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 2014년)

KBS교향악단 제678회 정기연주회/2.28.금/예술의 전당

나베가 2014. 2. 28. 00:30

KBS교향악단 제678회 정기연주회

 

 

 

Symphonie Espagnole in D minor, Op.21

랄로 / 스페인교향곡 라단조 작품 21

?douard Victor Antoine Lalo 1823∼1892  

 

1873년(50세)에 작곡하여 사라사테의 초연으로 대성공을 거두어 랄로의 이름을 일약 유명케 한 작품이다. 스페인풍의 정열과 프랑스풍의 세련미가 합쳐진 랄로의 대표작으로 전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곡은 스페인의 피(할아버지가 스페인 사람)를 이어 받은 작곡가의 작품답게 스페인풍의 이국 정서가 넘친다. 독주 바이올린은 화려하고 정열적이며 다채로운 관현악과 어울려 매혹적인 멋을 풍기고 있다. 전곡을 통해 제4악장 안단테가 극히 아름다우며 제3악장은 연주시 생략되기도 한다.

 

스페인적인 정서가 짙게 배어있는 '교향적 모음곡 스타일의 바이올린 협주곡'인 이 곡은 랄로의 두번째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그가 50세때에 작곡되었으며 사라사테에게 헌정되고 초연되었다. 사라사테의 비범한 연주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곡인 만큼 독주 바이올린에 매우 화려하고 연주에 초인적인 기교를 요한다. 3악장 Allegretto non troppo는 간주곡으로 사라사테가 이 악장을 생략해서 초연한 이래 연주효과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간혹 생략되어 연주되기도 한다.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이 작품은 랄로가 50세때 사라사테를 위하여 작곡한 것으로 협주곡풍의 5악장으로 된 모음곡이다. 낭만파 음악 후기에 러시아를 중심으로 국민파 음악이 일어났다. 그 영향은 체코슬로바키아, 노르웨이, 스페인, 헝가리, 핀란드 등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는데 이것은 음악에 있어서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작곡자들은 제각기 자기 나라의 향토적인 음악, 즉 민요나 민속 무곡을 바탕으로 작곡하려고 힘써다. 이 조류에 따라 랄로는 스페인의 민족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이 <스페인 교향곡>이라는 민족적 특징이 있는 곡을 작곡한 것이다. 제목은 <스페인 교향곡>이라 했지만 그 속에 어떤 줄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순수한 음을 가지고 스페인의 민족적 색채를 추상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경쾌한 변화와 그림과 같은 색조를 지니고 있으며 달콤하고도 우울한 향수가 깃든 곡이라 평하기도 한다.

 

전 악장 이어듣기 (1-2-3-4-5)

Anne Sophie Mutter, Violin
Wien Philharmonic Orch / Seiji Ozawa, Cond.

 

Vadim Repin, violin

L'Orchestre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

Myung-Whun Chung, Cond.

 

 

Alissa Margulis violin

World Youth Orchestra

Damiano Giuranna, Cond.

 

1악장: Allegro Non Troppo

투티로 시작되는 힘찬 곡으로 독주 바이올린의 서정적 선율이 매우 돋보이는 탄탄한 형식의 악장이다.


David Oistrakh, Violin
Philharmonia Orchestra / Jean Martinon, Cond.
 

 

Anne Akiko Meyers, Violin

 

Silvia Marcovici, Violin

 

2악장: Scherzando-Allegro Molto

스페인의 색채가 가장 두드러져 제목의 이미지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주는 곡이다.

관현악의 화려한 색채감, 템포의 자유로운 변화가 특징이다.

 

David Oistrakh, Violin
Philharmonia Orchestra / Jean Martinon, Cond

 

Silvia Marcovici, Violin

 

3악장: Intermezzo-Allegrotto Non Troppo

'인터메초'는 연주 효과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가끔 생략되기도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2악장처럼 스페인적인 색감이 진하게 느껴지는 곡이다.

