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목요일 인터내셔널 마스터즈] 이자벨 판 쿠오렌 Violin 울리케 파이어 Piano
이자벨 판 쿠오렌 Isabelle Van Keulen (Violin)
1984년, ‘BBC 올해의 영뮤지션'으로 선정되며 주목 받기 시작한 네덜란드 바이올리니스트 이자벨 판 쿠오렌은 정직함과 정화한 해석뿐만이 아니라 관객과 동료 연주자와의 소통에 매진함으로써 생동감 넘치고 열정적이며 영감을 주는 무대로 관객들을 만나왔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뿐만 아니라 비올리스트서도 뛰어난 연주력을 보이고 있는 그녀는 다양한 앙상블, 연주자들과 비올라 주자로 호흡을 맞추었고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20년 넘게 네덜란드 피아니스트 로날드 브라우티함과의 연주, 메조 소프라노 크리스티아네 스토틴과의 공연, 노르웨이 체임버 오케스트라와의 연주 및 지휘, 1997년부터 2006년까지 델프트 실내악 축제를 조직 및 예술감독으로서의 활동, 마스터클래스,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베를린 필하모닉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의 협주 등 다양한 활동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녀는 ‘음악에 충실히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자벨 판 쿠오렌은 동시대 작곡가들의 많은 곡들도 초연하였다. 테오 뢰벤디, 에르키스벤 튀르를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이 그녀를 위해 협주곡을 썼으며, 앙리 뒤티외, 존 애덤스, 소피아 구바이둘리나를 비롯한 수많은 20/21세기 작곡가들의 곡을 그녀의 레퍼토리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그녀는 작곡가 콜린 매슈스, 에른스트 크레네크, 앨런 페터슨, 페루초 부소니의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도 즐겨 연주한다.
이자벨 판 쿠오렌의 음반으로는 베르크 바이올린 콘체르토(샨도스), 스트라우스, 로타, 레스피기의 바이올린 소타나(챌린지 클래식스), 클라리네티스트 샤론 캄과의 모차르트 퀸텟(베를린 클래식스), 그리고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로날드 브라우티함과 녹음한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전곡 음반이 있다.
2012년부터 현재, 그녀는 루체른 대학교에서 바이올린, 비올라 실내악을 가르치고 있으며, 1734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로 연주하고 있다.
울리케 파이어 Ulrike Payer (Piano)
울리케 파이어는 바로크부터 현대음악까지, 피아노 독주회, 실내악뿐만 아니라 가곡까지 다양한 무대로 한계 없는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독일 부퍼탈의 연극인 집안에서 태어난 울리케 파이어는 브뤼셀, 쾰른과 하노버에서 수학하며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아마데우스 콰르텟을 사사하였으며 수많은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하였다.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키릴 페트렌코, 유스투스 프란츠와 같은 저명한 지휘자가 이끄는 오케스트라들과 협연한 울리케 파이어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뮤직 페스티벌, 라인가우 뮤직 페스티벌, 델프트 뮤직 페스티벌, 베이징 페스티벌, 우제돔 뮤직 페스티벌, 라 포르 쥬르네 오 자퐁과 같은 세계적인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연주하였다.
NRD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피아니스트로서 울리케 파이어는 세묜 비치코프, 마하엘 길렌, 앨런 길버트와 안드리스 넬손스와 함께 호흡을 맞추었다. 그녀는 이자벨 판 쿠오렌, 오르페오 만도치 등과 함께 실내악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크리스티안 폴테라, 퍼트리샤 코파친스카야, 솔 가베타, 자시코 가브릴로프 등과 최근 음악적으로 교감을 나누었다. 현재 활발한 연주활동과 함께 그녀는 이마이 노부코, 닐스 묀케마이어와 함께 독일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제5번 F장조(‘봄'), Op.24
Ludwig van Beethoven Sonata for Violin and Piano No.5 in F Major(‘Spring'), Op.24
요하네스 브람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제1번 G장조, ‘비의 노래', Op.78
Johannes Brahms Sonata for Violin and Piano No.1 in G Major, ‘Regenlied', O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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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MISSION
아르보 패르트 프라트레스
Arvo Pärt Fratres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제2번 D장조, Op.94 bis
Sergei Prokofiev Sonata for Violin and Piano No,2 in D Major, Op.94 bis
Allegro con brio
공연후기
사실 오늘 공연은 기대를 아주 많이 하고 간 공연이었다.
프로필도 좋고, 금호의 올 기획연주중 대표급 연주회였기때문이다.
물론 화려한 프로그램도 한몫한다.
더우기 그녀가 연주하는 악기가 1734년산 과르네리 라서 더욱....
그러나 첫곡이 연주되는 내내 듣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너무 강하게 연주를 해서...
그래서 2악장은 눈을 감고 들었다.
코앞에서 연주를 보고 있어서 그런가...싶기도 하고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2악장을 제대로 음미하고도 싶고 해서....
그러나 내가 기대했던 2악장의 가슴 절절한 그 매혹적인 연주는 들을 수가 없었다.
2012년 LG아트홀에서 알렉산더 멜니코프와 내한 연주를 펼쳤던 '이자벨 파우스트'의 연주가 귓전에서 어른거렸다.
그땐 정말 숨을 쉬지도 못하고 빨려들어 갔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녀의 음반을 들으며 잠 못 이루었으니까...
무터와 그녀의 연주와 너무 비교가 되서 그런 지, 과르네리의 악기 소리도 너무 강하고 날카로워 귀에 거슬렸다.
