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무용

몰리에르와 그의 희곡 돈 주앙....공연을 앞두고.

나베가 2006. 5. 15. 10:12
연애 실패자가 쓴 ‘작업의 정석'
- 보리스 에이프만의 작업의 토대가 된 작가 몰리에르와 그의 희곡 '돈주앙'에 대하여

글: 김일송 / scenePLAYBILL 편집장

가장 많은 사람과 키스한 영화 속 주인공은? <돈 후앙>(1926)의 주인공 돈 주앙. 그는 영화 속에서 수많은 처녀들과 총 191번의 키스를 나누는데, 그 키스의 평균 시간은 53초였다. 최근 ‘사랑할 때 키스는 장수의 묘약’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떴던 기사 일부다.

굳이 영화에 빗대 설명할 필요도 없다. 바람둥이를 일컬을 때, ‘카사노바’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으로 붙는 대명사가 바로 ‘돈 주앙’이니까. 이탈리아의 카사노바가 1725년 생生이고 돈 주앙이 14세기 경 실존했다는 스페인 귀족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돈 주앙은 족보상 카사노바의 고조부의 고조부, 그 이상의 먼 조상. 티르소 데 몰리나에 의해 문학사에 처음으로 일대기가 소개되며 엽색가獵色家의 전설이 된 돈 주앙은 17세기 프랑스 작가 몰리에르에 의해 호색방탕한 자유사상가로 다시 태어난다. 그런데 이들의 조합, 몰리에르와 돈 주앙이라는 조합이 아주 흥미롭다. 연애에 실패하기만 했던 작가가 바람둥이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때마침 5월 30일, 31일 LG아트센터에서 러시아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의 <돈 주앙과 몰리에르>가 공연을 준비 중에 있다 하니, 왕년의 불문학도로서 이들의 기묘한 관계를 살짝 알려주고자 한다.


한 작품 속 주인공의 삶이 반드시 작가의 삶과 일치해야 한다는 강령은 없으나, 그리고 이러한 주장 자체가 잘못된 논리에 기대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나,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등장인물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투영시키기 마련. 정(正) 방향을 따르건 반(反) 방향을 따르건, 작중인물들은 작가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대변인. 그런 면에서 돈 주앙은 몰리에르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듯하다.

젊은 아내를 버리면서 새로운 연애 상대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돈 주앙은 아무도 막지 못하는 호색한. 돈 주앙에게 있어 여자란 미지의 세계. 때문에 이미 정복한 대상은 미련 없이 버려야 할 존재이며 그에게는 늘 새로운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돈 주앙의 작가 몰리에르까지 방탕한 바람둥이로 오해한다면 곤란하다. 본명 장 밥티스트 포클랭인 몰리에르는 프랑스 고전주의의 대가로 17세기에 소위 가장 잘 ‘나가던’ 코미디 작가다. 영리한 재담꾼에다가 세간에서 인기도 높았으며 게다가 태양왕 루이 14세의 총애까지 받고 있었으니, 그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들끓었겠는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는 사실. 그러나 알려진 바로는 몰리에르에게는 그보다 스무 살 어린 부인, 아르망드 베자르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갖가지 추문으로 몰리에르를 힘들게 했다. 스캔들을 부추긴 자들은 몰리에르를 시기한 상대편 부르고뉴 극단 배우들로, 이들은 몰리에르가 옛 애인의 여동생과 결혼했는데, 여동생이 사실은 옛 애인의 딸이고 몰리에르가 그 아버지라고 수군거리곤 했던 것이다. 그들이 흘린 소문의 진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확실한 사실은 몰리에르가 부인을 끔찍하게 사랑했다는 점. 그런 점에서 확실히 돈 주앙과 몰리에르는 양극단에 놓인 인물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 교집합이 전혀 없던 것도 아니다. 헤겔의 변증법을 빌자면 돈 주앙은 몰리에르의 의식이 만들어낸 정반합의 총체적 인물인 까닭. 돈 주앙의 바람기 많은 면모가 몰리에르의 반한다면, 종교인들의 권위를 조롱하던 자유사상가적 면모는 몰리에르에게 부합한다. 색정에 빠진 ‘풍각쟁이’ 돈 주앙을 통해 몰리에르가 고발하고자 했던 대상은 불경하고 방종한 자유사상가 돈 주앙이기 보다는 돈 주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신봉하는 하인 스가나렐로 대표되는 경박한 믿음의 독신론자들이었다. 덕분에 몰리에르는 15회 공연을 끝으로 <돈 주앙>의 막을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이 15회로 끝났던 <돈 주앙>을 그의 창조주 몰리에르의 이야기와 함께 발레로 풀어낸다. 보리스 에이프만의 창작노트 한 켠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아르망드는 몰리에르의 삶에 번뇌를 가져다주었다. 번뇌가 없는 예술가가 있을까? 커다란 비극들이 위대한 예술가를 만드는 법이다. 몰리에르의 영웅인 돈 주앙은, 그의 창조자인 몰리에르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이상형이다. ……이번 우리 작품은 이상에의 추구에 대한 환멸, 자기 자신과의 투쟁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이 세상에 불멸의 영웅들을 바치고 있는 작가의 힘든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업에는 영 소질이 없던 몰리에르와 작업의 명수 돈 주앙. 과연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이 풀어내는 돈 주앙은 과연 어떤 인물이 될까? 몰리에르의 욕망의 결집물이 될 것인가? 혹은 끊임없이 투쟁하는 대상이 될 것인가? 직접 마주하고 확인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