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2017년)

안드레이 가브릴로프Andrei Gavrilov /2017.11.9.목/롯데 콘서트홀

나베가 2017. 11. 8. 00:30




Andrei Gavrilov plays Rachmaninoff Piano Concerto 3




세르게이 바실리에비치 라흐마니노프  (Sergei, Vassillievich Rachmaninov)

 

오네그 태생인 러시아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부친은 러시아의 귀족이며 근위대의 대장이었고, 교양이 높은 모친에게서 4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9세에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유아 과정에 들어가 피아노를 배우고, 그 뒤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전학하여

타녜에프, 아렌스키 등에게 작곡법을 배웠다.

이밖에 피아노를 실로티에게도 사사하여, 탁월한 피아니스트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1895년에 《교향곡 제 1 번》을 완성했으나, 평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 쇠약이 심해져서,

한때 창작을 중지했으나,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제 2 번》으로 1901년에 글린카 상을 획득하고부터는

자신을 회복했다. 1906년에 드레스덴에 옮겨 가서, 이듬해에 《교향곡 제 2 번》을 완성했고, 1909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피아노 연주로 호평을 얻었다. 이 해에 《피아노 협주곡 제 3 번》을 완성했고, 일시 귀국했으나,

1917년의 혁명 때문에 난을 피해서 온 가족과 함께 망명하여 미국으로 이주해서 이곳을 영주의 땅으로 삼았다.

이 시기 이후는 과히 작곡을 하지 않고, 오로지 피아니스트로서 활약했지만, 《피아노 협주곡 제 4 번》,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 《교향곡 제 3 번》 등의 명작을 완성하기도 했다.

만년에 스탈린이 귀국을 권유했으나, 응하려 하지 않고 캘리포니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작곡상으로는 차이콥스키의 전통을 계승하는 모스크바 악파의 한사람으로, 서정성과 센티멘탈리즘을 특징으로 했다. 또 19세기 후기 낭만파의 양식과, 피아노 연주의 거장으로서의 필치를 곳곳에 느끼게 하는 작풍에 의해서 일부의 작품은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주요 작품] 가극 《아레코》(1893), 교향곡 5곡 중 《교향곡 제 2 번》(1907), 교향시 《죽음의 섬》(1907), 피아노 협주곡 4곡 중 제 2 번(1901), 제 3 번(1909),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1934), 피아노곡, 전주곡, 가곡 등.

 


Andrei Gavrilov plays Rachmaninov 3 concerto live .Full version



Piano Concerto No. 3 in D minor, Op. 30

이 곡은 '세계에서 가장 어렵다'라고도 표현한다.

이 걸작은 초당 음표수가 다른 어느 협주곡보다도 많아, 끔찍할 정도로 빠르고 온통 '크고 뚱뚱한 코드'로 된 곡이다.


영국왕립 음악원의 시릴스미스는 이곡을 연주하는 노력을 '석탄 1천톤을 삽으로 푸는데 비교했다.'


매머드급 피아노 협주곡의 탄생

러시아의 정서와 작곡가의 시성이 매 순간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라흐마니노프를 있게 한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한 작품일지는

모르겠지만, [3번 협주곡]이야말로 피아니스트로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초월적 의지를 반영한 작품이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피아노의, 피아노를 위한, 피아노에 의한 협주곡이다. 오죽하면 작곡가 자신도 이 작품을 “코끼리를 위해 작곡했다”라며

곤혹스러워했을까.

1909년 라흐마니노프는 이바노프카의 시골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자신의 미국 데뷔 무대를 위한 새로운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그러니까 이 [3번 협주곡]은 순수하게 미국을 위해 작곡한 곡으로서 작곡가로서는 자신의 기량을 한 번에 쏟아내어 새로운 무대를 휘어잡을 만한                 도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바램대로 피아노 협주곡 역사상 무서우리만큼 가공할 만한 테크닉과 초인적인 지구력, 상상을 뛰어넘는 예술적 감수성과 시적 통찰력을 요구하는

매머드급 작품이 탄생했다.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를 미국으로 이끌었을 뿐더러, 예술적 동료로 평생토록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피아니스트 호프만에게 헌정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호프만은 이 작품을 연주하기에는 손이 작았기 때문에 공개석상에서는 한 번도 연주하지 못했다고 한다.