 

David Oistrakh, Violin
Philharmonia Orchestra / Jean Martinon, Cond

 

Silvia Marcovici, Violin

 

4악장: Andante

안단테의 빠르기로 연주되며 애수 띤 풍부한 정서와 아름다운 선율을 특징으로 한다.

 

David Oistrakh, Violin
Philharmonia Orchestra / Jean Martinon, Cond

 

Silvia Marcovici, Violin

 

5악장: Rondo-Allegro

론도 악장으로 독주 바이올린의 화려한 연주기교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랄로의 나이 50세 때인 1873년 작품이다.

 


David Oistrakh, Violin
Philharmonia Orchestra / Jean Martinon, Cond

 

Silvia Marcovici, Violin

 

작품의 개요 & 배경

 

일반적으로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을 설명 할 때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게 되는 것은 이 곡의 제목에 관한 부분이다. '교향곡'이란 말이 있지만 이 작품의 성격을 먼저 밝힌다면 어디까지나 바이올린 협주곡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랄로의 두 번째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랄로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총 네 편 썼는데 제 1번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곡에는 모두 이런 식으로 표제를 붙였다. 제 2번은 지금 얘기한 것처럼 '스페인 교향곡'이고 제 3번은 '노르웨이 환상곡' 그리고 제 4번은 '러시아 협주곡'이다. 자세히 보면 이들 표제들은 각각 나라를 앞에 내세우고 '교향곡', '환상곡', '협주곡'이란 악곡 종류를 붙여서 만든 것 이다. 물론 이런 식의 표제 사용은 작곡가의 이국적 취미를 반영한 것이었다.

 

랄로는 프랑스 사람이긴 하지만 할아버지가 스페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몸에는 스페인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거기다가 랄로가 이 작품을 쓸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국적 풍조가 한창 유행하였기 때문에 많은 작곡가들이 스페인 풍의 작품을 쓰곤 했다. 랄로의 작품도 그런 음악계의 취미나 유행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날에는 대중적인 사랑을 흠뻑 받고 있지만, 이 곡에 대해 차이코브스키는 '아주 즐겁고 참신한 작품이긴 하지만 진지한 면은 없다'고 비꼬기도 했다. 기교를 앞세운 대부분의 바이올린 작품들이 그렇듯이 랄로의 이 명곡도 깃들어 있는 정서는 매혹적이고 화려한 기교도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지만 음악적인 깊이는 별로 없다.

 

Lalo, Edouard Victor Antoine 1823~1892

 

프랑스의 작곡가. 스페인 교향곡〈Symphonie espagnole〉과 명료한 관현악법으로 유명하다. 스페인계 군인집안에서 태어나 1839년 무일푼으로 파리로 가서 파리 음악원에서 프랑수아 아브네크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J. 쉴로프와 크레브쾨르에게 작곡 개인교수를 받았다. 1848년 첫 작품을 출판했고, 1855년에는 아르맹고(Armingaud) 현악 4중주단에 비올라 연주자로 들어갔다.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스페인 교향곡〉을 사라사테가 1875년 초연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1876년에는 첼로 협주곡, 1882년에는 발레곡 〈나무나 Namouna〉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곡은 안무솜씨보다는 수준 높은 음악이 더 돋보인다는 점에서 디아길레프의 발레 작품들을 예시했다.

 

뒤이어 1887년 〈교향곡 G단조 Symphony in G Minor〉를, 1888년에는 오페라 〈이스의 임금님 Le Roi d'Ys〉의 결정판을 발표했다. 역시 후대에 영향을 준 바 있는 실내악으로는 현악 4중주, 3개의 3중주, 피아노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가 있고, 바이올린 협주곡과 피아노 협주곡도 작곡했다. 그의 음악은 슈만, 베버와 유사한 점이 있기는 하나 매우 독창적인 재능의 산물이다.

