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클래식 시리즈 I
1991년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인 프랑스의 프랑크 브랠리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의 대명사격인 21번 C장조를 협연합니다. 이 곡은 영화 `엘비라 마디간`삽입곡으로 쓰여 대중적 인기를 얻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브랠리는 르노, 고티에 카퓌송 형제와의 실내악 활동으로 한국 청중에게 낯익은 피아니스트 입니다. 지난해 말러 교향곡 10번(데릭 쿡 버전)을 지휘했던 한스 그라프는 이번엔 브루크너의 미완성 교향곡인 9번 D단조를 메인 프로그램으로 소개합니다. 첫 곡인 미요의 `천지창조’는 제목이 주는 인상과 달리 재즈 스타일이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지휘 한스 그라프 Hans Graf, conductor
협연 프랑크 브랠리, 피아노 Frank Braley, piano
[프로그램]
미요, 천지창조 Milhaud, La creation du monde, Op. 81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Mozart, Piano Concerto No. 21 in C Major, K. 467
브루크너, 교향곡 9번 Bruckner, Symphony No. 9 in d minor
한스 그라프
Hans Graf지휘자
"그라프는 쳄린스키의 서정 교향곡에서 깊고 만져질 듯한 관능을 표현하였다. 숨이 멎을 듯한 텍스쳐의 아름다움과 투명함이 결합된 연주였다." (가디언)
휴스턴 심포니의 음악감독인 한스 그라프는 존경받는 지휘자이자, 창의적인 프로그래밍, 폭넓은 레퍼토리에 대한 해석으로 이름이 높다. 2006년 휴스턴 심포니의 카네기홀 데뷔 무대를 이끌었으며, 2010년 1월에는 홀스트의 "행성"과 NASA의 영상을 결합하는 비디오 프로젝트로 카네기홀 무대에 다시 섰다.
유럽과 미주 양 대륙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한스 그라프는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 캘거리 필하모닉, 보르도 아키텐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2002년 프랑스 정부의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2007년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황금 명예 훈장을 받았다. 뉴욕 필하모닉, LA필하모닉, 클리블랜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미국 주요 교향악단을 지휘하였으며, 보스턴 심포니와는 정기 공연과 탱글우드 뮤직 페스티벌을 지휘하는 등 꾸준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유럽에서는 빈 필하모닉,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등을 모두 지휘하였으며, 피렌체 마지오 무지칼레, 액상프로방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자주 출연하였다.
향후에 로테르담 필하모닉, 런던 필하모닉, 드레스덴 필하모닉, 홍콩 필하모닉, 서울시향 등을 지휘하게 되며, 베를린 도이체 심포니, 힐베르숨 라디오 필하모닉 등과도 정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인디애너폴리스, 디트로이트, 세인트루이스 심포니 등에 재초청 받았다. 베를린, 뮌헨, 빈, 파리, 취리히, 로마의 오페라 극장과 일하고 있는 한스 그라프는 최근에 보르도 오페라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취리히 오페라에서 <파르지팔>을, 스트라스부르 오페라에서 <보리스 고두노프>를 지휘한다.
수많은 그의 음반 중에서 모차르트의 슈베르트 교향곡 전곡 녹음, 뒤티에 관현악 전곡 녹음이 주목할 만하며, 쳄린스키의 오페라 <옛날 옛적에>를 세계 최초로 녹음하였다. 휴스턴 심포니와는 버르토크의 <나무 왕자>(Koch), 쳄린스키의 서정 교향곡(낙소스), 말러의 <대지의 노래>(낙소스) 등을 녹음하였으며, 이외에도 EMI, 오르페오, 에라토, 카프리치오 등에서 많은 음반을 발매하였다.
린츠 인근에서 태어난 그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운 후 그라츠에서 지휘를 배웠고, 이탈리아에서 프랑코 페라라와 세르지우 첼리비다케를, 러시아에서 아르비드 얀손스를 사사하였다.
