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 클래식 2015년)

뮌헨필하모닉&게르기예프&백건우/2015.11.23.월/예술의 전당

나베가 2015. 11. 22. 00:30

 

 

 

■ Program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 About the Concert
 
전설의 거장 첼리비다케가 남긴 게르만의 전통적인 사운드를 묵묵히 지키는 뮌헨 필하모닉이 2년 만에 네 번째 내한 공연(1997 메타, 2007 틸레만, 2013 마젤)을 갖는다. 제임스 레바인, 크리스티안 틸레만, 로린 마젤에 이어 새로운 수장이 된 ‘마린스키의 차르’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휘봉을 잡고 ‘건반 위의 구도자’ 백건우가 협연한다.
 
소련이 붕괴된 직후 많은 러시아 예술가들이 좌절해 있는 동안 게르기예프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동토의 예술 지형을 완전히 뒤바꿨다. 이러한 노력으로 이제 오늘날의 러시아 예술을 말할 때 ‘볼쇼이’보다는 ‘마린스키’가 먼저 떠오르게 됐다는 점에 대해 게르기예프는 무한한 자긍심을 가진다. 그가 곧 러시아 클래식의 현재다.
 
게르기예프는 뮌헨 필과의 한국 여행에서 자신의 전매특허와도 다름없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을 지휘한다. 2000년 필립스에서 발매한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의 녹음을 먼저 들어본다면 악단에 따라 달라지는 게르기예프 관현악의 묘미를 만끽할 것이다.
 
백건우는 이번 공연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한다. 1999년 매리너 & ASMF 이후, 백건우가 맞이한 해외 단체 국내 공연으론 16년 만의 ‘황제’ 협연이다. 백건우가 ‘황제’를 국내 악단과 자주 연주하던 시기는 1990년대 중반이다. 1995년 서울시향 협연을 비롯해 이듬해 지방 공연장에서 큰 소문 없이 ‘황제’를 연주한 그는 그동안 무수한 협연 기회에서 ‘황제’를 아껴 놓았다. 최근 그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탐구에 집중하고 있다. 6월 드레스덴 필과 베토벤 협주곡 3-4번을 연주한 데 이어 게르기예프 & 뮌헨 필과 ‘황제’로 베토벤 협주곡 연구의 여정을 마감한다.
 
 
■ About the Orchestra
 
독일 전통 사운드의 수호자, 바이에른 클래식의 중심 뮌헨 필하모닉
Die Munchner Philharmoniker

 
현대 뮌헨 음악문화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893년 문헌학자 프란츠 카임에 의해 설립되어서 ‘카임 오케스트라’로 출발한 이 악단은 창립 초기부터 당대 작곡가들의 초연작을 대거 소개하며 공격적 프로그램으로 명성을 굳혔다. 특히 1910년 말러 자신의 지휘로 초연된 교향곡 8번은 토마스 만, 버나드 쇼, 레오폴드 스토콥스키 등 신구 대륙 문화계의 지성들이 객석을 가득 채운 당대 문화사의 일대 사건으로 꼽힌다. 또한 지크문트 폰 하우제거가 재임하던 시기에는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기존의 린츠판본이나 빈 판본이 아닌 자필악보에 충실한 편집으로 재간행한 원전판 연주의 보급에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나치 집권 이후 악단의 성향이 친 나치로 기우는 바람에 1944년 전황의 악화로 활동 정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으나 전후 미군정의 허가를 받고 새로 부임한 상임 지휘자인 한스 로스바우트의 지휘로 뮌헨 대학 강당에서 연주회를 진행했다. 카임 오케스트라 시절 공식 데뷔 무대를 가졌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도 종종 객원 지휘자로 출연해 공연 수익금을 악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로스바우트의 후임으로는 프리츠 리거와 루돌프 켐페가 차례로 상임 지휘자 직책을 맡았고, 1979년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상임 지휘자에 부임하면서 악단의 명성이 급상승했다. 첼리비다케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리허설과 상업적인 녹음 거부, 돌발적인 언행 등으로 악명이 높았으나, 악단의 연주력과 표현력을 끊임없이 연마해 세계적인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관현악의 사제’로 불리며 예술적 완성도에 있어서 일체의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첼리비다케로 인해 뮌헨 필은 ‘우월’ 하다기 보다는 ‘독특’한, 다른 악단과는 비교를 쉽사리 허용치 않는 유럽 관현악계의 이단아로 새롭게 자리 매김하게 된다. 첼리비다케는 공식적인 상업 녹음을 거의 하지 않았으나, 바이에른 방송을 중심으로 연주회 중계가 활성화되면서 그 음원을 무단으로 복제한 해적판까지 만들어지는 등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첼리비다케가 1996년에 타계한 뒤에는 3년 동안 객원 지휘 체제로 운영되다가 1999년 제임스 레바인이 창단 후 최초의 미국인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다. 레바인은 2004년에 보스턴 교향악단으로 옮길 때까지 직책을 유지했으며, 후임으로 독일 음악의 적자(嫡子)이자 수호자로 불리는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부임했고 2012-13 시즌부터 거장 로린 마젤이 악단을 이끌며 독일 정통 사운드와 마젤의 국제적 사운드의 조화로 새로운 명성과 도약을 쌓았다. 그리고 2015년 가을부터 ‘마린스키의 차르’ 게르기예프가 새 감독으로 임명되어 독일 클래식에 새로운 역사를 함께 만든다. 2차 대전으로 톤할레가 파괴된 후 레지덴츠 궁전이 있는 헤르쿨레스잘과 독일 박물관 등을 공연장으로 사용했으나, 1985년에 가슈타이크 필하모니가 완공되면서 상주악단이 되었다.
 
