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K2bc,낭가파르밧.45일(2014

35.경이로운 낭가파르밧 루팔벽...헤를리코퍼BC(Herrligkoffer,3'550m)

나베가 2014. 11. 17. 03:54

 

 

 

루팔벽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더니, 이내 습지로 들어섰다.

라카포시BC와 디란BC앞 푸른 초원에서 탄성을 자아냈던것 처럼

이곳 역시 또 푸른 초지인 것이다.

이제 헤를리코퍼 BC가 눈앞에 다다른것이 분명하다.

 

 

 

아!!

이곳은 또 라카포시BC와는 또다른 풍광이네~

잔잔한 수풀을 가득 띄우고 있는 습지호수야~

 

 

 

습지건너 저 만치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의 모습과 호수를 감싸고 있는 독특한 산...

그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낭가파르밧 루팔벽의 모습까지...

정말 아름다운 풍광이 아닐 수 없다.

 

 

 

습지 주변 풍광에 사로잡혀 멈춘 발걸음이 쉬이 떠나질 못한다.

습지로 바짝 다가서 물속을 들여다보니,

물살에 흐르듯 휩쓸려 있는 바닥 가득한 수초와 그 주변으로 동동 떠 있는 앙증맞은 수초와 노오란 꽃들이

얼마나 또 이쁜 지...

부서지는 햇살에 반짝이는 물방울은 보석이 따로 없다. 

 

 

 

 

 

 

맞았어!

헤를리 코퍼 BC잖아.

 

습지를 바로 빠져 돌아서니, 눈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거대한 루팔벽의 모습에 그만 위압감 마저 느껴진다.

와아!!

 

 

 

파키스탄에서는 2번째이고,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낭가파르밧 (Nanga Parbat, or Diamir 8,126m)...

우르두어로는 '벌거벗은 산'을 의미하고, 이 지방 사람들은 '디아미르'라 하여 산중의 산이라고 부르는 산...

아니, 고산등반을 도와주는 셰르파들의 언어로는 '악마의 산' 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산...

 

 

 

1895년 영국의 A.F. 머메리가 첫 시도를 한 후 1953년에서야 독일. 오스트리아 등반대원 '헤르만 불'이 첫 등정에 성공한 산...

마지막 캠프를 단독으로 출발해 정상에 서고 41시간 만에 돌아온 청년 헤르만 불의 모습이 팔십 노인의 모습이 되어 돌아왔다는....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아픈 안타까운 사연-우리나라의 자랑스런 산악인 고미영을 비롯해 무려 31명이란 생명을 앗아가 버린 산....

낭가파르밧...

 

 

 

특히 지금 내 눈앞에 펼쳐 보여지고 있는 낭가파르밧 남동쪽의 저 루팔벽(Rupal Face)은 4,500m 의 수직으로 된 절벽으로

산악인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코스중의 하나로 안나푸르나 남벽, 마칼루 남서벽과 더불어 히말라야의 3대 난벽으로 꼽히고 있는 거대벽이다..

 

저 무시 무시한 대 장벽을...

1970년 '라인홀드 매스너(Reinhold Messner)'가 첫 등정을 한 이후 35년만인 2005년에 우리나라팀-김창호와 이현조 대원에 의해 등정이 이루어졌다는 거다.

무려 109일이란 어마 어마한 시간이 걸려서.

 

아!!

이렇게 표고차 5000m 아래서 바라다 봐도 가위가 눌리거늘 저 4600m의 시커먼 벽앞에 섰을때의 그들의 느낌은 과연 어땠을까...

단단한 각오로 점철되었겠지만 경사 60도가 넘는 4600m의 거벽과 맞딱뜨렸을때의 그 느낌이...

1934년 독일 낭가파르바트 대장 빌리 메르클이 느꼈던 것 처럼 소름이 끼쳤을까... 

 

어제 도착하자 마자 우리 눈에 들어와 잠시 흥분케 했던 '한국 루팔대장벽 원정대원' 이란 플랫카드가 저 높은 곳에서 왠지 휘날리고 있는 듯한

환각이 보이는 듯 하다.

자랑스럽고도 대단한 대한민국의 산악인들이여!!

 

 

 

 

올라올때 먼발치서 보이던 루팔벽 주변이 구름에 휩쌓여 있어 이렇듯 거대한 루팔벽의 선연한 모습을 볼 수 없을줄 알았는데,

살짝 걸친 구름이 있긴하나  제대로 된 루팔벽의 모습을 볼 수 있음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지...