브루크너 교향곡 9번 D단조 작품해설 이 글에서는 일반적인 이 코너의 형식과는 달리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만한 사고의 방향들을 제시하면서 곡의 해설을 대신하고자한다. 먼저 작품에 대한 고찰이 수반된 뒤에 다시 내부적으로 곡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브루크너 교향곡의 의미와 특히 9번이 차지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그럼 과연 명확하게 어떤 부분이 브루크너와 바그너가 일치하는가에 대해서 간단히 생각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바그너를 우상으로 생각한 브루크너는 실질적으로 바그너 음악 자체와 유사하기보다는 기존의 보수적인 음악(그가 평생토록 배워온 음악들이 바로 이러한 고전적이거나 바로크적인 음악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그너 음악을 접하므로써 새로운 영감과 부딪히게 된다.)과는 다른 방법으로 머리 속의 생각을 음악으로 구체화시켰다. 그래서 엄밀히 말한다면 이러한 표현 방법의 철학 자체만이 바그너와 유사하다는 의미이다. 바그너는 신화, 죽음, 사랑, 증오를 토대로 음악적 언어를 구사한 반면 브루크너는 종교적인 색채의 합창과 신을 배경으로 한 언어로써, 엄격하게 두 작곡가의 음악은 매우 다르다. 우리가 브루크너를 교향곡이란 장르를 베토벤 이후에 더욱 발전시켰다 라는 말은 단순히 그가 곡의 크기만을 부풀렸기 때문에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가 대위법이란 작곡 기법과 소나타 양식에 충실하면서 바그너적인 방법들까지 융화시켜서 금관악기들의 합창곡처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후대에서 바라보여지는 부분을 잠시 접어두고 브루크너 당시,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베토벤과 항상 비교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심리적 상황으로 그는 이 곡이 베토벤 9번처럼 마지막 악장은 합창을 수반하는 거대한 곡으로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그토록 그가 오랜 시간을 투자하면서 고심하던 부분도 바로 이런 점이 이었으며 마지막 미완으로 남겨질 자신의 곡에 대해서 그는 " 테 데움"이 대신 연주되기를 원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브루크너가 합창을 동반한 거대한 곡으로 완성하리라 생각한 이 교향곡은 베토벤 9번과는 음악적 성격이나 주제가 다르다. 음 하나하나를 짙게 눌러서 표현하는 브루크너 음악은 오르간의 음을 연상케 하며, 선율이 점층적이고도 분명하며 반드시 강렬한 투티를 통해 정서적인 분출을 시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음향 자체도 베토벤보다 더욱 밀도가 높다. 이러한 음악적 특징을 통해서 그가 최종적으로 결말을 짓고 있는 것은 투쟁적이고 혁명적인 면보다는 당연히 종교적인 동화와 아울러 영속적인 평화로 귀의함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역시 그의 마지막 교향곡답게 그를 끝까지 잡고 있던 종교적인 신앙의 고백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2. 이 교향곡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한 방향으로 연주가 이루어져야 하는가? 3. 연주의 창조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4. 브루크너 곡을 연주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5. 꼭 빈 필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6. 마지막으로 브루크너는 어떤 사고의 소유자였는가? 9번의 최초의 스케치는 63세 때인 1887년 9월이며 그후 병세가 점점 심각해지고 나이가 들면서 3악장까지 작곡하고 200페이지 분량의 피날레 스케치를 코다까지 남겨둔 상태로 서거하게 된다. 이 피날레를 가지고 브루크너의 의도와 비슷하게 다시 완성하려는 시도는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마지막 코다 부분은 브루크너의 영면과 함께 엄숙한 세계로 완결 지어졌기 때문에 굳이 피날레 부분에 손을 델 필요는 없다고 본다. 브루크너는 마지막에 이 피날레가 완성되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테 데움이 대신 연주되기를 바랬었다.
