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거리에서 사람들이 제게 뉴욕필하모닉의 야심찬 프로그램을 통해 평생 모를 수도 있었던 음악을 소개해줘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곤 합니다. 2009년 뉴욕필 상임지휘자로 취임하면서 관객들이 우리가 선정한 프로그램, 그리고 우리가 충분히 연주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랐지요. 지난 5년간 그런 신뢰가 뚜렷하게 보여 무엇보다 흐뭇합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뉴욕필하모닉 상임지휘자 앨런 길버트(47·사진)가 5년 만의 내한무대에서 ‘야심찬’ 현대음악을 선보인다.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6, 7일 열리는 내한공연에서 앨런 길버트 지휘의 뉴욕필은 베토벤·차이콥스키 등 전통 레퍼토리와 거슈윈·번스타인 등 미국적 레퍼토리를 선보인다. 문화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그는 “상임지휘자로서 오케스트라 공연의 정의를 확장시키면서, 이 시대 주목해야 할 흥미로운 음악가, 작곡가들과 함께하는 예술적 연대를 중시해왔다”고 뉴욕필의 지난 4년을 밝혔다. 그러한 사례로 그는 관객들을 에워싸 연주한 매그너스 린드베리어의 ‘크래프트’, 뉴욕발레단 수석무용수 사라 메언즈가 출연한 발레 비디오아트와의 융합무대였던 스트라빈스키의 ‘어느 무용가의 꿈’ 공연을 지목했다. 세계 클래식음악의 중심에서 동시대 작곡가의 곡 등 다양한 음악을 활발하게 해석하고 연주해온 뉴욕필은 서울에서도 유럽의 고전음악 외에 역동적인 20, 21세기 미국 작곡가 작품을 연주한다. “이번 공연은 한국 관객이 뉴욕필의 폭넓은 연주를 접할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입니다. 오케스트라가 어떤 곡이든 열정과 헌신으로 통찰력 있게 연주한다는 걸 보여주는 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뉴욕필의 상주작곡가 크리스토퍼 라우즈, 음악감독이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곡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는 특히 “상주작곡가 라우즈와 함께 두 번째 시즌을 맞아 투어에서 예술적 파트너십을 선보일 수 있어 자랑스럽다”고 덧붙였다. 첫날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피아노 김다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을, 이어 둘째 날 라우즈의 ‘랩처’, 거슈윈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랩소디 인 블루’(피아노 오조네 마코토)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시 파리의 미국인’, 번슈타인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교향적 무곡’을 연주한다. 앨런 길버트는 줄리어드음악원 출신. 뉴욕필 전현직 단원인 바이올리니스트인 부모를 따라 뉴욕필 연습실에서 성장한 ‘뉴욕필 키즈’로 뉴욕필을 이끌고 있다. 부친(마이클 길버트)은 2001년 뉴욕필에서 은퇴했고, 현재 뉴욕필 단원인 일본인 어머니(다케베 요코)는 이번 투어에도 참가한다. (신세미 기자 ssemi@munhwa.com) |
뉴욕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은 미국 태생의 Ureli Corelli Hill이 이끈 지역 음악인들에 의해 1842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교향악단으로서 빈, 베를린 필과 함께 세계 3대 교향악단으로 불려지고 있다. 뉴욕 필하모닉은 미국 역사의 70% 가까운 세월의 기간 동안 지속적인 활동을 하면서 미국인들의 음악적 삶을 이끌며 발전시켜왔다. 2002-03년 뉴욕 필하모닉은 160번 째 기념일을 맞이 하였다. 뉴욕 필하모닉은 연간 180여 회에 이르는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 애버리 피셔 홀(Avery Fisher Hall) 및 링컨 센터(Lincoln Center)에서 시즌 9월부터 다음 시즌 6월 사이에 열린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초창기부터 주요 작품들을 초연하는 공연들을 통해 명성을 얻 어가기 시작하여 당대의 새로운 음악을 선보이는 작업을 통해 그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그 예로 드보르작의 교향곡 No. 9, '신세계로부터', 지휘자가 키보드를 치는 형식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No. 3, 거쉬윈의 Concerto in F; Copland의 Connotations, 베토벤 교향곡 No. 8과 9의 미국 초연과 브람스 교향곡 No.4의 미국 초연 등이 있다. 이러한 개척적인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 뉴욕 필하모닉은 현대의 주요 작곡가들의 곡을 정기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2002-2003 시즌을 사전 홍보하는 기간에 뉴욕 필하모닉은 2001년 9월 11일을 추모하는 존 아담스(John Adams)의 Transmigration of Souls로 그 시작을 알렸다.
뉴욕 필하모닉을 이끈 작곡가와 지휘자들로는 Theodore Thomas, Tchikovsky, Dvorak, Mahler (지휘자, 1909-11), Klemperer, Richard Strauss, Megelberg (지휘자, 1922-30), Furwangler, Toscanini(지휘자, 1928-36), Stravinsky, Koussevitzky, Copland, Walter (음악 고문, 1947-49), Mitropoulos (지휘자, 1949-58), Szell (지휘자, 1969-70), Tennestedt, 그리고 Leinsdorf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있다. 이 무수한 세대를 거친 뉴욕 필하모닉의 협연자 리스트에는 역시 훌륭한 기악 연주자, 성악가들이 대거 망라되어 있다.
로린 마젤은 2002년 9월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로린 마젤은 1991년부터 2002년 여름까지 지휘자로 있으며 2002년 6월 1일 명예 지휘자라는 존칭을 부여 받았던 쿠르트 마주어의 뒤를 이어 2002년 9월부터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 겸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전의 지휘자로는 주빈 메타(Zubin Mehta, 1978-91)와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1971-77)가 있으며, 1958년부터 지휘자로 있었던 (고) 레오나르드 번스타인에게는 1969년 뉴욕 필하모닉의 종신 지휘자라는 평생의 타이틀이 주어졌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Leopold Damrosch 지휘 아래 1882년 첫 미국 내 투어를 시작하였다. 1928년 뉴욕의 심포니 소사이어티에 합류한 후로 뉴욕 필하모닉은 Arturo Toscanini 지휘 아래 첫 유럽 투어를 가졌다. 오늘날까지 뉴욕 필은 5개 대륙, 57개 국가의 412개의 도시에서 공연을 가졌다. 1980년부터 Citibank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16회에 이르는 해외 투어를 스폰서 하였으며, 85개 도시와 40개 국가의 공연을 지원하였다. 이것은 유럽(1980, 1985, 1988, 1993, 1995, 1996, 2000), 남아메리카 (1982, 1987, 1992, 1997, 2001), 그리고 아시아 (1984, 1989, 1994, 1998)를 포함하고 있다. 뉴욕 필하모닉은 1980년 이후 미국 투어를 7회에 걸쳐 진행하였으며, 이는 Citibank가 후원한 1999년 북미 투어를 포함하고 있다.