아무래도 무터나 강렬했던 '이자벨 파우스트'의 부드럽고 매혹적인 연주가 귀에 익어서 그런지는 몰라도...ㅠㅠ
개인적으로 과르네리 보다는 고혹적인 스트라디 바리우스 소리를 훨씬 더 좋아하기도 하고....
암튼 안타까움과 버거움으로 첫곡을 흘려 보내고....
2번째 브람스 곡에서는 그래도 좀 낳았다.
아무래도 베토벤의 '봄'처럼 유명 연주자의 연주가 귀에 완전히 베인것이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다.
인터미션이 끝나고...
2부 첫곡에서부터는 그녀의 연주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르보 패르트'의 곡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워낙 이 곡이 매혹적이라서...
패르트의 음악이 한없이 빨려들어가 헤어나오기 힘들게도 하지만
이 곡을 코앞에서 듣고 있자니 정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이자벨 판 쿠오렌'의 연주도 연주려니와 워낙에 이 곡이 주는 임펙트가 강해서....
이렇게 연주자 코앞에서 한없이 이 곡을 듣고 싶을 정도....
마지막으로 연주된 '프로코피예프' 곡은
역시 강렬하게 연주하는 '이자벨 판 쿠오렌'과 그녀의 악기 과르네리와도 잘 맞아 떨어지는것 같았다.
잠시도 한눈 팔새도 없이 그녀의 연주- 프로코피예프곡에 빠져들었으니까....
오히려 많이 듣지 않은 곡에서는 온전히 그녀의 연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본 연주가 끝나고 많은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오니, 활짝 웃던 두 연주자의 얼굴이 선연하다.
연주자로서 이보다 더 큰 기쁨과 감동은 없을테니까....
앵콜 연주가 없을줄 알았는데, 브람스의 스케르쵸를 연주하며 그녀의 강렬하고도 열정적인 연주를 끝냈다.
너무나 익숙한 베토벤 소나타 '봄'에서는 아쉬움이 컸지만, 아르보 패르트의 곡과 프로코피예프 곡을 들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Isabelle van Keulen & Hannes Minnaar - Beethoven's Complete Sonatas for Violin & Piano
루트비히 판 베토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제5번 F장조(‘봄'), Op.24
Ludwig van Beethoven /Sonata for Violin and Piano No.5 in F Major(‘Spring'), Op.24
Beethoven.Violin.Sonata.No.5.Op24.Spring.[Anne.Sophie.Mutter.Lambert.Orkis]
'베토벤'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해 총 10개의 소나타(독일어 원제 참조)를 썼는데, 그 중 5번 ‘봄’("봄"이라는 부제는 베토벤이 직접 붙인 것이 아니라, 훗날에 이 곡을 들은 평론가가 이 곡의 분위기가 봄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는 이유로 타인에 의해 부제가 붙여진 것임)은 9번 ‘크로이처'(Op.47, 1803년 작곡)와 더불어 가장 유명하다. 우리가 흔히 '베토벤' 하면 운명'이나 '합창', '영웅', '전원'등의 교향곡을 떠올리며 고뇌와 격정에 가득찬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 곡은 '비발디'의 '사계' 중 '봄'처럼 즐거움과 따사로움으로 가득하다. 곡 초반의 멜로디는 저 유명한 운명 교향곡의 첫 멜로디처럼 우리 귀에 익숙하다. 명쾌한 바이올린 선율에서는 베토벤 음악이 통상 안고 있는 무거운 이미지를 찾아볼 수 없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주를 하는데 때론 바이올린이 반주를 하며 피아노가 멜로디를 연주하는 등 다양한 표현이 돋보인다. 전 악장에 걸쳐서 봄의 느낌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베토벤은 이미 귀를 완전히 먹은 후였음에도 어떻게 이렇듯 뛰어나면서도 동시에 낙천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 곡은 제4번(작품23)과 거의 같은 시기에 작곡되었다(1801년 작곡, 당초 작품23에 포함되었으나 후에 작품성격이 상반되어 분리되었다). 제5번은 4악장으로 이루어진다. 제1번에서 제4번까지는 3악장 구성이었다. 따라서 베토벤이 이 곡에서 바이올린 소나타로서는 처음으로 4악장 구성을 사용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후 제7번과 제10번 소나타가 4악장 구성으로 작곡되었고 그 외는 3악장이다.
1악장
소나타 형식. 첫머리에 흐르는듯한 상쾌한 선율로 연주되는 것이 제1주제이며 이것을 어떻게 연주할 것인가 하는 것이 연주자들의 최대 고민이기도 하다. 4째마디와 6째마디에서 하강음형이 나타난다. 이 두개의 음에 의한 하강음형은 바로크 시대로부터 하나의 기법으로 정착된 것으로 (희망의 동기)라도고 불린다. 베토벤은 이 동기를 좋아하며 많은 작품에서 사용한다. 예를 들어 교향곡 제9번의 제3악장 25번째마디부터 제 2바이올린과 비올라에 의한 안단테 모데라토의 테마(교향곡 제9번)와 같은 것은 이 희망의 동기만으로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이 동기에 대해 가진 애착은 남다른 것으로 보인다. 이 동기는 바이올린 소나타에서도 제 5번뿐만 아니라 제1번의 제1악장 제2주제에서도 발견되므로 주목할만 하다. 또한 이 제5번의 제1악장 37째마디부터 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제2주제가 연주된다. 이 악장은 이 두개의 대조적인 주제로 이루어진다. 발전부에서 처음 나타나는 셋잇단음은 듣는 이들을 숨막히게 하는데 베토벤은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셋잇단음표를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우리를 감탄하게 한다.
