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대표하는 현대무용단 엘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 씨어터가 20년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역동적이며 자유로웠던 그들의 몸짓은 지난 5월 19일부터 21일 3일동안 예술의전당을 흠뻑 적시며 잊지못할 감흥을 전해주었다. 3일의 공연동안 총 일곱 가지의 레파토리를 선보일만큼 그들은 많은 수의 레파토리를 보유한 저명한 단체이며, 이렇듯 다양한 레파토리를 펼쳐보이는 그들에게 나는 미리부터 매료되었던 듯하다. 각 작품이 주는 호소력과 떨림을 느끼고픈 마음에서 모든 공연의 관객이 되고 싶었지만, 단 하루의 공연에만 참석할 수 있었던 점은 아직도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19일 공연에서는 총 네가지 작품들을 선보였다. 앨빈 에일리 무용단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주는 <러브 스토리즈>를 시작으로 미니멀한 감각의 조형미를 선사한 <트레딩>, 전통적인 민속춤과 클럽댄스를 아우르는 미국 남부 흑인의 저항적인 몸짓 <쥬바>를 감상할 수 있었고 마지막으로 흑인의 종교적 의식에 토대를 둔 엘빈 에일리 무용단의 대표작 <계시>로 공연은 마무리되었다. 이 네가지 작품들은 각각 스티비 원더의 노래, 스티브 라이히의 음악, 드럼 사운드, 흑인 영가라는 음악적 배경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특히 가사가 있는 <러브 스토리즈>와 <계시>의 경우 몸짓과의 결합이 탁월히 드러나 작품의 내러티브적 성격이 더욱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음악을 움직임으로 형상화시켰다는 특성과 더불어 <쥬바>와 <계시>에서는 흑인들의 이야기, 즉 흑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모든 경험들이 특히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이는 에일리 리 무용단이 억압하는 실체에 대한 분석과 그에 대한 투쟁이나 저항, 그리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작품속에 투영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중에서도 에일리가 직접 안무한 그들의 대표작 <계시>를 보면서 우리는 이러한 인종적 특질을 더욱 잘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열 개의 흑인영가를 바탕으로 “슬픔의 순례자”, “나를 물가로 데려다주오”, “움직여요 여러분, 움직여” 이 세가지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지난 과거 박해받는 노예로서의 고난과 하느님을 향한 구원의 손길을 나타냈으며, 두 번째 부분은 흑인의 전통적인 침례의식을 춤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주일을 맞아 교회로 향하는 신도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열정과 행복을 드러낸다. 절망적인 삶에서 시작하여 침례의식을 거쳐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체험들을 통해 흑인의 분노, 고난, 정신세계의 갈등 등을 묘사한 이 작품은 인종차별의 고난을 단순하고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첫 번째 파트인 “슬픔의 순례자”는 “I've Been 'Buked"라는 흑인 영가로 시작한다. 아카펠라의 음색과 함께 등장한 여러명의 무용수들은 한데 뭉쳐 앞을 주시하고 서있다. 노래의 흐름에 맞춰 움직임이 나열되는데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땅을 밟고 서서 고개를 젖히고 두손을 하늘을 향해 쭉뻗은 동작이다. 이는 땅에서의 신체적 구속과 하늘을 향한 정신적 해방을 암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Didn't My Lord Deliver Daniel"의 노래에서는 3명의 무용수가 행하는 과장된 제스쳐, 즉 밧줄로 두 손을 묶은 듯한 형상을 통해 노예화의 과정을 재현한다. 이 춤 역시 “I've Been 'Buked"와 같이 자유를 갈망하는 신체적인 기원이 담겨있다. 흑인 영가의 프레이즈를 시각적으로 나타낸 점, 솔로와 그룹의 부름과 응답형식으로 구성된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특징은 <계시>의 다른 곳에서도 보여지는 일관된 구성방법이다. 뒤이은 “Fix Me, Jesus"는 <계시>의 핵심적인 이인무라 할 수 있다. 기도하는 여자무용수와 그녀를 보호하는 수호천사 역의 남자무용수가 등장한다. 이런 배치는 남성은 지지하고 여성은 의존하는 무용의 전통적인 테크닉과 일치하고 있다. 기도하는 움직임을 보이던 여성이 남성 수호천사에 의해 들어올려질 때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하는데 이 마지막 장면에서의 여성의 아라베스크 동작은 자신의 영적인 상승과 만족상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파트인 “나를 물가로 데려다 주오”는 침례장면을 시각화한 “Honor, Honor”로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하얀색의 의상과 파란빛의 배경이 눈에 띄는데, 이는 흑인 침례의식이 호숫가 근처에서 하얀 옷을 입고 거행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우산을 든 여성, 남녀, 그리고 소도구를 들고 나오는 여러 무용수들이 등장하는데, 앞의 두 역할은 각각 집사와 세례받는 이를 의미한다. 