뉴욕 필하모닉은 라디오, 텔레비전, 그리고 다른 방송 매체를 통해서도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으며 동시에 미국 통신 역사의 틀을 잡는데 도움을 주었다. 보다 넓은 관객층에게 다가가겠다는 오케스트라 전통의 공약을 지키기 위하여 필하모닉은 1922년 콘서트를 생방송으로 방송한 첫 오케스트라 가 되었다. 미국 전역을 통해 방송된 1930년의 라디오 방송은 그 중 하나이다. 1966년까지 생방송을 진행한 뉴욕 필하모닉은 테이프의 형태로 라디오 방송이 바뀌게 되면서 생방송을 멈추게 되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77년 다시 텔레비전 생방송의 전파를 타고 국가적인 규모의 방 송을 정기적으로 선보이는 미국 최초의 교향악단이 되었다.
1917년 첫 음반을 녹음한 후로 뉴욕 필하모닉은 대략 2000여 장의 앨범을 내놓게 되었다. 현재 500장 이상의 음반이 입수 가능하며, 뉴욕 필하모닉(New York Philharmonic)의 음반은 주요 음반 라벨사인 Deutsche Grammophon, London, New World, RCA, Sony Classical, 그리고 Teldec에서 공 급하고 있다 Teldec,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와 오케스트라의 대규모 협조로 제작된 두 개의 디스크는 '올해의 음반' 상을 스테레오 리뷰(Stereo Review)로부터 수여 받았다. 1997년 필하모닉은 자체의 성공적 라벨인 New York Philharmonic Special Editions를 만들었고 오케스트라의 기록 중 역사적인 라디오 방송(1923-87)을 모은 10장의 음반을 발매하였다. 이후로는 The Mahler Broadcasts 1948-1982가 뒤를 이었으며 이것은 12장의 CD 모음집으로써 라디오 생방송을 통해 이루어진 말러(Mahler)의 9개 교향곡 전곡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미국 음악과 오케스트라의 관계를 탐험할 수 있는 10장의 음반도 있다. 2000년에는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이 이끄는 필하모닉이 연주한 Bernstein LIVE와 스테판 손하임(Stephen Sondheim)의 Sweeny Todd를 10장의 CD인 Live at New York Philharmonic을 선보였다. 가장 최근 발매된 특별 판은 2001년 10월에 출시된 쿠르트 마주어 지휘의 10장의 CD 모음집이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탄생은 뉴욕 필하모닉의 관객 층을 더욱 넓혀 주었다. 오케스트라는 20년이 넘도록 젊은 연주자들의 콘서트를 정기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1976년부터 PBS에서는 생방송으로 뉴욕 필하모닉의 링컨 센터(Lincoln Center)에서의 연주가 자주 방영되었다. 1996년 11월 14일에 는 번스타인의 1943년 지휘 데뷔 공연이 인터넷 배포를 위하여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통해 CD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로써 뉴욕 필하모닉은 교향악단으로서 새로운 기술적 시도의 제작과 발매를 처음으로 시행한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1965년 뉴욕 필하모닉은 시리즈로 공원에서의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취지의 공연이 개최된 이후로 1,3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다. 1986년 7월 5일 뉴욕 필하모닉 자유 주말 콘서트는 클래식 음악 콘서트 사상 최대 관객인 약 80만의 청중을 끌어들이는 기록을 낳았다. 2002년 2월 7일 뉴욕 필하모닉은 어느 세계적 오케스트라도 따를 수 없는 획기적인 13,500번째의 콘서트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2003년 2월, 뉴욕 필하모닉은 교향악단의 음악 산 업과 미국 문화에 대한 높은 기여도를 인정받아 레코딩 아카데미(The Recording Academy)로부터 Trustees상을 수상하였다. 뉴욕 필하모닉은 45회 그래미 어워드(Grammy Awards)에서 교향악단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연을 하였는데, 이것은 뉴욕 메디슨 스퀘어(Madison Square) 정원의 텔레비전을 통해 전세계로 방영되기도 하였다.
뉴욕 필하모닉은 70년 이상 머무른 카네기 홀(Carnegie Hall)에서 링컨 센터(Lincoln Center)로 그 상주 건물을 옮기게 되었다. 건물은 훗날 1976년 공연장의 재건축을 위해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 사람에 대한 보답과 감사의 표시로 애버리 피셔 홀(Avery Fisher Hall)이라고 개명하였다
1961년 3월 25일 생, 일본
재즈 음악에 관심을 가져 미국의 버클리 음대로 진학하였다.
1993년 부터 그의 스승인 게리 버튼이 조직한 게리 버튼 그룹에 참가하였으며 그동안 15장의 앨범 제작에 참여 하였다.
이후로도 게리버튼과 함께 밴드나 듀엣 등 다양한 형태로 연주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직접 마코토 오조네 트리오를 조직해 연주하고 있다.
일본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실력을 알리고 있는 베테랑 피아니스트이다. 특히 Branford Marsalis나 John Scofield같은 거장들과도 협연을 해왔으며 특히 Gary Burton의 든든한 지원하에 그와의 듀엣 음반도 발표하면서 국내에서도 꽤나 많은 관심을 받았던 뮤지션이다.
학력
| ||||||
경력 |
---|
2009 ~ |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
---|---|
2004 ~ | 함부르크 북독일방송교향악단 수석객원지휘자 |
2003 ~ 2007 | 산타페 오페라 음악감독 |
2000 ~ |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 |
1995 ~ |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부지휘자 |
1993 ~ |
산타페 오페라 오케스트라 부악장
|
160여년 역사상 첫 뉴요커 출신
줄리아드서 수학 ‘뉴욕필 키즈’
로린 마젤의 뒤를 잇는 앨런 길버트(Alan Gilbertㆍ42)를 두고 사람들은 가장 ‘뉴욕 필하모닉적’인 지휘자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다.
1967년생인 앨런 길버트는 뉴욕 필의 160여 년 역사상 첫 뉴요커 출신의 음악감독이다. (‘뉴욕 필의 아이콘’ 레너드 번스타인은 메사추세츠주 태생이며, 다른 지휘자들은 모두 유럽 출신이었다.)
