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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의 이중주 / 양한수 | 칼럼니스트

나베가 2008. 4. 5. 14:52
빛과 그림자의 이중주
  Talk to Art II
  양한수칼럼니스트





까만 조끼에 빨간 바지를 받쳐 입은 소년이 피리를 연주한다. 비스듬하게 눌러쓴 꽃술 장식 모자가 똘망한 눈망울을 보다 앳되게 조명한다. 소년은 이따금 가볍게 왼발을 구르며 리듬을 가늠한다. 피리 소리는 넓게 비워둔 배경 속에 회색빛으로 번져든다. 그리고 이내 애달픈 반향음을 남기고 낮게 가라앉는다.
마네가 나폴레옹 3세 근위대의 한 소년악사와 큼직한 캔버스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것은 1866년이었다. 스페인을 여행하는 동안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의 화폭에서 받은 감동이 채 가시기 전이다. 간결한 구도와 대담한 색상 대비가 아름다운 화폭이었지만 아카데미 심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근법이나 붓 터치에서 완성도가 미흡하다는 게 거절 이유였다.


또 다른 화폭에 담긴 한 여인의 자태가 무척 대담하다. 어두운 배경 색으로 해서 여인의 속살 위에 내려앉은 빛이 더욱 눈부시다. 팔찌와 목에 두른 리본, 그리고 까만 고양이와 흑인 하녀를 두어 여인의 육감적인 풍모에 악센트를 더했다. 그녀는 침대 위에 길게 몸을 눕힌 채 시종을 통해 한 남자로부터 꽃다발을 건네 받는다. 짧은 사랑을 얻기 위해 아첨하는 음탕한 남자에게 오히려 여인 쪽에서 측은한 시선을 던진다.
이 그림 앞에서면 누구나 꽃을 건네준 당사자가 된 듯 착각에 빠져든다. 그리고 여인의 냉담한 시선이 그림 앞에선 사람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인들 나를 부도덕하다 나무랄 처지가 됩니까?" 그녀의 물음에 스스럼없이 답할 만큼 속물스러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지도 모른다. 그림 앞에 섰던 젊잖은 남자는 자신의 숨겨진 관음증을 눈치라도 채인 듯 개운치 않게 헛기침을 남기고 돌아서야 했을 터였다. 화가는 1863년 이 그림을 완성하고 '올랭피아'라는 제목을 두었다. 무어인 왕궁에서 시종 들던 여인들의 이미지를 들어 은유적인 구도 속에 당시 유행하던 유곽 풍경을 그려 넣었다. 주류사회의 위선을 이 여인의 시선을 통해 꼬집는 게 화가의 숨은 의도가 아니었을까?


같은 해에 완성한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함께 그림 내용은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중산층인 듯 의상을 차려입은 두 남자의 한가로운 야외 피크닉에 미역을 감고 난 남녀가 스스럼없는 표정을 하고 동석해 있는 화폭은 관점에 따라서는 결코 예사롭지 않은 풍경이다.
희대의 스캔들을 남긴 두 작품의 여주인공 빅토린 뫼랑(Victorine Louise Meurent)은 16세 때부터 쿠튀르(Thomas Couture) 밑에서 드로잉을 익혔고 아카데미 쥘리앙(Academie Julian)에서 공부하며 또 다른 세계를 꿈꾸던 당찬 여인이었다. 젊은 마네 역시 쿠튀르 밑에서 미술 수업을 받던 시절이었고 눈에 띌 만큼 아름다운 뫼랑을 1862년부터 화실로 끌어들여 십수 년간 자신의 캔버스에 옮겨 그렸다. 후에 뫼랑이 그린 초상화 한 점이 살롱에 선정되었으나 그녀의 재능은 여성에 관한 편견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 채 끝내 좌절을 겪어야 했다. 10년 남짓 자신의 미술에 영감을 주었던 동반자에게 도움을 주겠다던 약속을 마네는 전혀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벗은 몸으로 포즈를 했던 탓에 길거리에서 몸 파는 여인쯤으로 세간에 인식되는 것을 방치했다는 소문을 피하지 못한다.