곡의 초연은 그의 사후인 1903년 2월 11일 빈에서 Ferdinand Lowe 지휘로 당시 막 창단된 빈 콘체르트페라인 오케스트라 (Wiener Konzertvereinsorchester)에 의해 행해졌다. 이 오케스트라는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전신에 해당한다. 뢰베는 작품의 연주를 원활히 한다는 미명하에 브루크너의 악보를 수정했으며 그 수정본이 Doblinger에 의해 이듬해 출판된다. 1934년에야 Alfred Orel이 편집한 오리지날 악보가 출판되게 된다. 크나퍼츠부쉬 (1950)를 비롯해 푸르트벵글러 (1944), 아벤트로트 (1951) 등은 모두 이 오리지날 악보를 쓰고 있다. 반면 현대의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1951년에 출판된 Leopold Nowak판을 이용하고 있는 추세다. - 김성익
분명 초기의 교향곡 작품들은 아직 고전주의(베토벤, 모차르트 등의 작곡기법)등의 구조들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브루크너의 개성이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개성적인 면들이 작곡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오하게 복잡해져 가는데, 이 과정에서 바그너의 영향이 실제보다 더 과장되게 이해되는 것과 함께 다른 작품 외적인 요소들보다 두드러지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작품 내면 본질에 대한 왜곡이 일어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우리가 역사의 뒤편에서 브루크너를 재평가하면서 어떤 규정이라는 틀 속에 넣기 위한 편리하고도 위험한 도구임을 솔직히 인정해야만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어떠한 음악적 산물이 홀로 독립된 창조물이 아니라 과거의 훌륭한 전통으로부터 이룩되어진다. 그러므로 브루크너 또한 예외가 아니며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추구 방향을 설정하고 독자적인 언어를 통해서 더욱 확대시켰다. 후기로 접어들면서 드디어 이러한 면들은 확실히 브루크너와 일체감을 형성하게 된다. 바그너는 단지 그가 생각하는 진보적인 음악(또한 베를리오즈, 리스트)의 전형으로 간주된다.(이는 형이상학적인 면과 특히 미학에 관한 관점 자체로써 존중했다는 뜻이다.)
흔히 트럼펫은 종교 음악적인 분위기에는 가장 높이 있는 신을 상징한다. 이는 매우 당연한 음악적 건축물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의미처럼 오케스트라의 최정상(튜티에서 역할을 일컬음)을 차지하는 이 악기의 특색과 역할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될 것으로 안다. 대부분의 지휘자나 연주자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특히 브루크너가 항상 투티의 마지막까지 어떤 악기를 고집하고 있던가? 다른 금관악기들은 상당히 장식적인 면이나 음의 집속도를 높이고 고조되는 상승 분위기를 나타낸다. 하지만 최고의 순간에는 반드시 이러한 분위기 속에 뻗어 나오는 표현의 핵심이 존재한다. 이를 제대로 살려내느냐? 못 내느냐? 하는 부분이 이 교향곡을 바라보는 진정한 시각이 된다. 이는 스코어 상에 지시된 포르티시시모(fff) 말고도 진정 작품의 핵심을 꿰뚫는 혜안이 있다면 반드시 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바로 창조에 대한 시도로 이루어져왔다. 그러므로 예술이란 장르도 이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이러한 점은 발전이라는 표어 하에서 자행되는 퇴행적인 방향이 아니라 순수한 의도로 빚어내는 진실한 마음과 진리를 추구하여야 함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곡에 대한 해석방향도 창조적인 시도나 새로운 의도가 더욱 돋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단지 돋보이고 싶어서 남들과 다르기만 하다고 해서 진정한 창조성의 표출인가 하는 물음은 어렵고도 힘든 문제인가? 해답은 간단하게 결코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작곡가의 그 당시 절대적인 진리의 상황을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하지만 이에 근접한 상황을 연주자가 간접적으로나마 진실에 근접하게 표현만 하더라도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음악을 듣고 이해함에 있어서 귀중한 것은 이러한 느낌들을 구체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연주가 중요하다. 이런 역할을 소홀히 하는 연주들은 자연스레 훌륭한 연주의 대열에서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위의 질문에서 내포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바로 브루크너 음악을 낭만주의로 볼 것인가 아니면 고전주의나 바로크로 볼 것이냐 하는 중요한 문제와 접하고 있다. 