 
■ About the Couductor ㅣ Valery Gergiev
 
카리스마의 제왕, 마린스키의 차르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

 
마린스키 극장 예술 총감독 겸 수석 지휘자. 런던 심포니 수석 지휘자.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 예술학부 학부장이자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조직위원회 위원장이다.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 명예 총재와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 ‘백야의 별’ 음악제 총감독이다. 로테르담 필하모닉에서 게르기예프 음악제(네덜란드)를, 모스크바에서 부활절 페스티벌을 창설했고 각각 예술감독과 음악감독으로 활약 중이다. 1997년에 급서한 게오르그 솔티의 후계자로 월드 오케스트라 포 피스의 감독도 맡고 있다.
 
게르기예프는 1988년부터 마린스키 극장 감독에 취임하면서 수많은 세계적인 명성의 가수를 육성하고 세계 음악계에 배출했다. 게르기예프의 지휘 하에 마린스키 극장은 오페라와 발레 레퍼토리를 크게 넓혀 27년이 지난 지금은 18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고전의 걸작들과 컨템포러리를 자랑한다.
 
게르기예프는 마린스키 이외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빈 필, 뉴욕 필, 로테르담 필, 라 스칼라 필을 정기적으로 객원 지휘하고 있다.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 네덜란드, 폴란드 정부로부터 훈장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수훈했다. 2013년 뉴욕 카네기 홀이 주도한 전미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 오브 아메리카 감독에 취임했고 2015년 가을부터 뮌헨 필 수석지휘자에 취임한다. 2015년부터 일본 퍼시픽 뮤직 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맡았다.
 
 
■ About the Soloist ㅣ Kun-woo Paik (Piano)
 
백건우 | Kun-Woo Paik
 
서울에서 태어난 백건우는 10살 때 한국 국립 오케스트라와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으로 첫 콘서트를 가졌다. 다음 해에 그는 무소로그스키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을 그의 이름을 건 연주회에서 연주했다. 15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위대한 전통을 잇고 있는 로지나 레빈을, 1967년 런던으로 건너가 일로나 카보스를 사사하였고 같은 해 나움버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1969년 백건우는 리벤트리 콩쿠르의 결선에 올랐으며 같은 해 세계적인 권위의 부조니 콩쿠르에서 골드 메달을 받았다.
 
이후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디아파종상 수상으로 더욱 명성을 높였으며, 1972년 뉴욕의 링컨 센터에서 처음으로 라벨의 독주곡 전곡을 연주하였으며,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 이어 런던과 파리에서 연주함으로써 라벨의 뛰어난 해석자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화려한 경력과 함께 백건우는 1992년 1월, 스크랴빈 피아노 작품집 앨범으로 디아파종 상을 수상하였으며, 1993년 낙소스 레이블로 발매된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5개 전곡 녹음으로 다시 한 번 디아파종 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이외에도 버진 레이블로 발매된 “헝가리안 랩소디”는 그라모폰 시상식에서 크게 호평 받았다. 그리고 2000년 데카와 계약을 맺은 후 첫 앨범으로 부조니가 편곡한 바하의 오르간곡과 프랑스에서 주요상을 받은 두 번째 앨범 포레의 소품집이 출판되어 또 한 번 음악계의 찬사를 받았다. 또한 그는 안토니 비트 지휘의 바르샤바 필하모닉과 연주한 쇼팽의 피아노 작품 음반을 발매하였다.
 