게다가 앨런 길버트의 미국인 아버지와 일본계 어머니 모두 뉴욕 필의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이라, 그는 어려서부터 뉴욕 필 연습실을 제 집 드나들 듯했다. 아버지 마이클 길버트(바이올린)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음악감독으로 있던 1971년 뉴욕 필에 입단해 2001년 은퇴했고, 일본인 어머니 다케베 요코(맨해튼 음대 교수)는 1979년부터 현재까지 뉴욕 필 제1바이올린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이종 사촌 다케베 미키는 뉴욕 필 사무국의 운영감독이다.
앨런 길버트는 커티스 음악원과 하버드대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전공하고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지휘를 공부한 뒤 28세인 1995년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부임했다. 이후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수석 지휘자 겸 예술고문, 산타페 오페라 음악감독, 함부르크 북독일방송교향악단 수석 객원 지휘자를 거쳤다.
뉴욕 필은 길버트와 2009~2010년 시즌부터 2014~2015년 시즌까지 5년간 계약을 맺었다.
지휘자 앨런 길버트와 e메일 인터뷰
-당신의 부모님은 모두 뉴욕필하모닉 단원이었는데, 5년 전 한국에도 왔던 당신의 어머니는 여전히 현역인가? 또 뉴욕필하모닉의 대선배인 두 분은 당신에게 어떤 음악적 조언을 하는가?
“두분 모두 여전히 활동적이다. 어머니는 지금도 단원으로 활동하신다. 뉴욕필에서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연주하셨던 아버지는 지금도 내 연주회를 늘 찾아오시면서 당신의 관점과 비평을 들려주신다. 그뿐 아니라 두 분은 내 아이들을 돌봐주시는 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나로서는 무척 감사한 일이다.”
-2009년 취임 이후 5년이 지났다. 그동안 음악감독으로서 중요한 숙제가 무엇이었나? 당신은 뉴욕필하모닉에 어떤 변화를 꾀했다고 생각하나?
“처음이나 지금이나 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확장해보려는 욕구가 있다. 관객들을 에워싸고 연주하는 매그너스 린드베리어의 음악 ‘크래프트’, 여러 장르가 혼합된 리게티의 음악 ‘르 그랑 마카브레’, 또 발레와 비디오아트가 융합된 연주회 같은 것들을 예로 들 수 있다. 나는 이 시대의 흥미로운 음악가와 예술적 연대를 이루고 싶다. 또 언제나 중요한 목표는 관객과 신뢰를 쌓는 것이다. 5년이 지난 지금, 그 신뢰를 뚜렷하게 느낀다.”
-과거의 전통적인 마에스트로들과 달리 오늘날 지휘자의 상은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지휘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당신이 지휘자로서 지닌 장점을 어떻게 자평하는가?
“음악감독의 일은 지휘 단상에서만 이뤄지는 것 같지 않다. 때로는 악보에서 물러나서, 오케스트라가 무엇인지, 이 오케스트라가 관객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또 행정감독, 후원자들, 스태프들, 또 단원들과 프로그램에 대한 신념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때로는 위험 부담이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더라도, 오케스트라의 모든 구성원이 왜 그 일을 우리가 하는지를 같이 이해하고 경험해야 한다. 내 리더십의 핵심은 자연스러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냉담한 사람은 못되는 것 같다. 다가가기 힘든 마에스트로 스타일도 아니다. 나는 단원들과 최대한 소통하려고 노력한다.”(경향신문.문학수기자)
거슈인/랩소디 인 블루 듣기/http://blog.daum.net/scam416/12409811
Gershwin, Rhapsody in Blue
거슈윈 ‘랩소디 인 블루’
George Gershwin
1898-1937
1924년 2월 12일 뉴욕의 에올리언 홀, ‘현대음악의 실험’(An Experiment in Modern Music)이라는 제목이 붙은 음악회에서 <랩소디 인 블루>가 초연되었다. 거슈윈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폴 화이트먼이 지휘하는 그의 악단이 연주를 맡았던 <랩소디 인 블루>는 피아노 솔로와 재즈 밴드를 위한 곡으로, 클래식 음악의 요소와 재즈로부터 받은 영향을 결합한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았다. 한때 변진섭이 노래한 가요 ‘희망사항’(노영심 작사 작곡) 마지막 부분,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도 등장해 친숙한 곡이다.
‘재즈 왕’이란 별명을 지녔던 오케스트라 지휘자 폴 화이트먼은 1922년 거슈윈의 1막짜리 오페레타 <블루 먼데이>(Blue Monday)를 보고 거슈윈의 재능을 발견했다. 화이트먼은 거슈윈에게 상업적으로는 실패작이었던 이 작품을 새롭게 편곡할 것을 권유했다. 거슈윈 자신도 편곡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폴 화이트먼과 그의 오케스트라는 그보다 몇 개월 전인 1923년 11월 1일 에올리언 홀에서 프랑스계 캐나다 가수인 에바 고티에와 클래식과 재즈를 결합한 실험적인 콘서트에서 꽤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성공에 고무된 폴 화이트먼은 좀 더 야심적인 시도를 감행하기로 하고 거슈윈에게 ‘협주곡 형식의 재즈 작품’을 의뢰하며 1924년 2월에 무대에 올리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거슈윈에겐 여전히 작품을 편곡할 시간이 없었다.
협주곡 형식의 재즈 작품을 작곡하다
1924년 1월 3일, 맨해튼 브로드웨이에서 조지 거슈윈과 버디 드 실바가 당구를 치고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조지 거슈윈의 형인 아이라 거슈윈은 1월 4일자 <뉴욕 트리뷴>지를 읽고 있다가 어느 대목에 시선이 머물렀다. ‘미국 음악이란 무엇인가?’(What is American Music?)라는 제목으로 펼쳐진 화이트먼의 콘서트 리뷰 기사였다. 마지막 단락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조지 거슈윈은 재즈 협주곡을 작곡 중이고, 어빙 벌린은 싱커페이션(당김음)을 쓴 교향시를, 빅터 허버트는 <미국 모음곡>을 작곡하고 있다.” “이봐, 조지, 이것 좀 보라구. 지금 재즈 협주곡 작곡하고 있는 것 맞아?”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곡가 조지 거슈윈. 재즈와 클래식의 독창적인 결합을 시도했다.
