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굼부리 분화구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사려니 숲길'로 들어섰다.
사실, 작년에도 딸과 조카와 함께 제주 여행을 왔었는데, 이곳 사려니 숲길로 들어섰다가 얼마나 추웠던 지...
그 기억에 우리 딸은 오늘 다시 이곳을 방문함을 탐탁해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주의 숨은 비경 31경중 하나라 하니 일단 가보기로 했다.
사려니 숲은 전형적인 온대성 산지대에 해당하는 숲길 양쪽을 따라 졸참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산딸나무, 편백나무, 삼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자라는 울창한 자연림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오소리와 제주족제비를 비롯한 포유류, 팔색조와 참매를 비롯한 조류, 쇠살모사를 비롯한 파충류 등 다양한 동물도 서식하고 있어, 청정한 공기를 마시며 이 숲길을 걸으면 스트레스 해소에 좋고 장과 심폐 기능이 향상된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된 곳이다.
2009년 7월 제주시가 기존의 관광 명소 이외에 제주시 일대의 대표적인 장소 31곳을 선정해 발표한 제주시 숨은 비경 31 중 하나이기도 하고...
비자림로는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에서 봉개동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도로이며, 사려니숲길은 비자림로의 봉개동 구간에서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의 물찻오름을 지나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의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는 숲길이다. 총 길이는 약 15km이며 숲길 전체의 평균 고도는 550m....
오호~그러고 보니, 작년에 갔었던 '비자림'과 사려니 숲길이 서로 이어져 있는 거였네~
비자림을 방문해서는 그리 춥지도 않았고 사철 푸른 숲에 대단히 만족스런 방문이었었거늘...
역시 자연 탐방은 그날의 날씨가 관건이다.
차에서 내려 숲길로 들어섰다.
왠지 사람도 없고,...입구에 가드레인을 쳐놓은게...지난 폭설에 아직까지 패쇄된것은 아닐까...순간 걱정스러웠지만
방송도 나오고 몇 몇 사람들이 옆으로 들어서 가기에 우리도 따라 들어섰다.
작년에 방문했었던 출입구가 아니란건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단체 버스로 오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온다면 이쪽이나 반대편 출입구로 들어와서 이곳 또는 반대편으로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온전하게 숲의 정기를 마시며 제대로 힐링하는 코스이다.
오늘도 우리를 맞은 사려니 숲길은 여전히 추웠다.
아니, 춥기만 한것이 아니라 하늘을 찌를듯 솟아있는 나무들때문인 지 햇볕이 가려진 탓에 숲길이 꽝 꽝 얼어붙어있기까지 하다.
그래도 하얗게 쌓인 눈길을 걷는다는게 왠지 느닷없이 나타난 다른 세상에 들어선것 같아 살짝 흥분이 된다.
그렇게 한참을 눈쌓인 숲길을 걸어 들어갔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까지 들어가 말끔하게 씻어내 주는것만 같아 더없이 기분이 상쾌하다.
하얀 길섶의 진한 초록의 싱그러움도 이색적인 느낌이 들고....
문득 지난 주 폭설에 온 나무가지가 흐드러지도록 눈이 쌓여있음을 순간 상상해 보았다.
초록과의 대비가 또 다른 설경의 멋짐을 자아내며 크리스마스 기분에 흠뻑 젖어 들었을 것 같은 예감이다.ㅎㅎ
어느 정도 숲을 걷다가 우린 발길을 돌렸다.
쌀쌀한 추운 날씨에 마냥 눈쌓이고 얼어붙은 길을 걸어들어 가고 있자니 힐링이나 낭만보다는 춥다는 느낌이 더 들어서...
숲을 나와 사려니 숲길 가까이 있는 '절물 휴양림'으로 갈까...잠시 망설이다
이중섭 거리에 가기로 결정을 했다.
작년에 산악회 회원들과 한라산 등반을 하면서 묵은 절물 휴양림은 숲도 조성이 잘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시간여면 다녀올 수 있는 '절물 오름'도 있어서
아주 매력적인 곳이기에 잠깐 맘이 흔들렸었지만, 날씨가 추워서 차라리 한라산을 오르면 모를까 더이상 숲길은 그만 걷기로 한것이다.
이번 여행은 온전히 우리 딸을 위한 여행이라....ㅎㅎ
이중섭 미술관에 도착했지만 뜻밖에도 주차장이 만원이라 되돌아 나왔다가 근처 길가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 참을 걸어 이중섭 미술관으로 갔다.
미술관 근처 거리 풍광이 앙증맞다.