2악장
느리게 연주하며 적절하게 아고긱을 덧붙이면 후기 낭만파를 연상시키는 악장이다. 이무렵 베토벤의 낭만성은 아주 심화되었던 것 같다. 2째마디부터 9째마디까지 연주되는 피아노 선율이 주선율이며 이것을 바이올린이 반복하는데 연주자나 듣는 이들을 아주 행복한 기분에 젖어들게 한다. 20째마디와 21째마디에는 앞에서 얘기했던 (희망의 동기)를 사용하여 더욱 행복한 시간이 오기를 바라는 듯하다. 30째마디부터 나타나는 피아노의 주선율 장식도 아름답다.
3악장
연주시간이 약 1분 조금 넘는 짧은 악장이다.제2악장에서 제4악장으로 가는 다리역할, 또는 간주곡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주부는 피아노로 가볍게 시작되며 트리오 부분은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3도나 6도 음계의 상승과 하강이 특징적이다.
4악장
제1주제로 시작하며 38째마디부터 c단조의 제2주제가 나온 후 다시 제 1주제가 나타난다. 이후 73째마디부터 강한 싱커페이션의 제3주제가 연주된다. A-
B-A-C-A-B-A코다로 도식화할수 있 으며 마지막에는 셋잇단음의 연속으로 힘차게 마친다.
1879년 여름, 오스트리아의 푀르차흐에서 휴양중이던 브람스는 오랜 친구인 테오도르 빌로트(외과의사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에게 편지를 썼다. “한 번 연주해 보세요. 몇 번이나 해볼 필요는 없습니다. 온화하고 가벼운, 비 오는 저녁의 약간 달콤씁쓸한 분위기가 날 겁니다.” 그는 브람스의 사보가였던 흘라바체크와 함께 자신의 집에서 연주해본 후에 작곡가에게 답장을 썼다. “어둠 속에서도 눈을 감고 들어야만 할 정도로 독특한 분위기의 음악이군요
브람스가 발표한 첫 번째 바이올린 소나타
이 작품은 사십을 넘어선 작곡가가 발표한 첫 번째 바이올린 소나타이다. 이 곡은 1878년 봄에 떠났던 이탈리아 여행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휴양지 푀르차흐의 호수도 브람스의 마음 속에서 추억의 모티프로 작용했을 것이다. 모두 세 개의 악장인 이 작품의 구조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브람스의 기쁨과 슬픔 같은 다양한 감정들이 모두 녹아들어가 있다. 곡의 부제인 ‘비의 노래’(Regenlied)는 3악장의 시작 부분이 브람스의 가곡 [비의 노래 Regenlied]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독일의 시인 클라우스 그로트 (Klaus Groth, 1819~1899)의 시에 곡을 붙인 이 작품을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의 노래로 들어보는 것도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을 즐길 수 있는 또하나의 즐거움이다. 아래는 비의 노래 가사인데, 천천히 음미해보면 음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Dietrich Fischer-Dieskau "Regenlied" Brahms
Elisabeth Grümmer "Regenlied" Brahms
브람스가 머물던 휴양지 푀르차흐의 호수. 푀르차흐의 고즈넉한 인상도 작곡에 영감을 주었다.
쏟아져라, 비여, 쏟아져라 / 물방울이 모래에 거품을 일으킬 때 / 나는 어린 시절 꾸었던 꿈들을 / 다시 떠올린다.
찌는듯한 여름 무더위가 / 이따금 신선한 냉기와 / 이슬에 흠뻑 젖은 잎사귀 / 그리고 진한 푸른 색으로 물든 들판에 맞서 발버둥칠 때,
이 호우 속에 / 잔디밭을 맨발로 밟고 서 있을 때, / 이 거품들에 손을 대어볼 때,
혹은 차가운 물방울들을 맞기 위해 / 뺨을 내밀 때, / 그리고 그 싱그러운 공기를 가스에 품을 때의 / 환희란!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 들어가는 꽃봉오리처럼 / 영혼은 가슴을 활짝 열고 숨쉰다. / 향기에 취한 꽃처럼, / 천국의 이슬에 흠뻑 젖는다.
심장부를 흔들며 /증발해버리는 빗방울 하나하나, / 은둔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내 안에 / 파고드는 우주만물의 신성함
쏟아져라, 비여, 쏟아져라. / 빗방울이 바깥을 두드릴 때마다 / 우리가 문간에서 부르던 /옛 노래들을 떠올린다.
나는 이 달콤하고 촉촉한 빗소리를 / 다시 듣고 싶다. / 성스럽고 순수한 경외감에 /부드럽게 젖는 내 영혼- 클라우스 그로트 ‘비의 노래’
사실, 브람스는 작품을 발표하는 데 있어 신중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 작품 이전에도 바이올린 소나타를 네 곡 정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중에서 이십대 초반에 쓴 작품은 분실되었으며 나머지 작품들은 브람스 스스로가 파기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1853년에 브람스가 디트리히, 슈만과 함께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과의 우정을 기리기 위해 [FAE (Frei aber einsam) 소나타]를 작곡한 적은 있다. 하지만 이 곡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우정을 위해 쓴 작품이며 오직 스케르초 악장만을 브람스가 썼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의 콘서트용 작품은 아니었다.
