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 클래식 2015년)

KBS교향악단 제698회 정기연주회/로만 라비노비치(Pf)/9.18.금/예술의 전당

나베가 2015. 9. 17. 00:00

 

 

Fireworks(Feu D'artifice)

, Fantasy for Orchestra, Op.4

스트라빈스키 / 불꽃놀이

Igor Stravinsky 1882∼1971

Stravinsky 의 Fireworks, Op.4

스트라빈스키가 26세에 쓴 Fireworks는 당시의 러시아발레단 책임자 디아길레프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의뢰로《불새 L’oiseau de feu》(1910) 《페트루슈카 Petrushka》(1911)를 작곡하여 세계적인 작곡가로 성공을 거두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본래 이곡은 작곡가 자신과 같이 림스크 코르사코프의 문하생이었던 맥시밀리언 스타인버 (Maximilian Steinberg)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딸 Nadezhda(나데츠다)를 신부로 맞게 됨을 축하하며 그에게 헌정된 곡이었다. 그러나 이 곡은 그 들의 결혼 날짜인 1908년 7월까지 완성을 하지 못하고 거의 1 년이 지난 후에 완성되었다. 1910년 에 알렉산더 실로티의 지휘로 초연이 있었으며 이곡은 200 마르크라는 좋은 조건으로 독일의 출판재단 Schott에게 판권이 넘겨져 그곳에서 같은 해에 출판되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스타인버그와 스트라빈스키의 관계는 매우 미묘하여 훗날 스트라빈스키가 쓴 일종의 회고록을 읽고 매우 열을 받았었다고 한다. 1962년 스트라빈스키가 고국을 방분하여 이곡을 연주하게 되었을 때 이곡이 헌정된 결혼의 장본인 Nadezhda는 그가 자신의 남편 스타인버그를 싫어하였다며 그 음악회 초청을 거절하였다.

 

Stravinsky - Feu d'artifice (Orchestre de Paris, Boulez)

 

스트라빈스키 Igor Fyodorovich Stravinsky (1882.6.17 - 1971.4.6)

소련의 작곡가. 페테르부르크 출생. 양친의 권유에 따라 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면서 N.A.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 개인지도를 받았다. 1908년 관현악곡 《불꽃:Feu d’artifice》으로 러시아발레단의 디아길레프에게 인정을 받고, 그의 의뢰로 발레곡 《불새:L’oiseau de feu》(10) 《페트루슈카:Petrushka》(11)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둠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 후 제3작인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13)은 파리악단에서 찬반 양론의 소동을 일으켰으나, 그는 이 곡으로 당시의 전위파 기수의 한 사람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 곡은 혁신적인 리듬과 관현악법에 의한 원시주의적인 색채감, 그리고 파괴력을 지닌 곡으로 앞의 2곡과 함께 이 시기의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러시아혁명으로 조국을 떠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신고전주의 작풍으로 전환하였으며, 발레곡 《풀치넬라:Pulcinella》(19) 《병사 이야기:Histoire du soldat》(16) 《결혼:Les noces》(12∼23) 등의 작품에 그의 새로운 작풍이 나타나 있다.

고전파와 바로크스타일의 정신을 부흥시키려고 한 음악풍조는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서 유럽음악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는 이 시기의 풍조에 선도적 역할을 했으며, 오페라 오라토리아인 《오이디푸스왕:Oedipus Rex》(27)과 《시편교향곡:Symphony of Psalms》(30) 등을 통해 이 작풍의 완성을 보았다. 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45년 미국으로 망명, 귀화하였다. 그는 한때 침체기를 거쳐 《3악장의 교향곡:Symphony in 3 Movements》(45)과 《미사:Mass》(48) 등으로 재기, 다시 제2의 전기(轉機)를 맞이하였다.

