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멜니코프 & 케라스
Trio with Isabelle Faust, Alexander Melnikov and Jean-Guihen Queyras
Faust/Melnikov/Queyras - R.Schumann/ from: Piano Trio 1 op.63 in d (live @Bimhuis Amsterdam)
Faust/Melnikov/Queyras - R.Schumann/ from: Piano Trio 2 op.80 in d (live @Bimhuis Amsterdam)
Piano Trio No. 2 in F Major, Op. 80 - Robert Schumann [HD]
Schumann: Pianotrio in g kl.t., op.110
낭만주의 피아노 트리오의 정점, 슈만 피아노 트리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로 이루어진 피아노 트리오는 실내악의 역사에서 늦게 등장한 편성이다. 18세기 중반 요한 쇼베르트(Johann Schobert, 1735?-1767) 같은 작곡가들이 피아노 트리오를 처음으로 선보였을 때, 이미 현악사중주는 형식적으로 거의 완성된 상황이었다. 반면 피아노 트리오는 건반악기와 현악기라는 이질적인 조합으로 이루어진 편성이었고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가 당시에 크게 변화하는 중이었기에 꽤 오랜 시간 동안 정체성에 혼동을 겪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트리오를 듣다 보면, 피아노가 주인공이고 바이올린/첼로는 충실한 반주자 역할에 머물러 있는 초기 모델에서 점차 모든 성부가 좀 더 동등하게 대화를 나누는 후기 모델로 움직여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의 콘티누오 역할에서 해방되어 눈부신 주인공으로 떠오른 건반악기(피아노)와 현악기가 만들어내는 묘한 긴장감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세 악기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현악사중주처럼 ‘조화로운 음향’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이는 피아노 트리오의 숙명적인 본질인 동시에 크나큰 매력이기도 하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의 손을 거치며 피아노 트리오는 규모가 커지고 내용은 다채로워졌으며, 그 결과 피아노가 이끄는 ‘가정음악’에서 세 악기가 대화를 나누고 경쟁을 펼치는 ‘전문가들의 음악’으로 변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는 상대적으로 실내악의 비중이 작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위대한 실내악 작곡가들은 새로운 확립된 피아노 트리오 형식에서 새로운 샘물을 길어냈다. 그 중에서도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의 피아노 트리오 세 곡은 19세기 낭만주의 피아노 트리오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차르트, 베토벤의 작품은 물론 슈베르트와 멘델스존의 트리오를 면밀하게 연구하고 심오한 비평을 남겼던 슈만에게 피아노 트리오는 편하고 친숙한 형식이었다. 그는 여기에 과거와 현재, 미래가 어지럽게 공존하고 있는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마음껏 펼쳐냈다. 슈만의 피아노 트리오, 특히 3번에서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세 악기는 드디어 가장 이상적인 균형과 독자적인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시대악기와 현대악기를 오가는 정상급 솔리스트들의 트리오
피아노는 앞서 언급했던 이질적인 본질 때문인지 전문적인 트리오 앙상블과 독주자들로 이루어진 앙상블이 엇비슷하게 균형을 이루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리고 코르토-티보-카잘스에서 안스네스와 테츨라프 남매에 이르기까지, 인상적인 슈만을 들려주었던 독주자 앙상블의 마지막 대열에서 우리 시대를 대표할 만한 눈부신 해석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들이 바로 이자벨 파우스트, 알렉산더 멜니코프, 쟝-기엔 케라스(이하 ‘파-멜-케 트리오’)다. 비슷한 연배의 세 사람은 1990년대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상급 독주자로 떠올랐는데, 세 명 모두가 경력의 초창기부터 대단히 다재다능하고 지성적인 연주자였을 뿐만 아니라 타고난 실내악 연주자이기도 했다.