 

 

 

 

 

 

 

스텝과 일행들이 앉아있는 곳으로 ....

아니, 루팔벽 앞으로 한 발 한 발 더 디뎌나갔다.

그렇게도 무시 무시한 장벽이란것을 순간 또 잊을 만큼...

맑은 물이 흐르는 도랑물하며 소들이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풍광이 그렇게도 평화롭게 느껴질 수가 없다.

 

 

 

그런 착각도 잠깐...

이내 눈이 붙어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저 거벽은 겨우 붙어있는 눈들을 떼어내기라도 하듯

작은 산사태들을 일으켰다.

 

 

 

 

왠지 구름이 자꾸 거벽 안으로 들어오는것만 같다.

조금 더 선명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수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 보지만, 되려 더 구름이 안쪽으로 밀려든다.

 

 

 

 

 

 

수시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루팔벽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그제서야 온 몸이 지쳐 녹아듦이 느껴진다.

생각해보니, 아침을 거의 못 먹은 채로 오전 8시에 출발해서 뙤약볕을 5시간 반을 넘도록 3,550m까지 걸어 오른 것이다.

 

스텝들이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등산화를 벗고 바지를 까지끝 올려 얼음처럼 차가운 빙하 도랑물에 무릎을 담그며 쉬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나서, 커다란 돌을 그늘막 삼아 그 앞에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서서 보았을때의 루팔벽의 모습과 그 주변풍광과는 달리 누워서 보이는 루팔벽의 모습은 더욱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주변풍광은 더욱 광활하고 평화롭게 보인다.

 

 

 

 

 

 

 

그냥 이대로 캠프치고 이곳에 머물면 딱 좋겠지만....

오늘은 이곳을 떠나 라토보BC까지 가서 캠프를 친다.

벌써 늦은감이 있는 지, 스텝들의 서두름이 느껴진다.

모르는 척 누워있고 싶었지만, 우리도 주섬 주섬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그려~

내일 다시 찾아와서 그때는 라카포시BC에서 처럼 맘껏 누워있다 가자.

 

 

 

 

참고/ 월간 산

낭가파르바트 변형 신 루트 등반] 2005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등정, ‘변형 신 루트’ 등반이었다

  • 글·사진 | 김창호 대한산악연맹 등반기술위원장, 월간산 기획위원
  • 독일 산악논문, 중앙립 ‘직등루트 재등’을 정정 기록

사느냐 죽느냐 프리들 뮤츄레히너와 함께 해낸 캉첸중가 북벽 완등은 내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등반이었다. 그러나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절실하게 체험한 것은 1970년 낭가파르바트(8,125m)에서 이루어진 나의 8,000m봉 최초의 종주에서다.

곤란, 고생, 위험 그리고 절망적 상태 등을 총망라해 생각할 때, 이 낭가파르바트에서의 등반을 상회할 만한 모험은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귄터와 내가 1970년에 종주한 루트를 다시 한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1,000명의 알피니스트들이 이 루트를 시도한다 해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정도일 것이다. 이제 와서 또 다시 살아남아서 돌아오라 해도 다시는 살아서 돌아올 것 같지 않다.’

8,000m 급 14개 고봉을 세계 최초로 오른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2005년 낭가파르바트로 떠나기 전에 이 글을 읽었다. 암담했다. 낭가파르바트가 그에게 히말라야 8,000m급 첫 등반이었듯이 서른여섯 살 나에게도 같았다. 세계의 철인이라 불리는 메스너가 왜 이 등반에 대해 다른 어떤 봉우리보다 좌절과 절망적으로 얘기했을까. 루팔벽으로 막 떠나려는 나는 알지 못했다.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4,600m, 평균 경사 60도의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등반은 109일 만에 이뤄졌다.
▲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4,600m, 평균 경사 60도의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등반은 109일 만에 이뤄졌다. 이 등반은 독일의 볼프강 하이헬이 쓴 ‘낭가파르바트 개척 연대기’ 논문에 변형루트 개척으로 기록됐다.
그레이트 히말라야산맥(Great Himalaya)의 8,000m급 14개 고봉 중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낭가파르바트는 8,125m 높이로 세계 제9위봉이다. 원주민의 말로 낭가파르바트는 ‘벌거벗은 산’이다. 사면이 너무 가팔라 눈이 붙어 있을 수 없는 형상에 걸맞게 그 정상에 오르려는 등반가들에게는 험난한 산으로 익히 알려졌고 평범한 등산인들 가운데도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 산에는 많은 이름이 붙어 있다. 즉 ‘공포의 산’이니 ‘운명의 산’이니 하는 식이다. 구름 위에 높이 솟은 그 거봉은 벌써 31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렇게 희생을 요구할 뿐 베푸는 것이 없다.

