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E
포도밭 향기 속의 산책
영화 <어느 멋진 순간>을 보면, 주식 매매 그래프에 돌돌 말린 채 성공에 대한 야망과 작업 정신(?)을 불태우며 숨가쁜 일상을 살아가는 펀드 매니저 맥스가 나온다. 어느 날 그는 어린 시절 그의 영웅이었으나, 물욕과 바람기로 점철된 나날들 속에서 까맣게 잊고 지내던 삼촌이 사망하면서 조카 앞으로 남긴 폐가가 되다시피 한 와이너리를 처분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나게 된다. 온통 머릿속엔 좀 더 비싼 값으로 팔아 넘기기 위한 생각에 골몰한 여행이었지만, 그래프 숫자에서 벗어나 나지막이 속삭이며 흐르는 시간들 속에서 천진했던 유년의 기억들이 빛바랜 빛깔로 하나둘 찾아들고, 또한 그곳에서 알게 된 도도한 아름다움을 지닌 처녀 페니와의 사랑에 빠지면서, 결국 삶에서 ‘쟁취하고자’ 했던 것들을 버리고, ‘팔고자’ 했던 것을 지키려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는, 어쩌면 뻔한 스토리의 영화다.
그러나 내게 있어 이 영화의 미덕은 영화 내내 흐르는 포도주 향과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드넓은 포도밭, 머리를 부드럽게 흐트려놓는 감미로운 바람, 투명한 햇살.., 굳이 하루라도 와인 향을 맡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든 와인 전문가나 와인 수입상이 아니더라도, 와인 로드를 따라 며칠간의 휴가를 보내보는 것은 정말 잊지 못할 생의 한 풍경이 된다. 중세 시대부터 세워진 교회의 뾰족한 종탑이나 샤토(포도원) 지붕에 걸린 푸른 하늘을 배경 삼은 구름들, 시간의 때가 고스란히 새겨진 낡은 돌집 위에 파랗게 줄지어 올라가 바람결을 한목소리로 노래하는 담쟁이 덩글, 덧창 달린 창가에 알록달록하게 걸려 있는 예쁜 꽃화분들은 눈으로만 담기엔 너무 가슴 아프다. 각박한 대도시가 아닌 자연이 주는 평화에 길들여진 그들은 미소나 말투부터 다르다. 공기의 색깔과 조도(調度)마저도 확연히 다르다. 병약한 도심의 햇살과는 달리 너무나 강렬하고 투명해서 오히려 우리네 근심이 부끄러워지는 곳...
보르도나 부르고뉴의 특등급 와이너리들이나 규모 큰 샤토(Chateau), 도멘(Domaine)들은 사전 방문 예약을 철저히 받지만, 적지 않은 포도원들이 지나는 길손의 방문에 미소로 화답한다. 그들의 와인 제조 시설 및 저장고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몇몇 빈티지 시음도 시켜준다. 어둠 속에 조용히 누워 있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놀라며 깨어나는 와인을 일으켜 음미해보는 맛과 향은 아무리 같은 라벨의 와인이라도 한 달간의 파도와 빛, 진동에 시달려 우리 입에 전달되는 것과는 깊이와 신선도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와이너리들을 여행하는 방법은 전문 여행사를 통해 하거나, 승용차나, 택시를 빌려 타고 돌 수 있다. 혹은 바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과 땅이 함께 조우하는 느낌을 오롯이 전달받을 수 있는 자전거 여행 또한 즐거운 선택이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가고자 하는 와인 지역 중앙에 위치한 호텔에 머물면서 군데군데 세워진 와이너리 표지판을 따라 걸어서 탐험하는 것이다. 충격을 흡수하는 쿠션감 좋은 운동화나 조깅화가 필수적이긴 하지만, 차창으로 휙휙 지나가는 것이 아닌 타박타박 걸으며 볼 수 있는 풍경들은 의외로 감동적인 것들이 많다. 꼭 가보고 싶은 와이너리가 있다면 미리 그곳 와인 생산자나 홍보 담당자에게 편지나 이메일을 써서 사전 허락을 받아놓는 것이 좋다. 혹은 메종 뒤 뱅(Maison du Vin)이나 투어리스트 오피스에 문의해 지도와 와이너리 주소, 지역의 가볼 만한 레스토랑 등을 소개받을 수도 있다.
