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은 미국 태생의 Ureli Corelli Hill이 이끈 지역 음악인들에 의해 1842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교향악단으로서 빈, 베를린 필과 함께 세계 3대 교향악단으로 불려지고 있다. 뉴욕 필하모닉은 미국 역사의 70% 가까운 세월의 기간 동안 지속적인 활동을 하면서 미국인들의 음악적 삶을 이끌며 발전시켜왔다. 2002-03년 뉴욕 필하모닉은 160번 째 기념일을 맞이 하였다. 뉴욕 필하모닉은 연간 180여 회에 이르는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 애버리 피셔 홀(Avery Fisher Hall) 및 링컨 센터(Lincoln Center)에서 시즌 9월부터 다음 시즌 6월 사이에 열린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초창기부터 주요 작품들을 초연하는 공연들을 통해 명성을 얻 어가기 시작하여 당대의 새로운 음악을 선보이는 작업을 통해 그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그 예로 드보르작의 교향곡 No. 9, '신세계로부터', 지휘자가 키보드를 치는 형식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No. 3, 거쉬윈의 Concerto in F; Copland의 Connotations, 베토벤 교향곡 No. 8과 9의 미국 초연과 브람스 교향곡 No.4의 미국 초연 등이 있다. 이러한 개척적인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 뉴욕 필하모닉은 현대의 주요 작곡가들의 곡을 정기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2002-2003 시즌을 사전 홍보하는 기간에 뉴욕 필하모닉은 2001년 9월 11일을 추모하는 존 아담스(John Adams)의 Transmigration of Souls로 그 시작을 알렸다.
뉴욕 필하모닉을 이끈 작곡가와 지휘자들로는 Theodore Thomas, Tchikovsky, Dvorak, Mahler (지휘자, 1909-11), Klemperer, Richard Strauss, Megelberg (지휘자, 1922-30), Furwangler, Toscanini(지휘자, 1928-36), Stravinsky, Koussevitzky, Copland, Walter (음악 고문, 1947-49), Mitropoulos (지휘자, 1949-58), Szell (지휘자, 1969-70), Tennestedt, 그리고 Leinsdorf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있다. 이 무수한 세대를 거친 뉴욕 필하모닉의 협연자 리스트에는 역시 훌륭한 기악 연주자, 성악가들이 대거 망라되어 있다.
로린 마젤은 2002년 9월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로린 마젤은 1991년부터 2002년 여름까지 지휘자로 있으며 2002년 6월 1일 명예 지휘자라는 존칭을 부여 받았던 쿠르트 마주어의 뒤를 이어 2002년 9월부터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 겸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전의 지휘자로는 주빈 메타(Zubin Mehta, 1978-91)와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1971-77)가 있으며, 1958년부터 지휘자로 있었던 (고) 레오나르드 번스타인에게는 1969년 뉴욕 필하모닉의 종신 지휘자라는 평생의 타이틀이 주어졌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Leopold Damrosch 지휘 아래 1882년 첫 미국 내 투어를 시작하였다. 1928년 뉴욕의 심포니 소사이어티에 합류한 후로 뉴욕 필하모닉은 Arturo Toscanini 지휘 아래 첫 유럽 투어를 가졌다. 오늘날까지 뉴욕 필은 5개 대륙, 57개 국가의 412개의 도시에서 공연을 가졌다. 1980년부터 Citibank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16회에 이르는 해외 투어를 스폰서 하였으며, 85개 도시와 40개 국가의 공연을 지원하였다. 이것은 유럽(1980, 1985, 1988, 1993, 1995, 1996, 2000), 남아메리카 (1982, 1987, 1992, 1997, 2001), 그리고 아시아 (1984, 1989, 1994, 1998)를 포함하고 있다. 뉴욕 필하모닉은 1980년 이후 미국 투어를 7회에 걸쳐 진행하였으며, 이는 Citibank가 후원한 1999년 북미 투어를 포함하고 있다.
뉴욕 필하모닉은 라디오, 텔레비전, 그리고 다른 방송 매체를 통해서도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으며 동시에 미국 통신 역사의 틀을 잡는데 도움을 주었다. 보다 넓은 관객층에게 다가가겠다는 오케스트라 전통의 공약을 지키기 위하여 필하모닉은 1922년 콘서트를 생방송으로 방송한 첫 오케스트라 가 되었다. 미국 전역을 통해 방송된 1930년의 라디오 방송은 그 중 하나이다. 1966년까지 생방송을 진행한 뉴욕 필하모닉은 테이프의 형태로 라디오 방송이 바뀌게 되면서 생방송을 멈추게 되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77년 다시 텔레비전 생방송의 전파를 타고 국가적인 규모의 방 송을 정기적으로 선보이는 미국 최초의 교향악단이 되었다.