 

Anne Sophie Mutter (안네 소피무터)

 

바이올린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는 1963년 6월 29일 라인펠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5살때에 피아노를 시작했 으나 곧바로 바이올린으로 바꾸었다. 6살 때 Jugend Musiczier에서 처음으로 입상했고 Carl Flesch의제자인 Erna Honigberger와 스위스의 Winterhur 음악학교 교수인 Aida Stucki로부터 사사받았다.1976년에 있었던 Lucerne Festival에서 카라얀은 무터에게 깊은 음악적 애정을 갖게되었고 1977년 13세의 나이로Salzburg Easter Festival에 카라얀과 함께 데뷔공연을 가졌다. 그 다음해인 1978년에는 카라얀의 베를린필과 함께 그녀의 첫 레코딩을 했고 그 레코드는 Grand Prix Disque와 Deutsch Schallplatten Preis를 수상했다.

 

안네 소피 무터의 국제적 경력은 1977년 Salzburg Whitsun Festival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그녀는 솔리스트 또는 챔버 뮤지션으로서 유럽, 미국, 카나다, 일본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연주회를 가졌다. 그녀는 Witold Lutoslawski, Norbert Moret, Krzysztof Penderecki , Wolfgang Rihm의 작품들을 주 레퍼토리로 연주하였고 많은 작곡가들은 특별히 그녀를 위한 곡들을 썼다. 무터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많은 상을 받았다. 그리고 1985/86년에는 런던에 있는 왕립음악학교는 그녀를 honorary fellow로 지명했다. 그녀가 16세가 되던 1979년에는 그해의 아티스트로 불려졌고 prestigious Deutscher Schallplattenpreis 를 받았다. 1983에는 옥스포드대학의 모자르트협회의 명예회장이 되었고 1987년에는 독일공화국의 일등훈장을 받았다. 1996년에는 본에 있는 베토벤협회의 명회회원이 되었다.무터는 세계적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 에이즈 퇴치와 암으로 고생하는 어린이를 위한 자선 콘서트를 가졌다.

 

 

Schubert, Symphony No.9 'The Great'

슈베르트 교향곡 9번 ‘그레이트’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이 작품은 스케치만 남아 있는 교향곡 D장조(D936A, 1828년)를 제외하고는 슈베르트 최후이자 최대의 교향곡이다. 이 작품은 출판 당시인 1849년 시점에서는 교향곡 7번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까지 슈베르트 교향곡은 1~6번까지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7번째 교향곡 번호를 받았던 것이다. 1884~1885년 구 전집이 출판됐을 때에도 이 사실은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 후 단순한 스케치 상태였던 E장조 교향곡(D729, 1821년)을 어떻게 슈베르트의 작품목록 속에 위치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불거졌다. 그래서 다시 작품의 성립 연대순으로 번호가 재배치되었다. 따라서 성립 연대순에 따라 ‘E장조 교향곡’을 7번, ‘미완성 교향곡’을 8번, ‘그레이트 교향곡’을 9번으로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보편적으로 일컬어지는 슈베르트의 교향곡 번호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오토 에리히 도이치의 신작품 목록에는 ‘E장조 교향곡’이 실제로 연주가 불가능한 작품인 것을 고려해 번호를 삭제하고 ‘미완성 교향곡’과 ‘그레이트’에 각각 이전의 7번과 8번 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가끔씩 교향곡 8번과 9번을 7번과 8번으로 표기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 것은 7번이었던 교향곡 E장조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슈베르트 최후이자 최대의 교향곡

1825년 5월부터 10월까지 슈베르트는 긴 여행을 떠났다. 그 여정에는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운 휴양지 그문덴(Gmunden, 브람스가 바트 이슐로 휴양 갈 때 머물기도 했으며, 쇤베르크가 이곳에서 현악 4중주를 작곡했다)과 가스타인 등의 온천 휴양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행 중 체재하고 있던 곳에서 슈베르트는 그동안 신세를 졌던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을 보면 당시 작곡한 ‘그레이트’에 대해서 조금씩 언급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따라서 이 긴 여행의 시기 전후에 ‘그레이트’가 작곡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슈베르트가 ‘그레이트’를 구상한 휴양지 그문덴의 풍경.