그는 항상 창조적인 자신의 능력 배양을 위해서 평생토록 공부를 하였다. 그러므로 고전주의에만 안주할 수 없었던 브루크너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다른 작곡가들이 교향곡을 작곡할 나이에도 그는 아직도 더 많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브루크너의 이런 면을 통해서 단순히 그의 음악적 유산이 단순히 고전주의를 계승하였다 라고 보기보다는 낭만적인 내적 갈망(주로 신에 대한 귀의나 평화)을 보다 바그너적인 수법을 통해서 차분하게 낭만주의를 실현하였다 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렇게 종교 음악적인 분위기가 포함된 낭만성이 가득한 음악은 어떠한 흑백논리의 범주 즉 우리의 편의적인 틀에 귀속시키려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여기서 다루고 있는 교향곡이란 장르에서는 낭만성이 가득한 음악으로 생각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각 단원들의 연주실력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 물론 지휘자의 역할도 있지만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 일단 곡 자체가 필요로 하는 것은 굉장히 밀도 높은 음색과 특유의 빛깔이다. 브람스의 음악적 색깔과는 판이하게 다른 황금빛이 요구된다. 이런 색채 감각에 가장 적합한 오케스트라는 존재하는가? 이에 대한 물음은 쉽게 답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연주들의 녹음으로도 알 수 있듯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가장 적격이다. 오케스트라의 바탕색 자체가 회색이나 검은색의 느낌이 강하면 일단 곡이 필요로 하는 뉘앙스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브루크너가 8개의 호른과 3개씩의 트럼펫, 튜바를 쓰면서 같은 악기 종류라도 스코어에서 진행되는 음은 각자 다른 선율을 부르게 된다. 같은 호른 파트이면서도 4가지의 다른 선율이 사용된다. 이를 본다면 단순한 음색의 정갈한 빛깔이 요구되겠는가? 아니면 다양한 음색의 선율이 요구되겠는가? 이에 알맞은 해결책이며 근접한 선택법으로서 빈필이 적임이며 이는 음반으로써도 증명된다. 브루크너 곡에 대해서는 빈필이 필요충분 조건이다. 그리고 브루크너의 음악은 독일, 오스트리아 계통에서만 자주 연주될 뿐 다른 지역에서는 자주 연주되지 않는다. 그리고 빈이라는 도시의 색채감은 아주 브루크너적인 영상미를 짙게 함유하고 있다.
곡을 이해하는데는 그 작곡가의 심리적 상황이나 갈등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면 매우 놀라운 감수성을 우리들에게 부여한다. 그래서 단편적인 조각들이나마 브루크너의 그 당시 심리적 상태를 알아 보고자한다. 물론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인간에 대한 투영은 오류다. 단편적인 조각으로 한 인간 내면까지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단지 외부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유추적인 생각이 전부다. 그렇지만 조심스럽게 한번 접근해 보기로 한다. 일단 그는 일반적인 세속적인 삶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삶 속에서 카톨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착실함이란 외부적인 표정과 내부적으로는 강렬한 끈기나 열정이 도사리고 있는 이원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는 인생의 모든 것을 포괄적인 한가지로 초점을 맞추었다. 이것에는 여러 가지 부분이 포함될 수 있겠으나 먼저 자신의 음악적 식견을 넓히는 것이나 숭고한 음악을 헌정하는 일로 압축된다. 항상 진보적인 심리적 긴장상태를 유지하다보니 자연스레 건강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특히 그를 향해 비난하던 빈의 한슬릭(분명 시대착오적인 형식주의론자이지만 이 때문에 더욱 브루크너의 음악적 견해가 튼튼해질 수 있는 토대가 된다.)을 위시한 브람스 옹호주의자들에 의한 스트레스도 가세한다. 또한 강력하게 반대파에게 논박하지 못한 면과 작곡된 뒤에도 꼼꼼하게 다시 재수정을 가하는 면들을 통해서 상당히 유약한 심성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유약하다면 어떻게 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 9번 교향곡까지 작곡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진실한 음악적 완성을 신과 함께 완성되기를 바랬으며 최종적인 그 결과가 신에게 되돌려지기를 간절히 원하던 천진하면서도 강인한 인간일 뿐이었다.