그는 2000년 10월 중국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초청된 한국의 첫 번째 아티스트이다. 2003년 프로코피예프의 사망 15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그 때 그는 베를린, 밀라노, 부다페스트, 베이징, 도쿄, 서울, 니스, 세빌리아 등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2004년 11월 그는 중국 필하모닉과 라흐마니노프 콘서트에 초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펜데레츠키 지휘 아래 그의 새로운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초청 공연을 가졌다. 2005년 그는 데카에서 베토벤 소나타 32작품을 녹음하기 시작하여 첫 번째 볼륨이(소나타 16~26번) 2005년 8월에 출시되었다. 2007년 그는 베토벤 소나타 32작품 녹음 완성을 축하하는 뜻에서 중국과 한국에서 여덟번의 연이은 성공적인 리사이틀을 열었다.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면서 연주에 전념하고 있는 그는 200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기사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국내의 호암재단으로부터 <호암예술상>을 수상하였고, 아셈 회의를 기념하는 음악회에서 재일 북한국적의 지휘자 김홍재와 부조니를 협연하였다.
 
2009-2011년 시즌에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Israel Philharmonic Orchestra),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Frankfurt Radio Symphony Orchestra), 파리 오케스트라(Orchestre de Paris)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과의 협연뿐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리사이틀,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한 4대의 피아노 연주회, 리스트 탄생 200주년 리사이틀을 가졌다. 2010년에는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변주곡집(Brahms Piano Concerto No. 1 & Variations)을 발매했고, 2011년 9월, 그리고 최근 2013년 6월 한국 섬마을을 찾아 지역 주민을 위한 음악회인 ‘섬마을 콘서트’ 투어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으며, 2014년 7월 24일에는 제주도 제주항 특설무대에서 ‘세월호 사고 100일 추모공연 - 백건우의 영혼을 위한 소나타’로 온 국민의 뜨거운 성원을 받았다.

Beethoven, Piano Concerto No.5, Op.73 'Emperor'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Arturo Michelangeli piano

Sergiu Celibidache cond.

Paris Symphony Orchestra

 

 

1809년 초, 베토벤의 생활은 비로소 든든한 반석 위에 올라선 것처럼 보였다. 일단 3월 1일부터 '평생 연금'을 받기 시작했는데, 세 명의 젊은 고위 귀족, 로프코비츠 공작, 킨스키 공작, 루돌프 대공이 그에게 매년 4천 플로린이라는 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다만 베토벤이 '빈 혹은 오스트리아 황실 폐하의 다른 세습 영지를 거주지로 하는 대신'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로써 안정적인 재정 기반을 확보한 베토벤은 들뜬 기분에 여행이나 결혼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고, 특히 친구인 글라이헨슈타인 남작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신붓감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 해 5월,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바이에른 침공에 대한 대응에 나선 프랑스군이 에크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다음 내친 김에 빈까지 진격해 왔고, 그러자 오스트리아의 왕족과 귀족, 부유층들은 서둘러 빈을 탈출했다. 뒤에 남은 시민들이 나름대로 도시를 수호하겠다고 나섰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무기가 턱없이 부족해서 극장에 있던 총과 창, 칼 등의 소품들까지 꺼내 왔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빈은 포위된 지 일주일 만인 5월 13일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장대한 스케일, 찬란한 색채

빈에 남게 된 베토벤의 상황은 절박했다. 적군의 포탄이 쏟아지는 동안에는 약해진 청력을 보호하기 위해 책상 밑으로 들어가 베개를 머리에 두르고 있어야 했다. 또 프랑스군이 도시를 점령한 뒤에도 한동안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으로 인한 전투가 계속되어, 그는 사방을 뒤덮은 전쟁의 참화와 진군의 북소리, 군화소리로 인해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후원자들이 모두 도시를 떠나면서 경제적 원조가 끊기는 바람에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힘겨웠는데 피난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가까스로 동생의 집에 의탁한 그는 여름에 쓴 한 편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가장 심각한 형태의 비참함을 겪고 있었습니다. 5월 4일 이후 나는 일관성 있는 작품을 거의 하나도 쓰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단편 이것저것뿐입니다. (...) 바로 얼마 전에 내가 쌓아올린 생존의 기반이 불안정해졌습니다. (...) 주위에서는 온통 파괴적이고 무질서한 행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온통 북소리, 대포소리, 모든 형태의 비인간적인 처참함뿐입니다.”

