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향의 비창
10월 19일 (목)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바실리 시나이스키 Vassily Sinaisky, conductor
피아노 스티븐 허프 Stephen Hough, piano
슈레커, 에케하르트 (아시아 초연)
Schreker, Ekkehard, Op. 12 (Asian premiere)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1번 (1919년 버전)
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 1 in F-sharp minor, Op.1 (1919 version)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
Tchaikovsky, Symphony No. 6, Op. 74 ‘Pathetique’
거장 지휘자 바실리 시나이스키는 모스크바의 전설적인 볼쇼이 극장을 이끌었던 러시아 음악계의 강자이다.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는 음악계의 경이로운 존재로 꼽힌다. 레이저 처럼 한 치 오차도 없는 연주와 지성을 겸비한 그는 맥아더 재단이 각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인 인물들에게 수여하는 ‘지니어스 그랜트’를 받기도 했다. 두 명장이 협연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은 기억에 남을 연주가 될 것이다.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두 작품이 이 공연의 줄기를 이룬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6번 ‘비창’은 비상하도록 아름다운 선율과 솔직함, 압도적인 감정 표현을 드러내는 음악적 자서전으로 지휘자 시나이스키가 그 애통함을 이끌어낸다. 슈레커가 1903년 작곡한 격정적인 서곡 ‘에케하르트’는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지휘자는 이 작품에 대한 강한 믿음을 포디엄 위에서 입증해 보일 것이다.
바실리 시나이스키Vassily Sinaisky 지휘자
프로필
러시아의 거장 지휘자 중 한명으로 꼽히는 바실리 시나이스키는 무신과 콘드라신을 사사했으며 러시아, 독일, 영국 레퍼토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해석으로 음악계에서 인정 받아왔다. 또한 오페라 지휘자로서 남다른 경력을 쌓아온 그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의 상임지휘자이자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시나이스키의 세계적인 지휘 커리어는 1973년 카라얀 지휘 콩쿠르에서의 금상을 수상을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전설적인 거장 콘드라신(모스크바 필하모닉), 무신(레닌그라드 음악원)과 함께 활동하며 뛰어난 지휘자로 성장했다. 그는 카라얀 지휘 콩쿠르 수상 후 라트비아 국립 시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되어 1976년부터 1987년까지 악단을 이끌었다. 이후 모스크바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이자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며 악단의 러시아 국내 활동과 투어를 진두지휘했다.
2016/17시즌 그의 주요 활동으로는 시티오브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 BBC 필하모닉, 드레스덴 필하모닉, 스트라스부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뉴 재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홍콩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연주가 있다.
시나이스키는 BBC 필하모닉의 명예 지휘자로 활동하며 ‘쇼스타코비치와 그의 영웅들’이라는 축제, 유럽과 중국 투어, BBC 프롬스에서의 연주에 함께하는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또한 그는 네덜란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와 볼쇼이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는 동안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황금 닭(감독 키릴 세레브레니코프)>,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감독 스티븐 로리스)>를 지휘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빈 극장에서 스티븐 로리스 감독과 함께 오페라 <이올란타>와 <리미니의 프란체스카>를 지휘했다. 그는 베를린 코미세 오퍼에서 오페라 <불의 천사>를, 영국 국립 오페라에서 <카르멘>과 <장미의 기사>를 지휘하는 등 오페라 지휘자로서 입지를 굳건히 해왔다.
시나이스키의 주요 음반으로는 말뫼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프란츠 슈미트 교향곡 집(낙소스), BBC 필하모닉과 함께 녹음한 쇼스타코비치, 차이콥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작품집 등이 있다. 최근 발매된 음반에는 피아니스트 데니스 코츠킨의 협연으로 베를린 방송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한 차이콥스키와 그리그 협주곡 음반이 있다. 음악 교육 분야에서도 두각을 보이고 있는 그는 상태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이자 지휘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스티븐 허프Stephen Hough 피아노
동세대 뛰어난 음악가 중 한명으로 인정받고 있는 스티븐 허프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그리고 작가로서 화려한 경력을 쌓아왔다. 영국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에 의해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20인에 선정된 스티븐 허프는 맥아더 펠로우쉽을 수여받은 최초의 클래식 음악가이며 2014년에는 영국 제국 데임 작위를 수여받으며 그의 음악적 공헌을 인정받았다.
1983 년 뉴욕 나움부르크 콩쿠르에서 1 위를 차지한 허프는 이후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협연해왔으며 저명한 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그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모스틀리 모차르트 페스티벌, 에딘버러 음악제, 그리고 그가 무려 25회 출연했던 BBC 프롬스 등 저명한 음악제에서 정기적으로 초청받아 연주해왔다.