이는 이미 쇤베르크일파가 취해 온 음렬작법(音列作法)으로부터 12음작법(音作法)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었으며, 《칸타타:Cantata》(52)에서 시작하여 《아곤:Agon》(57)과 《트레니:Threni》(58) 등의 시도로 차차 엄격한 12음작법을 구사하였다. 그 이후로는 종교음악에 관심을 두어 《설교, 설화 및 기도:a Sermon, a Narrative and a Prayer》(61), 칸타타 《아브라함과 이삭:Abraham and Isaac》(63), 합창곡 《케네디의 추억을 위하여: la m?oire de Kennedy》(95)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저서로는 《내 생애의 연대기:Chronicle of My Life》(35)와 그가 하버드대학에서 강연한 것을 정리한 《음악의 시학:Poetics of Music》 등이 있다.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3 in D minor, Op.30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Sergei Rachmaninov

1873-1943

Martha Argerich, piano

Riccardo Chailly, conductor

Radio-Symphonie-Orchester Berlin

1982.12

 

Martha Argerich -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3 in D minor, Op.30

 

 

“라흐마니노프는 강철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강철의 팔과 황금의 심장! 나는 눈물 없이는 전지전능한 그의 존재감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탁월한 예술성을 존경했을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1945년 5월 16일, 요제프 호프만

1873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1943년 미국에서 생을 마감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자기 자신을 작곡가라고 생각했지만, 생의 마지막 30여 년 동안에는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고 녹음하는 피아니스트라는 두 번째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이역만리 타국에서 생활하기에 작곡가라는 직업은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세월 동안 그가 보여준 놀라운 피아노 음악의 경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그를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로 아로새길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정력적이고 외향적이었던 그의 친구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Josef Hofmann)에 비해 라흐마니노프는 사색적이고 내향적이었는데,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곧 음표가 구조에 달라붙듯이 청동처럼 견고한 건축물로 변화하였다. 한편 호프만이 자연스럽고 다채로운 음색과 변덕스러울 정도로 거침없는 스타일을 구사한 반면, 라흐마니노프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한결같은 음색과 기계적일 정도로 잘 계산되고 정돈된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그의 사진에서도 느낄 수 있는 수도사도 같은 이미지, 즉 삭발에 가까운 머리 스타일과 고정된 시선, 굳게 닫힌 입술에서 느낄 수 있는 엄격함은 곧 그의 연주 및 작곡 스타일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피아노의, 피아노를 위한, 피아노에 의한 협주곡’

러시아의 정서와 작곡가의 시정이 매 순간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라흐마니노프를 있게 한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한 작품일지는 모르겠지만, 3번 협주곡이야말로 피아니스트로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초월적 의지를 반영한 작품이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피아노의, 피아노를 위한, 피아노에 의한 협주곡’이다. 오죽하면 작곡가 자신도 이 작품을 “코끼리를 위해 작곡했다”라며 곤혹스러워했을까. ▶이 곡은 영화 <샤인>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정신질환자인 주인공을 통해 이 곡의 연주와 해석의 어려움을 잘 나타낸 영화다.

1909년 라흐마니노프는 이바노프카의 시골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자신의 미국 데뷔 무대를 위한 새로운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그러니까 이 3번 협주곡은 순수하게 미국을 위해 작곡한 곡으로 작곡가로서는 자신의 기량을 한 번에 쏟아내어 새로운 무대를 휘어잡을 만한 도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피아노 협주곡 역사상 무서울 만큼 가공할 테크닉과 초인적인 지구력, 상상을 뛰어넘는 예술적 감수성과 시적 통찰력을 요구하는 매머드급 작품이 탄생했다.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를 미국으로 이끌었을 뿐더러, 예술적 동료로 평생토록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피아니스트 호프만에게 헌정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호프만은 이 작품을 연주하기에는 손이 작았기 때문에 공개석상에서는 한 번도 연주하지 못했다고 한다.

1909년 11월 28일, 이 곡은 월터 담로슈(Walter Damrosch)의 지휘와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되었고, 7주 후 구스타프 말러의 지휘로 다시 한 번 연주되었다. 작품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피아노 협주곡 2번 초연 때만큼 뜨거웠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오히려 연주자 라흐마니노프에게 관심이 집중되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날의 성공 덕택에 다음 시즌 연주회를 위한 계약이 쇄도했고,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직책까지 제안 받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연주하기가 너무나 힘들 뿐더러 그 정서적 표현 역시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곡이었다. 그래서 대중적으로 어필하기까지에는 1960년대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가 등장할 때까지 50여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1928년 한 젊은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나타나 이 3번 협주곡을 말 그대로 ‘삼켜버린’ 사건이 벌어졌다.