 

그의 마지막 협주곡은 바로 이러한 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9월에 베토벤은 자선 연주회에서 <영웅 교향곡>을 지휘했고, 전황이 정리되어 감에 따라 빈의 질서와 생활도 점차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아갔다. 일련의 상황은 10월 14일 쇤부른 궁전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단락되었고, 베토벤도 다시금 기지개를 켰다. 그 전란의 와중에 작곡된 것으로 알려진 <피아노 협주곡 제5번 E♭장조>는 베토벤 최고의 역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의 장대한 스케일, 왕성한 추진력, 찬란한 색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심지어 베토벤 자신조차도 이 정도로 대담하고 격렬한 협주곡은 쓴 적이 없었다. 그는 이 곡에서 특유의 강력한 피아니즘을 그 어느 때보다 과감하게 펼쳐 보였고, 그 결과 이전의 <피아노 협주곡 제4번 G장조>에 이어 다시 한 번 피아노 협주곡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영웅적인 기개와 경이로운 조성 전개

이 협주곡은 베토벤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훗날 슈만과 브람스가 계승하게 되는 ‘교향적 협주곡’(Symphonic Concerto)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이 곡은 분명 ‘협주곡’이지만 관현악부가 독주부 못지않은 중요성을 지니며, 두 파트가 긴밀하게 어우러져 더없이 절묘하고 역동적인 음악세계를 펼쳐 보인다. 발터 리츨러의 말을 빌리자면 “이 작품은 첫 악장과 마지막 악장에서 영웅적인 기개를 과시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경이로운 조성 전개의 극치를 보여준다. 강렬한 개시 화음들은 경이로운 조성 전개의 건물 안으로 이끄는 웅장한 입구와도 같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자크 다비드, 610x931cm, 1807

 

제1악장  Allegro

약 20분간에 걸친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첫 악장은 시작부터 특별하다. 관현악의 힘찬 화음에 이어 피아노가 곧바로 등장하여 화려하고 당당한 카덴차를 연주해 보이며 출발하는 것. 협주곡의 고전적인 틀에서 벗어난 이런 개시법은 이후 슈만, 그리그, 차이코프스키 등 수많은 후배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혁신적인 개시부에 이어 관현악이 강렬하고 박진감 넘치는 제1주제와 스타카토 리듬에 실려 등장한 후 유려하게 펼쳐지는 제2주제를 제시한다. 이후 피아노가 다시 등장하고 음악은 때로는 충만한 열기와 긴장감 속에서 강력하게, 때로는 섬세하고 유연하면서도 멋스럽게 진행된다. 이 악장은 두 차례의 장쾌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후 힘차게 마무리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특별한 점은 통상 재현부와 종결부 사이에 놓이는 독주자 임의의 카덴차가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 베토벤은 '카덴차는 필요 없음. 그대로 계속해서 연주할 것'이라고 지시하는 대신 카덴차에 상당하는 독주부를 직접 채워 넣었다. 즉, 자신이 의도한 흐름이 독주자의 기교 과시에 의해서 단절되거나 왜곡될 위험을 차단했던 것이다. 이 역시 슈만과 브람스를 비롯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부분이다.