허프의 2016/17 시즌 주요일정으로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세인트 루이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스트라스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몬테카를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바이마르 슈타츠카펠레 오케스트라, 할레 오케스트라, 시티오브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 홍콩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세계 주요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있다. 그는 최근 클리블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 핀란드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뉴질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으며 런던 바비칸홀 뉴욕 카네기홀에서 리사이틀 무대를 열었다.
그의 음반은 ‘디아파종 도르’를 수상하고 ‘그래미 어워드’ 후보작으로 선정되는 등 세계 권위의 음반 상을 수상했으며, ‘그라모폰 어워드’에서 ‘올해의 음반’과 ‘골드디스크’를 포함해 여덟 개 부문에서 수상하며 세계적 피아니스트로서 입지를 굳건히 했다. 최근 발매된 그의 음반으로는 지휘자 안드리스 넬슨스의 지휘로 시티오브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한 드보르자크 피아노 협주곡 집과 스크리아빈, 야나체크 독주 음반이 있다.
작곡가로서도 활약하고 있는 허프는 위그모어 홀, 루브르 박물관, 런던 국립 미술관, 웨스트민스터 성당, 길모어 국제 키보드 페스티벌, 베를린 필하모닉 윈드퀸텟으로부터 위촉받아 다수의 작품을 작곡했다. 그의 최근 작품인 ‘Dappled Things’는 2016년 10월 위그모어 홀에서 초연된 바 있다.
작가로서도 인정 받아온 허프는 영국 ‘텔레그라프’, ‘타임즈’, ‘가디언’, 그리고 ‘인디펜던트’에 글을 기고했다. 영국 왕립 발레단의 주지사이기도 한 허프는 영국 왕립 음악원의 객원 교수, 왕립 북부 음악대학(Royal Northern College of Music)의 피아노과 과장, 그리고 뉴욕 줄리어드 음악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는 등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Schreker Ekkehard op.12.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
[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 1 in F-sharp minor, Op. 1 ]
Mikhail Pletnev plays 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 1 - video 1983
우리에게 익숙한 유명한 작곡가들 가운데 작품 번호 1번으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한 사람은 아마도 라흐마니노프가 유일할 것이다. 더군다나 실내악이나 독주곡도 아니고 관현악에 대한 이해와 피아노에 대한 노련함을 수반해야 하는 피아노 협주곡을 자신의 첫 출판작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어지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10대의 라흐마니노프는 세상을 향해 포효하듯 피아노 협주곡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에 앞장섰다.
작곡가는 학생 시절이던 1890년(불과 17세)부터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했는데, 특히 2악장과 3악장은 불과 이틀 반 만에 완성했다고 주장했다. 가히 한 천재의 웅비(雄飛)라고 말할 수 있는 작업 속도와 음악적 숙련도가 아닐 수 없다.
1892년 3월 17일에 열린 협주곡 초연은 대단한 화제를 일으키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피아노 솔로를 맡고 콘서바토리의 교수인 바실리 사포노프가 지휘를 했는데, 사포노프는 이 작품에 대해 수정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확신에 차 있던 젊은 작곡가는 완강하게 거부하며 오히려 지휘자의 템포를 비판했다. 만약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지 않고 차이콥스키의 뒤를 잇는 적자로서의 과감한 경력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학생으로서 이러한 뻔뻔스러움은 결코 용서되지 않았을 것이다.
차이콥스키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1번]에 가해진 비판을 처음에는 강력하게 거부했던 것을 그를 숭배했던 라흐마니노프 또한 그대로 답습한 듯한데, 작곡한 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개정 작업을 한 것 또한 닮아 있어 이채로움을 더한다. 게다가 차이콥스키가 자신의 협주곡을 옹호해준 피아니스트인 한스 폰 뷜로에게 헌정했듯, 라흐마니노프 또한 자신의 동료이자 선배인 위대한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질로티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알렉산더 질로티(좌측)와 라흐마니노프(우측)
이후 사포노프는 모스크바의 출판업자인 구테일에게 라흐마니노프를 추천하여 젊은 작곡가의 오페라인 [알레코]와 저 유명한 [전주곡 C샤프 단조]를 비롯한 몇몇 피아노 작품들,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출판하게 된다. 그러나 24세인 1897년에 교향곡 1번을 초연한 뒤 3년 동안 슬럼프에 빠졌지만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하여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되었고 이후 1909년 매머드급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작곡하여 피아노 협주곡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었다.
