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 클래식 2015년)

정명훈과 서울시향 10년/김선욱협연/1.18.일.pm.5/예술의전당

나베가 2015. 1. 19. 09:38

 

관객의 선택! 정명훈과 서울시향 10년
1월 18일 (일) 오후 5:00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정명훈 Myung-Whun Chung, conductor
피아노 김선욱 Sunwook Kim, piano


프로그램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 Wagner, Tannhäuser Overture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Emperor’
브람스, 교향곡 4번 Brahms, Symphony No. 4

서울시향이 2014년 상반기 관객 설문을 통해 뽑은 ‘가장 듣고 싶은 프로그램’을 펼쳐놓습니다. 2014년 유럽 투어에서 베토벤 협주곡 3번으로 서울시향과 환상의 호흡을 자랑한 김선욱은 이번에는 지난해 베토벤 교향곡 5번과의 커플링으로 DG에서 발매된 이후 단숨에 골드 디스크를 기록한 협주곡 5번 ‘황제’를 들고 나옵니다. 19세기 후반의 독일-오스트리아 음악계에 혁신과 형식미의 건강한 ‘미학적 대립’을 불어넣었던 바그너와 브람스의 상징적인 두 거작이 협연무대 앞뒤로 연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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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명훈

    Myung-Whun Chung지휘자

세계 정상의 지휘자 정명훈은 1974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5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피아노 부문 준우승을 차지하며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뉴욕 매네스 음대와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공부한 그는 1978년 거장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상임지휘자로 재직하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새로운 음악인생을 시작한다.

이후 정명훈은 1984년 독일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1990)로서 마에스트로의 길을 걷게 된다. 오페라 지휘에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그는 198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시몬 보카네그라>로 데뷔한 이후 1989년부터 1992년까지 피렌체 테아트로 코뮤날레의 수석객원지휘자를 역임하고, 1989년부터 1994년까지 파리 오페라 바스티유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정명훈은 그동안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로열 콘서트헤보우, 런던 심포니,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뉴욕 필하모닉, 시카고 심포니,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등 세계 최정상의 교향악단을 지휘했으며, 뉴욕 메트로폴리탄과 파리 바스티유를 비롯한 전 세계 오페라 극장에서 오페라를 지휘했다.

1990년부터 세계적인 음반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DG)의 전속 아티스트로서 20여 장의 음반을 레코딩하며 음반상을 휩쓸었으며, 특히, <사중주를 위한 협주곡>을 그에게 헌정하기까지 한 메시앙의 음반들(<투랑갈릴라 교향곡>, <피안의 빛>, <그리스도의 승천> 등)과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 베르디의 <오텔로>,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 등은 최고의 음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8년 이탈리아 비평가들이 선정한 ‘아비아티 상’과 이듬해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상‘을 받았으며, 1991년 프랑스 극장 및 비평가 협회의 ’올해의 아티스트 상‘, 1992년 프랑스 정부의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95년 프랑스에서 ’브루노 발터 상‘과, 프랑스 음악인들이 선정하는 ’음악의 승리상‘에서 최고의 지휘자상을 포함 3개 부문을 석권한 데 이어, 2003년에 다시 이 상을 수상했다.

일본에서는 1995년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가진 일본 데뷔 공연으로 “올해 최고의 연주회”에 선정된 이래, 이듬해 런던 심포니 공연 역시 최고의 공연으로 기록되었으며, 2001년 도쿄 필하모닉의 특별예술고문 취임 연주회 등 열광적인 찬사와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국내에서 1995년 유네스코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바 있는 정명훈은 음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문화훈장인 ‘금관 훈장’을 받았고, 1996년 한국 명예 문화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한 바 있다. 2002년 국내 방송사에서 실시한 문화예술부문 전문가 대상 설문조사에서 음악분야 최고의 대표예술인으로 선정되었다.