브루크너는 마지막 교향곡인 미완성 9번을 위해서, 8번을 작곡한지 6주 뒤부터 죽기 전까지 10년이나 작업했다. 9번은 그의 마지막 최후의 삶에 대한 결정체이다. 숨을 거두는 그날에도 마지막 악장을 잠시 작업하다 숨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굳건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신에게 이 곡을 바치고 싶어했었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염원을 간직하고 있다. 이 곡의 음악적인 형상에 대해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점은 그 음의 구성에서 나타나는 생소함과 대담성에 대한 놀라움이다. 선율의 처리 방법은 복음정을 각별히 많이 구사하였으며, 풍부한 하모니는 바그너적인 반음계법이 침투하여, 음의 장대한 흐름은 아주 개성적인 면모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또한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브루크너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이제 브루크너는 그의 교향곡을 통해서 더욱 베토벤의 교향곡적인 형식을 발전시킨 셈이 된다.
작곡과 초연
글쓴 날짜: 2000/01/20
악기편성
악장구성
- 1악장 Feierlich, misterioso, 2/2 박자,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 제1 주제 - 제2 주제 - 제3 주제 - 전개부 - 재현부 - 코다 의 형식임.
- 2악장 Scherzo. Bewegt, lebhaft - Trio. Schnell, 3/4 박자, 복합 3부 형식. 트리오는 제1 주제와 제2 주제(A-B-A-B-A)로 구성됨.
- 3악장 Adagio. Langsam, feierlich, 4/4 박자, 변형된 소나타 형식. 제1 주제 - 제2 주제 - 전개부 - 코다로 구성됨.
펌<원글보기/http://pathetick.blog.me/60094812686>
Mozart, Piano Concerto No.21 in C major, K.467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C장조 K.467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Mozart: Piano concerto n. No. 21 in C major, K.467 Pollini-Muti
지난 회에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들었습니다. 내친김에 그 다음 곡인 피아노 협주곡 21번 C장조 K.467로 이어 가겠습니다. 사실 이 곡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입니다. 물론 그 유명세는 영화 <엘비라 마디간>(1967) 덕택이지요. 이 영화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세계적인 히트곡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미국의 빌보드 톱10에까지 올라갔을 정도입니다.
영화 덕분에 ‘별칭’이 바뀐 사연
<엘비라 마디간>은 1960년대에 제작된 영화 중 보기 드물게도 인상파적 영상미를 제법 연출해냈던 영화인데, 그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협주곡 21번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악장으로 손꼽히는 2악장 안단테가 곳곳에서 흘러나옵니다. 덕분에 협주곡 21번의 ‘별칭’이 바뀌는 일까지 생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원래 이 협주곡의 별칭이었던 ‘군대’가 ‘엘비라 마디간’으로 바뀌었다는 얘깁니다. 물론 ‘군대’라는 별칭도 모차르트가 붙인 건 아니었지요. 행진곡 풍으로 당당하게 시작하는 1악장 때문에 후대 사람들로부터 얻은 닉네임이었습니다. 어쨌든 영화 <엘비라 마디간>이 세계적 히트를 기록한 다음부터, 이 협주곡은 그냥 ‘엘비라 마디간’이라는 이름으로 통하게 됩니다. 음반 가게에 가서 “엘비라 마디간 주세요” 하면, 협주곡 21번을 곧바로 꺼내줬을 정도입니다.