그러나 보통의 완벽주의자들이 자신이 어린 시절에 작곡한 작품들을 끊임없이 개작했던 것과는 달리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처녀작에 대해서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실제로 자신이 작곡과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해 성숙한 지식을 습득한다면 이 초기 협주곡도 매우 훌륭해질 수 있다고 1908년경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바 있는데, 아마도 세월의 때가 묻지 않은 어린 시절의 모습 그대로
를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그는 삶의 전환기를 맞이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작품 번호 1번을 개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라흐마니노프에게 있어서 삶의 전환점은 바로 1917년 9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를 영원히 떠나기 불과 몇 주 전에 해당한다. 모스크바의 한 아파트에 은둔하고 있던 그는 길거리에서 들리는 총소리를 무시한 채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작곡함과 동시에 [피아노 협주곡 1번]을 개작했고, 스톡홀름으로 가는 배를 타기 바로 하루 전에 새로운 버전의 악보를 구테일에게 보냈다.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연민, 혹은 새로운 땅으로 향하는 불안감과 도전의식이 작용했을까,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음악적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피아노 협주곡 1번을 꺼내들고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새롭게 구성하여 미래를 향한 발판으로 삼고자 대대적인 수술을 감행했다.
1917년 라흐마니노프와 두 딸들. 좌로부터 타티아나,
이리나, 라흐마니노프
그는 자신의 첫 출판 작품에 과감한 수정과 대담한 삭제를 가하여 원곡에 담긴 젊은 기운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고스란히 유지한 채 보다 섬세하고 정제된 작품을 만들어냈다. 무엇보다도 개정판에서 대단히 까다롭고 거대하게 스케일이 커진 첫 악장 카덴차에서 서두의 팡파르와 두 옥타브의 화려한 장식적 악구를 포함한 모든 주제가 하나로 통합된 모습이 특히 그러하다. 그리고 2악장에서는 텍스추어가 얇아진 대신 화성은 풍부해졌는데, 이러한 작업을 통해 슬라브적인 노스탤지어가 깃들어있는 쇼팽적인 느낌이 배가되었다. 가장 많은 수정이 이루어진 부분은 3악장으로, 거의 모든 부분이 바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 3악장에는 그의 [전주곡집 Op.32]나 [회화적 연습곡 Op.39]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화성과 고도의 테크닉, 작곡가 특유의 어법 등이 고스란히 담기게 되었다.
미국으로 건너온 라흐마니노프는 1919년 1월 뉴욕 카네기 홀에서 새로운 판본에 의한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모데스트 알츠슐러가 지휘하는 러시아 심포니 소사이어티와 함께 초연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역시 카네기 홀에서 아르투르 보단츠키가 지휘하는 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했다. 그는 이 1번 협주곡에 대해 “개정을 통해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습니다. 작품 안에는 젊음의 생기가 가득 담겨 있고 훨씬 더 원활하게 연주할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군요. 미국에서 내가 1번 협주곡을 연주하겠다고 하면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얼굴을 보면 오로지 2번과 3번 협주곡을 연주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아직까지도 1번 협주곡은 레어 레퍼토리로 남아있지만 진지하게 들어본다면 아름답고 강력한 음악적 메시지를 담고자 한 젊은 천재의 패기와 이를 위대한 유산으로 남기기 위한 중견 작곡가의 간절한 소망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917년 라흐마니노프와 그의 부인 나탈리아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의 형식과 분위기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1악장 첫 도입부에서 오케스트라 총주와 피아노의 옥타브 하강 패시지, 카덴차의 주제와 진행 방법은 자신이 그토록 칭송했던 그리그의 협주곡과 너무나 닮아 있다. 또한 차이콥스키로부터의 영향 또한 찾아볼 수 있는데, 첫 대목에서의 그 ‘운명을 향한 노크’로 일컬어지는 금관 모티브로 최초의 불꽃을 일으킨 뒤 흘러내리는 듯한 멜로디가 제시되는 모습이 그러하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탁월한 경력을 쌓아나가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대중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고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과 더불어 녹음 또한 하지 않았다.
