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 클래식 2015년)

KBS 제690회 정기연주회/도약하는 또 한 걸음, 음악의 환상 속으로 /1.16.금/예술의 전당

나베가 2015. 1. 16. 06:04

 

 

Tchaikovsky,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Julia Fischer, violin

Vasily Petrenko, conductor

Orchestre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

Salle Pleyel, Cité de la musique, Paris

2013.06

Julia Fischer/Vasily Petrenko/OPRFr - Tchaikovsky's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1878년 봄, 차이콥스키는 스위스의 제네바 호수 근교의 클라렌스에서 결혼의 상처(1877년 여름에 차이콥스키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밀류코바라는 여성과 결혼했지만 석 달 만에 파경을 맞았다)를 달래고 있었다. 3월 14일, 자신의 제자였던 요시프 코테크가 찾아왔다. 그때는 차이콥스키가 한창 피아노 소나타 G장조를 작곡하던 시기였다. 베를린에서 요제프 요아힘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던 코테크는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의 악보를 보여주었고, 두 사람은 이 곡을 함께 연주했다. 그리고 차이콥스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불타는 영감으로 써 내려간 바이올린 협주곡

며칠 후,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들리브나 비제의 작품처럼 랄로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쓰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형식을 찾아냈고 대부분의 독일 작곡가들처럼 전통을 답습하는 대신에 음악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힘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오늘 아침 나는 불타는 영감 안에서 한없이 타올랐습니다. 내가 작곡한 이 협주곡이 심장을 파고들 만큼 강력한 음악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군요.”,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작곡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의 1악장은 완성되었고, 내일부터는 2악장을 시작할 겁니다. 이 협주곡을 작곡하는 동안 내내 즐거웠고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끌렸습니다. 손님이 없을 때는 하루 종일 작곡에 몰두할 수 있었고 이런 식의 속도라면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폰 메크 부인

사실 코테크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차이콥스키에게 작곡을 배웠던 인연으로 그와 오랫동안 교류해 왔다. 차이콥스키가 폰 메크 부인을 알게 된 것도 코테크를 통해서였고, 차이콥스키는 코테크를 위해 <왈츠-스케르초>를 작곡할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깊었다. 마침내 4월 4일 모든 작업을 끝냈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여전히 2악장이 마음에 걸렸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차이콥스키는 결국 처음 작곡했던 2악장(두 달 후 <명상곡>으로 출판된다)을 버리고 하루 만에 새로운 안단테 악장을 썼다. 그리고 4월 11일에 악보의 초고가 나왔다. 차이콥스키가 4번 교향곡과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을 막 끝냈을 때였다. 출판은 모스크바의 표트르 위르겐슨이 맡았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악보가 그해 10월에, 오케스트라 파트보는 1879년 8월에 나왔다.

‘연주 불가능, 바이올린을 모르는 작곡가’라는 잘못된 평가

초연을 향한 길은 멀고도 험했다. 차이콥스키는 이 곡을 완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코테크가 초연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프로페셔널 연주자로 경력이 많지 않았던 코테크는 이 작품의 연주를 망설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 차이콥스키의 육체적 관계에 대한 소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1878년 10월, 차이콥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트 아우어에게 악보를 주면서 초연을 부탁했다. 아우어는 자서전에서 그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차이콥스키가 내게 보여준 협주곡을 우정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나는 작곡가에 감사하다고 말했고, 우리 둘은 곧바로 연습을 해보았다. 첫 번째 연습에서 작품의 전체적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1악장 2주제 선율의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슬프게 변화하는 2악장 칸초네타의 매력이 느껴졌다. 나는 초연을 맡겠다고 약속했고 차이콥스키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악보를 주었다. 그런데 악보를 자세히 보니까 이 협주곡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가치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손을 보아야 했다. 작곡가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바이올리니스트 아우어는 초연을 부탁받았지만 연주 불가능이라는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

끝내 아우어는 차이콥스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년을 기다리다 지친 차이콥스키는 넌더리를 냈다. “우리의 우정에도 불구하고 아우어는 나의 협주곡을 까다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비르투오소가 ‘연주 불가능’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애꿎은 나의 협주곡만 오랫동안 내팽개쳐져 있었다. 마치 영원히 잊혀진 것 같았다.”