어두운 기억, 희망의 뉘앙스가 뒤섞인 브람스의 낭만주의
이 곡은 '비의 노래'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데 3악장 흐르는 빗방울과 같은 선율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아름다운 작품이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성공의 기쁨을 맛보았던 브람스가 자신감 있게 써내려간 작품이 바로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이며, 이 작품을 시작으로 마지막 [바이올린 소나타인 3번]을 작곡하기까지 놀라운 집중력으로 대단히 생산적인 시기를 보냈다. 1888년까지 약 10년 동안 [교향곡 3번]과 [4번]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2번] 등의 작품을 작곡하면서 브람스는 자신의 인생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낭만주의의 핵심적인 문구는 ‘먼 곳에 대한 동경’이며, 독일의 낭만파 시인 빌헬름 바켄로더가 말한 그리움의 나라는 바로 음악의 나라였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독문학 교수였던 프리드리히 군도르프는 낭만주의에 대해 “시작은 화약과 같았고, 곧이어 마법의 분장으로 이어졌으며, 마지막에는 수면제로 끝났다”고 결론짓고 있는데 우리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은 어둠의 기억으로만 물들어 있지 않다. 여기에는 어떤 경쾌한 발걸음 같은 희망적인 뉘앙스들이 내포되어 있으며 세상에 대한 긍정도 함께 숨쉰다.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이 비극적인 색채로 치장된 절망의 노래라면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은 사십대 중반을 이제 막 넘긴 브람스의 비전이 제시되어 있다. ‘브람스 서클’의 일환이었던 엘리자베트 폰 헤어초겐베르크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음악이 가져다준 감동에 대해 적고 있다. “어제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곧 눈물을 흘려야했다.”
Kremer / Afanassiev, Brahms Sonata for Piano and Violin No.1 in G major, op.78
(ReUp) Kyung Wha Chung plays Brahms violin sonata No.1
1악장 - 비바체 마 논 트로포
온화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악장으로 피아노가 코드를 연주하고 이어 바이올린의 화음과 피치카토가 물결치듯이 평온하게 움직인다. 이 속에는 감정이 녹아들어가 있다. G장조의 제1주제는 이 악장의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하는데 제시부와 재현부의 진행은 우아하면서도 상냥하게 진행된다. 특별히 감정에 호소하는 118~126마디는 브람스 음악의 진면목을 과시한다.
2악장 - 아다지오
피아노가 메인 테마를 연주하고 이어서 바이올린이 노래한다. 브람스가 작곡한 느린 악장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이 악장은 분위기의 미묘한 변화가 대단히 신선하다. 민요 스타일의 친근한 음악은 호소력이 짙으며, 1악장과 3악장의 화사함과는 또다른 세계를 선사해주는데 어둠 속에서 울려퍼지는 감정의 진폭을 느낄 수 있다.
3악장 - 알레그로 몰토 모데라토
클라우스 그로트의 시에 음악을 쓴 ‘비의 노래’ 선율이 하나의 주제로 쓰였으며, 지극히 우아하게 전개된다. 중요한 포인트는 피아노 파트에 흐르는 빗방울을 연상시키는 듯한 선율과 약간은 우울한 정서의 바이올린 사이의 음악적 흐름이다.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느껴지는 음악은 인생의 새로운 단계를 말해준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프라트레스
Arvo Part(1935- )
Fratres for Violin and Piano
에스토니아 현대음악 작곡가인 아르보 패르트는 7살에 음악을 시작해 14~5살에 곡을 쓰기 시작했다. 탈린 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웠다. 1940년부터 에스토니아는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 있었고, 당시 소련에는 서유럽의 음악이 전해지지 않았다. 패르트의 초기 작품은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바르토크와 같은 신고전주의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뒤에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12음렬 기법과 음렬주의를 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패르트는 소비에트 연방에 염증과 음악적 한계를 느꼈다.
패르트는 오히려 과거로 돌아가 그레고리오 성가와 르네상스 시대의 폴리포니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러시아 정교회를 믿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서는 그가 현실에 받은 충격이 음악적인 것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기부터 그의 음악은 아주 다른데, 3화음과 심지어는 하나의 음과 같은 단순한 화성이 쓰인다. 패르트 자신은 이를 "tintinnabular(종의 울림)"이라 표현했다. 리듬도 단순하고 템포가 바뀌지 않는다. 에스토니아어 가사 대신에 정교회에서 쓰는 라틴어나 교회 슬라브어로 쓰여진 종교적인 가사를 썼다. 패르트의 음악은 50개가 넘는 영화에 쓰였다. 《벤자민 브리튼을 추모하는 성가》는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 중에서 테러 직후의 장면에서 배경음악으로 쓰였다.
Arvo Part의 음악은 마치 수백년전에 작곡된듯하지만 오늘날 작곡될수 밖에는 없는 음악이다. 그의 음악에서 시간은 멈추어 있다. 그 말은 곧 영원함을 뜻하기도 한다.
그 속의 화성들은 기계적으로, 음악이론상으로, 얽매여 있지 않다.
그 자체로서만 존재할 뿐
Lana Trotovsek / Arvo Part - Fratres
Arvo Pärt - Fratres / Gil Shaham, violin
Violin Sonata No.2 in D major, Op.94bis 프로코피에프 / 바이올린 소나타 2번
1악장 (Moderto) - 모데라토 D장조 4/4 박자 소나타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느끼게 하는 악장. 러시아 민요풍의 주제로 명알하게 시작된다. 소나타 형식의 악보, 느릿하게 노래되는 제1주제와 무곡풍의 제2주제가 차례로 제시되면 리드믹한 바이올린의 패시지와 더불어 전개부로 옮겨진다. 러시아적 정서를 담은 각 주제가 전조되면서 순차적으로 전개된 후, 근대에 만들어진 소나타로서는 보기 드물게 도입부의 연주가 반복된다.