아울러 이 악장에서는 트럼펫과 팀파니의 활약을 통해서 팡파르풍의 울림과 행진곡풍 리듬이 유난히 부각된다. 또한 전편의 치열하고 박진감 넘치는 흐름은 다분히 전투적이다. 그래서인지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이 협주곡을 ‘군대 개념의 변증론’이라고 불렀는데, 혹시 베토벤은 이 곡에서 나폴레옹 군대, 혹은 그로 상징되는 '적군'에 대한 자기 나름의 투쟁을 전개했던 것은 아닐까?  나폴레옹이 빈을 점령했던 시절, 베토벤은 프랑스군 장교와 마주친 자리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내가 대위법만큼 병법에 정통했더라면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도처에서 포탄이 터지는 듯한 장면마저 연출하는 이 곡을 들으며 (물론 비유적인 견지에서) 관현악을 병사들로, 피아노를 그들을 이끄는 장수로 상정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제2악장  Adagio un poco mosso

앞선 악장과 사뭇 대조적인 완서악장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온화하게 이어지는 흐름, 그리고 그 위에 신중하게 얹히는 독주 피아노의 선율. 이 명상적인 악장에는 숭고하고 성스러운 기운마저 서려 있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체르니에 따르면 찬미가풍의 주제는 오스트리아의 순례의 노래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나폴레옹이 빈에서 물러간 얼마 후인 11월 22일에 베토벤이 라이프치히의 출판업자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격렬한 파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난을 겪은 뒤에 우리는 약간의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나는 몇 주 연속해서 작업했지만 불멸성보다는 죽음을 위한 작업으로 여겨집니다. (...) 이 죽어버린 평화에 대해 당신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이 시대에 더 이상의 안정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확실성은 우연한 기회뿐입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다시 한 번 절망을 딛고 일어섰다.


이 악장은 그 극복의 통로가 아니었을까? 여기서 그는 반추하고, 기도하고, 음미한다. 그리고 새 희망을 꿈꾼다. 그의 후기 음악에 나타나는 영적인 차원의 환상적인 음률이 이미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 악장은 베토벤이 남긴 가장 심오하고 감동적인 음악 가운데 하나이다.

 

제3악장  Rondo. Allegro

앞선 악장의 끝부분에서 중단 없이 이어지는 이 악장에서 음악은 다시금 첫 악장의 기세와 분위기로 복귀한다. 이 '승리'를 향한 행진곡에서, 춤곡풍의 주제는 마치 곡예를 펼치는 듯하며, 피아노와 관현악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술래잡기를 하는 듯하다. 협주곡 고유의 경쟁의 묘미와 돌파의 스릴을 만끽할 수 있는 박진감 만점의 멋진 피날레이다.

 

클림트가 그린 <베토벤 프리즈>의 부분. 이 곡에 '황제'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영웅적인 기개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흔히 이 곡의 제목처럼 통용되는 '황제'라는 별명은 정작 베토벤 자신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베토벤이 한때 존경하던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서 격노하여 <영웅 교향곡>의 원래 표지를 찢어버렸다는 일화를 떠올리자면, 베토벤의 가장 돋보이는 걸작 중 하나에 '황제'라는 별명을 붙이는 것은 심히 불경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별명을 누가 붙였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설에는 J. 크라머라는 영국의 출판업자가 거론된다. 그는 이 작품이야말로 모든 피아노 협주곡들 가운데 황제의 자리에 놓일 만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도 꽤나 그럴듯한 발상 아닌가? 더구나 젊은 시절에는 혈기왕성했던 베토벤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보수적인 성향으로 변해갔으며 한때 황실 악장의 직함을 원하기도 했었다는 사실을 돌아보면, 굳이 거부할 필요도 없는 일 아닌가 싶다.

 

 

 

Tchaikovsky, Symphony No.6, Op.74 ‘Pathétique'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Chung Myung-Whun, conductor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Korean Art Centre, Seoul

2011.05.16

 

Chung Myung-Whun/SPO - Tchaikovsky, Symphony No.6, Op.74 ‘Pathétique'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b단조 Op.74)에는 아시다시피 ‘비창(Pathétique)’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차이콥스키의 번호가 붙은 교향곡 중에서 표제를 지닌 것은 1번과 6번입니다. 1번 g단조에는 ‘겨울날의 환상(Winter Daydreams)’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지요. ‘겨울날의 몽상’이라고도 번역합니다. 6번에 붙어 있는 ‘비창’은 이 곡의 초연(1893년) 직후, 차이콥스키의 동생 모데스트가 지은 이름입니다. 모데스트는 차이콥스키의 매니저와도 같은 역할을 했지요. 우유부단하고 내향적이었던 차이콥스키는 동생 모데스트에게 적잖이 의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형과 동생이 거꾸로 된 것이지요.