1909년 11월 28일, 이 곡은 월터 담로슈(Walter Damrosch)의 지휘와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되었고 7주 후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의 지휘로 다시 한 번 연주되었다.

작품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피아노 협주곡 2번] 초연 때만큼 뜨거웠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오히려 연주자 라흐마니노프에게 관심이 집중되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 날의 성공 덕택에 다음 시즌 연주회를 위한 계약이 쇄도했고,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직책까지 제안받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연주하기가 너무나 힘들 뿐더러 그 정서적 표현 역시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곡이었다.

그래서 대중적으로 어필하기까지에는 1960년대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Vladimir Ashkenazy)가 등장할 때까지 50여년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1928년 한 젊은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나타나 이 [3번 협주곡]을 말 그대로 ‘삼켜버린’ 사건이 벌어졌다.


제 1악장 - Adagio


관현악의 서주에 이어, 엄숙하고 씩씩한 주제가 피아노로 나온다.

그 특유 스타일이 전개된 뒤 아름다운 정취가 중간에 묘사되는데, 이 아름다움은 차이콥스키의 내성적인 애수미를 상기시킨다.

이윽고 곡은 또다시 불꽃을 튀기는듯한 화려한 카덴짜로 들어가, 기교의 경지를 이룬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서주부에 뒤이어 D단조의 장엄한 테마가 피아노로 연주된다.

피아노가 두 번째 주제를 연주하며 점점 빠르게 진행되며 음악은 힘차고 다이내믹하게 이어진다.

이윽고 걸음이 빨라지면서 변주곡으로 진입하고 곧 카덴차부분으로 이어지며 장대한 피아노 솔로 카덴차가 나타난다.

그리고 다시금 1주제와 2주제가 제시되며 끝을 맺는다. 이 카덴차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반짝이고 투명한 질감을 가지고 있는 버전, 다른 하나는 화음 위주의 무겁고 힘이 실려있는 버전이다.

비르투오시티를 강조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주로 앞 버전을 선호한다


제 2악장 - Adagio.


목관악기를 마음대로 활약시키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음 위에 수정처럼 빛나는 진행을 배치해, 맑은 악상을 그려내고 있다.

피아노는 생기에 차고, 분위기는 발랄하다.
오보에의 독주로 멜로디가 연주되며 강렬한 총주로 이어진다. 이 때 불협화음으로 등장하는 피아노 독주는 주단 위를 굴러가는 흑진주 같다는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왈츠풍 음형과 여러 단편들이 경쟁적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솔로 피아노의 장대한 스케일과 간결한 오케스트라 총주가 등장하여

3악장으로 음악을 이끌어간다.


제 3악장 Finale-Alla breve


러시아의 축제임을 연상케 하는 첫머리의 정취는, 이윽고 무거운 화현에 의해 변화해 간다.

교회당의 종루()에서 높이 울려 퍼지는 음을 상기시키지만, 얼마 후 첫머리의 정취가 되돌아오고, 제2주제가 피아노에 의해서 연주된다.

피아노는 가볍고 교묘한 진행을 계속하여, 그 분위기를 고조시켜 종결로 나아간다.

한 마디로 비르투오소를 위한 찬가라고 말할 수 있다.

웅대한 힘, 야성적 매력, 정교한 테크닉과 진한 서정성이 뒤엉켜 펼쳐지는 낭만주의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프로코피에프를 연상시키는 듯한 짧은 카덴차 성격을 가진, 피아노가 연주하는 마지막 토카타 패시지가 압권이다.

피아노가 클라이맥스를 주도하며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옥타브, 살인적인 분산화음으로 듣는 이의 심장을 10분 넘게 들었다 놓으며

웅장하고 화려하게 마무리된다.