라흐마니노프도 놀란 초신성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의 연주

1928년 1월의 어느 날, 뉴욕 카네기홀 맞은편에 위치한 스타인웨이 쇼룸에 두 명의 러시아 음악가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시대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라흐마니노프, 다른 한 명은 막 미국에 도착한 스물다섯 살의 젊은 피아니스트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였다. 1월 12일, 지휘자 토머스 비첨과 뉴욕 필과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로 전설적인 데뷔 무대를 가진 호로비츠는 여세를 몰아 2월 23일에 라흐마니노프가 3번 협주곡 초연 시 함께했던 지휘자 담로슈의 지휘로 3번 협주곡을 연주하기로 했다. 이 만남은 이 연주회를 위해 작곡가와 연주자가 함께한 리허설 성격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날의 만남이 음악사에 ‘역사적인 만남’이라고 기록되는 이유는 곡의 창조자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에 관한 ‘권위의 봉인’을 호로비츠에게 물려주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 연주를 듣고 너무 놀라 입을 벌린 채 넋을 잃었다고 친구에게 말했을 정도로 무한한 신뢰를 보냈는데 특히 후배인 아브람 카신스에게 “호로비츠는 이 작품을 통째로 삼켜버렸네!”라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피아노 협주곡 3번과 호로비츠는 샴쌍둥이와 같은 운명이었다.

이 자리에서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의 조언에 따라 1악장과 2악장에서 짧은 삭제 부분을 결정했고(호로비츠는 2악장과 3악장에서 보다 더 삭제된 버전으로 연주, 녹음했다), 1악장의 솔로 카덴차를 보다 짧게 단축시켰으며, 2악장과 3악장의 짧은 피아노 부분들에 대한 두 장 분량의 얼터너티브 솔로 패시지를 과감하게 생략했다. 이러한 수정을 모든 연주자들이 따르게 강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이유에 의해 이 관습은 작곡가에 대한 가장 정중한 예의이자 호로비츠에 대한 무한한 존경의 표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낭만주의 러시아 피아니즘의 진정한 적자임을 대변하는 ‘권위의 인장’은 3번 협주곡을 통해 라흐마니노프를 거쳐 호로비츠에게 주어지게 된 것이다. ◀호로비츠는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로부터 이 곡의 해석과 연주의 권위를 인정받은 대 피아니스트이다.

1930년 최초로 이 작품을 녹음한 이후 총 여섯 종의 리코딩을 남겼던 호로비츠에게 이 작품에 대한 진정한 라이벌은 작곡가도 다른 연주자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작곡가가 서거한 지 40여 년이 지난 1982년 런던에서 연주회를 가질 당시 호로비츠는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위대한 인간이자 위대한 작곡가이며 또한 위대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작곡가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겨놓았던 호로비츠야말로 이 3번 협주곡을 삼킬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1악장: 알레그로 마 논 탄토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서주부에 뒤이어 D단조의 장엄한 테마가 피아노로 연주된다. 피아노가 두 번째 주제를 연주하며 점점 빠르게 진행되며 음악은 힘차고 다이내믹하게 이어진다. 이윽고 걸음이 빨라지면서 변주곡으로 진입하고 곧 카덴차 부분으로 이어지며 장대한 피아노 솔로 카덴차가 나타난다. 그리고 다시금 1주제와 2주제가 제시되며 끝을 맺는다. 이 카덴차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반짝이고 투명한 질감을 가지고 있는 버전, 다른 하나는 화음 위주의 무겁고 힘이 실려 있는 버전이다. 비르투오소의 기교를 강조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주로 앞 버전을 선호한다.