이 대규모의 교향곡은 그 실체가 분명히 알려지지 않은 채 슈베르트가 당시 휴가를 떠난 장소의 지명을 본떠서 ‘그문덴 가스타인 교향곡’ D849으로 통칭되어 왔지만, 이후 음악학자들의 연구로 이 시기에 작곡된 교향곡은 D849가 아니라 C장조 ‘그레이트’ D944임이 판명 났다. 이 곡의 슈베르트 자필 스코어는 빈 악우협회에 보존돼 있으며, 같은 시대 필사악보도 존재한다. 초연은 멘델스존의 지휘로 1839년 이루어졌다. 그러나 슈베르트 생전에 빈 악우협회에서 단독으로 주최한 음악회에서 초연됐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Lorin Maazel/BRSO - Schubert's Symphony No.9 'The Great'

Lorin Maazel, conductor

Symphonieorchester des Bayerischen Rundfunks

Prinzregententheater, München

2001.03.18

1악장: 안단테 -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서법으로 시작한다. 첫 부분에서 2대의 호른이 단독으로 주제를 연주하는 것이다. 이 같은 스타일은 후대에 슈만 교향곡 1번 ‘봄’이나 멘델스존 교향곡 2번 도입부에 계승되었다. 교향곡 8번 ‘미완성’도 그러하지만 이 주제가 포함돼 있는 동기가 1악장 제2주제, 2악장과 4악장의 제1주제, 3악장의 트리오 주제 등에 포함돼 있고, 전곡에 걸쳐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면서 전곡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대규모의 서주는 고전파적인 성격의 서주를 넘어서서 독립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고 하겠다. C장조와 같은 순수하고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 선율적이고 화성적인 부분이 모습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악장이다. 마지막 부분에는 피우 몰토(매우 더욱)로 템포를 빠르게 하여 등장하는 서주부 주제가 장대한 코다로 끝을 맺는다.

2악장: 안단테 콘 모토

A-B-A-B-A 형식으로 슈베르트의 초기 6개 교향곡과 동일한 형태의 느린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양식적으로는 밀도 있고 한층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제부는 저음현과 목관이 이어지는 선율로 휴양지 그문덴과 가스타인 지방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단조와 장조의 빈번한 교대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뉘앙스도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후 바순에 더블베이스가 이끄는 주제가 만들어지지만 첫 주제와 정서는 동일하다. 호른의 3도 하행에 의한 연결구를 두고 슈만은 “하늘의 천사가 숨어 있는 듯하다.”고 말한 바 있다. 후반부는 미묘한 변화를 주면서 마지막 부분에는 첫 주제가 반복돼 덧붙여진다.

3악장: 스케르초. 알레그로 비바체

베토벤과는 다른, 슈베르트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쓴 스케르초다. 단순하고 접근하기 쉬운 춤곡 성격을 스케르초 안에 잘 융화시켰다. 작은 3부 형식의 주요부는 대조적인 두 개의 악보로 구성돼 있다. 화성적으로 미묘한 차이가 돋보이는 것은 A장조 트리오에서 3도 관계의 조바꿈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슈베르트 특유의 유려한 선율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교향곡은 천사를 연상시키는 듯 유려한 선율로 가득 차 있다.

4악장: 알레그로 비바체

슈베르트는 자신의 교향곡 2번 4악장 등에서 보여준 바 있는 음형과 리듬의 오스티나토(일정한 음형을 같은 성부에서 같은 음높이로 계속 되풀이하는 기법) 처리를 소나타 형식과 근사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C장조와 A단조를 오고가는 제1주제에 포함돼 있는 두 개의 음형이 전체를 통해 쉬지 않고 반복되고 G장조의 음형적인 제2주제가 중복된 발전부, 재현부에서 반복되고 있다. 발전부에서는 제2주제와 관련된 새로운 소재가 중첩되며, 제1주제가 C단조로 다시 등장하고 Eb장조와 교차한다. 제2주제는 C장조 중에 재현되고 마지막에는 제1주제가 다시 연주된다. 간명하지만 장대한 코다는 마치 슈베르트 교향곡 전체의 피날레와 같이 감격적으로 다가온다.