무거운 색상 대조와 빛의 효과에 착안해 중간색을 자제했던 것을 제외하면 마네의 기법은 종전에 쿠르베(Gustave Courbet)의 사실주의로 이어지던 전통화풍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과거 사안보다 현재 세태를 날카롭게 파고들어 부르주아 계층의 위선에 대한 조소쯤으로 인식했을 그림 내용들이 살롱에서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시 통념에 비추어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새로운 의념을 추구하던 젊은 화가들에게 마네의 수난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의 화실이 있던 '바티뇰'거리의 카페 게르브와(Cafe Guerbois)에 모여 미술의 새 방향에 대하여 논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카페 게르브와 에서는 1866년 이래로 보불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매주 목요일 밤이면 마네를 맨 윗자리에 앉혀놓고 서로 격론을 벌였다. 주로 '드가'가 마네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 언성을 높여댔고 조심스러운 성격에 말수가 적은 바지유(Frederic Bazille)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 들어 그들의 논지에 이의를 달거나 자신의 소신을 논리적인 어투로 피력하곤 했다. 이들 대화에서 뼈있는 뜻을 이야기한 또 한 사람은 가장 나이가 많은 피사로(Camille Pissaro)였다. '글레르'의 화실에서 수학하던 시절 젊은 '모네'가 '르누아르'나 '시슬리'와 함께 참석했고 '팡탱 라투르'가 다소곳이 그들의 대화를 귀담아 들었다. '졸라'와 사진 작가 '나다르'가 새로운 예술 이념에 뜻을 같이하고 그들의 칼럼을 통해 화가들을 두둔했다. 비평가 뒤랑티(Louis Edmond Duranty)는 마네와 언쟁 끝에 서로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을 벌인 일이 있었을 만큼 당시 좌중의 대화분위기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중절모에 검은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화가들 사이에 '액상 프로방스'에서 올라온 '세잔'만이 유독 누추한 복장을 하고 한 쪽 귀퉁이에 말없이 쪼그려 앉아 인상주의 화풍이 태동하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보불전쟁이 끝난 후에 이들은 '피갈'거리의 카페 누벨 아텐(Cafe Nouvelle Athene)으로 옮겨 다시 모였지만 바지유는 전장에서 목숨을 잃어 돌아오지 못했다. 작가 '모파상'과 '말라르메'가 새로운 모임에 동참했고 '고흐'와 '로트렉'이 이따금 참석해 제법 작지 않은 커뮤니티로 성장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마네 자신은 전통적인 아카데미를 도외시할 의사가 없었다. 또한 이들 무리들의 대화에서 언제나 선배로서 이론적인 도움을 주었지만 결코 그들의 수장이 되어 전면에 나서려 하지 않는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그 와중에서도 살롱이 인정하는 화가로서 성공을 거두기를 원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874년 이래 '앙데팡당'전에 출품하는 것을 극구 사양했던 것 역시 당시 화단에서 더 이상 지탄의 대상이 되거나 종전에 제도권 전시공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부르주아 태생으로서의 현실을 타계치 못하면서 오직 화폭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표현코자 했던 처세의 이중성이었을 터였다.


마네는 자신의 미술 인생에 동반했던 여인들에 대해서도 그의 색상 대비만큼 선명하게 처신하지 않았다. 양갓집 규수의 풍모를 하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마담 마네의 프로필에는 화가의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듯 보인다. 애초에 그는 자신과 동생 '웨젠'에게 1850년부터 피아노를 가르치던 네덜란드계 가정교사 쉬잔 리노프(Suzanne Leenhoff)를 부인으로 맞았다. 리노프는 화가의 식구들과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치정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네의 아버지 '오귀스트'의 정부였을 뿐만 아니라 화가와 은밀한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다. 그녀는 1852년에 비밀리에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들 레옹(Leon Koella)을 출산해 친정 집안 성을 쫓아 '린호프'라 불렀다. 아버지 오귀스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1863년 두 사람은 결혼을 했지만 마네는 레옹의 대부가 되어주었을 뿐 아이의 친부임을 인정하거나 계부가 되는 것을 끝내 허용치 않았다. 리노프 역시 사람들에게 레옹을 언제나 남동생인 것처럼 이야기했을 만큼 마네 부부의 관계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베르트 모리소(Berthe Morisot)에 대한 마네의 시선 또한 모호한 것이었다. 코로(Camille Corot)밑 에서 미술 수업을 받던 1868년 마네를 알게 된 이래 두 사람은 나란히 서로 조언자로서의 관계를 지속했다. 마네는 모리소의 그림에 대한 호의만큼이나 그녀를 내심 연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리소 역시 마네가 유일하게 제자 삼았던 에바 곤잘레스(Eva Gonzales)를 연적으로 여겼다는 이야기이고 보면 두 사람 모두의 속내는 서로 비슷한 처지였다. 그녀는 이미 1864년부터 내내 살롱에 자신의 그림을 전시해왔으나 1874년 앙데팡당전에 참가의사를 밝혔을 때 마네는 극구 만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모험이 있는 길을 택하기보다 살롱에서 순탄하게 성장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마네의 우려와 달리 모리소의 작품들은 앙데팡당전과 이후 인상주의 전에서 내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마네의 화폭에 살아난 모리소의 윤곽에서 화가의 애틋한 마음을 읽을 수 있을 법하다. 검정색을 멀리하라고 조언했던 모리소를 두고 그 검정색을 듬뿍 적신 붓을 들어 가장 사랑스러운 초상화를 그렸다. 동생 웨젠과 결혼하는 것을 지켜보며 마음속에 홀로 간직했던 끈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다.
'베르트 모리소의 초상화'에서 사랑과 회한을 어두운 배경색 뒤에 묻어둔 채 빛과 그림자의 이중주를 연주하는 마네의 음악을 다시 듣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