다음날 화이트먼과 통화하면서 거슈윈은 화이트먼의 라이벌인 빈센트 로페스가 재즈와 클래식을 융합하는 자신의 실험을 표절해서 선수를 치려고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거슈윈은 마침내 작품을 쓰기로 결심했다. 남은 시간은 단 5주. 거슈윈은 서둘러 작품을 썼다.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랩소디 인 블루>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1931년 거슈윈은 그의 첫 전기 작가인 아이작 골드버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기차 안이었다네. 열차 바퀴가 선로 이음새와 마찰하는 덜컹거리는 소리는 종종 작곡가들에겐 좋은 자극이 되지. 종종 큰 소음이 나는 가운데서 음악을 듣곤 하네. 거기서 갑자기 <랩소디 인 블루>의 구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번쩍 하고 떠올랐지. 마치 악보에 적혀 있는 것 같았다네. 다른 주제는 어떤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 주제 선율은 이미 마음에 있었고 전체로서의 작품을 파악하려고 했다네. 그건 마치 미국을 묘사하는 음악적 만화경이나 다름없었지. 거대한 용광로와 같은,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미국적인 기운이랄까. 블루스라든지 도시의 광기 같은 것 말일세. 보스턴에 도착하기도 전에 내겐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계획이 서 있었던 거야.”
Andrew Armstrong, piano
Maxim Eshkenazy, conductor
Bulgarian National Radio Symphony Orchestra
FORTISSIMO FEST 2010.09.10
미국을 묘사하는 거대한 음악적 만화경, 미국적인 기운
1월 7일 거슈윈은 작곡을 시작했다. 원래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이었던 이 작품에 붙였던 제목은 ‘아메리칸 랩소디’였다. ‘랩소디 인 블루’라는 명칭은 형 아이라 거슈윈이 조지에게 제안한 것으로, 아이라 거슈윈은 미국의 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전시회에서 <검은색과 금색의 녹턴: 떨어지는 불꽃>, <회색과 검은색의 구성>(‘화가의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작품) 등을 관람하고 명칭이 떠올랐다고 한다. 몇 주 뒤 거슈윈은 작곡을 마치고 화이트먼의 편곡자 퍼디 그로페(Ferde Grof?)에게 넘겼다. 훗날 <그랜드 캐년 모음곡>으로 유명한 작곡가가 되는 그로페는 초연을 불과 여드레 앞둔 2월 4일 오케스트레이션 작업을 마쳤다. <랩소디 인 블루>는 1924년 2월 12일, 폴 화이트먼과 그의 오케스트라(Palais Royal Orchestra)가 ‘현대음악의 실험'(An Experiment in Modern Music)이란 제목으로 에올리언 홀에서 개최한 오후 콘서트에서 초연됐다. 초연은 화이트먼 밴드에 객원 현악 주자들을 보강한 가운데 조지 거슈윈의 피아노 연주로 진행됐다. 초연 악보에서 거슈윈은 화이트먼과 합의하여 1페이지 가량을 비운 채 진행했다. 그로페가 쓴 총보에도 ‘(피아니스트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 연주를 계속한다’는 부분만 적어 놓았다. 이 공백 부분을 거슈윈은 즉흥으로 연주했는데, 공연이 끝난 이후에도 피아노 즉흥 연주 부분을 따로 적지 않았기 때문에 초연 당시 <랩소디 인 블루>가 어떻게 연주됐는지 정확히 아는 것은 힘들게 되었다.
<랩소디 인 블루>는 미국적인 기운, 블루스, 도시의 광기 들을 표현한 음악이다. 사진은 맨해튼의 스카이라인.
그렇다면 왜 콘서트 명에 ‘실험’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화이트먼에 의하면, 당시 실험은 클래식 음악 평론가와 지식인들 앞에서 하는 프리 콘서트 렉처(공연을 앞두고 미리 작품에 대해 해설하는 강의)를 위한 것으로 “순수하게 교육적인 목적”을 띄고 있었다. “대중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이해하고 교향곡과 오페라를 즐기게 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하기 위한 것, 쉽게 말해 클래식 음악 대중화를 위한 시도였다. 상당히 긴 프로그램이었다. 독립된 악장 수만 약 26개에 이르고 11개의 섹션으로 구분되었다. ‘재즈의 진정한 양식’이나 ‘대비: 정통 기보법과 즉흥연주’ 등등 각기 붙은 제목들도 다양했다. 거슈윈의 작품은 뒤에서 두 번째 순서에 소개됐다.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바로 전이었다. 당시 에올리언 홀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많은 작품들이 서로 비슷비슷하게 들렸고, 홀의 환풍기도 고장 난 상태였다. 청중들은 점차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랩소디 인 블루>의 도입부인 글리산도(음에서 음으로 미끄러지듯이 연주하는 것)로 연주하는 클라리넷 선율이 들려왔다. 청중들의 눈은 갑자기 초롱초롱해졌다. 작품은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오늘날까지도 인기를 잃지 않고 있다. 이 도입부의 유명한 클라리넷 글리산도는 리허설 중에 탄생했다고 한다.
백만 장 넘게 팔려나간 음반, 클래식 대중화를 시도한 ‘실험’
화이트먼 밴드의 클라리넷 연주자인 로스 고먼이 연습의 오프닝 부분에서 거슈윈에 대해 장난하는 의미로 유머러스한 터치를 가미해서 연주했던 것. 거슈윈은 이에 호응하여 고먼에게 오프닝 부분의 연주를 부탁하며 “좀 더 울부짖는 듯이 연주해줘.”라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1927년 말까지 화이트먼의 악단은 <랩소디 인 블루>를 84차례나 연주했다. 레코딩은 백만 장이 넘게 팔려나갔다. 나중에 화이트먼은 이 작품을 아예 악단의 테마 곡으로 삼아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랩소디 인 블루>만 빼고”는 이 프로그램의 슬로건이었다. 한편,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누구보다도 이 곡을 좋아했지만 하나의 작품으로서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번스타인은 이 곡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하나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각각의 서로 붙은 악절을 묶은 것에 가깝다. 그러나 주제 선율은 탁월하다. 영감이 느껴지고,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상에서 차이콥스키 이후 최고의 천부적인 멜로디들이 아닐까. 그러나 작곡가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다른 문제다. <랩소디 인 블루>는 하나하나의 악절이 필수불가결하게 수립돼 있다고 볼 수 없다. 몇 개의 악절을 삭제한다고 해도 예전과 다름없이 진행될 수 있는 곡이다. 5분짜리로 만들 수도, 12분짜리로 만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렇게 연주가 되고 있으며 그들 모두가 <랩소디 인 블루>이다.” ▶피아노 앞에 앉은 프랑스의 작곡가 라벨(가운데)과 거슈윈 (맨 오른쪽). 거슈윈은 라벨을 존경해 자신의 스승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공연차 미국에 왔을 때 거슈윈은 자신의 스승이 되어 달라고 라벨에게 요청했다. 라벨은 “당신은 저절로 샘처럼 솟아나는 듯한 멜로디를 가진 사람이다. 일류의 거슈윈이 되는 편이 이류 라벨이 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고 거절한 일화도 유명하다. 거슈윈의 천부적인 멜로디에는 20세기 거장 지휘자 라벨도 공감했던 것이다. 초연 당시 ‘재즈 왕’이라 불렸던 폴 화이트먼은 이 곡을 재즈라고 선전했지만, 훨씬 다양한 요소들이 클래식 음악에 스며들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는 <랩소디 인 블루>를 클래식 음악으로 보아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글 류태형(음악칼럼니스트) 월간 <객석> 편집장 역임, 현재 (재)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거장들의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이 반복되는 삶이 마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다고 생각한다.