이자벨 파우스트(Isabelle Faust)는 현대악기와 바로크 악기를 자유롭게 오가며 바흐와 베토벤, 슈만과 바르토크에서 모두 ‘좋은 취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스승 크리스토프 포펜(Christoph Poppen)의 ‘청출어람’이라고 할 만하다. 쟝-기엔 케라스(Jean-Guihen Queyras) 역시 콰르텟과 트리오를 모두 연주하는 전천후 실내악 연주자이며, 알렉산더 멜니코프(Alexander Melnikov)는 파우스트, 케라스와 각각 파트너로 연주하면서 트리오의 든든한 등뼈 역할을 하고 있다. 10여 년 전 세 사람이 함께 트리오를 연주한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냉철한 지성과 뜨거운 감성이 공존하는 비슷한 성향의 연주자들이 참 잘 만났다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이때 느꼈던 기대감은 하나도 남김없이, 아니 그 이상으로 현실화되었다고 해야겠다. 이들은 10년 넘게 꾸준히 트리오를 연주하면서 현대악기는 물론 시대악기까지 시도하면서 양쪽의 풍부한 유산을 자유롭게 공유했으며, 이를 통해 각자 독주자로서도 더욱 성장했다. 이렇게 21세기 들어 ‘파-멜-케 트리오’가 축적한 예술적 역량은 2011년에 녹음한 베토벤 트리오 음반에서 본격적으로 그 위용을 드러냈다. 시대악기를 연주한 이 음반에서 세 사람은 변화무쌍할 정도로 음악적 주도권을 바꿔 맡는데, 이것이 단지 독주자들의 ‘밀당’이 아니라 전체적인 해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놀랍다.
파우스트-멜니코프-케라스의 눈부시게 유기적인 슈만
쟝-기엔 케라스(Jean-Guihen Queyras)
그리고 2014년에서 베를린에서 녹음한 슈만 시리즈(협주곡도 함께 녹음했다)에서 세 사람이 또 한 번 음악적 비상(飛上)을 이루었다. 이는 아마도 세 사람이 모두 뛰어난 슈만 해석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특히 파우스트는 경력 초창기부터 훌륭한 슈만 연주자였다. 그녀의 슈만 바이올린 소나타 녹음은 나온 지 15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감동적이다). 파우스트, 멜니코프, 케라스의 슈만 연주는 무엇보다도 기존의 연주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롭게 파고들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들은 슈만에서 섬세한 디미누엔도나 리타르단도, 템포 루바토 등을 많이 구사하는데, 들을수록 모든 세부가 거시적인 악곡 해석과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 사람의 연주는 세 곡 중 가장 지명도가 떨어지고 ‘어렵다’고 알려진 트리오 3번 G단조에서 가장 인상적인데, 당김음과 복합적인 리듬으로 가득한 그 복잡한 구성을 명쾌하게 드러내는 해석,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강한 포르티시모를 울리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드라마를 구축할 수 있는 음향, 절제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빛을 발하는 비브라토를 듣는 일은 참으로 즐거운 경험이다.
‘파-멜-케 트리오’의 연주를 듣기 전까지, 나는 종종 슈만이 왜 그렇게 돋보이지 않는 중음역에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궁금해하곤 했다. 세 사람은(그 중에서도 특히 이자벨 파우스트는) 우리에게 슈만의 실내악이 연주회장 높은 곳으로 퍼져나가며 노래하는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약하게 들리는 패시지에서 가장 큰 매력을 뿜어낸다는 것을 알려준다. 안스네스와 테츨라프 남매의 슈만이 마치 환영 속을 헤매는 긴 꿈과도 같다면, ‘파-멜-케 트리오’의 슈만은 계속 변하는 풍광을 찬찬히 살피며 천천히 올라가는 산행(山行)과도 같다. 나는 이제까지 이처럼 유기적인 슈만 트리오 해석을 들은 적이 없다. 로베르트 하벤 쇼플러(Robert Haven Schauffler, 1879-1964)는 직접 쓴 슈만 전기에서 ‘슈만의 음악, 특히 실내악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연주자들이 필요하다’고 쓴 바 있다. 또 이자벨 파우스트는 ‘시대악기를 연주한 다음에 현대악기로 되돌아가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주하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들이 한국에서 현대악기로 펼쳐낼 슈만 피아노 트리오는 그 말들의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Isabelle Faust, Alexander Melnikov - Beethoven: Violin Sonata #10 In G, Op. 96 - 1. Allegro Moderato
"Spring" Sonata (Beethoven) / Isabelle Fa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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