프랑스 <르 몽드>지가 ‘영적인 지휘자’라고 극찬한 마에스트로 정명훈은 1997년 아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맡았고, 같은 해 가을부터 2005년까지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아카데미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2000년 5월부터 프랑스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 2001년 4월부터 일본 도쿄 필하모닉의 특별예술고문을 맡고 있으며, 재단법인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2005년 예술고문으로, 2006년부터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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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욱

    Sun-wook Kim피아노

18세의 나이로 세계적 권위의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2006)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이 콩쿠르 40년만의 최연소 우승자이자 아시아 최초 우승자다. 그가 결선에서 마크 엘더의 지휘로 연주한 브람스 협주곡 1번은 전 언론의 극찬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유럽 리사이틀과 함께 영국 최고 오케스트라들과 협연 기회를 얻었다.

그는 앞으로 파리, 런던, 밴쿠버, 남미에서 리사이틀을 계획하고 있으며 이번 시즌에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로열 스코티시 국립 오케스트라, 로잔 체임버 오케스트라, 마렉 야노프스키가 지휘하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서울시향과 협연한다.
1988년 서울 출생인 김선욱은 3세 때 처음 피아노를 시작했다. 10세 때 금호문화재단의 영재 시리즈를 통해 데뷔했고 이로부터 2년 후 협주곡 데뷔무대를 가졌다. 이때부터 그는 서울시향, KBS 교향악단을 비롯한 한국 정상급 오케스트라의 국내외 연주에 정기적으로 초청 받고 있다.

지난 시즌 그는 바실리 시나이스키가 지휘하는 런던 필하모닉, 마크 엘더 지휘의 할레 오케스트라, 타다키 오타카 지휘의 BBC 웨일즈 국립 오케스트라, 아스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정명훈 지휘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이반 피셔 지휘의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자난드레아 노세다 지휘의 BBC 필하모닉과 한국 투어 연주를 가진 바 있다.

최근 주요활동으로는 베토벤 페스티벌, 루르 피아노 페스티벌,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페스티벌, 아스펜 뮤직 페스티벌, 뉴욕 국제 건반협회, 폴란드 두취니키 즈드로이 국제 쇼팽 페스티벌과 통영 국제음악제, 금호 라이징 스타 시리즈 연주 등이 있다.

김선욱은 1999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김대진 교수의 지도를 받아왔으며 2008년 2월 졸업했다. 그는 리즈 콩쿠르 외에 2004년 독일 에틀링겐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으며, 2005년 스위스 클라라 하스킬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한국에서는 2005년 제1회 대원예술인상과 2007년 금호음악인상을 수상했다.

 

Brahms, Symphony No.4 in E minor Op.98

브람스 교향곡 4번

Johaness Brahms

1833-1897

Carlos Kleiber, conductor

Wiener Philharmoniker

Große Musikvereinssaal, Wien

1988.03.20

Carlos Kleiber conducts Brahms' Symphony No.4

 

 

“거인이 내 뒤로 뚜벅뚜벅 쫓아오는 소리를 항상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보게. 그때 그 기분을 자네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걸세.” ―요하네스 브람스

19세기의 다른 교향곡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브람스 역시 베토벤이라는 거인을 피해갈 수 없었다. 광대한 우주의 소리를 담아낸 베토벤의 교향곡이야말로 독일 교향곡의 모범답안으로 여겨지던 당대의 분위기에선 신작 교향곡이 나오면 곧바로 베토벤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브람스가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을 완성하기까지 무려 20여 년의 세월을 투자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베토벤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브람스의 마지막 교향곡

브람스의 첫 번째 교향곡은 유난히 베토벤의 교향곡을 닮았다. 이 곡에서 팀파니는 마치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의 ‘운명의 동기’를 닮은 리듬을 집요하게 반복한다. 그 때문에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이나 지휘자이며 음악평론가인 한스 폰 뷜로는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가리켜 ‘베토벤의 제10번’이라 불렀다. 이후 브람스는 교향곡 두 곡을 더 작곡했는데, 그 중 교향곡 2번은 ‘브람스의 전원’, 3번은 ‘브람스의 영웅’에 비유되면서 여전히 베토벤의 교향곡과 유사하다는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교향곡 4번은 진정한 브람스만의 음악이며 아무도 이 교향곡을 베토벤의 작품에 빗대지 않았다. 이 교향곡을 채색하고 있는 클라리넷과 비올라의 중음역, 첼로와 호른의 저음역이 강조된 무채색의 사운드, 그 사이사이에 간간히 묻어나는 진한 고독감은 브람스 음악 특유의 깊이를 담고 있다.