추천음반 먼저 추천하는 음반은 역시 번스타인 지휘, 피아노 연주다. 컬럼비아 심포니(CBS/Sony)와 LA필과의 녹음(DG) 중 소니 쪽이 날렵한 측면에서 낫다. 프레빈 녹음 3종 가운데 피츠버그 심포니와 함께 한 연주(Philips)도 좋다. 재즈에 재능이 있는 프레빈의 연주는 폼을 잡기보다는 곡을 순수하게 해석하고 있다. 르웬탈의 피아노에 오스카 대넌이 지휘한 음반(Chesky)은 마치 뉴욕의 고급 레스토랑 같은 분위기다. 얼 와일드와 피들러가 협연한 보스턴 팝스 연주(RCA/Sony Music)는 미국적 유머와 여유를 느낄 수 있다.
An American in Paris 거슈인 / 파리의 아메리카인 George Gershwin 1898∼1937 Nathaniel Shilkret, Cond / Victor Symphony Orchestra |
'랩소디 인 블루'와 'F조의 피아노 협주곡'의 성공으로 화려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거슈윈이 파리를 방문하여 작곡한 교향시이다. 화려한 파리 거리를 산책하는 촌뜨기 미국인의 놀람과 향수를 그린 작품으로 선율미와 색채감이 돋보이고 있다. 곡은 우수의 블루스, 챨스톤풍의 주제, 첫머리의 프랑스풍의 유려한 선율, 파리의 클랙슨 소리 등을 독자적 음악 어법을 통해 교묘하게 표현하였다. 1928년 봄 유럽 악단의 실정을 살피기 위해 떠난 파리 여행의 인상을 바탕으로 완성한 곡으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위촉을 받아 작곡했다. 전체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미국인의 눈에 비친 파리 거리의 정경을, 2부는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느끼는 블루스풍의 향수를, 3부는 다시 화려한 거리를 산책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
|
거슈윈 Gershwin, George 1898~1937 미국의 작곡가. 유태계로 부모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와서 뉴욕에 정착하였고 그는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1914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뉴욕의 경음악출판사의 피아노 연주자로 취직하였다.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 못하여 처음에는 대중적 경음악 작곡가로 출발하였고 1919년 뮤지컬 코메디 《La La Lucille》를 작곡하여 성공하였다. 이후 1924년 피아노 협주곡 《랩소디 인 블루》를 작곡함 으로써 재즈와 클래식을 결부한 교향악적 재즈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때까지 순음악 분야에는 지식이 부족하였으나 뉴욕 교향악단에서 그에게 협주곡을 의뢰하여 본격적으로 고전형식을 공부하게 되었다. 1931년에 《그대 위해 부르리라》로 퓰리처 상을 받았으며 1934년에는 남부의 흑인 생활을 주제로한 최초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를 작곡하였고 이후 할리우드에서 영화음악을 작곡하며 지냈으나 1937년 젊은 나이에 뇌종양으로 세상를 떠났다. 그의 작품의 특성은 작곡의 세밀한 테크닉이나 구성력에는 부족한 점이 있으나 블루스나 래그타임, 또는 유대음악의 요소를 교묘히 채용하여 경음악 작곡가로 닦는 선율적 재능을 바탕으로 하여 그 당시 미국인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당시 유럽의 작곡가 라벨에게 사사받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그의 작품이 유럽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대표작품에 《피아노 협주곡 F장조》, 관현악곡 《파리의 미국인》, 오페라《포기와 베스》 등이 있다. 거슈윈은 현대 음악이라 일컫어 지는 20세기 전반에 있어서 미국적인 성격과 수법을 가장 잘 발휘시킨 작곡가이다. 그는 유대계의 러시아 이민인으로서 가난한 장사꾼의 아들로 뉴욕 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12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였으며 13세 때에 화성학을 공부하였다. 16세 때에는 고등학고를 중퇴하고 뉴욕에 있는 리믹 악보 출판사의 피아니스트로서 손님들에게 피아노를 쳐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유행가를 작곡할 정도로 공부를 계속했던 것이다. 19세 때에는 극장의 쇼 같은 데서 일한 적도 있었는데, 21세 때 뮤지컬 코미디 [라 라 루실 La La Lucille]을 써서 크게 성공하였다. 이렇게 행운의 문은 열려 그가 24, 25세 때에는 제1급에 속하는 가요 작곡가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자 당시 재즈왕 화이트먼이 거슈윈의 재능을 인정하고 심포닉 재즈를 작곡할 것을 권했다. 마침내 [랩소디 인 블루]를 1924년에 작곡하여 절찬을 받았으며, 악단에 데뷔했던 것이다. 거슈윈은 그 때까지 순음악의 방면에는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화성을 공부했다. 뉴욕 교향악단에서 그에게 협주곡을 부탁했기 때문에 고전 형식을 공부해 가면서 작곡을 했다. 1925년 봄에 그는 파리를 여행한 바 있는데, 그 곳에서 [파리의 미국인]이란 작품을 발표하여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35년에는 오페라 [포기와 베스]를 작곡하여 절찬을 받는 등 그는 이제 미국 작곡계의 커다란 인물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서민적인 음악의 이디엄을 간직했으며 거기에 생생하고 자발적인 멜로디와 리듬, 그리고 변화가 많은 깨끗하고 새로운 화성적인 면을 볼 수 있는 유행가와는 달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음악적인 창조성을 느깨게 된다. 그리고 그의 창작에는 흔히 낙관적이며 명랑한 반면 우수가 깃들어 있는 재즈라고 할 수 있다. George Gershwin (1898.9.26∼1937.7.11) 미국의 작곡가. 뉴욕 출생. 대중적인 경음악을 작곡하면서 재즈기교에 의한 수준 높은 관현악곡과 오페라를 창작하여 새로운 측면을 개척하였다. 소년시절 개인교사에게 피아노와 화성학을 배우고 16세 때 고등학교를 중퇴, 음악출판사의 피아니스트로서 작곡을 시작하였다. 19세 때부터는 극장 전속 피아니스트로 근무하였으며, 21세 때에는 《스와니》를 발표하여 히트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인기를 모아 리뷰나 쇼의 일류 작곡가가 되었으며, 1924년(26세) 폴 화이트먼이 위촉한 재즈의 기법을 따른 피아노협주곡 《랩소디 인 블루》를 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고전음악과 경음악을 조화시켜 관현악곡 《파리의 미국인》(28) 《피아노협주곡 F장조》(25) 및 오페라 《포기와 베스》(35) 등의 본격적인 작품 외에도 많은 통속 희가극과 대중음악, 영화음악을 작곡하였는데 뇌종양이 발병해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세기는 로맨틱한 멜로디보다는 리듬의 시대라고 일컬을 만큼 재즈의 강렬한 리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지 않은 작곡가는 없다. 