여행은 낯선 풍경,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지만, 그 속에서 드문드문 나누는 나 자신과의 조우가 더 큰 수확일 경우가 많다. 거기에 더해, 와인의 생생한 향기와 역사를 만날 수 있음에야..!
글&사진 | 김영주(서울와인스쿨 이사)
서울와인스쿨 : 2000년 3월 와인바 ReB(Rouge et Blanc)와 함께 최초의 와인스쿨로 문을 연 서울와인스쿨은 와인을 제대로 배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1순위로 추천되는 곳이다.
OPERA
로시니 <랭스로 가는 여행>
오페라를 좋아하려면 알아두어야 할 작품이 몇 편쯤 되어야 할까? 정답이 있을 수는 없고 일단 10개쯤을 일차 목표로 삼았다가 20개, 50개... 이런 식으로 늘려나가면 된다. 처음에는 잘 알려진 명작 오페라부터 선택하는 것이 맞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가면 나만의 레퍼토리를 몇 개쯤 개발해두는 것도 좋다. 극장에서 잘 공연되지 않더라도 음반이나 DVD로 즐길 수 있고 다른 애호가에게 비장의 카드로 권할 만한 것 말이다.
이번 호에는 <랭스로 가는 여행>이란 기발한 오페라를 소개할까 한다. 게으른 천재였지만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가 넘쳤던 로시니의 작품이다. 이 오페라는 여러 면에서 특이하다. 첫째, 처음부터 일회용 오페라였다. 프랑스 왕정의 부활로 샤를 10세의 대관식이 랭스에서 거행되는 것을 축하해 단 세 번 공연될 목적으로 씌어졌다. 1825년 6월의 대관식 전날 랭스 인근의 황금백합이란 온천장에 모인 손님들의 얘기이니 작곡한 시점으로 보면 미래에 벌어질 일을 다룬 셈이다. 둘째, 유럽 열강을 대표하는 무려 10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므로 마치 오페라의 만국 박람회 같다. 각국 귀족의 제각각 행태에서 고유의 민족성이 드러나는데, 지금 시각으로 보더라도 포인트가 잘 잡혀 있다. 셋째, 워낙 등장인물이 많다 보니 줄거리가 발전되지 않고 개별적인 에피소드로 펼쳐지다가 오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14중창으로 단번에 통일감을 획득한다. 넷째, 그런데 이 14중창의 내용이 마차를 구하지 못해 대관식 참가가 불가능해졌다는 얘기다, 대관식 축전 오페라에서 참석 불가를 선언하다니! 과연 로시니가 아니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상이다. 게다가 극중 내내 의도적으로 유치한 사랑 놀음이 벌어지는가 하면 프랑스의 남녀 귀족을 웃기는 사람들로 설정했으니 도대체 새 프랑스 국왕을 축하하는 것인지 조롱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다섯째, 단막 오페라로서 무대가 바뀌지 않는데도 2시간 40여분이나 소요되는 대작인 데다가, 여행 계획이 무산된 다음에는 상식적인 피날레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홀에 모여 각국의 노래자랑을 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기발한 구성이다.