2악장 (Scherzo :Presto) - 스케르조 : 프레스토 a단조 3/4박자 싱싱한 피아노의 서주에 이끌려 바이올린이 주요 주제를 제시하고 2개의 악기가 경쾌하게 전개하면서 중간부(D장조, 2/2박자)로 들어간다. 현란하고 빠른 트리오 부분에서는 바이올린에 의한 자장가와도 같은 새로운 멜로디를 피아노가 드럼의 저음풍으로 바꾼다. 우수를 띈 바이올린 선율이 나타나고 다시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익살스러운 패시지가 따른다. 이후 재현부터 옮겨간다. 3악장 (Andante) - 안단테 F장조 2/4박자 피아노의 차분한 반주를 타고 피아노가 둥글둥글한 주요주제를 켜낸다. 똑같은 선율이 피아노에서 이어지면서 아늑하고 조용하게 얽혀 나간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짧은 음형을 잔물결 같이 서로 응답해 나가는 중간 부를 끼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몽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멎는 인상파풍의 서정적인 악장이다.
피아노의 리드믹한 화음이 열정적인 독주의 선율은 받치고 제 1주제를 제시한다. 이어 반복된 후 부주제를 제시하고 다시 피아노가 낮은 음역에서 제 2주제를 제시한다 이 2주제에 플릇이 화려한 패시지를 겹쳐 장대한 전개를 보인다. 이 후 1주제. 부주제, 2주제가 나타나고 이어 중간부(3/4박자, F장조)로 옮겨간다. 애수에 넘친 주제가 바이올린에 의해 연주되고 피아노는 점점 규칙 바른 리듬을 새겨나간다. 이 선율은 점점 커지면서 전개된 후 재현부로 옮겨가면서 끝을 낸다.
프로코피에프 / 러시아 작곡가. 손초프카 출생 Sergei Prokofiev, 1891-1953
프로코피에프 [Sergei Prokofiev, 1891-1953] 예카테리노현 손초프카(현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출생. 아버지는 유대인 대지주이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과 친숙해져 5세 때 《인도풍(風)의 갤럽》을, 9세 때 피아노반주가 딸린 오페라 《거인》을 작곡하였다. 1904년 페테르부르크음악원에 입학, A.K.리아도프, A.N.체레프닌, N.A.림스키코르사코프 등에게 사사하여 작곡·음악이론·피아노·지휘 등을 배우고 1914년에 졸업하였다. 이 사이에도 《제1피아노협주곡》을 비롯하여 많은 곡을 작곡하였으며 또 1908년에는 ‘현대음악의 저녁’이라는 모임에 참여하여 이때부터 유럽 근대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런던에서 S.P.디아길레프에게 발레음악 작곡을 권유받아 귀국 후 《알라와 롤리》를 작곡하였으나 이 작품은 상연되지 않은 채 《스키타이모음곡》으로 개작되었다.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1918년 미국에 망명, 오페라 《3개의 오렌지에의 사랑》 등을 발표한 다음 유럽으로 건너가 유명한 《피아노협주곡 제3번》을 포함한 많은 곡을 작곡하였다. 1933년 소련의 여러 차례에 걸친 귀국 종용으로 조국으로 돌아가 당국의 비판을 받아가면서도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교향곡 제5번》 등을 완성하고, 스탈린의 사망과 같은 해에 죽었다. 작풍은 초기의 원시적인 격렬함에서 점차 고전적 경향으로 이행하여 감미롭고 간소한 스타일을 취하였다. 8개의 오페라, 7개의 발레, 각 10곡의 교향곡과 협주곡 외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Sergei Prokofiev, (1891~1953) 피아노 주자였던 어머니에게서 어려서부터 음악 교육을 받은 프로코피에프는 작곡에 놀라울 정도로 조숙한 재능을 나타내었다. 5세 때 피아노곡 인도의 갈롭을, 9세부터 10세 무렵에는 거인과 무인도에서라는 두 개의 규모가 작은 오페라를 작곡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학생인 유리 포메란체프 Yuri Pomerantsev와 당시 아직 젊은 작곡가였던 글리에르에게 화성의 기초를 배웠고, 그의 작곡에의 시도는 세르게이 타네예프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1904년 페테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리아도프에게 화성을 배우고, 처음에는 빙클러 Vinkler, 이어서 에시포바 Esipova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비톨 Vitol에게 작곡을,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관현악법을, 체레프닌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또한 그곳에서 니콜라이 미아스코프스키와 알게 되었고 그와의 친교는 평생을 통해 계속되었다. 그러나 철학적인 음악 교육과는 성격이 맞지 않았고 오히려 일찍부터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에 관심을 보였던 프로코피에프는 최초의 몇 개의 리사이틀에서 드뷔시나 슈트라우스, 레거(음악원에서는 모두 악평을 얻고 있었다), 그리고 쇤베르크라는 작곡가의 작품을 초연하였다. 그의 연주자로서의 평가는 그 힘참과 테크닉으로 청중을 매료시키기보다는 청중에게 충격을 줌으로써 급속히 높아졌다. 그는 20세가 될 무렵에 유르겐슨사에서 몇 개의 초기 작품을 출판했다(슈만이나 레거, 라흐마니노프 등의 영향을 지닌 피아노 소나타 제1번,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연습곡과 8개의 소품). 1914년 프로코피에프는 루빈스타인 피아노 콩쿠르에 출전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는데, 그 심사 때 오케스트라 반주로 자작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했다. 