 

추천음반

푸르트벵글러/베를린 필(DG)의 음반은 이 곡에 관한 한 초이스의 상위권에서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푸르트벵글러의 가장 빼어난 스튜디오 레코딩이다. 이 1951년 녹음은 슈베르트의 명곡을 따스하면서도 노래가 끊이지 않고 아름답게 형상화시켰다. 요제프 크립스/빈 필(Decca)의 연주는 슈베르트의 숨결이 생생한 빈의 분위기를 가장 잘 나타내준 명연이다. 1958년 녹음이면서 이상적으로 관현악의 밸런스를 구현해 LP시절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시종일관 구름 위에 떠서 연주하는 듯한 천상의 음악다운 숭고함을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크립스의 지휘가 일품이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시카고 심포니(DG, 1977)는 느린 템포 가운데서도 스코어 그 자체의 비경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준다. 줄리니 특유의 유려한 노래와 신사적인 기풍이 결합된 독보적인 해석이다. 귄터 반트/베를린 필(RCA)는 거장 브루크네리안 반트가 그 조상격인 슈베르트 해석에서도 진면목을 보여주는 음반이다. 15년 만에 베를린 필과 재회한 1995년 3월 실황으로 생동감이 넘치며 꿈틀거리는 펄스가 전곡을 관통하고 있다.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현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전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전 <객석> 편집장 역임.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누비길 즐겨 한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클래식>명곡 명연주 2011.03.21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6&contents_id=4771

 

 

 

Symphony No.9 in C major D.944 'The Great (Die Grosse)'

슈베르트 / 교향곡 9번 C장조 '더 그레이트'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Sawallisch/Wiener Philharmoniker 

 

Riccardo Muti / Wiener Philharmoniker (Scala-LIVE)

슈베르트의 9번 교향곡은 다른 C장조 교향곡인 6번

 

'Little C Major'(소교향곡)과 구분하기 위해 '그레이트'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데 전 슈베르트 교향곡에 비해 한차원 높은 힘과 무게감이 표현되어 있다. 이는 모든 9번 교향곡의 위대함에 걸맞으며, 제목만큼 장대한 선율로 꽉 찬 포만감에 젖게 한다.
특히 1악장은 첫부분에 호른이 솔로로 제시한 주제가 계속 변형되어 연주되어 가는데 끝에 치다를수록 다양한 악기가 합주되어 웅대한 선율을 뽐내 듣는이에게 희열을 보게 한다. 또한 4악장 피날레는 1악장부터 품고 있던 모든 힘을 쏟는 듯 명쾌하고 화끈한 악장이다. 이와 같은 '그레이트 교향곡'은 슈베르트 사후 10년이 지난 후에야 슈만에 의해 빛을 보게된다. 슈만은 원고를 라이프치히로 가져갔고, 그 곳에서 멘델스존에 의해 초연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스케치만 남아있는 '교향곡 D장조'(D936A, 1828년)를 제외하고는 슈베르트 최후이자 최대의 교향곡이다. 출판 당시인 1849년 시점에서는 '교향곡 7번'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까지 슈베르트 교향곡은 1~6번까지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7번째 교향곡 번호를 받았던 것이다. 1884~1885년 구 전집이 출판됐을 때에도 이 사실은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 후 단순한 스케치 상태였던 'E장조 교향곡'(D729, 1821년)을 어떻게 슈베르트의 작품 목록 속에 위치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불거졌다. 그래서 다시 작품의 성립 연대순으로 번호가 재배치 되었다. 따라서 성립 연대순에 따라 'E장조 교향곡'을 7번, '미완성 교향곡'을 8번, '더 그레이트 교향곡'을 9번으로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보편적으로 일컬어지는 슈베르트의 교향곡 번호로 정착되었다. 현재는 슈베르트 교향곡 중 '미완성 교향곡'과 함께 유명작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교향곡은 전에는 제7번으로도 불렸고, "더 그레이트(The Great)"라는 별도의 호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슈만이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잠들고 있는 비인의 벨링 묘지를 찾은 것은 1838년의 일이었다. 그 해는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지 11년,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10년째 되던 해였다. 그 때 슈만은 28세였다. 존경하는 대선배님들의 묘는 나란히 있었다. 그리고 베토벤의 묘에는 장미가 심어져 있었지만, 슈베르트의 묘에는 꽃 한 송이 없었다. 