이 오페라의 악보는 159년 만에 발견되어 1984년 로시니의 고향 페사로의 페스티벌에서 부활했는데, 대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두 차례나 음반을 녹음했다. 두 번 모두 10여명의 주요 출연진에 당대 최고의 로시니 가수들을 싹쓸이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현재 출시된 두 종의 DVD에는 그만한 가수들이 나오진 않는다. 그래도 2003년 3월의 바르셀로나 리세우 대극장 실황(TDK)은 현실적으로 최상의 출연진을 자랑한다. 세르기 벨벨의 연출도 온천장 분위기를 잘 살려 무대 위에 수영장이 있고 일종의 황토방도 등장하는 등 신선하기 그지없다.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이끄는 마린스키 오페라의 2005년 12월 파리 샤틀레 극장실황(오푸스 아르테)은 아바도와 반대로 마린스키의 어린 가수들과 무명의 학생들만으로 출연진을 꾸몄음에도 신선한 젊음의 빛을 발한다. 오케스트라는 무대 위에 배치되었고 게르기에프의 지휘는 ‘샴페인 오페라’라는 이 작품의 별명에 딱 어울린다. 러시아 장군 리벤스코프 백작으로 러시아가 자랑하는 젊은 테너 다닐 슈토다가 출연했는데, 젊은 날의 파바로티를 연상시키는 외모와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글 | 유형종(무지크바움 대표)
무지크바움 : 무지크바움(MusikBaum, '음악나무'라는 뜻의 독일어)은 클래식 음악과 발레,오페라 등 공연 예술 작품과 관련 예술을 감상하고 그 감동을 나누는 장입니다. 현재 클래식바움, 발레바움, 그란디보치, 시네바움 등 수준 높은 강의를 만날 수 있습니다.
BOOK
조연호 <행복한 난청>(랜덤하우스)
길 위에서 우리는 늘 꿈꾸지 않았던가.
돌이킬 수 없는 사실들을 지워버리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앞에 펼쳐질 더 많은 풍경을 그리며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던가.
떠다니는, 또는 떠도는 존재인 우리를 자각하게 하는
선물로서 음악이 존재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행복한 난청>은 <죽음에 이르는 계절>, <저녁의 기원> 두 권의 시집을 우리에게 보여준 조연호 시인의, 시인 자신의 표현을 그대로 쓰자면, '음악에 관한 어떤 散 : 文 : 詩'이며, 떠도는 존재로서의 우리를 일깨우는 음악에 관한 자유로운 사유의 글모음집이다.
시인이 풀어내는 음악에 관련한 사유를 읽는 것은 고통스럽다. 느낌을 전달하는 시인의 글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면 시인이 <행복한 난청>에 붙인 부제 '散文詩'라는 표현이 무엇 때문인지 더 확실하게 알게 된다.
<행복한 난청>을 읽는 것은 새로운 형식의 시집을 한 권 읽는 것일 수도 있다. 글은 한계를 지을 수 없는 시적 비유로 가득한 것이어서 무엇을 읽는 것인지 길을 잃을 수도 있겠지만 이 점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참 맛일 것이다. 젖과 꿀이 넘치는 세계로 우리가 넘어온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 모습은 적어도 풍요로운 꿈을 꾸는 것에는 익숙해진 듯하다.
<행복한 난청>의 시인은 그러나 내면 밑바닥에서부터 내가 나를 보며 타인이라고 부르는 <위상 우주>의 세계를 인정한다며 그늘 진 삶의 다른 부분도 이야기한다.
기억은, 추억이라도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불행에 대한 기억도 함께 연상되어지는 것에 밝은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음악은 당연한 듯하지만 잊어버리고 익숙해지지 않는 기억을 반추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
시인은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이 내면 의식에 결을 일으키는 음악적 정서에 대한 표현을 또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말의 의미가 뿜어내는 소리, 음악이 음으로 흐르지 않고 의미로 변주되는 전이를 발견하는 시간을 선사하는 시인의 글에서 음악 에세이의 또 한 모습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간단한 소개서에서부터 정밀한 이론으로 무장한 감상론까지 음악에 관한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이 있다. 이제 여기 덧붙여지는 또 한 권 <행복한 난청>은 어디에 자리를 잡을 것인지 궁금하다.
글 | 한상준(이음아트 대표)
이음아트 : 2005년 10월 메마른 대학로의 활자 문화에 나눔과 보탬의 마음을 갖고 인사한 이음아트. 서점을 넘어서 책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한다. 또한 서점을 배경으로 한 연극의 무대가 되기도 하며, 작가와의 만남 등 문화 사랑방으로 많은 이들에게 추억을 선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