초연 직후에 차이콥스키가 모데스트에게 표제를 붙이고 싶다는 의향을 말하자, 모데스트는 ‘비극적’이라는 표제가 어떻겠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는 그 이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잠시 생각을 굴린 모데스트가 “그러면 ‘파테티체스키’(러시아말로 ‘비창’)는 어떠냐?”고 하자 “그래 모디, 좋구나!”라며 동의했다고 하지요. 이 유명한 에피소드는 모데스트가 쓴 차이콥스키 전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정확한 진위를 판명하기에는 좀 애매합니다. ◀차이콥스키의 동생 모데스트

1번과 6번 외에도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에 제목이 붙는 경우들이 더러 있습니다. 예컨대 2번 ‘소러시아’, 3번 ‘폴란드’가 그렇지요. 이 이름들은 공식적인 표제가 아니라 그저 ‘별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출판된 악보에 기록된 공식 표제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2번의 경우에는 1악장과 4악장에서 우크라이나의 민요 선율이 사용되고 있어서 ‘소러시아’라는 별칭이 붙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20세기 초반까지 소러시아로 통칭됐지요. 또 3번은 마지막 5악장에 폴란드의 춤곡인 폴로네즈가 등장해서 ‘폴란드’라는 별칭을 얻게 됐습니다.

차이콥스키의 비관적 인생론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교향곡

6번 ‘비창’은 차이콥스키가 지상에서 보낸 마지막 해에 작곡됐지요. 그야말로 절망의 심연을 더듬는, 그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의 뒷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곡입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레퀴엠’을 인용하고 있는 1악장은 물론이거니와, 느리고 우울하게 소멸하는 4악장도 절망의 극치를 보여주는 피날레입니다.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삶과 죽음, 그것이야말로 ‘비창’이 묘사하고 있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말하자면 차이콥스키의 비관적 인생론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교향곡입니다. 교향곡 4번과 5번에서도 차이콥스키의 비관이 드러나지만 6번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한층 어둡게 표출됩니다. 예컨대 5번만 해도 차이콥스키의 어떤 동경과 그리움 같은 것이 음악 속에 담겨 있지요. 특히 3악장에서는 따뜻함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 전해집니다. 마지막 4악장에서도 완벽한 절망으로 추락하지 못하고 절충적인 피날레를 선택하지요. 하지만 오늘 들을 6번의 마지막 악장은 완전한 비관주의를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이 곡이 차이콥스키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작곡했던 음악인 것은 아닙니다.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음악이라고 얘기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좀 다릅니다. 5번 교향곡에서도 언급했듯이 차이콥스키는 연주여행이 아주 잦았는데요, 1892년 말부터 다음 해 초에 걸쳐 서유럽 여행을 다녀온 직후, 모스크바 북서쪽의 도시 클린((Klin)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교향곡 6번을 스케치합니다. 그해 2월에 동생 아나톨리(모데스트와 쌍둥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새로운 곡을 쓰고 있단다. 이 곡은 틀림없이 내 최고의 작품이 될 거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차이콥스키는 4월 무렵에 교향곡 6번의 스케치를 끝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차이콥스키가 생애 마지막 날들을 지내던 클린 시에 있는 집. 지금은 차이콥스키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할 수가 없었지요. 마지막 피아노 작품인 <18개의 소품>, 또 최후의 가곡집인 <6개의 로망스>를 작곡하느라고 교향곡 6번에서 잠시 손을 놓습니다. 이어서 영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나는데요, 이것이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여행이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로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 산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교향곡 4번을 연주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하지요. 클린의 집으로 돌아온 것은 거의 8월에 다다라서였습니다. 그는 얼마 후 여동생 알렉산드라의 아들 다비도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 페이지를 쓰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단다.”라면서 교향곡 6번을 마무리하기가 영 만만치 않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 조카 다비도프도 차이콥스키의 생애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인데요, 자식이 없었던 차이콥스키는 그를 매우 아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였다는 말도 있지만, 이 역시 진위가 불분명한 설입니다. 어쨌든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을 사랑하는 조카 다비도프에게 헌정하지요. 이 조카도 삼촌이 세상을 떠나고 13년 뒤에 자살로 생을 마칩니다.