 

슈만은 그 때의 일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근대의 예술가들 가운데서 가장 존경하는 이 두 사람의 예술가를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생존 중에 그들이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 즉 그들의 형제를 만나보기도 했다. 마침 슈베르트의 친형 페르디난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안 나는 묘지에서 나오는 길로 곧장 페르디난트를 찾아보기로 했다." 페르디난트는 동생 때문에 왔다니까 매우 반가워하면서, 슈만에게 동생의 유품을 이것 저것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맨 나중에 간직해 두었던 보물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책상 위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 있는 미발표의 초고였다.  순간 슈만의 눈은 그 초고에 고정 되었다. 슈베르트의 만년의 교향곡 제9번은 이렇게 해서 발견된 것이었다. 슈만은 페르디난트에게 초연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뒤에 그 초고를 즉시 라이프찌히로 보냈다. 라이프찌히에는 그 당시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지휘자로서 친구 멘델스존이 있었기 때문이다. 멘델스존을 비롯하여 악단 관계자들 은 그 초고를 받아 들고는 날듯이 기뻐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1839년 3월 21일, 멘델스존의 지휘로 역사적 초연이 이루어진 것이다.

 

슈베르트에게 있어서 마지막 교향곡에 해당하는 이 제9번은 그가 가난 속에서 세상을 뜨기 9개월 전에 작곡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1828년 3월이다. 슈베르트는 이 곡에 대해 상당한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에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이제 가곡을 그만 쓰기로 했네, 이제부터는 오페라와 교향곡에 주력할 작정일세,...."  이런 일은 좀 드문 일인데, 그는 이 곡이 완성되자 곧 초고를 가지고 오스트리아 음악협회에 그 상연을 부탁하러 갔다. 그런데 협회 돌대가리들은 그 상연을 거절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내용이 너무 꼬였고 거창하며, 게다가 너무 길다는 이유였다. 만약 베토벤이나 베를리오즈 같으면 흔쾌히 상연을 주선했을 것이다. 기질이 약한 슈베르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곡이 초연된 직후에 슈만은 "신음악시보(新音樂時報)에 "솔직히 말해서 이 곡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슈베르트를 안다고 할 수 없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슈베르트가 이제까지 세상에 내놓은 것을 염두해 둘 때, 지나친 찬사 같아서 수긍이 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교향곡을 한 번 들어 보라, 그 속에는 당당한 음악상의 작곡기술 말고도 갖가지 다채롭고 비할 데 없는 생명이 나타나 있으며, 도처에 깊은 의의가 담겨져 있으며, 각각의 소리가 날카로운 표현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슈베르트 고유의 로맨티시즘이 넘쳐 흐른다. 게다가 마치 장 파울의 4권으로 된 장편소설처럼 천국적으로 길다....." 라는 글을 실었다. 

 

이 제9번이라면 반드이 인용되는 것이 이 "천국적인 길이"라는 말이다. 분명히 이 교향곡의 규모는 크고 길다. 그러나 그 "천국적으로 길다"는 것은 단지 그 시간적 길이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지루함이 없이 계속되는 거룩할 만큼 아름답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제8번-미완성"과 이 "제9번"과의 사이에는 약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그 사이에 그는 인간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크게 성장했다. 이처럼 장대한 작품을 이렇다고 할 스케치도 하지 않고 단숨에 써내는 것만 보아도 그 성장을 짐작 할 수 있다.그런데 전작인 "미완성"은 아주 내성적이고 서정적인데, 이 "제9번"은 외향적이고 밝고 당당하며, 슈만도 지적하고 있듯이 전체적으로 로맨티시즘으로 넘치고 있다. 서두의 호른의 목가적 선율부터가 우선 그러한데, 이제까지의 교향곡에서는 엿볼 수 없었던 것이다.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베토벤이라는 거인이 길고도 당당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빈의 고전시대를 마감해 가고 있을 때, 슈베르트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 떠돌이 생활을 영위해 가며 선율미가 넘쳐 흐르는 작품들을 속속 써내고 있었다. 천재성이라는 점에서 볼 때, 슈베르트는 모짜르트에 못지 않으면서도 당시 빈의 음악계를 지배하고 있던 베토벤의 그늘에 가리어 생전에는 결코 빛을 보지 못한 채 31년의 짧은 생애를 마쳐야만 했다.