피아노 소나타 제2번과 함께 이 작품(1911~12)에 의해서 프로코피에프의 양식은 확실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힘찬 리듬과 타법, 느닷없이 혀를 찌르는 듯한 격렬한 화성에의 기호, 이런 명확한 힘과 민속적인 선율의 감흥이 느껴지는 슬프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서정성과의 대조 등이 엿보인다. 1912년에 마야코프스키를 포함한 러시아의 시인 그룹이 대중의 취미에 대한 일격이란 제목으로 미래파 선언을 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프로코피에프는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작곡했고 1913년의 초연 때는 대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협주곡은 독주자의 육체적 가능성의 한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나 그것말고도 피아노를 위한 10개의 소품 op. 12에는 보다 섬세하고 내면적인 프로코피에프의 또 하나의 측면이 표현되고 있으며, 이 양 극단의 두 측면이 각기 이 작곡가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1914년의 런던 여행 때 프로코피에프는 디아길레프와 알게 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도박사를 본뜬 오페라의 계획에 그가 흥미를 보이길 바랐으나 디아길레프는 러시아적인 주제나 선사시대의 주제를 가진 발레를 그에게 의뢰하게 된다. 이것은 알라와 롤리로 실현되었다. 이 작품은 스키타이의 신화에서 제재를 취하여 시인 세르게이 고로데츠키 Sergei Gorodestki가 각본을 쓴 것인데, 디아길게프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하게 된다. 프로코피에프는 이것을 다시 손질하여 스키타이 모음곡을 작곡했다.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힘찬 이 작품은 전편을 환상적인 꿈이 넘치는 힘찬 크레셴도로 끝맺는다. 스키타이 모음곡은 거대한 편성의 관현악을 사용하였으며 범몽고적인 사조의 계보 속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대한 프로코피에프의 대답이었다. 디아길레프의 거절은 프로코피에프로 하여금 그와의 협력을 단념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함께 새로운 발레의 주제를 찾게 했다. 어릿광대는 이렇게 하여 러시아의 민요집에서 뽑은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이 실현되기까지에는 6년이나 걸리게 된다. 1916년부터 1917년에 걸쳐서 프로코피에프는 거의 모든 장르의 작곡에 손을 대게 된다. 이 시기에 오페라 도박사를 완성하고(1917), 피아노 소나타 제3번과 피아노 소나타 제4번,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20곡으로 된 소곡집 잠깐 사이의 환영(1915~17) 등을 작곡했는데, 잠깐 사이의 환영은 쇼팽의 전주곡이 낭만주의 음악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지위를 그 시대의 음악 속에서 차지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매우 대조적인 두 개의 작품, 고전적 교향곡과 칸타타 그들은 7인(1917~18, 개정 1933)은 콘스탄틴 발몬트 Konstantin Balmont의 러시아 혁명의 격동에 대한 예감 속에서 씌어진 〈칼데아의 기원〉을 토대로 한 것으로서 스키타이 모음곡의 미학에 이어져 있다. 이 무렵 프로코피에프는 막심 고리키와 마야코프스키를 알게 되지만 몇 달 뒤에는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프로코피에프는 음악적으로는 혁명가였으나 정치에는 거의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 직후 러시아에서 활동의 장을 찾아내지 못하고 교육 인민위원이었던 루나차르스키 Lunacharski에게 미국으로의 망명 허가를 신청했다. 그는 1918년 5월 미국을 향해 가던 중 일본에 들러 몇 차례 리사이틀을 열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일부 비평가들이 그에 대해 좋지 않은 평을 했으나 어쨌든 상당히 빨리 명성을 얻게 되었다. 시카고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있던 이탈리아인 캄파니니 Campanini는 18세기의 작가인 Gozzi의 우화 3개의 오렌지에의 사랑을 토대로 한 오페라 테마를 그에게 의뢰한다. 프로코피에프는 곧 그 악보를 완성했으나 캄파니니의 돌연한 죽음으로 상연은 연기되고 말았다. 1920년 4월 그는 미국을 떠나 프랑스로 갔으며, 파리에서는 디아길레프의 모임에 가담하여 스트라빈스키, 풀랑, 미요, 데 팔랴, 라벨 등과 친교를 맺었다. 프로코피에프는 파리 체재 동안 두 차례에 걸쳐 미국 여행을 했는데, 두 번째 미국 여행은 오페라 3개의 오렌지에의 사랑의 초연(1921. 12)을 위해서였다. 파리에서는 발레어릿광대가 상연되었고(1921. 5), 또한 피아노 협주곡 제3번도 그 해에 완성되었다(작곡은 1917년에 시작). 이 작품은 이전의 작품들보다도 더 합리적인 구조와 보다 교묘하게 처리된 활력을 지니고 있다. 1922년 프로코피에프는 바이에른 지방의 알프스 산 속에 있는 에탈에 거처를 정하고 이곳에서 발레리 브류소프 Valrei Bryusov의 소설에 바탕을 둔 오페라 불의 천사를 작곡했다. 이 오페라는 16세기에 일어난 X악마에 홀린 사건을 다룬 것이다. 동시에 그는 서방 여러 나라의 주요 도시(런던, 베를린, 브뤼셀 등)에서 연주활동도 계속했다. 프로코피에프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 자신의 노력과 아울러 이 무렵에 망명하여 러시아 음악을 활발하게 소개하던 지휘자 쿠세비츠키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 1923년 프로코피에프는 파리로 돌아가서 같은 해 러시아와 스페인의 피를 이어받은 젊은 카롤리나 류베라 코디나 Carolina LluberaCodina와 결혼하여 두 아들 스비아토슬라프 Sviatoslav와 올레그 Oleg를 얻었다.그는 교향곡 제2번(1924~25)을 작곡하여 구성주의 미학에 접근했는데, 여기에 오네게르가 퍼시픽 231을 통해 칭찬을 보내 왔다. 2년 후에 소련 연방에서의 새로운 생활과 공업화의 실현을 주제로 하는 구성주의적 발레를 작곡할 것을 디아길레프로부터 의뢰받아 강철의 걸음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1927년에 야쿨로프 Jakulov의 무대장치와 데조르미에르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몇 년 전부터 사실 프로코피에프는 점차 소련 연방에 이끌려 들어가게 되었다. 