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디토씨의 음악여행수첩⑮ 로드리고 <아란후에즈 협주곡>
벌써 십 여년 전의 일이다. 이집트 카이로 공항에서 그리스 아테네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집트에서의 시간은, 뭐 괜찮은 편이었다. 피라미드는 압도적이었고, 기원전부터 쐐기 문자를 이용해 남겨놓은 그들의 무역과 전쟁기록 그리고 문학 등은 경이로웠다. 이들은 정신과 물질 모두에서 당대 최선두를 달리던 문화 민족이었음에 틀림없다.
해가 진 후 저잣거리에서의 경험도 감동적이었다. 지중해 식문화의 모태가 된 아랍의 음식은 그 자체로 유기농이고 입에도 잘 맞았다. 북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열이 뚜렷이 남아 있는 초저녁의 노천시장에서 이곳 사람들의 흥겨움과 어울리는 건 또 얼마나 즐거웠는지. 살가운 그들의 태도에서 삶의 진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러나, 사람은 못내 익숙함을 좋은 것으로 착각하기 마련이다. 떠들썩한 흥겨움 속에서도 카이로의 신호등 없는 차도를 건너긴 괴로웠고, 새벽 서너시까지 울려대는 자동차 클락션 소리에는 제대로 된 잠을 청하기 힘들었다. 무슨 특급호텔이라는데 서비스가 전혀 없다거나, 개장과 폐장 시간이 제멋대로인 박물관도 이래저래 사람을 당황시켰다.
일탈의 고대문명 여행은 이쯤에서 접고 다시 익숙한 세계로 ‘황급히’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예정된 비행기는 왜 또 오질 않는건지. 수 시간 째 눈 빠지게 기다리다보니 같은 처지의 다른 승객들과도 자연스레 시선이 마주치거나 눈인사를 나누게 된다.
맞은 편 의자에 앉은 키 작은 청년은 무슨 군대 더플백 마냥 초대형 배낭을 짊어지고 있다. 눈빛이 지적인 저 남자는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흘끔 쳐다보니 그의 손에는 얇은 책 한권이 들려있다. 스페인어는 잘 모르지만, 그게 무슨 제목인지는 얼추 알겠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비밀’
둘 다 혼자하는 여행이라 이럴 때는 말걸기가 편하다.
“스페인에서 오셨나봐요?”
“발렌시아 태생입니다.”
연락처를 교환한 우리는 이후에도 몇 번이나 안부를 주고 받기도 했다. 지금은 소식이 뜸해졌지만 그는 아마 요즘도 책과 음악 속에서 풍윤한 인생을 즐기고 있으리라.
기억에 남는 건 그가 이야기한 스페인 클래식 기타 이야기였다. 뭔가 처음 이야기를 꺼낼 땐 ‘노숙한 취미’로 여길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 하긴, 가야금 연주가 취미라고 설명할 때 비슷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손가락이 썩 잘 돌아가진 않지만 호아킨 로드리고와 파야의 음악을 곧잘 연주한다는 그는, 특히 아란후에즈 협주곡을 멋지게 연주해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하필이면 작곡가와 고향도 같고, 그의 이름도 로드리고였으니 실제로 그 꿈이 이뤄진다면 얼마나 멋질까.
(아랍풍의 정교한 장식미가 신비를 더하는 아란후에즈 왕궁의 장식들) |
아란후에즈는 마드리드 남방 70여km에 위치한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여름 별궁이다. 유럽 각지의 여름 궁전들은 정말이지 모두 다 찾아가볼만한 가치가 있는데, 정궁(正宮)의 엄격함에서 조금씩 벗어나 독특한 여유와 나른한 분위기가 큰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빈의 쇤부른이나 유럽의 크고 작은 도시들에 있는 ‘에르미타쥬’들이 모두 그렇다. 스페인 발렌시아 태생의 호아킨 로드리고는 잘 알려진대로 어릴 적 악성 디프테리아에 걸려 시력을 잃었다. 비록 스페인의 대자연을 눈으로 직접 보진 못했지만 고도의 안목과 섬세한 예술적 감수성만은 잃지 않았던 그는 달콤하면서도 명상적인 기타 선율 속에 의고적인 우아함과 느릿한 여유를 가미한 최고의 클래식 기타음악을 작곡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곡이 아란후에즈 협주곡(Concierto de Aranjuez)이다. 오늘은 2악장 아다지오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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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아란후에즈 협주곡> 2악장 아다지오, 기타 페페 로메로) |
로드리고는 이 악장을 가리켜 ‘기타와 잉글리시 호른이 나누는 애수의 대화’라 말했다. 과연 시공을 초월한 한없이 애절한 노스탤지어가 우리의 가슴을 적시는 음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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