1885년, 이미 세 곡의 훌륭한 교향곡을 통해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능력을 입증해낸 브람스는 이제 인생의 말년에 접어들어 자신만의 음악적 깊이를 교향곡에 담아내고자 그의 마지막 교향곡의 작곡에 심혈을 기울였다. 마침내 교향곡 4번이 완성되자 브람스의 옹호자였던 당대의 음악평론가 한슬리크는 이 작품을 가리켜 “어두움의 근원”이라 불렀다. 브람스의 단조 교향곡들 가운데 유일하게 피날레에서 장조의 환희로 변하지 않고 단조의 우울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로써 브람스는 ‘어둠에서 광명으로’ 향하는 베토벤 풍의 구도를 버리고 어둠으로부터 비극으로 침잠해가는 자신만의 교향곡 모델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이 곡은 인생을 관조하는 초연함, 나락으로 추락하는 어두움, 낭만적 서정성 등을 통해 브람스만의 고독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은 1885년 10월 25일에 마이닝겐에서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초연 후 11년이 지난 1896년, 브람스는 교향곡 4번의 악보를 펼치고 1악장의 첫 4음인 B-G-E-C 위에 ‘오! 죽음이여, 오 죽음이여!’라고 적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7년에 브람스는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

Mariss Jansons conducts Brahms' Symphony No.4

Mariss Jansons, conductor

Gustav Mahler Jugendorchester

Lucerne, Suisse

2001

 

 

 

광명이 아니라 어둠의 비극 속으로 침잠해가는 피날레

1악장: 알레그로 논 트로포

서주 없이 곧바로 제1주제로 시작하는 1악장 알레그로 논 트로포(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의 도입부는 고통의 흔적을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인생을 관조하듯 초연하게 펼쳐진다. 3도 하행, 6도 상행의 연쇄로 이루어진 이 주제를 음이름으로 풀어보면, B-G-E-C-A-F-D#-B로서 3도씩 계속 하행하는 형태가 된다. 마치 나락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듯하다. 추락하는 주제 선율은 쉼표들 사이로 띄엄띄엄 제시되고 있어 더 무뚝뚝하고 기묘하게 들려온다. 제2주제의 선율은 좀 더 표정이 풍부하고 서정적이지만 첼로와 호른의 어두운 음색으로 채색되고 있어 가라앉은 분위기를 풍긴다. 빈의 중앙공원묘지에 있는 브람스의 묘. 1896년, 브람스는 교향곡 4번의 악보를 펼치고 1악장의 첫 4음인 B-G-E-C 위에 ‘오! 죽음이여, 오 죽음이여!’라고 적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7년에 브람스는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

2악장: 안단테 모데라토

2악장 안단테 모데라토(걷는 듯 보통 빠르기로)는 매우 독특하다. 브람스는 호른으로 연주하는 도입부의 선율을 중세의 교회 선법 중 하나인 프리지아 선법으로 작곡했는데, 여기서 베토벤보다 더 먼 과거로부터 교향곡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얻고자 했던 브람스의 의도가 드러난다. 호른의 선율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음악적인 주제라기보다는 거룩한 종교적 선언처럼 들리며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호른의 선언적인 주제는 현악기의 피치카토를 배경으로 흐르는 클라리넷으로 이어지면서 엄숙하고도 차분한 색채를 더해가고, 이윽고 현악기의 서정적인 노래로 이어지면서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3악장: 알레그로 지오코소

3악장 알레그로 지오코소(빠르고 즐겁게)는 ‘바쿠스의 축제’라 불릴 정도로 화려하고 힘에 넘치는 음악이다. 하지만 형식만큼은 전통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브람스는 대체로 그의 교향곡에 간주곡적인 성격의 3악장을 써넣었으나 이 교향곡에서는 오히려 전통적인 스케르초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힘차게 제시되는 제1주제와 춤곡과 같은 제2주제, 피콜로와 트라이앵글의 화려한 색채는 1, 2악장의 차분함과는 매우 대조를 이루고 있으나, 1악장 제1주제의 중심이 되었던 3도 음정이 여전히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앞의 악장들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4악장: 알레그로 에네르지코 에 파쇼나토