이중섭 생가가 보인다.
제주의 전형적인 초가 지붕에 주변에 어우러 지는 흐드러진 겨울 나무들의 가지가 멋스럽다.
생가를 지나면 바로 이중섭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화가 이중섭은 1916년 9월16일 출생하여 1956년 9월6일 사망하였다.
불과 40세의 나이에 힘들었던 삶을 뒤로하고 세상을 뜬것이다.
경력
1952 |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 단원 |
1950 | 원산 신미술가협회 회장 |
1946 |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 |
1946 | 북조선 미술동맹 회원 |
1942 | 미술창작 작가협회 회원 |
1939 | 자유미술협회 회원 |
수상
1978 | 은관 문화훈장 |
1973 | 자유미협전 태양상 |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는 초입엔 그의 대표작인 소의 그림이 대형으로 사진 제작되어 걸려있다.
어찌보면 그의 실지 작품도 아닌 사진인 이 작품이 다 인것 처럼 느껴지기도 할 정도로 미술관 소장품은 초라했다.
아주 작은 2-3호 정도의 소품 몇점과 팬화가 다 였으니까...
그리고 그의 아내의 안타까운 편지들과 그가 보낸 절절한 사랑이 담긴 편지 몇 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 미술관의 소장품 치고는 너무나 초라해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이중섭 (李仲燮)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의 한 사람이다. 호는 대향(大鄕).
부유한 농가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8세 때 평양 이문리에 있던 외가에 머무르며 종로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임용련'으로부터 미술지도를 받았다. 임용련은 예일대학교 미술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로 학생들에게 향토적인 주제에 의한 미의식을 가르쳤고 이는 이중섭의 화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중섭은 18세에 학교건물을 새로 짓자는 이유로 오산학교 본관 화학실을 불태우기도 했으며 일제의 국어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자모로 구성을 시도했다. 이무렵 그는 들에 있는 소를 관찰하며 스케치에 열중했고 오산학교를 졸업할 때는 앨범의 서명란에 한반도를 그리고 현해탄에서 불덩이가 날아드는 그림을 그려 소동을 빚기도 했다.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 미술학교에 들어갔다가 문화학원에 재입학해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자유로운 경향을 공부했다. 이때 이정규·김환기·유영국·김병기·문학수 등과 사귀었다. 1938년부터 일본 추상 그룹인 미술창작가협회에 참여했으며 1941년에는 협회상인 태양상(원명 조선예술상)을 받았다.
그해 김환기·유영국·문학수 등과 서울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창립전을 가졌다. 프랑스 유학을 원했으나 형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1943년 귀국하여 2년 후 문화학원 후배인 야마모토[山本方子]와 결혼하여 원산에 정착해 살면서 8·15해방을 맞았다.
1946년 북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여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 凝香〉 표지그림을 그린 후 구상의 사건에 연루되어 고통을 받기도 했다. 그뒤 불우아동들의 무료강습소에서 그림을 가르쳤다. 1950년 겨울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부산·서귀포·통영 등지로 전전하며 피난살이를 했다.
1952년 국제연합(UN)군 부대 부두노동을 하며 양담배갑을 모아 은지화를 제작했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고 이듬해 부인을 만나러 일본에 1차례 건너갔다온 것을 제외하고는 만나지 못했다. 궁핍과 고독의 나날을 보내면서 종군화가로서 몇 차례 단체전에 출품했고 1953년에는 통영에서 유강렬과 함께 지내며 다방에서 40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듬해 진주를 거쳐 상경했고 박생광의 초대로 진주로 내려가 작품 활동을 했다. 서울 누상동에 거주하면서 국방부·대한미술협회(대한미협) 공동주최의 대한미협전에 출품했다. 1955년에는 미도파 화랑과 대구의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해 7월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 대구의 성가병원에 입원했다. 친구들의 배려로 여러 병원으로 옮겨다니며 치료해 얼마간 호전되었으나 무단으로 퇴원한 후 불규칙한 생활로 병세가 악화되어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1957년 조각가 차근호 제작으로 묘비가 세워졌다 (펌/ 다음백과)
환상적인 바다
1938년 일본인 화가들이 창립한 단체 지유미즈츠가쿄카이 (自由美術家協會)의 2번째 공모전 (이하 지유텐)에 응모하여 첫 출품에 협회상을 받았으며,동시에 평지들의 대호평을 획득했다.
이무렵 미술학교 후배인 일본 여성 마사코를 알게 되어 사귀기 시작했다.