모스크바에 있는 라흐마니노프 동상
1악장 : Vivace-Moderato-Vivace
1악장은 악장기호에서 그대로 드러나듯 라흐마니노프가 즐겨 사용했던 폭넓은 아치형의 구조로서, 제시부는 건강하고 서정적이며 매력적인 아이디어들이 넘쳐흐르다가 오케스트라 총주와 함께 처음의 피아노 옥타브로 되돌아온다. 2주제 바로 앞에 작은 카덴차와 보다 느리게(meno mosso)로 이어져 있는 것, 전개부 앞에는 연주자의 재량에 맡겨진 포르티시모 트릴이 강렬한 효과를 자아내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발전부는 한층 나이를 먹은 작곡가의 위대한 섬세함이 돋보이는 환상적인 간주곡 형식으로서, 모든 주제들로부터의 모티브들이 서로 미묘한 대화를 나눈다. 이 악장은 명백한 소나타 형식으로서 동경하는 듯한 주제로 돌아오며 대단히 긴 길이의 피아노 파트가 질서정연하게 소나타 형식으로 재현됨을 알리고, 악장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는 전통적인 솔로 카덴차가 상쾌한 더블 옥타브로 시작된다. 낭랑하고 호흡이 긴 리스트적인 불꽃과 작곡가 특유의 노스탤지어를 머금은 이 긴 카덴차는, 짧고 화려한 결말에 앞서 이 악장의 주제를 마무리한다.
Andante
2악장 :2악장은 다른 두 개의 악장에 비해 비교적 개작이 덜 가해졌다. 라흐마니노프는 어린 시절에 자신이 생각해낸 빛을 발하는 그 순수함과 싱싱한 리리시즘(lyricism, 예술적 표현의 서정성)에 만족해했기 때문이다. 시작부는 이전 악장을 모방한 혼과 목관 프레이즈에 의해 첫 악장과 밀접하게 관련지어져 있는데, 여기서 피아노 솔로에 의해 길고 변덕스러운 주제가 등장한다. 중간 부분의 열정적인 대목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조용하고 음울하다. 2악장과 3악장을 매끄럽게 이어나가는 대신 라흐마니노프는 찰나와 같은 휴지부를 두었는데, 전 악장의 감미로운 마지막 D장조에 뒤이어 느닷없이 날카로운 화음이 등장하며 피날레 악장은 질주하기 시작한다.
Allegro vivace
3악장 :3악장은 라흐마니노프가 그동안 익혀왔던 명료한 오케스트라 스코어링(scoring, 모음 악보의 형태로 악곡을 쓰는 일)과 불꽃을 튀기는 고도의 피아노 테크닉을 총동원하여, 왈츠풍의 작고 조증적((躁症的)인 단편들을 음표들의 폭풍으로 몰아넣는다. 중심 에피소드는 Andante ma non troppo로서 허세를 부리지 않는 E플랫 장조의 작은 음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바이올린 파트와 솔리스트 사이에 주고받는 응답이 매력적이다. 초판본에서 이 주제는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포르테로 돌아와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거대한 음조로 다루어지는데, 나이가 들고 현명해진 작곡가는 작은 음조는 그대로 작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빠르고 맹렬한 외적 단면들 사이에 꿈꾸는 듯한 에피소드로 남겨두었다. 진행의 명료함을 위해 라흐마니노프는 이후의 패시지들 가운데 여러 부분을 잘라냈고, 그 덕분에 음악은 단조로움과 애매함 없이 마지막을 향해 돌진하며 화려하게 끝을 맺는다.
글 박제성 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써 온 음악 칼럼니스트 공연, 방송, 저널활동, 음반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서울문화재단 평가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 [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 1 in F-sharp minor, Op. 1] (클래식 명곡 명연주)
Rachmaninoff - Piano Concerto No. 1 (Zimerman, Ozawa)
Stephen Hough Plays Rachmaninov First Piano Concerto Part. 1
Stephen Hough Plays Rachmaninov First Piano Concerto Part. 2
Lutoslawski: Variations on a Theme of Paganini - BBC Proms 2013 (Stephen Hough : Piano )
차이콥스키 ‘비창’ 교향곡
[Pyotr Ilyich T chaikovsky Symphony No. 6 B minor “Pathéque” ]
우수의 작곡가 차이코브스키
차이콥스키는 1840년에 태어나 1893년에 사망한 러시아 작곡가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재정 러시아의 말기로 극심한 혼란기이다. 1850년대 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 패한 후, 군사적, 사회적 후진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를 극복하려고 농노 해방 등 근대화가 시작하였으나, 이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해방된 농도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지 못하였고, 각지에서 소수민족의 소요가 일어났다. 경제 공황 속에 노동 운동이 과격화 되어 혁명의 싹이 커져가고 있었다. 차이콥스키가 사망한지 불과 8년 후인 1905년에 제 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정도였으니 그 시기의 러시아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차이콥스키 그는 평생 우울증을 앓았다. 그는 콜레라로 어머니를 14세 때 여의었는데, 그의 우울증의 원인을 거기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대하여 항상 고민하였다. 1877년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갑작스럽게 결혼했으나 그 결혼 생활은 파탄이나 오히려 그의 우울증은 극도로 악화되어 자살기도까지 하게 된다. 결국 차이콥스키가 유럽으로 요양을 떠나면서 그들은 헤어져 살게 된다. 이혼을 하지 않아 법적으로 부부관계는 그의 부인이 먼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후원자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의 예술을 사랑하고 지원했다
차이코브스키는 소심함, 신경질, 우울증 같은 성격을 가진 '우수의 작곡가'였다.
