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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디토씨의 음악여행수첩⑲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나베가 2014. 9. 28. 13:13

 

 

친절한 디토씨의 음악여행수첩⑲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어느덧 우리에게 가을이 찾아왔다. 이제는 짧아서 더욱 소중한 계절이다. 다음 달이면 살을 애는 찬 바람이 우리를 엄습할지도 모른다. 아니, 당장 다음 주에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기약 없이 사라질 이 가을을, 오늘 하루를 그저 만끽해야만 한다.

이 시절엔 모리스 라벨이 좋겠다. 그의 음악은 초가을의 옅은 갈색과 어울리는 서정과 여유를 지녔다고나 할까.

라벨은 어린 시절부터 예민한 천재 소년이었고, 말라르메와 에드가 앨런 포의 시를 암송하던 조숙한 취미의 독서가이기도 했다. 천재들이 의당 그렇듯 언제는 아방가르드의 선두에 서다가도, 또 어느 때는 아주 옛 것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담아내 지극히 아름다운 음악을 창조해내곤 했다.


(근대 프랑스 음악의 대표 작곡가 모리스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는 <볼레로>와 함께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라벨의 음악일 것이다. ‘파반느’라는 느리고 우아한 옛 무곡 양식 위에 일부러 구조를 조금 성기게 만든 선율을 얹었다. 거기에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제목이 우리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더욱 자극한다.

딱히 벨라스케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마르게리타 공주가 모델은 아니었을 것이다. 작곡가들의 정신세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라벨 특유의 색채적인 음악과 묘한 비극적 음영이 자아내는 깊은 여운은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을 제공한다. 5분 내외의 이 작은 음악은 대상도 불명확하고, 결말도 열려 있다. 그래서 더욱 매혹적이다.

원래는 피아노 음악이었다가 후일 관현악으로 편곡되었다. 지금은 주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이 되었지만 오늘은 원곡 버전으로도 한번 들어본다. 슈라 체르카스키의 연주다.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피아노 슈라 체르카스키)


오케스트라 버전은 라벨이 직접 편곡했는데, 소규모 편성으로도 지극히 아름다운 시정을 자아낸다. 특히 고적한 호른 솔로는 정말이지 가을을 부르지 않는가.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파리 오케스트라)


라벨의 파반느는 현란한 기교를 배제한 채 담담히 흐른다. 화사한 색채감 속에서도 투명함이 느껴지는 여유와 느릿한 리듬 속에 담긴 의고적인 쓸쓸함도 가슴 깊이 파고든다. 유화로 그렸지만 동양풍의 수채화 같은 느낌을 주는 음악이다. 그 풍부한 여백의 미, 그리고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아련한 안타까움이 이 시절의 가을과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