슈베르트 음악의 본질은 그 무궁무진하게 솟아 오르는 가락에 있다. 이러한 특성에 가장 완벽하게 제자리를 잡은 것은 그의 900여곡에 달하는 가곡이며, 따라서 가곡을 떼놓고서는 슈베르트를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흔히 '슈베르트는 관현악도 가곡처럼 썼고 베토벤은 가곡도 관현악곡처럼 썼다.'는 말은 이 두 작곡가가 음악적 본령이 어디에 있는가를 단적으로 풀이해 주고 있다.

슈베르트의 관현악 작품에는 확실히 가곡적이고 멜로디에 풍부한 악상이 넘쳐 흐른다. 31세라는 짧은 생애 동안에 남겨 놓은 9개의 교향곡 작품들 역시 이러한 윈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교향곡을 가곡처럼 음미할 때에 그 아름다움은 비로소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년의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같은 구축력이 강한 작품들을 써보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결국 삶의 여백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은 채 절필해야만 했다. 31세라는 나이를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음악사에는 슈베르트만한 업적을 남긴 작곡가가 없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우리의 가슴을 메이게 한다. 슈베르트가 음악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그 방대한 가곡에 있을 것이다. 슈베르트 없이 가곡을 생각할 수 없고 가곡을 얘기할 때 슈베르트를 떼어 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이루어져 이들 양자의 의미를 함축시키고 있다. 따라서 슈베르트 음악의 기본은 가곡에 입각한 가락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특수성을 기악곡이나 관현악곡에서도 그대로 침투되어 있어서 모든 메세지를 아름답게 노래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그 결과 '슈베르트에게 있어서 관현악곡도 가곡적이다' 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것은 '베토벤에게 있어서 가곡도 관현악적이다'란 말과 아주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 두가지 비유는 베토벤과 슈베르트라는 두 작곡가의 기질적 차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생관과 음악관을 모두 함축시킨 단적인 표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만년의 슈베르트는 가곡 위주의 작곡생활에서 크게 전향하여 대편성 교향곡이나 오페라에 몰두해 있었다. 특히 1821년에 손을 댄 E장조 교향곡 D.729가 제 1악장의 첫 부분만을 악보로 남기고 그 이하는 스케치에 그친 데다가, 곧 이어 착수한 여덟번째 교향곡 b단조 D.795도 2악장만으로 그쳐버린 '미완성'이어서 그는 대편성 교향곡에 대한 작곡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1823년 슈베르트가 쓴 편지에 의하면, 그는 이미 소편성의 실내악적 교향곡은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다. 또한 뒤따라 작곡된 두 곡의 4중주, 그리고 관과 현을 위한 8중주 등도 대편성 교향곡을 쓰기 위한 연습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이 편지는 시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슈베르트가 의도하는 대편성 교향곡의 작곡은 그의 뜻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심이 실행에 옮겨진 것은 1828년 3월, 죽음을 불과 3개월 밖에 남기지 않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가곡은 이제 그만 쓰겠다'고 스스로 심경을 밝힌 뒤에 본격적인 교향곡을 쓰기 위해서 벼르고 벼르다가 착수한 작품이었던 만큼 슈베르트는 이 교향곡을 마무리하는 데 온 힘을 다 바쳤다. 그 결과 착수한지 한 달만에 '장대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교향곡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이 곧 <그레이트>라고 불리는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C장조인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베토벤의 교향악적 정신을 이어 받기 위한 생각으로 슈베르트는 이 대곡에 손을 댔지만, 결과는 베토벤이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로까지 접근시켜 가지는 못하고 말았다. 오히려 그가 7년전에 써 두었던 제8번 <미완성>의 세계로 더더욱 파고 들어가 그것을 대폭 확장시켜 버린 결과가 되고 말았다. 바로 거기에 슈베르트적 관현악법의 장점이자 한계점이 공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이 작품이 베토벤의 교향악적 세계로까지 진입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 이후 슈베르트를 뒤따르는 낭만주의 교향곡 작곡가들에게 하나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히 슈베르트의 관현악 세계를 총결산하는 대작업이었고, 어찌보면 슈베르트라는 하나의 인간을 종결짓는 클라이막스이기도 했다. 슈베르트는 이 곡을 쓰고 난 9개월 후인 1828년 12월에 31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교향곡 제9번의 1, 2, 3악장은 연이어 나타나는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찼다가 4악장에 이르러 소나타 형식의 장대한 악장으로 발전한다. 극것이 힘차고 생명력이 넘치는 격렬함으로 고양되는 데서 베토벤적 의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슈베르트의 관현악이 내뿜는 정신의 열기는 한도를 갖고 만다. '고뇌를 뚫고 환희로' 끝없이 비상하는 베토벤이 아니라 적당한 선에 멈추어 서서 스스로 자지러지는 슈베르트의 특유의 격렬함이다.