빠른 템포의 리듬에 맞춰 중첩된 동작들이 신나게 풀어져 있는 군무에 연이어 “Wade in the Water”가 나온다. 이 부분은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흑인영가를 사용하고 있다. 침례의 분위기 속에서 한 여자 집사가 다른 두명의 무용수들을 인도한 뒤 사라지면, 무대위에 남은 두명이 진지한 춤으로 의식을 완성하며 서로간의 영적인 공통성을 나타낸다. 이 장면에서의 특징적인 동작은 단연 분절적 움직임인 이솔레이션이라 할 수 있다. “I Wanna Be Ready”는 <계시>에서 가장 슬프고 황량한 영가에 맞추어 추어진 남성의 독무부분이다. 여기서 무용수는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신에 대한 참회의 분위기를 나타낸다. 그의 움직임은 조용한 개인의 기도였지만, 그 기도를 전달받는 관객에게 그 움직임은 너무도 큰 호소력을 지닌 것이었다.
세 번째 파트인 “움직여요 여러분, 움직여”에서는 “Sinner Man”의 영가를 바탕으로 세 명의 남자무용수들이 출연하여 역동적이고 활기찬 동작을 그려낸다. 이 때 남자 무용수들은 세부분으로 나뉘어진 영가의 가사에 맞춰 각각 독특한 움직임을 해내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음악의 시각화 면에서 매우 두드러진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연이은 “The Day Is Past and Gone", "You May Run on", "Rocka My Soul in the Bosom of Abraham" 세가지 영가는 시골 교회의 예배장면을 그린 것이다. 가스펠 음악 속에 재즈 댄스를 가미하여 남부시골에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예배와 일상생활을 표현한 부분으로 이때 짝을 이룬 남녀 무용수들은 열정적인 사교춤과 정련된 재즈댄스의 움직임을 마음껏 발산한다.
전반적으로 엘빈 에일리 무용단의 공연에서는 아프리카 리듬의 힘과 재즈, 공간에서 길게 뻗치는 신체의 대각선과 그 선을 이용한 오랜 밸런스가 주요 특징인 줄 레스터 호튼 테크닉과 그라함의 수축과 이완 테크닉, 발레의 고전적인 움직임 어휘를 함께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테크닉에 국한되지 않은 그들의 자유로운 표현은 온몸으로 행복하게 춤추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들만큼 무대에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을까.
그동안 나에게 있어 꼬리를 물며 지속적으로 따라다닌 물음은 바로 ‘흑인무용이란 무엇인가’였다. 흑인들의 무용계란 것이 분명 무엇인가가 있지만 이를 인정해 줄 수 있는 이론적 배경도, 뚜렷한 논증도 없어 보였으며 더구나 그들의 춤이 무용사책에서 불과 몇 페이지만을 장식하며 다각도로 비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궁금증이 해소될 수 없었다. 춤현장에서 보고 들었던 나의 경험에서 역시 여러 인종보다는 대부분 백인에 의한 것들이 자연스레 당연한 것이었을 뿐이다. 이번 엘빈 에일리 무용단의 내한으로 흑인무용에 대한 생각을 다시 꺼내어 나름대로 그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에일리의 <계시>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모습을 주제로 하고 있어 더욱 흑인의 춤임이 부각되고,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흑인무용’이라는 경계선에 우뚝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자세히 파고들어가보면 좀더 일반화된 주제인 종교적 믿음과 공동정신을 탐험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이번 공연의 모든 레파토리에서는 흑인만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즉 흑인만의 특질이 아닌 보편적인 움직임과 구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작품에서는 미국의 흑인에게 가해지는 인종차별적 주제에만 한정되어있지도, 흑인의 민속음악만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단지 흑인으로서 독특한 경험을 얘기하는 데 있어 좀더 유리하거나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차용한 것뿐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단순히 ‘흑인적 특질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흑인의 무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쩜 너무도 표면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치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지난 과거가 아닌 현재의 눈으로는 더 이상 이들의 움직임을 ‘흑인만의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인종적 경계선짓기에 여념하기보다 그것을 뛰어넘어 보다 깊은 곳에 존재하는 예술성, 다시말해 춤을 넓은 관점으로 논의해야 되지 않을까.