브람스는 4악장 알레그로 에네르지코 에 파쇼나토(빠르고 힘차게 그리고 열정적으로)에서 또다시 과거로 회귀한다. 특이하게도 그는 바흐 이후에 퇴색해버린 샤콘느를 이 악장의 기본 형식으로 도입했다. 짧은 주제가 낮은 성부에서 계속 되풀이되는 동안 위 성부에서 계속 변주가 이루어지는 샤콘느는 바로크 시대에 성행했던 변주 기법들 중 하나다.

일찍이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제2번의 ‘샤콘느’에 큰 감명을 받아왔던 브람스는 바흐의 칸타타 제150번 ‘주여 저는 당신을 바라나이다’의 주제를 바탕으로 샤콘느 형식의 작품을 만들고자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1885년 교향곡 4번을 작곡하면서 이 주제를 약간 다듬어 마지막 악장의 모티브로 삼았던 것이다. 샤콘느 주제는 4악장 도입부에서 트롬본으로 힘차게 연주되며 변주가 진행되는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된다. 하나하나의 변주가 연주될 때마다 이 짧은 주제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브람스의 놀라운 변주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비장미 넘치는 샤콘느 주제가 반복되는 동안 음악적인 갈등은 점점 심화되고 마침내 비극적인 단조의 결말을 향해 숨 가쁘게 치닫는다.

추천음반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의 명반으로는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DG)의 생기 넘치는 연주가 유명하고,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DG)의 드라마틱한 연주 역시 색다른 감흥을 전해주며,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가 지휘하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Decca)의 정제된 연주 또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사이먼 래틀 경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EMI)의 최근 음반에는 브람스 음악에 대한 현대적인 관점이 드러나고 있어 흥미롭다.

최은규(음악평론가) <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는가>의 저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및 동대학원 석사,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부수석 및 기획홍보팀장을 역임했다. 월간 <객석>, <연합뉴스> 등 여러 매체에서 음악평론가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의 전당, 풍월당 등에서 클래식음악을 강의하고 있다.


베토벤 음악의 ‘남성성’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곡

- <피아노 협주곡 5번 E플랫장조 op.73 ‘황제’>

 

“당시의 청중은 4분의 4박자의 군대식 1악장을 기다렸다. 베토벤은 그 기대에 보답했다”

 

사실 저는 몇 년 전에 피셔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듣다가 정신줄을 잠깐 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들었던 음반은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었습니다. 아마 1~2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를 잠시 망각해버리는 몰아(沒我)의 상태에 빠졌던 것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려움이 왈칵 몰려오기까지 했습니다.

 

글 | 문학수

 

 

알프레트 브렌델(Alfred Brendel) [출처: 위키피디아]

 

 

저는 여러 장르의 음악 가운데서도 피아노곡을 유독 좋아합니다. 한 대의 악기로 ‘음악 전체’를 보여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악기라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피아노는 대범하면서도 고독한 악기입니다. 모든 것을 혼자 책임져야 하는 악기이지요. 그래서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1931~)은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책 『피아노를 들을 시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이올린은 악기 바이올린일 뿐이지만 피아노는 변화의 장(場)입니다. 피아노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 끝에서 노래하는 인간의 목소리로 변할 수도 있고, 다른 악기들의 음색을 모방할 수도 있으며, 오케스트라가 될 수도 있고, 무지개나 우주의 음향으로 변할 수도 있지요.”