초연의 실패와 혹평, 성공을 향한 집념

그러다 마침내 구원자가 찾아왔다. 모스크바 출신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교수였던 아돌프 브로드스키가 1881년 12월 4일, 빈 필하모닉 협회의 콘서트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초연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 악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콘서트에서 이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벌써 2년 전 일이었죠. (중략) 러시아에 돌아와서 몇 달째 하루 종일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습했습니다. 거의 미친 듯이 매달렸는데 어찌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그토록 오래 연습했는데도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물론 테크닉이 쉬운 작품은 아니었습니다만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 작품을 이제 알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 빈에서 초연을 맡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된 거죠.”

초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빈 음악계를 주름잡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음악이 이토록 심한 악취를 풍길 수 있다는 사실을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증명했다”고 혹평했다. 또 다른 비평가들도 이구동성으로 야유했다. “거칠기 짝이 없는 러시아의 허무주의”(테오도르 헬름), “괴이한 음악이 많은 사람들을 유혹한다”(막스 칼베크). 초연자 브로드스키는 절망하는 대신 몇 개월 후인 1882년 4월 런던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다시 협연함으로써 거대한 성공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8월 20일 이폴리트 알타니의 지휘와 브로드스키의 협연으로 모스크바 초연을 했고 여기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제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아돌프 브로드스키란 이름을 떼어내기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을 인식한 차이콥스키는 원래 예정되었던 헌정자였던 레오폴트 아우어 대신 브로드스키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영화 <더 콘서트>의 한 장면. 마지막 10여 분 동안 여주인공이 연주하는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눈물샘을 자극한다.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조용한 서주와 함께 두 개의 주제가 제시되는데 여리게 도입 선율을 연주하고 10마디부터 제1주제를 다시 연주한다. 그리고 바이올린 카덴차가 연주되는데 대단히 화려한 특징이 있다.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파워는 차이콥스키의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에 힘입어 폭발적인 파워를 느끼게 한다. 중요한 점은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 독주 사이의 미묘한 균형인데, 차이콥스키는 기교적인 카덴차와 질주하는 듯한 오케스트라의 대비감을 표현하는 데 있어 최상급의 작곡가였다.

2악장: 칸초네타. 안단테

관악기의 서주가 흐른 후 서정적인 주제를 바이올린이 노래하는데, 차이콥스키의 감수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무엇보다 바이올린의 부드러운 음색 조절은 연주자의 능력을 가늠하는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3악장: 피날레. 알레그로 비바치시모

오케스트라의 강력한 어택과 함께 16마디부터 37마디까지 바이올린 카덴차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러시아의 민속 춤곡 스타일이 물씬 풍기는 3악장은 서정성과 격정 그리고 탄식과 희망 사이를 교차하고 있다. 5도 음정의 관악기들과 함께 제2주제가 시작되는데, 활발하게 움직이는 독주 바이올린은 절망과 희망을 교차하면서 감정의 등고선을 자극한다.

Joshua Bell/Valery Gergiev/USA NYO - Tchaikovsky's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Joshua Bell, violin

Valery Gergiev, conductor

National Youth Orchestra of the USA

BBC Proms 2013

Royal Albert Hall, London

2013.07.21

 

추천음반

1. 이 작품의 녹음에서 정경화(Decca)는 우리에게 첫 번째 대상이었다.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의 연주는 그녀의 첫 출발점이었다. 우울한 서정성의 표현에 주안점을 둔 연주로 비극적인 색채의 느낌이 매우 특별하다.

2. 하이페츠(RCA)의 연주는 질주의 미학이 뭔지를 보여준다. 속도감과 박력의 오케스트라는 파괴적인 차이콥스키 상을 그려내었다.

3. 오이스트라흐(MELODIYA)는 내면적 우울과 열정의 상반된 요소들을 모두 표현한 훌륭한 연주다.