21세기를 사는 흑인무용가들은 혼합된 문화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고, 포스트모던 사조와 일맥상통하는 작업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세계가 무용계의 한 양상처럼 분리되고 있다. 이런 인식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흑인이자 무용수이다’라는 이중적 지위가 아닌 현대무용계를 구성하는 무용인으로 인식되는 자리매김은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깨우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분류는 하나의 예술형식을 배타적으로 만드는 방법이며, 그런 방법은 가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나를 고집스럽게 따라다녔던 ‘흑인무용이란 무엇인가’라는 궁금증은 더 이상의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미국내 흑인과 백인이 서로의 스타일에 빠르게 동화되어버린 이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흑인 현대무용가’가 아닌, ‘훌륭한 춤을 추는 현대무용가들’이다.
앨빈 에일리 무용단 내한공연 | |
앨빈 에일리 무용단은 댄스 씨어터 오브 할렘과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흑인무용단이다. 과거의 인종차별을 딛고 흑인도 발레와 예술무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공표한 이들의 공연장에는 유색인종 관객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후원과 호응도 매우 적극적이다. 앨빈 에일리는 미국 현대무용의 중심적 인물이었으나 1989년 사망했다. 레스터 호튼과 마사 그레이엄 등 미국 현대무용 개척자들을 사사한 그는 정형적인 현대무용 기교에 엉덩이와 가슴을 빠르게 흔드는 아프리카 민속춤을 결합한 춤 언어로 1958년부터 미국 무용계를 장악했다. 대개 지도자가 사망하면 단체의 기강이 해이해지지만 이번 공연(19~2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의 결과는 반대였다. 앨빈 에일리 생존 당시보다 작품의 다양성이나 감각이 발전적이어서 그의 사후 줄곧 무용단을 이끌어온 주디스 제이미슨의 지도력이 크게 부각되었다. 19일의 프로그램은 세 개의 소품과 함께 이 단체의 대표작이자 현대무용의 고전인 ‘계시’로 짜였다. 1960년 작 ‘계시’와 2004년 작 ‘러브 스토리즈’를 비교하니 흑인 문화의 감성과 순수성을 춤에 담아낸다는 의지가 공통점으로 드러났다. 찬송가로 시작되는 규칙적인 군무, 땅을 치며 애원하는 장면, 그리고 드레스와 정장 차림의 남녀가 등장하는 ‘계시’가 희망적인 삶을 다뤘다면 ‘러브 스토리즈‘는 에일리 무용단의 어려웠던 과거, 여전히 부족한 현재, 밝게 빛나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담은 보다 압축된 소재라고 하겠다. 최신작은 물론 힙합이나 재즈, 새로운 현대무용 등 춤이 보다 현대적이고 개성적이었으나 ‘계시’가 지닌 역사의 무게를 발판으로 했기에 더욱 빛났다. 그러나 한국 기획사측의 잘못은 옥에 티였다. ‘러브 스토리즈’에서 투사된 “나는 우리 회사가 무용의 중심지가 되기 바란다”는 글귀에서 회사는 무용단으로 번역해야 옳다. 흔히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감정이라 말하는 한과 신명이 앨빈 에일리 무용단의 특징이기도 한데, 그래서인지 우리 관객들의 호응이 좋았다. 흑인 영가에 담긴 한과 타악기의 빠른 장단이 만드는 신명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무용평론가 문애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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