재즈가 지닌 야성적인 활력과 리듬의 참신한 매력을 현대 음악과 의식적으로 결부시킨 작곡가로는 유럽 출신의 스트라빈스키와 미국 출신의 거쉰이 대표적이라고 할 것이다. 거쉰은 20세기 전반에 가장 미국적인 성격과 수법을 작품에 반영한 작곡가로서 그의 작품은 독특한 재즈 감각과 도시인 취미의 세련된 선율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 <랩소디 인 블루>로 미국 악단의 총아가 된 거쉰은 <파리의 아메리카인>, <피아노 협주곡>, 오페라 <포기와 베스>등으로 절정을 이루면서 미국 음악계의 혜성과 같은 존재일 뿐 아니라 음악사에 교향적 재즈의 확립이라는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서 출발한 그는 재즈나 파퓰러 음악에 관심이 높았고 많은 가곡을 작곡하여 인기를 모으고 있을 무렵, 당시 재즈계의 거장이던 폴 화이트먼이 거쉰의 뛰어난 재능을 간파하였다. 폴 화이트먼은 그에게 재즈의 수법을 도입한 교향적인 재즈를 쓰도록 간곡하게 권유하여 <랩소디 인 블루>를 작곡하게 된 것이며 초연 당시 미국에서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상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재즈와 교향악을 교묘하게 혼합하는데 성공한 거쉰의 독자성은 재즈를 교향적인 음악에 도입했다기보다는 재즈를 교향악의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는 점이다. 이것은 음악사에 있어 멜로디의 아름답고 다채로운 발전에 비해 등한시되었던 리듬에 대한 자각으로 멜로디와 리듬의 현대적인 결합이라는 점에 더 큰 의의가 있다. <랩소디 인 블루>는 교향적 재즈를 구상하던 폴 화이트먼의 위촉을 받아 쓰
여진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작품으로 거쉰이 최초로 쓴 교향적 재즈이다. 콘서트 개최일 한달전 쯤 위촉을 받았기에 무리한 작업이었지만 <그랜드 캐년>으로 널리 알려진 그로페의 능란한 편곡을 거쳐 1924년 화이트먼 악단과 거쉰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되어 경이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거쉰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이 곡은 리스트풍의 랩소디의 일종으로 블루스 하모니의 활용과 거쉰의 참신한 개성이 돋보인다. 이 곡을 유명하게 만든 사이렌 소리와도같은 3옥타브 가까운 클라리넷 솔로로 시작해서 청중을 사로잡는 <랩소디 인 블루>는 기본적인 테마가 고전적인 발전을 준수하고 있으며3악장을 한데 묶은 피아노 협주곡같은 형식으로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다. |
거슈인/파리의 미국인 듣기/http://johan55kr.blog.me/50122863562
20세기 미국 음악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90)
작곡가들은 나를 진정한 작곡가로 여기지 않고, 지휘자들은 나를 진짜 지휘자로 생각하질 않아. 게다가 피아니스트들은 나를 피아니스트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레너드 번스타인
1987년 7월 미국의 탱글우드 페스티벌에서 오케스트라와 리허설 중이던 예순아홉 살의 노지휘자가 휴식시간에 이렇게 한탄했다.
“작곡가들은 나를 진정한 작곡가로 여기지 않고, 지휘자들은 나를 진짜 지휘자로 생각하질 않아. 게다가 피아니스트들은 나를 피아니스트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업종 분화와 전문화가 미덕으로 정착한 클래식 음악계에서 ‘만능 음악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토로했던 주인공은 레너드 번스타인이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같은 인기 뮤지컬 작곡가이면서 동시에 교향곡과 미사곡 등 진지한 클래식 음악을 여럿 남겼고,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이 다재다능한 음악인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다.
1958년부터 14년간 뉴욕 필하모닉에서「청소년 음악회」를 진행했고, 1972년에는 모교인 하버드 대학에서 강연을 맡아 『대답 없는 질문(The Unanswered)』이라는 책으로 묶어냈으니 방송인이자 교육자라는 직함도 추가할 법하다. 1956년 인터뷰에서 그는 우스갯소리로 “작곡가들과 있을 때는 지휘자라고 말하고, 지휘자들과 있으면 작곡가라고 한다”라고 말했다.
1918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난 번스타인은 20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계 집안 출신이다. 조부는 저명한 랍비였고, 아버지는 가게 점원에서 출발해서 가발과 미용 제품을 만드는 경영자로 성공을 거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유대교와 탈무드를 뼛속 깊이 새기며 자라난 번스타인의 음악 입문은 상대적으로 늦었다. 열 살에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웠지만 쇼팽과 바흐의 쉬운 작품은 거뜬히 소화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번스타인은 1929년 벤저민 프랭클린과 존 F. 케네디 대통령 등을 배출한 300년 역사의 명문인 보스턴 라틴 학교에 진학할 정도로 학업 성적도 빼어났다. 학문의 길을 충실히 걷기를 바랐던 아버지와 음악에 뜻을 두고 있던 아들은 때때로 충돌을 겪기도 했다. 동유럽 출신 유대인에게 음악인이란 결혼식과 잔치에서 연주하면서 푼돈을 버는 거리의 악사에 불과했다.
훗날 음악가로 대성하자 아버지는 “그 녀석이 레너드 번스타인이 될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소!”라고 반문했다. 1935년 고교를 졸업한 번스타인은 결국 일종의 타협책으로 하버드 대학에 입학해서 음악을 전공했고, 그 뒤 커티스 음악원에 진학해서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를 사사했다.
번스타인은 스물세 살 때인 1941년 야외 콘서트에서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데뷔하는 동시에, 이듬해인 1942년에는 첫 교향곡인 「예레미야」를 완성해서 아버지에게 헌정했고, 1943년에는 에런 코플런드의 피아노 소나타를 초연하기에 이르렀다. 피아노와 지휘, 작곡으로 음악적 재능이 동시다발로 만개한 것이다.