1940년졸업. 도쿄에 머물면서 제작에 몰두. 두해전에 이어서 토오쿄오와경성에서 열린 4번째 지유텐에 <서있는 소>, <망월>, <소의머리>,<산의 풍경>을 내어 커다란 찬사를 받다. 휴가로 원산에 있으면서 연말부터 마사코에게 그림만으로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세 사람 * 18.2×28cm * 종이에 연필 * 1942∼5년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대향 이라는 호를 지음. 원산에서 휴가로 돌아와개성박물관에 다니며 스케치에 몰두했다. 1942년 27세 6번째 지유텐에 회우로서, <소와 아이>, <소묘>, <목동>,<지일(遲日)> 등을 출품했다. 경성에서 식민 당국의 종용으로신미술가협회로 바뀐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도 했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 등에서 일하기도 하면서, 그림은 거의 못 그리게 되었다. 1945년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홀로 현해탄을 건너 원산으로 와서 결혼하였다.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고 분가하여 따로 집을 마련해 살다가 소련의 대일 폭격을 피해 다시 이사했는데, 여기서 8. 15를 맞이하였다.
마사꼬에게 보낸 그림엽서 적십자병원에서 그린 마지막 그림
1946년, 31세때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작업 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했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음.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를 그렸는데. 詩 내 용과 더불어 표지 그림에 대해 북조선문학가동맹의 규탄을 받아 문초 받았다. 이후 부인이 일본인 이라고 하여 친일파로 분류된 점과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수 없다고 하면서 자주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리기도했다고 한다. 8월 평양에서 열린 8. 15 기념전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출품. 이를 본 소련인 평론가의 호의 어린 평가를 받기도 했다. 큰 아들 태현 태어났다. 그리고 1949년 34세 때는 차남 태성이도 태어났다.
소를 든 사람, 1942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오인한 소 주인에게 고발당하기도 했다.
원산에서 가까운 강원도 금성에 살던 화가 박수근과 친하게 되었고. 1950년 35세,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고 10월에는 집이 폭격으로 없어졌다. 12월 초바뀐 정세에 따라 부인, 두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범일동의 창고에 거처를 정하고,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에 잠시 종사했는데, 이때 껌을 훔친 소년을 잡아 마구 때리는 군인을 말려도 듣지 않자 화가나 군인을 때렸는데, 나중에 군인이 패를 지어 보복으로 휘두른 총개머리판에 맞아 머리에 큰 상처를 입다.
흰 소 * 종이에 유채 * 34.5×53.5cm * 1953년 무렵 *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얼굴을 맞댄 가족. 1953.
1951년 36세 초에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왔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 서귀포에서 만난 주민이 방을 내주어서 안착하게 된다.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는 한편, 게를 잡아 반찬으로 했다. 선주에게 사례하기 위해 6폭의 병풍 형식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 12월 다시 부산으로 와서 오산학교 동창을 만나 범일동에 있는 판자집을 얻게되고 일본의 처가로부터 소액의 원조금이 왔다. 1952년 37세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하여 3. 1절 경축미술전에 작품을 내었다.
이중섭 자화상 1955년.
그러나 가난이 계속되어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곧 일본의 친정으로 가고 이별하게 되었다.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편지가 시작되었다. 이중섭은 노래를 잘 불렀다. 테너 목소리로 쩌렁쩌렁 불렀다는 것이 친구 김병기의 기억이다. 그가 잘 부르던 노래는 둘인데, 독일민요 ‘소나무’와 이광수 작시 ‘낙화암’이었다.
이중섭이 가족과 생이별을 한채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중섭의 지나치리 만큼 둔감한 경제적 불감증, 고향후배에게 사기를 당하여 처가가 많은 빚을 지게되었고 일본에서 이중섭의 능력으로는 그 빚을 감당하기가 불가능했던 점, 당시의 미묘한 한일관계로 인한 출입국의 어려움 등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부산 남포동 - 평생지기 화가 한묵과 함께
1954년 서울로 가서 부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개인전을 열 계획했다.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달과 까마귀외 2점을 내다. 친지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개인전 준비에 몰두,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연말에 입원, 치료도했다. 이 무렵 자신을 베껴먹으려는 일단의 사람들에 대하여 다방의 탁 자를 집어던지면서 대갈일성한 일이 있었고, 간염이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5년 40세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 개최, 유화와 은박지그림을 비롯한 소묘 등으로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박지그림이 춘화라고하여 철거 당하고, 그림 값을 떼이기도 하고, 저녁마다 술로 지내다 빈털털이가 되어 자학과 외로움으로 기진맥진에 빠졌다.