서방사람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연연해 하는 망명한 동향인들 틈에서도 프로코피에프는 자기 자신을 이방인처럼 여기게 되었다. 1927년 초에는 소련 연방을 처음으로 여행하여 미아스코프스키 같은 이전의 친구들과 다시 사귀게 되었고 자기의 국외에서의 작품이 이미 그곳에 들어와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강철의 걸음은 소련 사람들에게서는 비난을 받았으며 우스꽝스러운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1927년에 불의 천사를 완성한 프로코피에프는 이 오페라의 주제에서 교향곡 제3번의 작곡을 시도했다. 그 이듬해에는 디아길레프로로부터 새로운, 그리고 최후의 발레 작곡을 의뢰받는다. 이것이 복음서의 우화에 기초한 방탕한 아들로서 세르주 리파르 Serge Lifar가 주인공을 맡아 초연했다. 얼마 후 디아길레프가 베니스에서 죽자 프로코피에프와 서방세계와의 중요한 한 통로가 끊겨 버렸다. 그래서 그는 7년 동안 소련 연방과 서방 세계의 틈에 끼어 안정을 잃은 생활을 하게 된다. 1930년에 다시 미국을 여행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국회 도서관의 위촉으로 현악4중주곡 제1번을 작곡하게 된다. 1932년 리파르와 협력하여 작곡한 발레 보리스텐 강가에서가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되었으나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또 하나의 실패는 피아노 협주곡 제4번(1931)이다. 이 협주곡은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파울 비트겐슈타인 Paul Wittgenstein의 의뢰로 씌어진 것인데 비트겐슈타인은 헌정받은 그 작품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피아노 협주곡 제5번(1931~32)은 제2번이나 제3번과 유사한 작품으로서 이것은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프로코피에프는 아직 소련의 시민권을 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33년으로 접어들자 소련 연방으로부터 가장 흥미있는 몇 개의 작곡 의뢰를 받았다. 파인치머 Feinzimmer 감독의 영화를 위한 음악 키제 중위가 그 첫번째였는데, 이것은 대중의 감상 능력에 맞추어 보다 고전적인 양식으로의 회귀를 보여주고 있다. 1936년에는 어린이를 위하여 피터와 이리를 작곡했으며, 그밖에도 연출가 라들로프 Radlov와 협력하여 대규모의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초연 1938 브르노)을 작곡했다. 이것은 프로코피에프의 최초의 소비에트적 발레이며, 또한 고전 문학에서 주제를 찾은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이 발레곡에서 교향적 모음곡(포로코피에프는 무대작품의 대부분을 이러한 형식으로 편곡하고 있다)과 일련의 피아노 모음곡이 태어났다. 1937년 프로코피에프는 소련의 시민권을 얻게 된다. 운이 나쁘게도 그가 조국으로 돌아간 것은 마침 권력의 통제가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강화되던 시기였다. 1932년에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이 발족하고 1936년에는 유명한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멕베드 부인을 둘러싼 사건의 벌어졌는데, 이 곡은 음악이 아니라 엉터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그 어떤 이유에서 기피시된 음악가들도 형식주의라 하여 맹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형식주의란 리듬이나 음색, 화성의 짜맞춤 등 음악의 여러 요소를 사용한 인공적인 것에 대한 추구로 인해, 음악이 지닌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내용을 희생시키는 것이며 최악의 오점으로 여겨져 왔었다. 많은 러시아 음악가(라흐마니노프, 샬리아핀, 체레프닌, 메트네르, 글라주노프 등)는 그들의 자유와 러시아에 있어서의 과거를 수호하기 위하여 소련의 미래를 부정하고 망명의 길을 택했으나 프로코피에프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필요 불가결한 원천이었던 러시아로 돌아가기 위하여, 그는 그 자유를 희생하고 소련이 공인하는 작곡가가 되었으며 이 지위에 따른 모든 득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1937년 프로코피에프는 수년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혁명 20주년 기념을 위한 칸타타를 완성했다. 그는 이곳에서 레닌을 포함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의 텍스트에 음악을 붙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검열에 걸려서 이러한 종류의 텍스트는 노래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영화감독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아이젠슈타인 Sergei Mikhailovich Eisenstein과의 만남으로 인한 협력관계는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된다. 프로코피에프는 역사적이고 애국적인 대프레스코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1938)를 위하여 음악을 썼다. 여기서는 소비에트적 미학의 요구에 맞게 씌어진 민중적이고 서사적인 부분(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노래, 죽음의 들판에서, 〈피날레〉)과 작곡자의 서방 시대의 양식(푸스코프의 십자군 병사나 얼음 위의 싸움)이 모두 인정된다. 이 영화에 의해서 프로코피에프는 19세기 러시아 국민 오페라의 전통과 결부되고 있다. 1939년 12월에는 스탈린 탄생 60주년 기념을 위한 칸타타 축사를 작곡하면서 체제 찬사자의 합창에 가담했다. 같은 해 우크라이나의 내전에서 착상을 얻어 그의 첫번째 소비에트적 오페라 시메온 코트코를 작곡하는 동시에 새로운 피아노 소나타(전쟁 소나타라 불려지는 세 곡, 제6번, 제7번, 제8번)의 작곡을 시작했다. 