 

자, 오늘은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체코의 모라비아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에서 주로 활약한, 20세기 중ㆍ후반을 관통해온 거장입니다. 오늘은 그에 대한 두번째 언급입니다. 첫번째 언급은 <내 인생의 클래식 101> 지난해 11월 8일자로 게재했던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http://ch.yes24.com/Article/View/20900)’ 편에 등장합니다. 만약 읽지 못하신 분은 잠시 짬을 내서 클릭해보시기 바랍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개인적으로 피아노 음악을 좋아하다보니 즐겨 듣는 피아니스트들도 몇 명 있습니다. 최근 출연했던 어느 라디오 방송의 진행자도 저한테 “좋아하는 피아니스트가 누구냐?”고 묻더군요. 그때 제 입에서 흘러나온 피아니스트들의 이름은 글렌 굴드,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마리아 주앙 피레스 등이었습니다. 한데 방송이 끝나고 나서 곰곰 생각해보니 그밖에도 더 있었습니다. 깜빡했던 이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알프레트 브렌델이었습니다. 진행자의 급작스런 질문에 답하다 보니 그의 이름을 빼놓았던 것이지요.

 

 

 

 

 

예전에도 썼듯이 브렌델은 피아니스트일 뿐 아니라 4권의 에세이집을 펴낸 문필가,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지요. 이번에 국내에서 출판된 『피아노를 듣는 시간』은 번역본으로 처음 소개되는 그의 저서입니다. 무대 은퇴를 선언한 2008년 이후에 쓴 글들을 모은 책인 듯합니다.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령에 이른 내가 그동안 음악, 음악가, 내 일에 대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간추려 엮어낸 것입니다. 최대한 간단하게 표현하되, 그렇다고 너무 단순하게는 쓰지 않도록 스스로를 부추겼답니다. 내가 좋아하는 함축, 불완전을 고스란히 드러냈지요.”

 

그의 피아노 연주가 그런 것처럼, 불필요한 수식어가 전혀 보이지 않는 참으로 담백한 서문입니다.

 

이 책에 수록된 수십 편의 짤막한 수상(隨想) 중에서 당신과 꼭 나누고 싶은 글귀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베토벤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 표현이 쉽고 다감하면서도 참으로 적확하기 이를 데 없어서 혼자만 읽기에는 아깝습니다. 무릇 세상의 모든 ‘말’은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뻥’치는 것과 담을 쌓고 살아온 여든두 살의 거장은 베토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베토벤 말고 살아생전에 그 드넓은 음악의 세계를 맘껏 활보한 작곡가가 또 있을까요? 베토벤 말고 희극과 비극을 모두 아우르는 작곡가는 없을 것입니다. 그가 아니면 어느 누가 다양한 변주곡에 깃든 경쾌함부터 자연의 힘을 풀어줬다 길들였다 하는 자유로움에 이르기까지 그 방대한 영역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을까요? 또 어느 거장이 후기 작품에서 현재, 과거, 미래를 하나로 모으고 숭고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결합시킬 수 있을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베토벤에 대한 여러 편견들이 존재합니다.

영웅적이고 초인적인 베토벤, 말년의 베토벤과 같은 모습들이지요. 우리는 이에 대항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베토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온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거?이나 오만함 말고도 친밀함과 부드러움이 그의 특성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 이제 오늘 이야기의 두번째 대목입니다. 저는 앞에서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들 가운데 한 명이 브렌델”이라고 털어놨는데, 책을 읽다보니 브렌델도 매우 흠모하는 선배 피아니스트가 한 명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대단한 피아니스트’는 과연 누구일까요?

바로 스위스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활약한 20세기 초ㆍ중반의 거장 에드빈 피셔(1886~1960)였습니다. 사실 이 분은 브렌델의 스승입니다. 브렌델이 배웠던 여러 피아노 스승 가운데 한 명이지요.

브렌델의 책에 빈번히 등장하는 유일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합니다. 책에서는 영어식으로 ‘에드윈 피셔’라 표기하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에드빈 피셔’가 옳은 표기일 성싶습니다.

 

사실 저는 몇 년 전에 피셔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듣다가 정신줄을 잠깐 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들었던 음반은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었습니다. 녹음 연도가 1951년입니다. 당연히 모노녹음이지요. 알려져 있다시피 스테레오 시대는 1957년 막을 올립니다. 한데 저는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음질도 별로 좋지 않은 그 연주를 듣다가 ‘음악의 주술적 에너지’라는 것을 실제로 체험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아주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1~2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를 잠시 망각해버리는 몰아(沒我)의 상태에 빠졌던 것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려움이 왈칵 몰려오기까지 했습니다.