1953년 낭가파르바트의 마지막 캠프를 단독으로 출발해 정상에 서고 41시간 만에 돌아온 청년 헤르만 불은 팔십 노인의 모습이 되어 ‘한 번 사람을 끌어당기면 다시는 놓아 주지 않는 무자비한 왕국’이라고 일기장에 적어 넣었다.

특히 낭가파르바트의 남쪽 측벽을 루팔벽(Rupal Face)이라 부른다. 1934년 독일 낭가파르바트 대장 빌리 메르클은 첫 조우를 이렇게 기록했다.

‘루팔벽의 위용 앞에서 숨이 멎을 듯하다. 표고차 5,000m에 이르는 남벽은 과히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급사면을 이룬 벽이라 할 만하다. 소름이 끼치는 측벽의 일직선을 따라 만년설로 뒤덮인 정상을 바라보기 위해 나는 머리를 뒤로 한껏 젖힐 수밖에 없었다. 이 산의 전례 없는 웅장함 앞에서만큼 우리들 자신이 작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매일 내리는 눈으로 원정 도중 푸자(기원제)를 다시 한 번 지내고 베이스캠프 방문단을 포함하여 전대원이 모였다
▲ 매일 내리는 눈으로 원정 도중 푸자(기원제)를 다시 한 번 지내고 베이스캠프 방문단을 포함하여 전대원이 모였다. 이성원 원정대장, 김창호, 김주형 등반대장, 대원 김병찬, 이현조, 주우평, 박남수, 송형근, 김미곤, 박상훈, 박현수, 구형준
산이 거칠고 벽이 가파르면, 정상에 오르는 결과 못지않게 어떠한 루트로 오를 것인지를 꿈꾸는 등로주의자와 한계를 시험하고자 하는 극한등반가를 유인한다. 2005년 한국 낭가파르바트 루팔대장벽 원정대(이성원 대장) 12명도 달콤한 꿈에 빠져들었다.

‘한국대 35년 만의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앙립 루트 재등’

루팔벽은 독일대가 정찰과 등반을 포함해 네 번째 시도인 1970년 등정됐다. 그러나 첫 등정자들은 독일인이 아닌 알프스 산골 티롤에서 대원으로 참가한 이탈리아인 라인홀트와 귄터 메스너 형제였다. 형제는 올라간 루트로 하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산의 반대편 디아미르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벽의 발치에서 눈사태로 귄터는 실종되고 라인홀트는 생존했지만 동상으로 발가락을 잘라야 했다. 그 후 세계 산악계에서 내로라하는 등반가들이 35년 동안 12개 팀이 출사표를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한국대는 3개월짜리 입산허가 기간을 다시 연장하면서 사투 끝에 나와 이현조가 한밤중에 정상에 섰다.

우리 원정대가 오른 루트는 1970년에 오른 루트와는 절반 이상이 달랐다. 특히 정상부의 메르클 쿨와르를 벗어나면서부터 메스너 형제는 남봉(8,045m) 밑으로 횡단해 오른 반면, 우리는 암벽지대를 곧장 직등했다. 원정대는 ‘변형루트 개척’이라는 자화자찬 격이 역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 한국산악계 내의 평가에 따르기로 했다.

게다가 엉뚱한 문제가 불거져 원정대는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등정자들이 한밤중 정상에 올라섰기에 등정 사진이 없었는데 가끔 등정에 관해 뒷얘기들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두 달 후 루팔벽에 신 루트를 개척하며 정상에 오른 미국인 스티브 하우스와 빈스 앤더슨 2인조의 정상 사진에 우리 팀이 정상에 매달았다고 보고한 쎄로또레 깃발이 공개되자 자연스럽게 마무리됐다. 그리고 루팔벽 중앙립 루트로 재등한 것으로 모두 기록됐다.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중앙립 루트도
▲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중앙립 루트도 연대기 논문에 실린 루트 개념도. 우리 원정대가 오른 루트는 1970년 독일대 메스너 형제가 오른 루트와는 절반 이상이 다르다. 특히 정상부 메르클 쿨와르를 벗어나면서 메스너 형제는 남봉(8,045m) 밑으로 횡단해 돌아서 오른 반면, 우리는 암벽지대를 곧장 직등했다.
‘낭가파르바트 개척 연대기’ 논문에 ‘변형루트 개척’으로 기록

루팔벽 등정 후 많은 원정대원들은 고산등반을 접었고 몇몇 대원만이 히말라야 등반을 계속했다. 나는 등반과 카라코룸산맥 탐사를 계속했다. 어느 날 독일의 볼프강 하이헬(Wolfgang Heichel)이라는 사람이 전자메일을 보내왔다. 그는 자신을 산악인이자 파키스탄 히말라야 연구자라고 소개했다. 파키스탄에 답사를 갔다가 우리 원정대의 기념엽서를 보았고 현지인들로부터 연락처를 알았다고 했다.