2악장: 인터메초. 아다지오

오보에의 독주로 멜로디가 연주되며 강렬한 총주로 이어진다. 이때 불협화음으로 등장하는 피아노 독주는 주단 위를 굴러가는 흑진주 같다는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왈츠 풍 음형과 여러 단편들이 경쟁적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솔로 피아노의 장대한 스케일과 간결한 오케스트라 총주가 등장하여 3악장으로 음악을 이끌어간다.

3악장: 피날레. 알라 브레브

한 마디로 비르투오소를 위한 찬가라고 말할 수 있다. 웅대한 힘, 야성적 매력, 정교한 테크닉과 진한 서정성이 뒤엉켜 펼쳐지는 낭만주의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프로코피예프를 연상시키는 듯한 짧은 카덴차 성격을 가진, 피아노가 연주하는 마지막 토카타 패시지가 압권이다. 피아노가 클라이맥스를 주도하며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옥타브, 살인적인 분산화음으로 듣는 이의 심장을 10분 넘게 들었다 놓았다 하며 웅장하고 화려하게 마무리된다.

Yuja Wang -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3 in D minor, Op.30

Yuja Wang, piano

Xian Zhang, conductor

Sächsische Staatskapelle Dresden

2012.07.07

 

 

Vladimir Horowitz 1951 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3 in D minor

추천음반

1. 경쟁자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평가를 받는 호로비츠의 6종 리코딩 중 2종의 연주를 추천한다. 하나는 1951년 프리츠 라이너의 지휘로 녹음한 스튜디오 레코딩(RCA)이고, 다른 하나는 라흐마니노프와 함께 이 곡을 녹음했던 유진 오먼디의 지휘로 녹음한 1978년 라이브(RCA)이다. 두 연주는 스타일과 해석에 있어 차이가 나는데 전자는 고전적인 반면 후자는 도취적이고 자의적이다.

2. 아시케나지/하이팅크 녹음(DECCA)은 가장 스탠더드한 명연으로 손꼽히며, 호로비츠의 재래로 일컬어지는 볼로도스는 러시아 비르투오소를 잇는 우리 시대의 명반이다.

박제성 (음악 칼럼니스트)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의 역자이다. 클래식 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쓰고 있으며, 공연, 방송, 저널활동, 음반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문화예술>음악>기악합주>협주곡  2010.01.25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6&contents_id=1909

 

스위스 게자 안다(Géza Anda )콩쿠르 파이널 영상-김다솔 연주

 Concours Géza Anda 2012 - Final: Da Sol

 

 

Tchaikovsky, Symphony No.5 in E minor, Op.64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Wiener Philharmoniker

Großer Saal, Musikverein, Wien

1984.03

 

Karajan/Wiener Philharmoniker - Tchaikovsky, Symphony No.5 in E minor, Op.64

 

 

 

 

차이콥스키의 교향곡들, 특히 후반의 3곡(4, 5, 6번)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사랑받는 레퍼토리입니다. 그의 교향곡을 미뤄뒀던 까닭은 겨울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추운 나라 러시아에서도 가장 추운 지역으로 손꼽히는 북쪽 지역, 한때 죄수들의 유형지로도 유명했던 보트킨스트에서 태어난 차이콥스키의 음악에는 추운 겨울에 들어야 제 맛이 나는 특유의 우울감이 있습니다. 특히 교향곡이 그렇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러시아의 음악적 중심은 오래도록 교회음악이었습니다. 로마의 비잔티움 교회에 반발했던 러시아 정교회의 음악들이 18세기 말까지 러시아 음악을 대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연주됐던 음악은 물론이거니와 서민들이 즐겼던 민속음악에까지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이 뿌리 깊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18세기 중반에 러시아 궁정에 소개됐던 이탈리아 오페라도 왕족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습니다. 물론 당시 음악 산업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었던 영국 런던에서도 상황은 비슷했지요. 그만큼 18세기 중후반의 유럽에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파급력은 대단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탈리아류(流)’라고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이에 대한 반발이 생겨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든 사회문화적 현상에는 나름의 이유와 배경이 있습니다. 러시아인들의 마음속에 민족적 자의식을 갖게 한 계기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시련을 겪은 러시아에는 국가주의적 자의식이 싹트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 속에서 이른바 ‘국민음악파’로 규정되는 다섯 명의 음악가가 등장합니다. 나이 순으로 이름을 불러보겠습니다. 발라키레프, 보로딘, 큐이,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입니다. ‘국민음악파’라는 규정은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고 당시에는 ‘모구차야 구치카’(강력한 소수파)라는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그들을 강력하게 옹호했던 음악비평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가 1868년에 붙여준 이름입니다. 살짝 미안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실 이들 중에서 음악가로서의 독창성과 재능을 확실히 보여줬던 음악가는 두 명입니다. 바로 무소륵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 정도라고 해야겠지요.