당초 이 곡은 빈악우협회에서초연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로부터 악보를 받아 본 빈악우협회는 이 곡이 너무 장황하고 길다는 이유로 연주를 거부했다. 본래 섬세한 기질을 타고나 심성이 여리기만 했던 슈베르트는 악우협회의 결정에 한 마디 불평도 못하고 악보를 되돌려 받은 채 연주를 포기하고 말았다. 만약에 베토벤이었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악우협회와 맞서서 연주를 강행했을 테지만 슈베르트는 그렇지를 못했다. 이 곡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슈만의 공이 있었다. 이 곡이 작곡된 지 10년 후인 1838년, 그러니까 슈베르트가 31세의 짧은 생을 마친지 10년 후인 당시 28세의 청년 작곡가 슈만은 빈으로 가서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묻혀 있는 베링중앙묘지를 참배했다. 슈만이 가장 존경했던 이들 두 선배 작곡가는 그가 한번도 상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슈만으로서는 무척 감개가 깊었다. 비록 그들이 이미 땅에 묻혀 말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진 해후였으나, 슈만은 오랫동안 잠재해 있던 마음 속의 열망을 조용히 풀어헤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선배 작곡가의 무덤을 참배하고 나서 곧 슈베르트의 형인 페르디난트의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상당량의 슈베르트 유고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슈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얻어 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간 것이다. 슈만의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슈만의 방문을 받은 페르디난트는 동생 슈베르트의 유품들을 이것 저것 뒤적이다가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묶여 있는 악보 뭉치 하나를 보여 주었다. 그 악보를 받아 본 슈만은 깜짝 놀랐다. 아직까지 발표되지 않은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C장조였기 때문이었다.

슈만은 페르디난트로부터 이 곡을 초연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후 악보를 즉시 멘델스존에게 보냈다. 당시 멘델스존은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슈만과는 각별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악보를 받은 멘델스존은 곧 연습에 착수하여 다음 해인 1839년 3월 21일 역사적인 초연이 이루어진다. 그 자리에는 물론 슈만도 참석해 있었고 페르디난트도 빈에서 달려와 동생의 마지막 교향곡의 초연을 감명 깊게 지켜봤다. 작곡된 지 꼭 11년 만의 일이었다. 그렇게해서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차츰 여러 교향악단들에 의해 연주 레퍼토리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아름답고 리드미컬한 여운은 때때로 우수를 불러 오기도 하지만, 어느 곳에서나 슈베르트적 명선율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낭만주의 교향곡 역사의 첫페이지를 장식하는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모든 연주자와 애호가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