Seong-Jin Cho - 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 3 in D minor, Op. 30 (2011)



P.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 Op.23

차이코프스키 / 피아노 협주곡 NO.1 Op.23


차이콥스키는 34세때, 모스크바에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직을 맡고 있으면서 약 1개월에 걸쳐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그 당시 그는 이미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 상당히 알려지고 있었지만, 이곡의 완성에는 몹시 애를 먹었던 모양으로 아우에게 보낸 편지에 "이 곡은 좀처럼 진전이 없으며 나로서는 도저히 완성시키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머리를 싸매고 곡을 생각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 파아노 협주곡을 완성시킨 차이콥스키는 음악원의 초대 교장인 니콜라이 루빈시타인(Nikolay Rubinstein)-피아노의 거장이며 유명한 안톤 루빈시타인의 아우이고 과동료 교수인 후베르트(Nikolay Hubert)를 자기 연구실로 초청하여 시험 연주하여 들려주었다. 그리고 모스크바 악단의 거두인 두 사람의 호의에 찬 비평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뜻밖에 그 두사람은 연주 후에도 아무말없이 침묵만 지키고 있고 그가 의견을 구하자 루빈시타인은 격렬한 어조로 이곡은 피아노에 부적당하다느니 졸렬하다느니 개성이 없다는 등의 혹평을 하였다.    차이콥스키가 분격한나머지 거기서 뛰쳐나가 다른 방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에 루빈시타인이 뒤따라 와서 이협주곡이 연주에 적당치 못함을 재삼 설명하고 다시 재작할 경우 연주회에서 자기가 초연을 맡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이 곡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결정을 거부하고 초연을 맡아 줄 피아니스트를 물색하여 드디어 독일에서 그의 작품을 휼륭해 연주해 준 바 있는 [한스 폰 뮐러]에게 악보를 보내어 좋은 기회에 초연을 밑아주기를 부탁하였다. 뮐러는 곧 이 곡이 매우 독창적이며 경탄한 명곡이란 내용의 서함을 차이콥스키에게 보내오고 미국연주여행 때 1875년 10월 22225일 보스턴에서 초연을 하였으며 그 결과 많은 박수 갈채를 받앗다.

이와같이 되어 이 협주곡은 애초에 [니콜라이 루비시타인]에게 헌정될 예정이었으나 [한스 폰 뮐러]에게 헌정되었고 모스크바에서 초연은 그해 11월에 이루어 졌는데 여기서도 크게 호평을 받았다. [루빈시타인]은 이곡이 초연된 3년후에 차이콥스키에게 사과하였으며 그 이후 자신의 연주회에서 이 곡을 즐겨 채택하였기 때문에 두사람의 우정은 원상으로 되돌아 갔다.

루빈시타인이 처음에 들었을 때에 그처럼 폭언을 한 것은 차이콥스키가 이곡을 작곡함에 있어서 선배이며 피아노의 대가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자기에게 가르침을 받지 안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지며 후에 이 협주곡이 각국의 피아니스트들에게 앞을 다투어 채택되었으므로 차이콥스키에게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엇다고 한다.

또한 차이콥스키는 1889년에 이곡을 다시 손질하여 지금의 것으로 만들어 그의 세곡의피아노 협주곡 중에 가장 빈번히 연주되는 곡이 되었다. 이 피아노 협주곡 제 1번은 세련된 서구적인 취미의 화려함은 없지만 약간 러시아적인 주제를 사용한 슬라브적인 중후한 선의 굵기와 음색적인 관현악법이 이 곡의 매력이 되어있다.



Andrei Gavrilov, Tchaikovsky 1 St Petersburg Symphony Orchestra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프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


그는 오페라단 가수였던 벨기에 여인  데지레 아르토와 약혼까지 했으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데지레는 스페인 남자와 결혼하면서 차이코프스키를  차버린다.  미완의 사랑으로 절망에 빠져 자살을 시도할만큼 차이코프스키는 마음이 여린 남자였다. 러시아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음악원 교장 나콜라이 루빈시타인과 진한 친분을 쌓는다.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PIANO CONCERTO No.1>을 루빈시타인이 연주할 수 없다고 한다.  루빈시타인은 그 당시 모스크바 음악계를 잡고 있던 독재자였다.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시킨 차이코프스키는 음악원의 초대 교장인 니콜라이 루빈시타인(Nikolay Rubinstein)과 동료 교수인 후베르트(Nikolay Hubert)를 자기 연구실로 초청하여 시험 연주하여 들려준다. 뜻밖에 그 두사람은 연주 후에도 아무 말 없이 침묵만 지키고 있고 그가 의견을 구하자 루빈시타인은 격렬한 어조로 이곡은 피아노에 부적당하다느니 졸렬하다느니 개성이 없다는 등의 혹평을 하였다. 차이코프스키가 분개한 나머지 거기서 뛰쳐나가 다른 방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에 루빈시타인이 뒤따라 와서 이 협주곡이 연주에 적당치 못함을 재삼 설명하고 다시 고칠 경우 연주회에서 자기가 초연을 맡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은 당대의 격식과 메너리즘에서 벗어난 때문이었을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생애 최대 불행은 결혼이었다. 모스크바 음악원 제자였던 안토니나 미류코바라는 28세의 여성으로부터 열렬한 구혼을 받았을 때 차이코프스키는 37세 였다.  너무나 똣밖의 일이라 마음이 내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순정에 빠져 결혼해 버렸다. 차이코프스키를 평생 동안 단 한번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을 사랑했고 인간으로서 차이코프스키를 존경했던 여인 폰 메크 부인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일이었다.