아버지로 표상되는 엄숙하고 종교적인 유대인의 세계와 코플런드로 대표되는 뉴욕의 현대적인 예술계는 이후 번스타인의 삶을 떠받치는 거대한 두 기둥이 됐다. 성(聖)과 속(俗), 가족 중심의 보수주의와 지극히 개인적인 자유주의, 이성애와 동성애는 번스타인의 내면에서 때때로 갈등을 일으키면서 공존하기에 이른다.
1943년 뉴욕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임명된 번스타인에게 극적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같은 해 11월 14일이었다. 당초 지휘자로 예정됐던 브루노 발터가 이틀 전 급작스럽게 고열로 출연을 취소하자, 단 한 번의 리허설도 없이 번스타인이 대타를 맡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 땅에서 태어나고 교육받고 훈련받은 젊은 지휘자의 첫 무대를 경험했다”는 안내 방송과 함께 당시 연주회가 라디오로 중계되고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언론의 1면을 장식하면서 번스타인은 전국적 스타로 급부상했다. 이러한 열광 이면에는 사실상 미국의 첫 지휘자를 배출했다는 자긍심과 ‘유럽 콤플렉스’가 병존했다.
1957년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빛을 보고, 이듬해인 1958년 미국 출신 지휘자로는 처음으로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에 취임하면서 번스타인은 탄탄대로를 걷는 듯 보였다.
테너 호세 카레라스, 소프라노 키리 테 카나와가 노래한 번스타인의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앨범
특히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초연 직후 732차례나 공연되고, 음반은 100만 장 이상 팔려나가면서 번스타인의 대표작으로 떠올랐다. 뉴욕 필하모닉 취임과 더불어 번스타인은 거슈윈과 코플런드, 아이브스 등 미국 작품을 대거 프로그램에 집어넣고 「청소년 음악회」를 진행하면서 혁신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뉴욕타임스>의 비평가 해럴드 숀버그는 “번스타인의 동작은 당대 지휘자 가운데 가장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꼬았지만, 그 열정적인 지휘 동작조차 새로운 청중 개발에는 톡톡히 효과를 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충실한 민주당 지지자로 취임 이전부터 케네디 대통령과 각별한 우의를 보였던 번스타인은 미국 보수 세력과 길항(拮抗)을 겪기도 했다.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1951~52년과 1955~56년 시즌에 번스타인이 뉴욕 필하모닉에서 지휘를 맡지 못했던 사례를 언급하며 “매카시즘의 마녀 사냥이 기승을 부리면서 번스타인은 좌파적 성향과 동성애적 기질, 인종적 태생으로 인해 미국에서 실질적인 실직 상태를 보냈다”고 기술했다. 배리 셀데스 같은 정치학자는 FBI 문서를 토대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번스타인을 정치적 좌파이자 급진적 행동주의자로 규정하기도 한다.
작곡가로서 번스타인은 1944년 한 해에만 첫 교향곡「예레미야」와 첫 뮤지컬인 〈온 더 타운〉, 첫 번째 발레 음악인 〈팬시 프리〉를 동시에 발표했고, 그 뒤로는 한 번도 멈추거나 뒤돌아보지 않았다. 1956년 12월 초연한 〈캔디드〉는 73회 공연한 뒤 두 달 만에 막을 내리는 참패를 겪었지만, “나는 살기 위해 지휘하고, 작곡하기 위해 산다”는 말러의 말은 그대로 번스타인의 신조가 됐다.
번스타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두 차례나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면서 ‘말러 부활’의 주역이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유대인이면서 작곡가 겸 지휘자로 활동한 말러는 번스타인이 평생 본보기로 삼았던 모델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세기말 빈의 말러는 신세기 뉴욕의 번스타인을 통해서 새롭게 부활했다.
1969년까지 뉴욕 필하모닉과 1,200회의 연주회를 열고 200여 장의 음반을 발표했던 번스타인은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작곡에 매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11년간 뉴욕 필하모닉에 재직하면서 번스타인이 발표한 곡은 교향곡 3번 「카디시」와 「치체스터 시편」이 전부였기에 작곡에 대한 갈증은 그만큼 더할 수밖에 없었다.
작곡가로서 번스타인은 쇤베르크 중심의 음렬주의나 극단적인 실험을 줄곧 배격했다. 그는 “조성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 존재와 정신,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누가 사랑과 우정, 믿음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대신 그가 자유롭게 넘나든 것은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였다. 재즈와 흑인 영가를 끌어안고, 오페라와 뮤지컬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파격적인 행보에 스승 쿠세비츠키마저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하지만 번스타인은 “교향곡이 단지 교향곡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노래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조성 파괴가 극에 이르렀던 1960~70년대 번스타인의 음악은 낡고 저속하며 상투적이라는 비판에 시달렸지만,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가 더 이상 뚜렷하지 않은 1990년대에 이르면 ‘외로운 선지자’로 재평가를 받는다.
이 ‘멀티플레이어’에게 단 한 명의 라이벌이 있었다면 역시 지휘자 카라얀일 것이다. 번스타인이 신대륙 미국을 상징한다면 카라얀은 본토 유럽을 대표했고, 번스타인이 말러를 재조명했다면 카라얀은 베토벤?브람스?브루크너로 이어지는 독일 교향악의 전통에 전념했다.
언젠가 카라얀과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번스타인은 “내가 10년 더 젊고, 5센티미터 더 크다는 것”이라고 위트 있게 받아넘겼다. 하지만 1989년 카라얀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번스타인은 파리에서 콘서트 도중, 프랑스어로 “동료이자 위대한 대가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추모하며”라고 청중에게 말한 뒤 묵념을 제안했다.
1959년 카라얀(왼쪽)을 만난 레너드 번스타인. 가운데는 뉴욕 필하모닉의 전임자였던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1973년 번스타인의 쉰다섯 번째 생일을 맞아 음반사 CBS에서는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 부부,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피에르 불레즈 등 당대의 음악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하지만 밤이 깊어가자 번스타인은 동료 프로듀서 폴 마이어스의 어깨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숨질 당시의 베토벤보다 고작 두 살 어릴 뿐이야. 하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어떤 작품도 아직 쓰지 못했어.”