4. 코간(EMI)의 연주는 테크니션 코간의 바람을 가르는 날렵한 연주가 색다른 쾌감을 던져준다.

김효진 (음악 칼럼니스트) 김효진은 클래식음악 전문지 <스트라드>, <콰이어 & 오르간>, <코다> 등을 거쳐 현재 클래식 음반 잡지 <라 뮤지카>의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문화예술>음악>기악합주>협주곡 2010.02.03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6&contents_id=1948

 

사랑에 미친 예술가의 환상적인 세계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

 

 

혁명과 반혁명의 충돌이 가장 극심했던 프랑스에서 1830년에 작곡된 곡이지요.‘소설적 교향곡’으로서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음악으로 자리했습니다.

 

글 | 문학수

 

1804년에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은 유럽 곳곳을 정복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1806) 스페인을 속국으로 만들고(1807) 합스부르크 왕가의 본거지인 오스트리아를 1809년에 굴복시켰습니다. 잇따른 승리에 도취해 영국, 러시아와 또 한판의 전쟁을 벌이지요. 하지만 이 지점부터 나폴레옹의 몰락이 시작됩니다. 광활한 러시아를 정복하는 데 실패한 데 이어 막강한 경제력을 자랑했던 영국과의 전쟁에서도 패배하지요. 결국 그는 1814년 4월에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폐됩니다.

 

 

 

베를리오즈 [출처: 위키피디아]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은 좌절됐지만 당시 유럽 사회에 남긴 영향은 거대했습니다. 프랑스혁명의 이념이 유럽 곳곳으로 전파된 것이지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실각 이후의 ‘빈 체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빈 체제’는 빈 회의의 결과물이지요. 1814년에 유럽 각국(오스트리아?영국?러시아?프로이센)의 보수파 지도자들이 오스트리아 빈에 모여 다시 세상을 옛날로 돌리기로 합의합니다. 이후의 복고적 질서를 ‘빈 체제’라고 부릅니다.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고 독일 지역에는 독일 연방이 세워지지요. 북이탈리아, 폴란드는 열강에 의해 분할 지배됩니다. 한마디로 말해 빈 체제는 절대왕정으로의 복귀라고 할 수 있는데, 혁명의 본산지였던 프랑스에서 특히나 강력한 반동 정책이 실시됩니다. 왕좌에 복귀한 샤를 10세가 이를 주도했지요. 일단 의회를 해산시켰습니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으로 토지를 잃었던 귀족들에게 대대적인 보상 정책을 실시하지요.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하겠습니다. 당시 유럽의 정세를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는 것은 음악을 듣고 이해하는 데 상당히 요긴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 듣는 음악들이 대체로 이 시기의 예술적 산물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자’는 빈 체제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것은 왕과 귀족들을 위한 세상으로의 회귀였기 때문에 곧바로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힙니다. 유럽 곳곳에서 크고 작은 봉기들이 일어나지요.

그중에서도 특히 프랑스에서 1830년에 일어났던 7월혁명이 커다란 사건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와 소시민, 그리고 자본가들이었습니다. 노동자와 소시민들은 공화정을 완전히 부활시키고자 하는 열망으로 들끓었지만 자본가들로 이뤄진 혁명 지도부는 결국 ‘입헌군주제’라는 방식으로 타협하지요.

 

문화사적으로 보자면 이 시기는 낭만주의의 시대입니다. 혁명의 열기와 함께 찾아온 낭만주의의 기운이 유럽 전역에 흘러넘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가장 두드러진 장르는 문학이었습니다.

독일에서는 괴테와 실러가 낭만의 풍조를 이끌었지요. 괴테가 나폴레옹 지지자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실러의 시에 기초해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이 태어난 것도 이미 썼던 칼럼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프랑스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물론 많은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있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빅토르 위고를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레미제라블>을 한번 떠올려 볼까요? 소설의 주인공 장발장이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쳤던 해가 1796년입니다. 한데 어린 조카는 왜 굶주렸던 걸까요?