러시아 5인조. 왼쪽부터 발라키레프, 보로딘, 큐이,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차이콥스키는 그들의 바로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거의 동시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구차야 구치카의 멤버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무소륵스키보다 1년 뒤에 태어났으니까요. 자, 어쨌든 당시 러시아의 문화적 분위기를 크게 둘로 나눠본다면 슬라브주의자들과 서구주의자들의 분열과 대립이라고 할 만한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슬라브의 전통적 정신과 문화를 옹호하는 쪽이었고, 또 다른 한쪽은 서구의 발달한 제도와 문화를 빨리 수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지요. 그런 러시아의 상황 속에서 모구차야 구치카의 5인방은 슬라브주의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던 음악가들이었습니다.

“내 음악은 러시아의 노래에서 나왔다”

그러면 차이콥스키는 어느 쪽이었을까요? 여러 정황으로 추정컨대 차이콥스키는 서구를 지향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그가 이탈리아를 동경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결혼에 실패한 그가 쫓기듯이 도피했던 곳도 바로 이탈리아였지요. 그런데 차이콥스키의 이런 서구 지향은 아주 어린 시절에 뿌리를 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그가 유년기에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웠던 가정교사가 프랑스 여성 파니 뒤르바흐였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좀 산다 하는 집에서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우는 것이 상당히 유행이었지요. 한데 차이콥스키는 이 여자 선생님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합니다. 4년간 함께 공부한 그녀와 헤어지고는 매우 힘들어했다고 전해지지요. 또 차이콥스키가 16살 무렵에 만났던 성악 교사는 이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 덕분에 차이콥스키는 서유럽을 친숙하게 느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울러 그가 서유럽의 음악가들, 예컨대 베를리오즈와 바그너, 리스트 등의 음악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니콜라이 쿠즈네초프가 그린 차이콥스키의 초상화, 1893

하지만 차이콥스키 음악의 독특함을 만들어내는 지점은 역시 러시아적 정서입니다. 차이콥스키가 겪었던 그 모든 교유 관계와 음악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에서 근간을 이루는 정서는 역시 ‘러시아의 노래’입니다. 교향곡에서도 물론 그렇지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들은 베토벤처럼 구조를 쌓아올리기보다는 모차르트처럼 선율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입으로 따라 부르기 좋은 선율이 빈번히 등장합니다. 게다가 그 선율들은 매우 러시아적이어서, 한국인이나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가슴으로 쉽게 밀려오는 본능적인 선율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동양적 정서’를 공유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내 음악은 러시아의 노래에서 나왔다”라는 차이콥스키의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생전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조용한 곳에서 자라났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러시아의 대중적인 노래들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었다. 그리하여 러시아 정신의 모든 표현에 정열적으로 빠져 들어갔다. 간단히 말해 나는 철저히 러시아 사람이다.” 이화여대 출판부에서 십여 년 전에 번역ㆍ출판했던 <음악의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차이콥스키가 동생 가운데 한 명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문구라는데, 어떤 동생에게 보낸 편지였는지는 제가 미처 확인하질 못했습니다. 아마 막내인 모데스트가 아닐까 추정합니다. 차이콥스키는 형제 가운데 모데스트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썼지요. 하지만 정확하진 않으니 그냥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앞의 인용 구절은 제가 이런저런 강의에서 차이콥스키 음악의 요체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하는, 아주 좋아하는 문구입니다. 한데 이 책은 요즘 절판돼 구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읽을 수 없어 안타깝군요. 이 기회를 빌어 이화여대 출판부에 재판 발매를 권해봅니다. ▶<음악의 즐거움> 표지.