초연은 같은 해 10월 28일,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음악협회의 연주회에서 차이콥스키가 직접 지휘해 이뤄집니다. 그리고 9일 뒤에 차이콥스키는 음악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의문의 죽음을 맞지요. 애초에 발표된 사인은 콜레라였습니다. 끓이지 않은 물을 마셨다가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는 것이 죽음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콜레라가 세계적으로 유행한 것은 사실이지요. 러시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 병으로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왠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습니다. 물 한 잔을 마시고 몇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어딘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1978년에 차이콥스키의 죽음을 둘러싼 다른 사연이 제기돼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킵니다. 클린 시의 차이콥스키 박물관에서 일하던 소련의 음악학자 오를로바가 차이콥스키의 죽음은 비소 중독에 따른 자살이라고 발표했던 것이지요. 사연인즉슨 이렇습니다. 동성애자였던 차이콥스키가 한 귀족의 손자와 연인 관계로 지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귀족이 차이콥스키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는 투서를 썼다는 것이지요. 그 투서를 전달받은 사람이 다름 아닌 차이콥스키의 법률학교 동창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법률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동창들을 소집해 비밀법정을 열었고, 그 결정에 따라 차이콥스키가 자살하도록 압박했다는 것입니다. 동성애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그것을 엄청난 불명예로 여겼던 당시의 상황에 비춰 보자면 개연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요. 오늘날에는 콜레라 설보다 오히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인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하나의 설로 남아 있을 뿐이지요. 차이콥스키의 죽음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남아 있습니다.

어쨌든 교향곡 6번 ‘비창’은 그 자체의 비극성뿐 아니라 차이콥스키의 실제 죽음과 결부되면서 ‘마지막 비극’이라는 신화성을 한층 키운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차이콥스키가 실제로 죽음을 염두에 두고 이 곡을 작곡했을 리는 없었겠지요.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교향곡 6번에 차이콥스키가 느꼈을 절망이 짙게 드리워진 것은 분명합니다.

1893년 차이콥스키의 장례식에 운집한 수많은 군중과 장례 행렬.

1악장: 아다지오 - 알레그로 논 트로포

1악장 서주의 아다지오 선율, 콘트라베이스가 저음으로 연주하는 침울한 멜로디부터 그렇습니다. 뒤따라 파곳이 흐느끼듯이 연주되다가 현악기가 이어받습니다. 이 서주를 그대로 이어받아 리드미컬한 첫 번째 주제가 펼쳐집니다. 점점 고조되면서 불안감을 증폭시키지요. 잠시 후 템포가 확연히 느려지면서 현악기들이 애절하게 연주하는 두 번째 주제가 제시됩니다. 클라리넷, 파곳이 그것을 이어받습니다. 그러다가 1악장 중간 지점인 발전부에 들어서면 갑자기 음량이 고조되면서 리듬이 강력해지지요. 금관이 격렬하게 포효하면서 콘트라스트를 고조시킵니다. 이렇듯이 6번 ‘비창’에는 피아니시모와 포르티시모의 극단적인 대비가 등장합니다. 차이콥스키의 ‘비창’을 들으면서 오디오의 볼륨을 조절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종결부에 들어서면 현악기들이 피치카토를 둥둥 울리는 가운데, 관악기들의 부드럽고 쓸쓸한 선율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2악장: 알레그로 콘 그라치아

2악장은 5분의 4박자로 이뤄진 비틀거리는 춤입니다. 러시아 민요에 빈번히 등장하는 리듬입니다. 아름다운 노래의 느낌이 물씬한 선율이 엇박자의 춤처럼 전개됩니다. 교향곡 5번의 3악장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차이콥스키의 매력이자 장기라고 할 수 있는 발레의 분위기를 풍기는 악장입니다. 하지만 이 춤은 뭔가 불안한 느낌을 내포한 채 흘러갑니다. 특히 종결부가 그렇습니다. 스르르 사라지는 느낌으로 끝납니다.

3악장: 알레그로 몰토 비바체

3악장은 조잘대며 시작합니다. 약간 장난을 치는 듯한 스케르초 풍의 악장인데, 2악장과 마찬가지로 춤곡의 분위기가 두드러집니다. 3악장의 주제는 차이콥스키가 사랑했던 이탈리아 남부의 타란텔라 무곡을 차용하고 있는 까닭에 ‘타란텔라 주제’라고도 불립니다. 종결부에서는 행진곡 풍으로 달려가다가 팀파니와 관악기가 어울려 명확하게 마침표를 찍습니다. ‘비창’의 4개 악장 중에서 유일하게 뚜렷한 종지부를 지닌 악장입니다.