우리는 이 장면에서 혁명 이후의 혼란한 사회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혁명은 당연히 혼란을 수반하지요. 그 혼란을 겪으면서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겁니다.

 

당시에도 물론 그랬습니다. 물가가 엄청나게 치솟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장발장은 빵을 훔치다가 19년의 노역형을 선고받았고 훗날 탈출해서 신분을 바꾸고 살아갑니다. 아마 뮤지컬이나 영화로 <레미제라블>을 본 분들이 많을 듯합니다. 젊은이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시위를 하는 장면이 기억나는지요?

그 장면에 이르면 장발장은 어느새 노년에 이르러 있지요.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그 장면은 1832년 6월 파리에서 일어났던 봉기입니다. 장발장은 사랑하는 양녀 코제트의 연인 마리우스를 구하려고 이 봉기에 참여하지요.

 

자, 다시 음악으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혁명과 낭만이 몸을 섞던 시대에 음악은 과연 어땠을까요? 음악에서도 물론 낭만주의가 유행합니다. 특히 이 시기는 문학과 음악의 융합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대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융합’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21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지만, 사실 이 ‘융합’이라는 것은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 음악에서 이미 확연하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낭만주의적 시를 가사로 삼은 ‘가곡’을 비롯해 한 편의 소설처럼 드라마틱한 성격을 띠는 ‘표제적 교향곡’이 중요한 장르로 등장했다는 뜻입니다.

 

 

 

Berlioz: "Symphonie Fantastique" - 1st Mvt. (part 1) - Leonard Bernstein

 Leonard Bernstein conducts the "Orchestre National de France" in Berlioz's Symphonie Fantastique

1st movement: part 1: Largo (R?veries)

Paris, 1976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은 그 지점을 잘 보여주는 음악입니다. 혁명과 반혁명의 충돌이 가장 극심했던 프랑스에서 1830년에 작곡된 곡이지요. 바로 7월혁명이 일어났던 해입니다. 한마디로 ‘소설적 교향곡’으로서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음악으로 자리했습니다. 물론 이 교향곡을 설명하면서 주로 거론되는 것은 베를리오즈 개인의 특정한 체험들이지요.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받았던 감동과 오필리어와 줄리엣을 연기했던 여배우 해리엇 스미스슨을 향한 사랑, 또 베토벤의 교향곡과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받은 영감과 자극 등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다 틀리지 않은 얘기입니다. 그런 개인적 경험들이 <환상교향곡>이라는 걸작 속에 녹아들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동시에 기억해야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파리음악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던, 그래서 피아노를 아예 칠 줄 몰랐던 베를리오즈, 대신 문학적 상상력이 풍부했던 그는 낭만주의 시대의 선택을 받은 음악가라는 점이지요. 독일의 바그너가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의 베를리오즈도 기질적으로 고전보다 낭만에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기질도 그렇거니와 인생을 살면서 겼었던 여러 가지 풍파, 아울러 자기 과시적인 태도 같은 것들도 그렇습니다. 그런 기질적 낭만성이 당대의 시대적 흐름과 만나면서 음악사를 아로새긴 걸작들로 남은 것이겠지요.

 

<환상교향곡>은 짝사랑했던 여인 스미스슨을 생각하면서 작곡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베를리오즈 본인의 자전적 기록에 따르면, 1827년 파리 오데옹 극장에서 영국의 한 극단이 <햄릿>을 공연하는 걸 보았다고 하지요. 그 다음날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포스터가 내걸렸고 베를리오즈는 그 연극도 한걸음에 달려가 관람했다고 합니다. 스물네 살 때였지요. 혈기 왕성한 베를리오즈는 셰익스피어 연극에 매료됐을 뿐 아니라 여배우 스미스슨에게 완전히 빠져 버립니다. 훗날 이렇게 회고하지요.

“나는 절망적인 상태로 몇개월을 보냈다. 모든 파리 사람들을 탄식하게 만든 오필리어 역의 여배우 꿈을 꾸었다.” 그리고는 거의 스토킹에 가까운 구애를 퍼붓습니다.