비록 자신은 제대로 발붙일 분야가 없다고 한탄했지만, 번스타인의 직접적 영향력 아래 성장한 지휘자 마이클 틸슨 토머스(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마린 알솝(볼티모어 심포니), 젊은 시절부터 번스타인의 곡을 즐겨 연주했던 사이먼 래틀(베를린 필하모닉)과 켄트 나가노(몬트리올 심포니) 등 새로운 지휘자 세대가 속속 등장하면서 그의 음악에 대한 대접도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나는 토스카니니처럼 언제나 50여 곡의 같은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인생을 보내고픈 마음은 없다. 나는 지휘하고, 피아노를 연주하며, 할리우드를 위해서 작곡하고, 교향곡을 쓰고 싶다. 나는 훌륭한 말뜻 그대로 음악인이고자 한다."
이 말처럼 생전에는 비록 카라얀의 위세에 눌린 감이 없지 않다고 해도, 사후에는 ‘20세기 음악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은 르네상스적 음악인이 바로 번스타인이다. 더구나 그에겐 아직도 ‘작곡가’라는 마지막 역전 카드가 남아 있다.
레너드 번스타인 일대기 1990년 10월 14일 뉴욕에서 사망한 레너드 번스타인은 미국의 20세기 사상 가장 저명한 지휘자이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비롯한 뮤지컬과 "워터 프런트"등 영화주제곡, 실내악, 교향곡, 발레곡, 심지어 미사곡까지 만든 작곡가로서도 명성을 떨쳤으며 이 외에도 피아니스트, 교육가,작가로서 만능의 재능을 발휘했다. 번스타인은 뉴욕의 아파트에서 주치의인 케빈 캐힐 박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성 폐기능 저하로 인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7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열과 영감, 순수한 감정이 가득한 번스타인의 지휘 스타일은 청중을 전율에 떨게 했으며 지휘 도중 갑자기 무대에서 허공으로 뛰어 오르는 그의 유명한 "레니 립스"(레오나드의 도약)는 현대무용에서 원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10월 초 진행성 기종(氣腫)의 합병증으로 늑막의 종양및 일련의 폐감염 질환이 생기는 바람에 주치의인 캐힐 박사의 권고로 지난 9일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서 은퇴할 것을 발표했는 데 최근 수개월간 그는 여러 차례 연주를 취소했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연주를 지휘한 것은 8월 19일 탱글우드 음악제에서였다. 번스타인은 한 손에 담배를 들고 다른 한 손에 지휘봉을 든 채 리허설을 할 정도로 대단한 애연가였다. 미국의 지휘자들 가운데 번스타인 만큼이나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지휘자는 거의 없다. 구스타프 말러 작품에 대한 그의 정열적인 지휘에 힘입어 말러는 다시금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작곡가로서의 번스타인은 로미오와 쥴리엣의 테마를 편곡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뿐만 아니라 "온 더 타운", "원더풀 타운"등을 작곡했으며 모든 사람들은 이를 두고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새로운 단계로 고양시켰다고 환호했다. 번스타인은 의례와 격식을 차려야 하는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주의나 명분을 지지하거나 포기하는가 하면 귀 뒤에 민들레를 꼽고 다니는 등 비관습적인 행동으로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性이나 마약에 관한 화제나 중동과 미국의 정치등에 대해 꺼리낌없이 견해를 밝힘으로써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주기도 했으나 그의 인생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역시 음악이었다. 유태계 러시아인 이민을 부모로 지난 1918년 8월25일 미국 메사추세츠州 로렌스에서 태어난 번스타인은 학창시절 부터 재즈 악단을 구성, 결혼식장이나 각종 연회에서 연주를 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를 반대했지만 번스타인은 음악을 포기하지 않 았다. 그는 하바드에서 피아노를 공부했으나 졸업후에는 점차 지휘에 관심을 돌리키 시작했다. 그는 프리츠 라이너의 지도를 받은 뒤 보스톤교향악단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문하에서 지휘공부를 계속했다. 번스타인은 43년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로서 뉴욕에 출현, 뉴욕 필 하모니의 보조 지휘자로서 활동했으며 이듬해 그는 병에 걸린 브루노 발터를 대신해 지휘, 독자적인 명성을 얻었는 데 당시 그는 자신감 넘치는 테크닉과 완벽에 가까운 음악에 대한 이해로 청중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그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완성한 57년에 일찌기 그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작곡에 전념할 것을 권유했던 디미트리 미트로풀리스와 함께 뉴욕 필하머닉 오케스트라의 공동 지휘자로 합류했으며 그 다음해에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교향악단의 감독이 됐다. 이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12년 동안 뉴욕 필하모니 사상 어떤 다른 지휘자보다 많은 공연을 했으며 69년 작곡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키 위해 지휘자직을 사임했다. 그는 작곡가로서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뮤지컬 극장과의 간극을 잇기위해 극장용 로마 미사곡인 예레미아 심포니나 재즈와 클래식을 결합시킨 작품들을 작곡했다. 또한 지휘자로서 그는 예루살렘과 런던을 비롯 빈, 보스톤, 피츠버그, 로스앤젤레스, 뉴욕등 세계의 훌륭한 오케스트라들과 공연했다. 그는 2차대전 종전 후 강제수용소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를 주도했으며 그후 흑인 급진세력 블랙 팬더를 위한 기금모금연주, 지난 89년 크리스마스에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축하하는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연주 등 다양한 메시지를 담은 연주회를 가졌다 유대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는 이스라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자주 공연을 가졌는 데 지난 67년 이스라엘이 6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 이스라엘의 마운트 스코푸스의 정상에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그래미賞과 에미賞, 토니賞 등 많은 상을 수상했으나 지난 해 11월에는 미국 정부가 AIDS에 관한 뉴욕의 미술 전시회 지원금 1만달러를 취소한데 항의, 국가예술메달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번스타인은 지난 78년 칠레 출신 여배우인 부인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가 사망한 뒤 한동안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으나 69세때 어빈 벌린의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는 "나의 12음조 멜로디"와 이스라엘 필하머니 오케스트라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는 "주빌리 게임스"를 작곡하는등 창작에 대한 새로운 열의를 보였다.
'공연후기(클래식 2014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시향/로맨틱 라흐마니노프/2.14.금/예술의 전당 (0) | 2014.02.14 |
---|---|
[아름다운목요일] 2014 금호아트홀 라이징 스타 시리즈 3 - 이상은 Cello/2.13.목/금호아트홀 (0) | 2014.02.13 |
뉴욕필하모닉 내한공연/앨런 길버트con./김다솔 협연/2014.2.6.목/예술의 전당 (0) | 2014.02.05 |
클라우디오 아바도 별세를 추모하며...2009년 아바도 공연 후기를 뒤적여보다. (0) | 2014.01.23 |
KBS교향악단 제677회 정기연주회 (0) | 2014.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