우울한 차이콥스키의 인생이었지만 그를 지켜준 것은 폰 메크 부인과의 관계였다. 폰 메크 부인은 그보다 9살 연상이고 많은 자녀를 가진 부유한 미망인이었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의 예술을 사랑하여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여 후원하기 시작했다.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그 중에는 결혼 생활에 고민을 토로하는 것도 있었다. 그 후 폰 메크 부인은 작품 의뢰 형식을 벗어나 아예 6000루불을 매년 연금으로 지불하는 형식으로 그에게 거액을 후원하게 된다. 그 조건은 서로 대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6000루불은 음악원 교수 초임의 10배에 해당되는 정도로 풍족한 금액이었다.
차이콥스키는 이후 경제적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게 된다.정신적으로도 폰 메크 부인에게 크게 의지하게 된다.약 15년 동안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총 1200통이 넘을 정도였다. 그런데, 부인과의 관계가 1890년에 갑작스레 끝나게 된다. 부인은 파산하게 되어 더 이상 후원금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부인의 경제 사정이 나빠진 것은 사실인 것 같으나 파산할 정도는 아니였다. 그 관계를 끊어야 할 만한 이유가 부인에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차이콥스키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초연 9일 후의 차이코브스키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러나 이미 그는 국제적 명성이 있는 작곡가로 더 이상 부인의 후원금이 꼭 필요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부인이 주는 정신적 지원은 대체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부인의 편지가 끊긴 후 그는 큰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 후 차이콥스키는 절망을 떨치고 작곡에 매진하게 되는데, 그 마지막 작품이 교향곡 6번이다. 초연은 1893년 10월 28일 페트르부르크에서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지는데 특이한 곡 형식과 절망적인 느낌으로 인해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초연 다음 날 차이콥스키는 작품이 청중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작품에 표제를 넣을까 고민하였다. 그때 동생이 비창(Pathéthique)이라는 이름을 제안하여 즉석에서 악보에 써 넣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이 교향곡이 <비창>이 된 것이다. <비창> 초연 후 차이콥스키는 9일 후에 갑작스레 죽게 된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콜레라라는 것이 그의 전기에 쓰여져 있다. 죽기 며칠 전에 끓이지 않은 물을 먹고 콜레라에 점염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러시아는 콜레라가 만연되어 있어 그가 아주 위험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도 자살설이 파다하였고 20세기의 연구가들도 그가 자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동성애의 추문을 피하고자 누군가가 그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가 죽기 직전까지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으니 병사가 맞다고 하는 이들도 여전히 있다. 이제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그는 그렇게 비극적으로 떠났다. 죽음에 앞서 폰 매크 부인의 이름을 여러 차례 불렀다고 한다. 그렇게 차이콥스키가 죽고 나서 <비창>이 다시 연주되었을 때, 이제는 관객들도 그의 뜻을 알았는지, 그의 죽음에 감명되었는지 연주회장이 울음 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1893년 차이코브스키의 장례식에 운집한 수많은 군중과 장례행렬
울음바다가 된 연주회장, 최고 걸작이라는 극찬
앞서 언급했다시피 <비창>은 특이한 부분이 많다. 보통 교향곡은 2악장은 조용하고 느리고 마지막 4악장은 웅장하고 빠르다. 그러나 <비창>은 2악장도 빠르고, 4악장은 조용하고 아주 음울하다. 또한 3악장의 마지막 부분이 마치 전곡이 끝나는 느낌을 주어 듣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실연에서는 3악장이 끝나고 박수가 나오는 경우가 많아, 박수가 나오지 않으면 그날의 관객 수준이 높다고 이야기 될 정도다. 1악장부터 음울한 1주제와 아름다운 2주제가 대조되고, 2악장도 밝은 앞부분과 어두운 뒷부분으로 나누어지며, 삶의 절정에 이른 듯이 쾌활한 3악장과 죽음을 앞둔 듯한 절망적인 4악장이 이어져 연주된다. 희열과 절망이 교차한 차이콥스키의 삶이 이 곡에 모두 들어있다.
Tchaikovsky - Symphony No 6 in B minor, Op 74 - Chung
Tchaikovsky: Symphony No. 6, Op. 74, "Pathetique" - mov. IV, Conductor: Vladimir Fedosey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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