광적인 러브레터를 계속 보냈던 것이지요. 하지만 잘 나가던 여배우는 무명의 작곡가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스토커 베를리오즈’가 무서웠을지도 모릅니다.

 

베를리오즈는 스미스슨을 향한 짝사랑이 좌절된 후,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뺏기기도 합니다. 벨기에 출신의 피아니스트 마리 모크와 사랑에 빠져 청혼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녀는 유명한 피아노 제작자인 플레옐과 결혼합니다. 베를리오즈는 격분했겠지요. “그들을 죽이고 자살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자서전에 남겨놓고 있습니다. 광적인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베를리오즈는 훗날, 그러니까 1832년에 자신이 그토록 구애했던 아일랜드 출신의 여배우 스미스슨과 재회합니다. 말하자면 인기가 시들해진 왕년의 스타, 게다가 자신이 직접 극단을 만들었다가 파산을 맞은 스미스슨과 파리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지요. 베를리오즈는 “빈털털이가 된 이 딱한 여인”과 이듬해에 결혼합니다. 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두 사람은 아들을 하나 낳고 헤어지지요. 그녀가 알콜 중독자여서 파경을 맞았다는 ‘설’이 많은데, 그런 얘기는 주로 베를리오즈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어서 100% 신뢰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Berlioz: "Symphonie Fantastique". 1st Mvt. (part 2) - Leonard Bernstein

 Leonard Bernstein conducts the "Orchestre National de France" in Berlioz's Symphonie Fantastique

1st movement. part 2: Allegro agitato e appassionato assai (Passions)

Paris, 1976

 

 

 

<환상교향곡>은 스미스슨을 향한 연모가 좌절된 이후에 작곡한 곡이지요. 한 여인에 대한 집착적인 사랑과 환상을 한 편의 드라마로 형상화하고 있는 곡입니다. 몽상가 베를리오즈는 ‘어느 예술가의 생애와 에피소드’라는 부제를 붙여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지요.

음악의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고통 받던 한 예술가가 아편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는데, 아편의 양이 치사량에 미치지 못해 혼수 속에서 온갖 환각을 겪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환상교향곡>보다 뒤에 작곡한 <렐리오>와 1부와 2부로 짝을 이루는 곡입니다. 모두 5개 악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베를리오즈는 애초에 각 악장의 스토리를 일일이 밝혀두었으나 훗날에 표제만 남기고 모두 삭제하지요.

 

 

 

Berlioz: "Symphonie Fantastique": 2nd Mvt.- Leonard Bernstein

Leonard Bernstein conducts the "Orchestre National de France" in Berlioz's Symphonie Fantastique

2nd movement: Valse: Allegro non troppo (Un bal)

Paris, 1976

 

 

 

1악장은 ‘꿈, 열정’입니다. 느린 목관의 연주로 시작합니다. 이어서 약음기를 낀 바이올린이 사랑을 향한 동경을 묘사하지요. 점차 음악이 격렬해지고 빨라지면서 사랑의 고통, 질투에 휩싸인 감정을 그려냅니다.

 

2악장은 ‘무도회’입니다. 약간 긴장감이 감도는 현의 트레몰로와 하프로 막을 엽니다. 이어서 우아하고 경쾌한 왈츠가 등장하지요. 베를리오즈 본인의 설명에 따르자면, 음악 속의 주인공은 무도회의 춤추는 사람들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이리저리 찾아 헤맵니다. 혹은 어디를 가든 그 여인의 모습이 끊임없이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하지요.