물고기와 노는 세아이
1955년 초 서울에 이어 5월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보려던 의도는 산산이 부서진다. 밀항을 해서라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자포자기에 빠져 그토록 열심히던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정신 이상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이에 전람회를 열기 위해 대구에 머물 당시 친구에게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그린 그림이다. 사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이중섭만큼 많은 화가도 드물 정도다. 가족을 그린 그림에는 꼭 자신이 등장한다. 하지만 자기만을 그린 것은 한 점도 없다고 여겨졌는데, 이 작품이 발굴되었다.
부부
달밤
1956년 41세,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다시 음식을 거절하기 시작.청량리뇌병원에 입원.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했으나 곧 다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
미국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에 은지화 3점이 소장되기로 결정되었으나, 9월 6일 홀로 숨을 거두었다. 3일 뒤 친지들이 이를 알고 장례를 치루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그를 묻었다. “이중섭 화백이 돌아가기 직전에 구상 시인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에는 화가가 가톨릭에 귀의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2004년 8월18일 뉴스가 있었다.
화가는 편지에서 “제(弟)는 여러분의 두터운 사랑에 쌓여 정성껏 맑게 바로 참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며 “구형의 지도를 구해 가톨릭 교회에 나가 弟의 모든 잘못을 씻고 예수 그리스도님의 성경을 배워 깨끗한 새 사람이 되고 싶다”고 고백했다. 화가가 작고하기 직전인 1955년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는 200자 원고지 한장 분량으로, 뒷면에 ’具常兄前 李仲燮製’(구상형전 이중섭제)라고 적혀 있다. 구상시인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이 화백은 시인의 인품을 높이 사는 의미에서, 비록나이는 어리지만 그를 ’형’으로 높여 불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달과 까마귀
이중섭의 그림 '황소'는 2006년 35억 ~ 45억원 가격대로 경매에 오르기도 했는데, 정작 생전에는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부두 막노동으로 생계를 잇다가 이마저도 건강 문제로 여의치 않게 되자 당시 담배갑에 들어있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 또한 유명하다. 간신히 1955년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전시회를 열었지만, 1년 뒤에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이중섭의 무덤은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묘지에 있다. 1960년 부산 로타리다방에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리다. 1972년 서울 현대화랑에서 15주기를 기념하는 대규모의 유작전과 작품집이 마련되다. 1973년 시인 고은이 여러 사람의 증언을 취재한 평전이 연재를 거쳐 출판되다. 1978년 문화훈장이 수여됨. 1986년 30주기를 기려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화집이 발행됨. 1996년 제주도 서귀포시에 살던 집을 복원하여 기념관으로 개관하다. 1999년 1월 문화관광부가 이달의 문화인물로 이중섭을 선정하다. 이를 기념하여 이중섭 특별전이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개최되다.
<펌/ 까페 :중년의 사랑 그리고 행복>
전시장을 나와 기념품가게에 들러 이중섭 그림이 그려진 소품들을 구경했다.
작은 그의 팬화들은 멋진 또 다른 작품이 되어 눈을 현혹시킨다.
이것 저것 만지작 거리다가 엽서 몇 장을 사들고 나왔다.
그의 생가로 들어섰다.
돌담이 가즈런히 쌓여진 골목에 흐드러진 나무가지들과 담을 휘덮은 담쟁이 넝쿨이 얼마나 멋지고 낭만적인 지...
그의 처절하도록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짧은 삶은 저 멀리 흐터져 버리는것 같다.
이중섭 생가를 나와 앙증맞은 상가들로 밀집된 거리를 걸었다.
조그만한 가게들을 들락거리며 구경하는 재미가 솔솔하다.
하지만 주말에만 선다는 거리 장이 문을 닫아 서운한 맘을 가지고 발길을 돌려 나왔다.
조금 더 올라가면 올레 시장이 나온다고 하는데...
가까이 다가보니 전통시장이라기 보다는 식당가들이 즐비하다.
우린 작년에 너무나 맛있게 먹었던 제주 돼지 바베큐 식당을 찾아가느라 그냥 가던 발길을 돌렸다.
맛있는 돼지고기와 쏘시지 바베큐를 먹었지만 아무래도 값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먹을건 다 먹어야지~ ㅎㅎ
호텔로 바로 들어갈까 생각하다가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어가 시간을 즐겼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다른 여행객을 보는 재미도 있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역시 제주의 바람....이름값을 한다.
Jacques Offenbach (1819~1880)
Deux Ames Au Ciel o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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