트의 탄생 250주년을 맞아 자금성에서 24시간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하는 매머드 프로젝트로 주목 받았다. 그는 현재 세계 유수의 악단을 객원 지휘하며, 지안 왕, 랑 랑과 같은 중국 음악가뿐만 아니라, 미하일 플레티뇨프, 프랑크 페터 침머만과 같은 거장들과 함께 무대에 서고 있다. 랑 랑과 협연한 '황하 협주곡'을 도이치그라모폰을 통해 녹음하기도 한 그는 올 5월 한국을 찾아 말러의 <대지의 노래>라는 반가운 레퍼토리를 선보인다. 그가 말러가 선택한 여섯 편의 한시를 가지고 따로 중국 작곡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기도 했을 만큼 관심을 보인 음악이다.


이들 젊은 거장들의 틈을 뚫고 서서히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우리 음악가도 있다. 이미 내한 연주를 통해 국내에도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구자범과 1976년생으로 지난해 말러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한 성시연이 그들이다. 특히 성시연은 이번 1월 서울 시향의 신년 음악회를 통해 국내 팬들에게 첫선을 보이게 된다. 열 사람의 솔리스트보다 한 사람의 지휘자에 더욱 무게가 실리는 시대이기에 이들의 다음 행보에 더욱 관심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