4악장: 피날레. 아다지오 라멘토소

이 곡은 전체적으로 느린 1악장, 빠른 2악장과 3악장, 그리고 다시 느린 4악장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교향곡의 4악장은 빠른 템포로 펼쳐지는 법이지만, 차이콥스키는 완전히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비창’의 4악장은 아주 느릿하게 문을 열면서 앞의 두 악장과 확연한 대비를 보여줍니다. 앞서 언급했던 차이콥스키의 비관적 운명론이 집약돼 있는 악장입니다. 두 개의 주제 선율은 모두 밑으로 하강하면서 비통한 분위기를 펼칩니다. 슬프게 울고 있는 것 같은 첫 번째 주제가 여리게 흘러나오다가 관현악 총주로 한차례 치솟아 오릅니다. 그랬다가 다시 꺼질 듯이 가라앉습니다. 호른의 뒤를 따라 현악기들이 여리게 연주하는 두 번째 주제도 흐느끼는 듯한 클라이맥스를 구축했다가 역시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우울함을 뛰어넘어 낙담과 절망, 체념을 느끼게 하는 악장입니다. 힘없이 사라지는 마지막 장면은 더욱 그렇습니다.

Karajan/Wiener Philharmoniker - Tchaikovsky, Symphony No.6, Op.74 ‘Pathétique'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Wiener Philharmoniker

Grossersaal, Musikverein, Wien

1984.01

 

추천음반

1.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60, DG. 50년이 넘은 녹음이지만 언제 들어도 좋다. 호쾌하고 섬세하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악단의 호응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지는 명연이다. 구소련이라는 정치ㆍ사회적 배경 속에서나 가능했던 연주이니, 이제는 ‘역사적 녹음’이라고 규정해도 될 성싶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을 연주한 음반들은 지천으로 널려 있지만, ‘이 한 장의 음반’을 꼽는다면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이 연주야말로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차이콥스키의 걸작 4번, 5번, 6번이 2장의 CD에 담겼다.

2.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75, DG. 음질을 중시하는 경우라면 카라얀의 1970년대 음반을 권한다. 생전의 카라얀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을 일곱 차례 녹음했는데, 1971년에는 EMI에서, 1976년에는 DG에서 녹음했다. 모두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한 녹음이다. 어느 것을 선택해도 무방하나 오늘은 DG의 음반을 권한다. 치밀한 합주력이라는 측면에서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버금갈 만한 연주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하고 세련된 연주다. 하지만 러시아적 야성이라는 음악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역시 4번, 5번, 6번을 2장의 CD에 수록했다.

[p.s.]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차이콥스키 ‘비창’ 음반은 키릴 콘드라신이 모스크바 필하모닉을 지휘한 것입니다. 옛 소련의 국영 레이블 ‘멜로디아’에서 나왔습니다. 현악기들이 예리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명연인데, 국내 매장에서 구할 수 없어 아쉽습니다. 교향곡 5번에서도 거론했던, 스베틀라노프가 지휘하는 소련국립관현악단의 실황도 좋은 연주입니다. 1990년 5월 21일 도쿄 산토리홀에서의 실황입니다. 일본 음반사 ‘포니캐년’에서 나왔습니다. 두 음반이 눈에 띄면 망설이지 말고 구입하실 것을 권합니다. 매장에서 당장 구입이 가능한 추천음반으로는 므라빈스키와 카라얀의 음반을 권합니다.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대학 시절부터 클래식 음반을 쫓아다닌 음악 애호가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 관현악과 피아노 독주다. 오랫동안 경향신문에 음악 비평을 써 왔으며, 채널예스에 음악 칼럼 ‘내 인생의 클래식 101’, 서울시향의 기관지 SPO에 ‘20세기 음악 산책’ 등을 연재하고 있다. 경향신문사에서 문화부장을 두 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 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저서에 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저서에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돌베개, 2013), <더 클래식: 바흐에서 베토벤까지>(돌베개, 2014)가 있다.

출처 : 문화웹진 채널예스>칼럼>음악>‘내 인생의 클래식 101’ 2013.12.23

http://ch.yes24.com/Article/View/24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