20~30대는 이 영화를 잘 모를 듯합니다. 제가 7년 전쯤에 썼던 에세이에 이 영화를 언급한 내용이 있어서 이곳에 잠시 옮겨봅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에 총구를 겨눕니다. 하지만 차마 쏘지 못하지요. 그때 어디선가 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날아옵니다. 그녀는 나비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그 나비를 쫓아가지요. 그녀가 나비를 마악 손에 잡으려는 순간 화면은 멈춥니다. 이윽고 들려오는 두 발의 총성. 아름다운 초원에서, 인상파 그림 같은 햇살을 역광으로 받으면서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죽어갑니다. 참으로 지독한 낭만주의였지요. 1967년도 스웨덴 영화 <엘비라 마디간>입니다. 엘비라는 서커스단에서 줄을 타는 소녀였습니다. 육군 중위 식스틴과 사랑에 빠지지요. 전쟁을 혐오하는 식스틴은 아내와 두 아이를 버리고 엘비라와 함께 자유를 찾아 떠납니다. 카메라는 두 사람의 도피 행각을 쫓아가지요. 그 도피는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합니다. 두 사람은 돈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수시로 세어보고, 허기에 지친 엘비라는 토끼풀을 뜯어 먹기도 하지요. 국내 모기업의 CF에 등장했던 유명한 장면, 서로 다투던 남녀가 ‘미안하다’는 쪽지를 적어 시냇물 아래로 흘려보내던 모습도 바로 이 영화의 한 장면이었지요.” ▲식스틴과 엘비라의 실제 사진.
지금 읽어보니 약간 민망합니다. 어쨌든 이 영화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것과 더불어, 당시 17살에 불과했던 발레리나 출신의 여배우 피아 데게르마르크를 단숨에 스타로 만들어 버립니다. 청순하기 이를 데 없는 외모의 그녀는 1967년도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지요. 하지만 그 후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제대로 증명하지 못한 채 곧바로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맙니다.
모차르트가 협주곡 21번을 작곡한 해는 빈에서 보낸 ‘생애 마지막 10년’의 딱 중간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1785년입니다. 이 해에 모차르트는 3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잇달아 써냅니다. 20번부터 22번까지입니다. 특히 21번은 20번을 작곡하고 난 후 불과 한 달도 안 돼 세상에 첫선을 보입니다. 이렇게 속전속결로 걸작을 써냈던 것에 대해, 후대의 음악사가들은 대개 모차르트의 ‘천재성’이라는 맥락으로 해석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매우 현실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의 모차르트에게 가족의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가장 중요했던 두 개의 수입원은 피아노 레슨과 연주회였고, 그중에서도 연주회는 항상 새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여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숙제였을 겁니다. 물론 그 연주회들은 모두 ‘예약’ 연주회였습니다. 올 손님들이 이미 정해진 연주회였다는 뜻이지요. 그들은 주로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었는데, 모차르트의 연주회에 단골로 찾아오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니 모차르트는 지난번에 했던 곡을 다시 반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지난번 연주했던 곡과 새로 선보일 곡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야 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지난번에 오셨던 손님이 이번에도 또 오셨는데, 분위기기 비슷한 곡을 잇따라 연주하면 손님들이 좀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항상 뭔가 색다른 음식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모차르트가 느끼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봅니다. 그것이 바로 20번에 이어 21번을 듣는 ‘핵심적 매뉴얼’이 됩니다.
Géza Anda/Camerata Academica Salzburg - Mozart, Piano Concerto No.21, K.467
Géza Anda, piano & conductor
Camerata Academica Salzburg
Grosses Festspielhaus, Salzburg
1961.05
글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 시절에는 음악을 멀리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 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출처: 문화웹진 채널예스>칼럼>음악>‘내 인생의 클래식 101’ 2012.12.17
http://ch.yes24.com/Article/View/21126
미요, 천지창조 Darius Milhaud - La Creation du Monde: Overture -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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