미류코바는 남편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해도 없는 여자였다. 극도로 내성적이고 수줍어하는 성품이며, 오직 음악에만 한결같이 정열을 쏟고있는 차이코프스키의 결혼생활은 순식간에 파탄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심한 노이로제에 걸려 한때 자살을 기도한 일까지 있었던 차이코프스키는 어느날 갑자기 아내를 버리고 친구를 따라 페테르부르크로 도망하여 결혼생활은 종말을 고하였다. 이때 그는 극도로 쇠약해 있었기 때문에 곧 전지요양을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와서 겨우 그의 건강이 회복되었으므로, 여기에서 제4교향곡을 작곡한외에 또 《에프게니 오네긴》의 작곡도 계속하였다.

미류코바는 이혼을 하는 댓가로 차이코프스키에게 만 루블을 요구한다. 돈이 없던 차이코프스키 사정을 잘 아는 루빈시타인이 폰 메크 부인을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 한다. 그 당시 만 루블은 무지막지한 돈이었을 것이다. 폰 메크 부인은 마음 속 깊이 사랑하는 사람의 불행을 듣고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그 돈이 차이코프스키를 불행에서 건져낼 수 있느냐고 묻는다. 루빈시타인은 부인에게 말한다. '부인은 참으로 위대한 분이십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이미 이루어진 사랑

광산업으로 큰 돈을 벌었고 철도 경영자의 미망인 이었던 폰 메크 부인은 평소부터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가난한 작곡가에게 경제적 후원자를 자임하고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녀는 이런 조건을 단다. "절대로 서로 만나지 않도록 할 것, 설령 마주치더라도 대화하지 말 것." 차이코프스키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폰 메크 부인의 후원은 15 년 동안 계속되었으나 두 사람은 한 평생 단 한번 밖에 만나지 못한다. 차이코프스키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쓴 작품을 그녀에게 헌정하고 오직 편지 왕래로 부인과 만난다.


 폰 메크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분에 넘칩니다. 나는 당신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당신의 음악 안에서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 안에서 당신의 감정을 함께 느낍니다."

차이코프스키는 답한다. "우리들의 교향곡(교향곡 4번) 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주는 이 교향곡 전체의 핵심과 정수입니다. 이것은 운명입니다. 제 2악장은 비애의 다른 일면을 보입니다. 이것은 일에 지쳐 쓰러진 자가 밤중에 홀로 앉았을 때 그를 싸고도는 우울한 감정입니다. 읽으려고 든 책은 그의 손에서 떨어지고 많은 추억이 샘솟습니다."

 

이혼 한 뒤로 그는 폰 메크 부인에게 만일 내가 다시 사랑이 시작된다면 그 상대는 당신일 것이라고 고백을 하기도 한다. 너무도 슬픈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순수한 사랑도 있었던가... 차이코프스키와 폰 메크 부인은 평생 동안 1,100여 통 편지를 주고 받는다. 차이코프스키의 작곡 배경을 알 수 있는,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자료다. 1890년 10월 폰 메크 부인은 "파산해서 더는 연금을 보낼 수 없다"는 편지를 보냈다. 차이코프스키는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에 크게 낙심해 했고 3년 뒤인 1893년 11월 콜레라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폰 메크 부인의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조건 없는 후원은 위대한 곡을 낳게 한다.육체적 사랑이 아닌 정신적 동반으로 시종일관했던 두 사람 관계는 한없이 가슴 아프지만 이들이 이루어낸 음악은 영원히 남아 세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P.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 Op.23 ANDREI GAVRILOV-R.MUTI 1977 - I MVT Molto Maesto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