 

 

 

Berlioz: "Symphonie Fantastique": 3rd Mvt. (Part 1) - Leonard Bernstein

Leonard Bernstein conducts the "Orchestre National de France" in Berlioz's Symphonie Fantastique

3rd Movement: Part 1: Adagio (Sc?ne aux champs)

Paris, 1976

 

 

 

 

Berlioz: "Symphonie Fantastique": 3rd Mvt. (Part 2) - Leonard Bernstein

Leonard Bernstein conducts the "Orchestre National de France" in Berlioz's Symphonie Fantastique

3rd Movement. Part 2: Adagio (Sc?ne aux champs)

Paris, 1976

 

 

 

 

 

Berlioz: "Symphonie Fantastique" : 4th Mvt.- Leonard Bernstein

Leonard Bernstein conducts the "Orchestre National de France" in Berlioz's Symphonie Fantastique

4th Movement: Allegretto non troppo (Marche au supplice)

Paris, 1976

 

 

 

 

3악장 ‘들판의 풍경’은 표제처럼 목가적인 악장입니다. 목동의 느긋한 피리 소리로 시작하는데, 곧 이어 현악기들의 트레몰로가 약간의 불안감을 지핍니다. 주인공이 들판을 거닐며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하는 악장이지요. 목가적인 평안함과 어두운 예감이 뒤섞여 있습니다.

 

4악장은 ‘단두대로의 행진’입니다. 팀파니가 연주하는 불길한 리듬으로 시작합니다. 이어서 주인공의 꿈속에서 펼쳐지는 그로테스크한 환상이 펼쳐집니다. 사랑했던 여인을 살해한 죄목으로 단두대로 끌려가는 장면이 행진의 음형으로 묘사되고, 악장의 거의 끝부분에 이르면 사형의 칼날이 쿵 하고 떨어지는 장면까지 음악으로 그려냅니다. 매우 사이키델릭한 악장입니다.

 

 

 

Berlioz: "Symphonie Fantastique" - 5th Mvt. - Leonard Bernstein

Leonard Bernstein conducts the "Orchestre National de France" in Berlioz's Symphonie Fantastique

5th Movement:Larghetto, Allegro (Songe d'une nuit de Sabbat)

Paris, 1976

 

 

 

5악장은 ‘마녀들의 밤의 축제와 꿈’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영향을 받은 악장으로 알려져 있지요. 단두대로 끌려가서 처형되는 4악장보다 오히려 더 그로테스크합니다.

주인공의 장례식에 모여든 마녀들의 소름끼치는 춤이 펼쳐집니다. 심지어는 사랑했던 여인마저도 마녀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중간에 등장하는 장례식의 종소리, 이어서 바순과 튜바가 레퀴엠 중 ‘분노의 날’(Dies Irae)을 연주하는 부분에 귀를 기울여보기 바랍니다. 처음 듣는 분들은 음악이 좀 장황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베를리오즈의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들으면 한 편의 그로테스크한 드라마처럼 들려올 겁니다.

 

 

 

▶샤를 뮌슈(Charles Munch), 보스톤 심포니/1962년/SonyMusic(RCA)

 

샤를 뮌슈는 보스톤 심포니와 1962년에, 파리오케스트라와 1967년에 <환상교향곡>을 레코딩했다. 두 연주 모두 빼어나다는 것이 중론이다. 국내에서는 보스톤 심포니를 지휘한 음반이 구입하기에 좀더 용이하다. 수십 년 동안 <환상교향곡>의 필청음반으로 손꼽혀온 녹음이다. 해석은 역시 뮌슈의 스타일대로다. 힘이 넘치는 화려한 연주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과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피해갈 수 없는 음반이다.

 

 

 

▶콜린 데이비스(Colin Davis),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1974년/Philips

 

지난해 타계한 콜린 데이비스도 베를리오즈의 음악을 운위하면서 빼놓을 수 없다. 영국 출신의 지휘자이지만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그의 주요한 레퍼토리로 자리해 있다. 앞서 언급한 뮌슈의 강렬한 드라이브에 비하자면 상당히 보수적인 느낌의 연주다. 주관적인 해석을 가능한 배제한 채 균형잡힌 연주를 들려주는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 차분하게 음악의 구조를 음미하게 해주는 연주다. 물론 이 또한 호불호가 엇갈릴 수 있겠다. <환상교향곡>의 극적인 느낌을 짜릿하게 맛보려면 뮌슈의 지휘가 더 적절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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