첨부된 파일은 낭가파르바트 초등자 헤르만 불의 생가 앞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거기에는 1957년 불과 함께 브로드피크(8,047m)를 초등정하고 바로 이어 초고리사(7,668m)에서 눈처마 붕괴로 헤르만이 실종됐던 당시 등반 파트너였던 쿠르크 디엠베르거, 헤르만의 미망인 유진 불, 그리고 그 이듬해 초고리사를 초등정한 일본인 카주마사 히라이, 짧은 머리가 희끗한 볼프강이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때부터 그와 나의 교류는 시작됐다. 자신이 쓰고 있는 <중부 카라코룸(Central Karakorum)>(2010, 제1권)에 들어갈 한국원정대들에 관한 자료요청이 첫 번째였다. 이것은 많은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었으나 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한국원정대의 활동이 해외로 알려지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논문집 <서부 카라코룸(Western Karakorum), 2003>과 히말라야에 관한 1950년에서 1970년대에 발행된 희귀본을 보내 주어 산서를 수집하는 나를 꽉 잡았다.

내가 등반하고 발행된 보고서는 물론 한국대들의 원정보고서도 그에게 보냈다. 카라코룸에서 탐사하면서 촬영된 내 사진은 그의 논문에 다수 실렸다. 전 세계 산악계에 볼 때 산악연대기를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아 당연히 볼프강 하이헬의 연대기는 바이블의 위치로 평가되는 분위기다.

하이헬은 <중부 카라코룸> 제2권을 멈추고 낭가파르바트 연대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자료요청은 폭주했다. 그 이유는 1970년 원정대장 헤를리히코퍼 박사의 공식 보고서와 메스너의 기록이 많이 달랐고, 그 루트를 가본 생존자는 나 한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그는 예전 대한산악연맹이 발행했던 <산악인>을 스캐닝해서 메일로 보내와 번역을 부탁하기도 했다. 얼마 전 420페이지의 분량의 낭가파르바트 개척연대기인 <Chronik der Erschliessung des Nanga Parbat, 2013>가 도착했다.

여기에 우리 원정대가 올랐던 루트는 중앙립 재등이 아니라, 루팔벽 메르클 빙원 루트(RU1)의 변형루트(RU1-1)로 등재됐다(낭가파르바트 등반루트표 참조). 루트개념도와 사진 8장을 포함한 그의 논문에 실린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초등자인 라인홀트 메스너와 35년 후에 등정한 김창호가 낭가파르바트로 4일간의 여행을 했다.
▲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초등자인 라인홀트 메스너와 35년 후에 등정한 김창호가 낭가파르바트로 4일간의 여행을 했다. 루팔벽 아래 타라싱 마을에서 메르클 쿨와르의 상태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1970년 낭가에서 라인홀트는 친동생을 잃었고 자신은 동상으로 발가락을 잘라야 했다.
2005년 한국 낭가파르바트 원정대(루트 1-1)

이성원 원정대장, 김창호, 김주형 등반대장, 대원 김병찬, 이현조, 주우평, 박남수, 송형근, 김미곤, 박상훈, 박현수, 구형준 12명으로 구성된 한국원정대는 이미 4월 20일 베이스캠프를 설치했으나 43일 후, 6월 14일에 한 팀이 루팔 대장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고도 6,850m까지 오르고 그 지점에 3캠프를 설치했다. 그 사이에 낙석과 눈사태가 여러 지점에 설치한 7개의 텐트들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캠프1에 설치한 텐트 3개와 캠프2의 텐트 모두가 신설 더미에 완전히 파묻히고 말았던 것이다.

6월 말 마침내 공격 팀이 정상 공격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4명의 대원이 6월 26일에 정상 공격에 나섰다. 해발 약 7,550m 지점에서 메르클 린네에 진입해 기어오를 때 김미곤 대원이 다리에 낙석을 맞았고, 부상 정도가 심각해 등반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 힘든 구조 활동을 펴며 베이스캠프까지 그를 내려 보내야 했다.