 

<피아노 협주곡 5번 E플랫장조 op.73>은 베토벤이 1809년에 쓴 곡입니다.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 군대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던 무렵이었지요. 베토벤 음악에 붙어 있는 많은 이름들이 그렇듯, ‘황제’라는 이름도 베토벤 자신이 붙인 것은 아닙니다. 누가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곡 자체의 위풍당당한 분위기 때문에 그런 별칭이 붙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베토벤이 자신의 친구이자 경제적 후원자였던, 또 피아노를 직접 가르치기도 했던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한 곡이지요. 베토벤 음악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는 ‘군대적 기풍’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곡입니다. 아마도 프랑스대혁명 이후의 사회적인 분위기, 아울러 나폴레옹 군대와의 전쟁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음악학자 알프레트 아인슈타인(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사촌)은 “(당시의 청중은) 4분의 4박자의 군대식 1악장을 기다렸다. 베토벤은 그 기대에 보답했다”라고 썼지요. 말하자면 ‘황제’는 베토벤 음악의 ‘남성성’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LFRED BRENDEL -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EMPEROR" - MVT.1 - ALLEGRO

 

MVT.1 - ALLEGRO CONDUCTOR - KURT MASSUR

 

 

'Piano Concerto No. 5 in E-Flat, Op. 73 - "Emperor": I. Allegro'

 

1악장은 20분이 넘는 장대한 규모의 악장입니다. 도입부에서부터 힘찬 맥박이 요동칩니다. 관현악이 ‘빰~’하면서 남성적인 화음을 던지면 곧바로 피아노가 화려한 카덴차로 이어받지요. 이런 식의 주고받기를 세 차례 반복합니다. 아직 1악장의 주제가 등장하기도 전입니다.

이어서 제1바이올린 파트가 첫번째 주제를 드디어 노래하고 클라리넷이 그 선율을 이어받지요. 그리고 다시 관현악 총주가 장쾌하게 울려 퍼진 다음, 바이올린이 스타카토의 느낌으로, 다소 연약한 음향으로 연주하는 두번째 주제가 펼쳐집니다. 이 첫 장면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당당한 관현악과 어우러지는 독주 피아노는 기교적으로 찬란할 뿐 아니라 때때로 압도적인 주술을 펼쳐내기도 합니다. 물론, 뛰어난 연주로 들었을 경우에 그렇습니다.

 

 

ALFRED BRENDEL -BEETHOVEN PIANO COCERTO NO. 5 "EMPEROR" - MVT. 2 - ADAGIO 

 

ADAGIO UN POCO MOSSO. ALFRED BRENDEL -BEETHOVEN PIANO COCERTO NO. 5 EMPEROR - PART 2/3. KURT MASSUR: CONDUCTOR

'Ludwig Van Beethoven :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No. 5 In E, Flat Major, Op. 73: II. Adagio. Emperor'

 

 

 

 

2악장은 첫번째 악장의 격렬한 에너지에 비한다면 한결 차분하고 느립니다. 이른바 완서(緩徐) 악장이라고 하지요. 약음기를 낀 바이올린이 사색적인 분위기의 첫번째 주제를 느리게 연주한 다음, 피아노가 온화한 표정으로 그것을 이어받습니다. 이어서 아련한 음색의 목관 악기들이 주제를 다시 한번 연주하고, 피아노가 또 그것을 부드럽게 이어받지요.

영화 ‘불멸의 연인’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베토벤이 평생 동안 마음속으로 사랑했던 여인 조안나가 베토벤의 편지를 읽으면서 오열하던 장면이 기억나시는지요? 그때 흘러나왔던 음악이 바로 ‘황제’ 2악장의 주제선율입니다. 물론 이 영화의 설정은 허구이지요. 베토벤은 동생의 아내였던 조안나와 실제로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ALFRED BRENDEL -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EMPEROR" - MVT. 3

 

 

 

 

 

