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글들.../클럽발코니....

친절한 디토씨의 음악여행수첩⑨ 알레산드로 마르첼로 <오보에 협주곡>

나베가 2014. 10. 6. 00:30

 

친절한 디토씨의 음악여행수첩⑨ 알레산드로 마르첼로 <오보에 협주곡>

“어휴, 거긴 세계에서 제일 비싼 커피를 파는 데잖아!”

베네치아 작곡가들의 음악을 모아 <In Venice>라는 독주 음반을 내기도 했던 베를린필의 오보에 수석 알브레히트 마이어가 서울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베네치아의 플로리안 카페(Caffe Florian)에서 찍은 핸드폰 사진을 몇 장 보여주니 기겁부터 한다. 거긴 비싸도 너무 비싸다는거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활동을 하는 그이지만 플로리안보다 커피가 비싼 곳은 못 봤단다. 하긴 플로리안에서 네 명이 커피를 마셨더니 음악 연주료까지 더해 100유로까지 나온 기억도 있다. 사람들은 여기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기보다는 시대를 음미하고 경험을 공유한다. 커피 값 속에는 과거의 ‘베네치아 공화국’을 반추하는 시간여행비와 서유럽의 커피역사를 직접 체험하는 체험 학습비가 녹아져 있는 것이다.

아랍의 음료였던 커피가 서유럽으로 전해진 과정은 전쟁과 무역을 통해서였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의 기나긴 공성전 끝에 도시를 사수해낸 빈(Wien) 시민들은 투르크가 버리고 도망간 전투식량 꾸러미에서 검은 콩 한 자루를 발견해낸다. 빈 커피 역사의 출발점이다.
베네치아는 무역을 통해 커피를 들여온다.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적성국인 터키지만 노회한 외교술로 이들과도 무역길을 트고 있던 베네치아는 당시 투르크 지식인 사회를 강타하고 있던 ‘검은 물’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곧 베네치아에는 유럽 최초의 카페가 생긴다. 사실 커피 맛을 따지자면야 밀라노의 어디, 나폴리의 어디가 더 나을 수 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밤바다를 앞에 두고, 그 치렁거리듯 울렁이는 바다의 묘묘한 분위기가 더해진다면 역시나 커피는 베네치아가 최고다.

무작정 이 도시를 아름답다고만 말하는 사람은 아직 베네치아를 잘 모르는 게 분명하다. 그건 남녀가 소개팅에서 딱 한번 만나 서로 잘 생기고 예쁜 얼굴만 확인하고 돌아온 수준의 그런 감상일 뿐이다. 베네치아는, 베네치아의 바다는 다른 이탈리아 도시의 그것과는 표정이 전혀 다르다. 온통 회색빛으로 암울하게 젖어있는 이 바다는 석호에 갇혀 퀴퀴한 물 냄새까지 만만찮다. 밤만 되면 희뿌연 안개가 눈 앞을 가려 도시의 인상을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모호한 퇴폐성이야말로 진정한 베네치아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정묘함, 두려움과 외로움, 쓸쓸한 고혹을 자아내는 베네치아의 밤 풍경)

그래서일까. 베네치아의 작곡가들이 남긴 음악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퇴폐미를 지녔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2막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도 사실은 이 도시 베네치아의 밤바다 풍경이었다. 안개가 자욱히 올라온 좁디 좁은 수로를 뚫고 무슨 비밀스런 사연을 담아가듯 천천히 노를 젓는 곤돌라 뱃사공들의 콧노래 소리가 독일의 노대가를 한없이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알레산드로 마르첼로 <오보에 협주곡>, 오보에 파비앙 튀앙 Fabien Thouand, 카메리스티 델라 스칼라 I Cameristi della Scala)
알레산드로 마르첼로의 오보에 협주곡은 참으로 ‘베네치아적인 음악’이다. 낮보다는 철저히 밤의 정서를 지향하고 있으며, 가장 맑디 맑은 오보에로 노래하나 사실 그 속에 숨은 정서는 실로 복잡하다. 이건 피렌체나 로마, 나폴리인들이 결코 느낄 수 없고 노래할 수 없는 오직 베네치아만의 정서다.

 

 

(좁고 구불거리는 베네치아 특유의 골목길)
오늘도 그처럼 짙게 내려앉은, 불안정하지만 실로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베네치아의 바다를 앞에 두고, 수백년의 역사를 지닌 고색창연한 카페의 발코니에 앉아, 마치 작은 잔 속으로 훅하고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짙은 에스프레소 한 잔과 작은 초콜릿을 받아든다. 마르첼로의 음악은 18세기의 것인데, 이 카페는 그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 베네치아의 대운하 카날 그란데의 건물들은 대개 밤이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피어난다. 사람은 살지 않지만 일부러 건물 저 깊은 곳에 조명을 하나씩 띄워 마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속에 마치 옛 베네치아의 대귀족이 우아한 걸음걸이로 자신의 서재 한켠을 걸어다니는 듯 하다.

이렇듯, 베네치아에 가면 마르첼로를 들어야한다. 깊고 쓰디쓴 에스프레소와 함께 베네치아의 화려하고도 예민한 고독이 우리의 밤을 한없이 쓸쓸하고 또 아름답게 어루만져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