“시작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영감이 온 것 같습니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은 번호가 붙은 것이 모두 여섯 곡(1번부터 6번까지), 번호 없이 표제로 출판한 곡(만프레드 교향곡)이 한 곡입니다. 그중에서도 교향곡 5번 E단조 Op.64는 4번을 작곡하고 11년이나 세월이 흐른 뒤에 작곡했습니다. 왜 이렇게 늦어졌을까요? 객관적 사실로는 차이콥스키가 그 중간의 기간에 오페라 작곡에 많은 신경을 썼고 유럽 각지를 다니면서 여러 음악가들과 친교를 나눴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동분서주하느라고 교향곡을 작곡하지 못했다는 것은 왠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보다는 교향곡 작곡에 대한 자신 없음 때문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잘 짜인 구성, 미묘한 관현악법을 적절하게 구사해야 한다는 교향악의 작곡 수법에 그는 매우 중압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1888년에 후원자였던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음악에 대한 형식을 파악하고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나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때문에 평생 괴로워했습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스스로 “선천적 약점”이라고까지 털어놓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독일-오스트리아의 고전주의 혹은 낭만주의적 수법에 대한 열등감이었을 겁니다. 교향곡 작곡의 대세이자 표준은 바로 그 지역이었으니까요. 말하자면 차이콥스키의 예술적 유전자였던 러시아적 감성, 자신의 음악이 “러시아의 노래에서 나왔다”는 고백은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었던 동시에 콤플렉스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차이콥스키는 1888년에 러시아로 돌아오지요. 그 이전에는 주로 서유럽에 머물렀습니다. 연주여행이 많았던 까닭입니다. 러시아로 돌아오기 직전까지도 라이프치히, 함부르크, 베를린, 프라하, 파리, 런던을 한 바퀴 도는 연주여행을 치렀지요. 그 과정에서 브람스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로 돌아온 차이콥스키는 모스크바 북서쪽의 도시 클린((Klin) 근교의 전원마을 프롤로프스코예에 집을 마련합니다. 숲에 둘러싸인, 넓은 정원을 가진 저택이었다고 합니다. 차이콥스키는 그해 5월 동생 모데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여름에 교향곡을 한 편 쓸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한 달 뒤에는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향곡을 한 곡 쓸 생각이라고 말씀드렸는지요? 시작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영감이 온 것 같습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자, 교향곡 5번 E단조 Op.64를 듣기에 앞서 교향곡 4번을 잠시 복기해보겠습니다. 제가 이미 말했다시피 교향곡 4번의 1악장은 호른과 파곳이 연주하는 격렬한 팡파르로 시작합니다. 차이콥스키는 그것을 “이 교향곡 전체의 핵심이며 정수”라면서 “운명”이라는 말로 폰 메크 부인에게 설명했지요. 한데 차이콥스키의 ‘운명론’은 11년 뒤에 쓴 교향곡 5번에서 한층 짙어집니다. 이번에는 아예 장송행진곡 풍의 어둡고 무거운 운명을 첫머리에 등장시킵니다. 1악장 서주에서 클라리넷이 연주하는 음울한 선율이 그것입니다. 게다가 그 운명은 불가항력적으로 인생 전반을 지배합니다. 이 음울한 선율은 교향곡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악상으로 계속해 얼굴을 비춥니다.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

2악장은 안단테 칸타빌레(느리게 노래하듯이)로 시작하는 악장입니다. 현악기들이 이끄는 도입부에 이어 호른이 노래하는 인상적인 선율이 등장합니다. 뭔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애상감이 가득한 선율입니다. 여기에 다른 악기들이 가세하면서 선율이 점점 강력해지다가 다시 고즈넉해집니다. 이어서 클라리넷이 등장해 중간부의 선율을 이끌다가 드디어 운명의 악상이 강렬한 음향을 뿜어내며 작열합니다. 1악장의 첫머리에서 만났던 바로 그 암울한 선율입니다. 그렇게 폭발했다가 다시 원래의 고즈넉함으로 회귀하지요, 마지막 코다는 잦아들듯이 끝납니다.