‘황제’는 어느새 아타카(attacca, 중단없이)로 3악장의 입구에 들어섭니다. 음악은 1악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빠르고 격렬해지지요. 피아노 독주가 힘차게 건반을 짚으면서 돌진하려는 자세를 드러내고, 관현악도 이에 질세라 합류합니다. 피아노가 부수적인 주제를 연주하면서 잠시 경과부를 거친 다음, 다시 원래의 호쾌하고 남성적인 주제로 돌아오지요. 이 장면에서 피아노가 보여주는 테크닉은 매우 현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마지막 장면이 펼쳐집니다. 팀파니 소리가 아련하게 울려 퍼지면서 피아노 독주가 차츰 잦아듭니다. 그렇게 음악이 끝나는가 싶더니 피아노가 한차례 더 도약하면서 관현악과 어울려 선명한 마침표를 찍지요. 협주곡 5번 ‘황제’는 그렇게 끝납니다.

 

 

 

 

 에드빈 피셔(Edwin Fischer), 빌헬름 푸르트벵글러ㆍ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1951년/NAXOS

 

컬럼의 본문에서 언급했던 녹음이다. 애초에는 EMI의 음원인데 현재 품절 상태. 대신 낙소스에서 2010년에 재발매한 음반을 추천한다. 피아니스트 에드빈 피셔와 지휘자 푸르트벵글러. 낭만주의의 극점을 보여주는 두 음악가의 협연이 짜릿하다. 알프레트 브렌델도 지적한 것처럼, 피아니스트 피셔는 ‘고전적 품격을 잃지 않는 낭만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두 거장의 협연은 60여년 전의 모노녹음임에도, 살아서 꿈틀대는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웅변한다. 베토벤적인 힘과 기백은 물론이거니와 피아노 터치의 영롱함도 섬세하게 살아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마지막 3악장에서 다소 힘이 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하지만 놓칠 수 없는 명연이다.

 

thoven Piano Concerto No.5 'Emperor' - Furtwangler, Fischer 1951 (I. Allegro)

 

 

Beethoven - Piano Concerto No.5. I. Allegro //
Edwin Fischer, piano - Philharmonia Orchestra - Wilhelm Furtwangler, cond. //
recorded 1951

 

 

 

Beethoven Piano Concerto No.5 'Emperor' - Furtwangler, Fischer 1951 (II. Adagio)

 

 

Beethoven - Piano Concerto No.5 in E-flat major, Op. 73. II. Adagio

 

 

Beethoven Piano Concerto No.5 'Emperor' - Furtwangler, Fischer 1951 (mov. III)

 

 

Beethoven - Piano Concerto No.5. mov. III

▶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 칼 뵘ㆍ빈필하모닉/1978년/DG

 

 

 

연주자나 지휘자가 과도하게 해석하는 ‘황제’에 불만을 가졌다면 폴리니와 뵘의 협연을 들어보는 게 좋겠다. 밋밋하고 심심하다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인 과장없이 악보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연주라고 할 수 있다. 폴리니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도 ‘황제’를 협연한 녹음을 남겼지만, 뵘과의 협연이 더 빼어나다는 것이 중론이다. 절제된 테크니션으로 평가받는 폴리니가 30대 중반이었을 무렵, 다시 말해 한창 전성기를 구가했을 당시의 연주다. ‘세련된’ 폴리니와 ‘투박한’ 뵘이 치열한 집중력으로 교감하고 있는 호연(好演)이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는 스탠다드한 연주다.

 

 

▶ 클라우디오 아라우(Claudio Arrau), 콜린 데이비스ㆍ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1985년/PHILIPS

 

시정(詩情) 넘치는, 아름다운 음색의 ‘황제’를 만나기에 적격이다.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리스트로부터 물려받은 낭만의 기질을 ‘황제’에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이 곡을 녹음한 명연들은 세상에 즐비하지만 ‘서정적’이라는 측면에서 아라우와 콜린 데이비스의 조합을 따라올 연주는 흔치 않을 성싶다. 얼마 전 타계한 데이비스는 영국 출신의 지휘자임에도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지휘한 이 녹음에서는 매우 독일적인 음색, 구조적으로 견고하면서도 악기 각각의 음향이 잘 살아 있는 소리를 들려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칠레 태생의 피아니스트와 영국 태생의 지휘자가 만나 매우 독일적인 음악을 구현해내고 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또 하나의 필청곡으로 꼽히는 4번을 커플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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