김창호와 이현조는 7월 13일 또다시 메르클 린네 쪽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오후 10시 30분경 해발 7,125m의 4캠프를 출발해 메르클 빙원(氷原)을 오르고 7,550m까지 뻗은 정말 위험하기 그지없는 아이스 쿨와르의 입구까지 서로 로프를 동여매고 올라갔다.

한국대원들은 오로지 지름 6mm와 길이 50m의 로프만을 사용해 7월 14일 9시경에 다시 등반에 나섰다. 쿨와르를 통해 우르릉거리며 떨어지는 바위와 얼음 덩어리들로 인해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오후 5시경 2인조는 해발 7,850m에 있는 설원(雪原) 최고지점에 도달했다. 그들은 이 지대에서 밤을 새우는 비박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위로 올라갈 결심을 했다. 이어 오후 9시경 남봉과 중앙봉을 잇는 산등성이에 진출하고 두 시간 뒤 마침내 낭가파르바트의 최고지점에 도달했다.

이 2인조는 잠시 휴식을 취했을 뿐 정상까지 중단하지 않고 24시간을 계속 등반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주위가 어두워 납득이 가는 정상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뒤늦게 그들의 성과를 의문시할 수 있을 거라고 조금은 걱정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 산의 다른 쪽으로 하산한 결정에 대한 상황을 짐작해 나온 황당무계한 하나의 시나리오였다.

	1957년 브로드피크(8,047m)를 초등정하고 바로 이어 초고리사(7,668m) 등반에서 눈처마 붕괴로 헤르만이 실종되던 당시 등반파트였던 쿠르크 디엠베르거, 헤르만의 미망인 유진 불, 그리고 그 이듬해 초고리사를 초등정한 일본인 카주마사 히라이, 뒷줄에 짧은 머리가 희끗한 볼프강이 헤르만의 생가 앞에서 찍었다.
▲ 1957년 브로드피크(8,047m)를 초등정하고 바로 이어 초고리사(7,668m) 등반에서 눈처마 붕괴로 헤르만이 실종되던 당시 등반파트였던 쿠르크 디엠베르거, 헤르만의 미망인 유진 불, 그리고 그 이듬해 초고리사를 초등정한 일본인 카주마사 히라이, 뒷줄에 짧은 머리가 희끗한 볼프강이 헤르만의 생가 앞에서 찍었다.
2인조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확실하게 했다. 그래서 두 한국인은 그들의 주요 스폰서 깃발과 로프를 증거물로 정상에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그 사이에 김창호와 이현조는 라인홀트 메스너가 서신을 넣어 둔 작은 통을 발견했다. 메스너가 1978년 디아미르의 대장벽 단독등정에 성공한 후 정상에 남겨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등정 증거물로 이 철제통을 가지고 내려가기로 결정했다(167쪽 그림 참조).

김창호와 이현조는 정상에서 10분 동안 있은 후 로프도 서로 동여매지 않은 채 밤 11시 10분 디아미르 대장벽의 킨스호퍼 루트를 따라 하산하기 시작했다. 정상지대 중간 어느 지점에서 한 줄기 설판(雪板)이 느즈러지며 흘러내렸다. 그 바람에 이현조는 눈 더미에 파묻히고 김창호는 50m 아래 깊숙한 곳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 다만 김창호는 헤드라이트를 잃어버려 어둠 속을 하강하는 게 문제였다.

두 사람은 눈사태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계속 아래로 하강해 해발 7,100m에 있는 일본원정대 텐트에 다다랐다. 그들은 억수로 쏟아지는 잠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휴식을 취하고 나면 다시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듯 힘든 상황에서도 비틀거리며 아래로 계속 내려갔다.

그들은 환각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 다른 등산가가 그들 앞에 나타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두 사람은 마지막 힘을 다해 루팔 대장벽의 4캠프를 출발한 이후 디아미르 기슭의 베이스캠프까지 68시간 남짓 걸린 이 대장정을 해냈던 것이다.

두 한국인을 맞아들인 등반가들은 이현조가 먼저 도착하고 이 엄청난 고난을 겪은 후에도 놀랄 만큼 씩씩한 모습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 산의 다른 쪽에 있는 동료 대원들과 교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 9일 후에야 동료대원들과 만났다. 전부해서 이 원정대는 109일 걸렸다.

 

Malotte : The Lord's Prayer (주기도문) - Gary Kar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