반면에 3악장은 따뜻합니다. 왈츠 악장입니다. 차이콥스키가 즐겨 작곡했던 발레음악이 연상되는 몽환적인 느낌의 왈츠입니다. 3악장에 느닷없이 왈츠가 등장하는 것에 대해 초연 당시에도 이런저런 비판들이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는 아주 적절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 2악장이 춥고 암울했던 까닭에 3악장에서라도 뭔가 따뜻한 것을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혹독하게 추운 겨울, 성냥팔이 소녀가 그리워했을 따뜻한 불빛이 느껴지는 악장입니다.

이어서 1악장 서주의 주제 선율이 다시 등장하면서 마지막 4악장이 문을 엽니다. 애초에는 단조였던 선율이 장조로 모습을 바꿔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현악기들이, 이어서 관악기들이 웅장한 느낌으로 연주합니다. 팀파니가 으르렁대는 소리를 배경에 깐 채 광포한 분위기의 첫 번째 주제가 연주되고, 잘게 부서지는 음형들로 표현되는 두 번째 주제는 목관이 연주합니다. 무거운 1주제에 비해 두 번째 주제는 환한 분위기를 구사합니다. 그리고 잠시 뒤 1악장 서주에서부터 이 교향곡을 관통해 온 음울한 주제 선율이 당당하게 모습을 바꿔 다시 등장합니다. 아주 늠름한 행진곡풍입니다. 그래서 4악장에 내려진 일반적인 해석은 ‘운명을 극복한 승리의 행진’이라는 식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차이콥스키의 맨얼굴이었을까요? 어쩌면 차이콥스키는 이 마지막 악장을 쓰면서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Yevgeny Svetlanov/USSR State SO - Tchaikovsky, Symphony No.5 in E minor, Op.64

Yevgeny Svetlanov, conductor

USSR State Symphony Orchestra,

Suntory Hall, Tokyo

1990.06.03

 

 

추천음반

1.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60, DG. 50년이 넘은 녹음이지만 언제 들어도 좋다. 호쾌하고 섬세하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악단의 호응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지는 명연이다. 구소련이라는 정치ㆍ사회적 배경 속에서나 가능했던 연주이니, 이제는 ‘역사적 녹음’이라고 규정해도 될 성싶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을 연주한 음반들은 지천으로 널려 있지만, ‘이 한 장의 음반’을 꼽는다면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이 연주야말로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2.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75, DG. 음질을 중시하는 경우라면 카라얀의 1970년대 음반을 권한다. 생전의 카라얀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을 일곱 차례 녹음했는데, 1971년에는 EMI에서, 1976년에는 DG에서 녹음했다. 모두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한 녹음이다. 어느 것을 선택해도 무방하나 오늘은 DG의 음반을 권한다. 치밀한 합주력이라는 측면에서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버금갈 만한 연주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하고 세련된 연주다. 하지만 러시아적 야성이라는 음악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P.S.] 개인적으로 즐겨 듣는 음반은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가 소련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한 1990년 녹음(Pony Canyon)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두 번 들었습니다. 도쿄 산토리 홀에서 가졌던 실황입니다. 질풍처럼 내달리는 연주입니다. 스튜디오 녹음과는 맛이 다른 흥분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마지막에 터져 나오는 ‘브라보!’와 박수소리도 음악입니다. 음질도 좋습니다. 현재 절판 상태이지만, 눈에 띄면 망설이지 말고 구입해도 좋은 음반입니다.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경향신문 문화부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문화웹진 채널예스에 음악 칼럼 ‘내 인생의 클래식 101’, 서울시향의 기관지 SPO에 ‘20세기 음악 산책’ 등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에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돌베개, 2013), <더 클래식: 바흐에서 베토벤까지>(돌베개, 2014)가 있다.

출처 : 문화웹진 채널예스 칼럼>음악>'내 인생의 클래식' 101 2013.12.16

http://ch.yes24.com/Article/View/23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