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디토씨의 음악여행수첩⑳ 쇼팽 <발라드 No. 1> 쇼팽의 발라드 1번은 마치 작은 오페라와도 같다. 10여분 남짓한 음악이지만, 서주로부터 시작해 조심스레 이야기를 펼쳐가는 과정이 있고, 곧 어둠과 밝음 그리고 열정적인 투쟁과 섬약하지만 아름다운 서정이 교차한다. 음악 사이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멈춤과 공백이 있고, 머뭇거리다 돌진하고 격정적인 웅변을 쏟아내다가도 곧 우아한 침묵 속에 부유한다. 여기엔, 확실히 무언가 거대한 드라마가 꿈틀거리고 있는 듯하다. 발라드(Ballade)는 유럽의 중세 시절부터 불려진 시가 양식이다. 기사나 떠돌이 가객들이 류트 등을 뜯으며 러브스토리가 가미된 작은 드라마를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그 전에는 주로 리듬 위주의 춤곡들이 유행했으나, 사람들은 발라드가 가진 이야기와 달콤한 선율에 빠져들었다. 쇼팽의 발라드 또한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폴란드 어느 애국 시인의 시에 영감을 받았다지만 그걸 애써 확인하기도 전에 우리는 쇼팽의 격정적인 음악이 쏟아내는 그 전율같은 감동에 곧바로 휩싸이고 만다. |
장대하지만 머뭇거리며 시작되는 서주. 그리고 곧 작은 망설임이 짧은 침묵의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옛날 옛적에, 그러니까 십 여년도 훨씬 지난 어느 해에...’ 지긋한 신사가 조심스레 입을 떼고는 잠시 멈춰 천천히 찻잔을 들며 호흡을 가다듬는 모양새다. 그리고는 곧,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선율이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우리 앞에 천천히 울려 퍼진다. ‘그대들이여, 이 매혹적인 이야기를 좀 들어보겠는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에도 등장했던 음악이다.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 앞에서 주인공 스필만이 살기 위해 연주했던 처절한 그 음악.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바르샤바에 살고 있던 유태계 폴란드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Wladyslaw Szpilman)은 나치의 인종청소를 피해 도피를 거듭하다 아사 직전에 몰린다.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음악인임을, 아니 자신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 곡을 연주한다. 실제로는 쇼팽의 ‘녹턴’을 쳤다지만, 그저 생존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야만했던 그 순간의 저릿한 감동이 내내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명장면이다. |
(쇼팽 <발라드 1번>, 영화 ‘피아니스트’ 중에서) |
발라드하면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짐머만, Krystian Zimerman)의 연주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쇼팽의 후예인 그는 지독히도 까다롭고 극도로 섬세한 성정의 피아니스트로 대단히 유명하다. 그 성격 때문에 크고 작은 트러블도 많이 일으켰다. ‘예술 이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류의 이야기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별반 대접 못 받는 인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면 어떤가. 지메르만의 이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황홀한 연주 앞에서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세상과 사회가 규정해놓은 그 ‘인격’이 그렇게 중요하고 좋다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살아라. 나는 이 절대적인 아름다움 근처에 조용히 머물고 있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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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발라드 제1번>, 피아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
가끔 삶이 무료해지거나 건조해질 때면 이 연주를 틀어놓고 조용히 들어본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빚어내는 서늘한 감동이 삶에 대한 질책과 위로, 희망과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예술이란 그래서 중요한 것인가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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