이들 세 곡의 소나타는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작품 분야에서 창조의 정점을 형성하는 기념비적 작품이며, 앞의 두 곡은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을 소련에서 초연한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터에 의해서 초연(1943), 제8번은 길렐스에 의해서 초연되었다(1944). 1940년에 그는 그의 새로운 동반자이자 협력자가 되는 젊은 시인 미라 멘델손 Mira Mendel'son과 알게 된다. 그녀는 그에게 셰리단 Sheridan의 성미까다로운 노파 The Duenna에 기초한 오페라 코미크 수도원에서의 약혼의 주제를 제안했고, 또한 그들은 톨스토이 원작에 의한 오페라 전쟁과 평화의 대본을 함께 각색했다. 이 오페라는 1941년에 작곡하기 시작하여 이후 프로코피에프는 죽을 때까지 그 작곡을 계속했다. 소련과 독일이 적대관계로 들어가자 곧 프로코피에프는 다른 많은 예술가나 지식인들과 함께 카프카즈 지방으로 옮겨 가서 그곳에 2년간 머물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칸타타 이름도 없이 남겨진 소년의 발라드나 카바르다 지방의 주제에 바탕을 둔 현악4중주곡 제2번,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이 곡은 뒤에 오이스트라흐의 의뢰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하여 개작된다) 등을 작곡했는데, 특히 플루트 소나타는 고뇌의 색깔이 짙은 비장한 작품이 많이 작곡된 이 시기에 그 명쾌함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뭉클하게 하였다. 그러나 1942년부터 프로코피에프는 특히 새로운 역사 영화 이반 뇌제의 제작에 수반하여 아이젠슈타인과의 협력을 재개했다. 이 영화는 1945년에 제1부를 상연하여 스탈린 상을 수상했으나 제2부는 검열에 걸려서 상연이 금지되었다(1958년 이후 상연된다). 1948년 아이젠슈타인이 죽자 영화음악 분야에서의 프로코피에프의 활동은 끝나게 된다. 1945년부터 1947년에 걸쳐서는 지난 수년간 스케치해 오던 여러 작품을 완성하여 초연했다(교향곡 제5번, 발레 신데렐라[초연 1945. 12. 볼쇼이 극장], 오페라 전쟁과 평화의 제1부[초연 1946. 6. 말리 극장, 레닌그라드] 등). 또한 10월 혁명 30주년 기념을 위한 두 곡의 작품 축제의 시와 번영하라, 힘찬 국토여를 작곡한 동시에, 1947년에는 최후의 피아노 소나타 제9번을 작곡하여 리히터에게 헌정했다. 이 작품에서는 어법상의 어떤 간소화가 엿보인다. 같은 해에 그는 R. S. F. S. R.로부터 국민예술가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러나 이 영예도 이듬해의 안드레이 즈다노프 Andrei Zhdanov가 공표한, 일찍이 보기 어려웠던 가혹한 형식주의 비판에서 그를 옹호할 수는 없었다. 이 비판은 쇼스타코비치나 하차투리안, 미야스코프스키나 카발레프스키 등, 소련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들에게까지도 미쳤다. 프로코피에프의 일련의 모든 작품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특히 그의 서구 시대의 작품(어릿광대, 강철의 걸음, 방탕한 아들, 불의 천사 등)에 비판이 심했고, 피아노 소나타 제8번 같이 소련 시대에 작곡된 작품에까지도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프로코피에프는 자기 비판을 강요당했는데 비판을 면한 몇 개의 작품(로미오와 줄리엣,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교향곡 제5번 등)으로 주의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수개월 후 그의 신작 오페라 진실한 인간의 이야기는 전시 중 소련 공군 비행사의 영웅적인 생애를 다룬 작품인데도 검열에 걸려 상연이 중지되었다. 불안정한 건강상태(고혈압)에도 불구하고 프로코피에프는 모든 정력을 작곡에 기울였다. 1950년에 그는 평화의 수호자를 작곡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했다. 그의 만년의 작품 중에서 중요한 것으로는 로스트로포비치와 리히터를 위하여 작곡한 피아노와 첼로 소나타, 교향곡 제7번, 그리고 특히 발레곡 석화(石花) la fleur de pierre가 있다. 석화는 우랄의 전설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 1954년 모스크바에서 초연되었다. 전후 프로코피에프가 살았던 곳은 모스크바 교외인 니콜리나 고라였는데, 그는 이곳에서 1953년 3월 5일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사실상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날은 바로 스탈린이 죽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프로코피에프는 종교음악을 제외한 모든 장르의 작품에 손을 댔다. 그는 그 자신의 최고의 것을 피아노 음악(그의 협주곡, 소나타, 그리고 수많은 소품은 20세기 피아노 음악의 레퍼토리 중 제1급에 속한다), 발레음악, 영화음악에 쏟아 넣었다. 특히 발레나 영화에서 사용되고 있는 음악에서는 시각적인 움직임이나 정경에 대해서 음악에 의한 등가물(等價物)을 만들어내는 데 뛰어났다. 그의 오페라 음악은 도박사나 불의 천사에서의 명백한 힘과, 시메온 코트코 Simeon Kotko와 전쟁과 평화의 몇몇 에피소드에도 불구하고 더한 불균등을 나타냈다. 프로코피에프는 성악서법 분야보다는 화성이나 기악 분야에서 비교가 안될 정도로 혁신적이었으며 심리학자라기 보다는 삽화가, 해설가였다. 그는 현실적, 자발적이었으며 구상(具象)과 미래에 눈을 돌리고 있었고, 또한 신랄하고 엄격하며 종교적이고 도발적인 동시에 서정적인 시인이었다. 그는 항상 그의 선율의 창작을 자신이 만들어낸 갖가지 양식에 적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형식과 견고한 구성에 대한 감각과 교묘한 착상의 처리 방법에 의해 고전파 음악가들의 직접적인 후계자였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대체로 그가 다작가이며 또한 어떤 경우에나 쉽게 적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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