1917년 첫 음반을 녹음한 후로 뉴욕 필하모닉은 대략 2000여 장의 앨범을 내놓게 되었다. 현재 500장 이상의 음반이 입수 가능하며, 뉴욕 필하모닉(New York Philharmonic)의 음반은 주요 음반 라벨사인 Deutsche Grammophon, London, New World, RCA, Sony Classical, 그리고 Teldec에서 공 급하고 있다 Teldec,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와 오케스트라의 대규모 협조로 제작된 두 개의 디스크는 '올해의 음반' 상을 스테레오 리뷰(Stereo Review)로부터 수여 받았다. 1997년 필하모닉은 자체의 성공적 라벨인 New York Philharmonic Special Editions를 만들었고 오케스트라의 기록 중 역사적인 라디오 방송(1923-87)을 모은 10장의 음반을 발매하였다. 이후로는 The Mahler Broadcasts 1948-1982가 뒤를 이었으며 이것은 12장의 CD 모음집으로써 라디오 생방송을 통해 이루어진 말러(Mahler)의 9개 교향곡 전곡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미국 음악과 오케스트라의 관계를 탐험할 수 있는 10장의 음반도 있다. 2000년에는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이 이끄는 필하모닉이 연주한 Bernstein LIVE와 스테판 손하임(Stephen Sondheim)의 Sweeny Todd를 10장의 CD인 Live at New York Philharmonic을 선보였다. 가장 최근 발매된 특별 판은 2001년 10월에 출시된 쿠르트 마주어 지휘의 10장의 CD 모음집이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탄생은 뉴욕 필하모닉의 관객 층을 더욱 넓혀 주었다. 오케스트라는 20년이 넘도록 젊은 연주자들의 콘서트를 정기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1976년부터 PBS에서는 생방송으로 뉴욕 필하모닉의 링컨 센터(Lincoln Center)에서의 연주가 자주 방영되었다. 1996년 11월 14일에 는 번스타인의 1943년 지휘 데뷔 공연이 인터넷 배포를 위하여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통해 CD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로써 뉴욕 필하모닉은 교향악단으로서 새로운 기술적 시도의 제작과 발매를 처음으로 시행한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1965년 뉴욕 필하모닉은 시리즈로 공원에서의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취지의 공연이 개최된 이후로 1,3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다. 1986년 7월 5일 뉴욕 필하모닉 자유 주말 콘서트는 클래식 음악 콘서트 사상 최대 관객인 약 80만의 청중을 끌어들이는 기록을 낳았다. 2002년 2월 7일 뉴욕 필하모닉은 어느 세계적 오케스트라도 따를 수 없는 획기적인 13,500번째의 콘서트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2003년 2월, 뉴욕 필하모닉은 교향악단의 음악 산 업과 미국 문화에 대한 높은 기여도를 인정받아 레코딩 아카데미(The Recording Academy)로부터 Trustees상을 수상하였다. 뉴욕 필하모닉은 45회 그래미 어워드(Grammy Awards)에서 교향악단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연을 하였는데, 이것은 뉴욕 메디슨 스퀘어(Madison Square) 정원의 텔레비전을 통해 전세계로 방영되기도 하였다.
뉴욕 필하모닉은 70년 이상 머무른 카네기 홀(Carnegie Hall)에서 링컨 센터(Lincoln Center)로 그 상주 건물을 옮기게 되었다. 건물은 훗날 1976년 공연장의 재건축을 위해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 사람에 대한 보답과 감사의 표시로 애버리 피셔 홀(Avery Fisher Hall)이라고 개명하였다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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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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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 |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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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 | 함부르크 북독일방송교향악단 수석객원지휘자 |
2003 ~ 2007 | 산타페 오페라 음악감독 |
2000 ~ |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 |
1995 ~ |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부지휘자 |
1993 ~ |
산타페 오페라 오케스트라 부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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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여년 역사상 첫 뉴요커 출신
줄리아드서 수학 ‘뉴욕필 키즈’
로린 마젤의 뒤를 잇는 앨런 길버트(Alan Gilbertㆍ42)를 두고 사람들은 가장 ‘뉴욕 필하모닉적’인 지휘자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다.
1967년생인 앨런 길버트는 뉴욕 필의 160여 년 역사상 첫 뉴요커 출신의 음악감독이다. (‘뉴욕 필의 아이콘’ 레너드 번스타인은 메사추세츠주 태생이며, 다른 지휘자들은 모두 유럽 출신이었다.)
게다가 앨런 길버트의 미국인 아버지와 일본계 어머니 모두 뉴욕 필의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이라, 그는 어려서부터 뉴욕 필 연습실을 제 집 드나들 듯했다. 아버지 마이클 길버트(바이올린)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음악감독으로 있던 1971년 뉴욕 필에 입단해 2001년 은퇴했고, 일본인 어머니 다케베 요코(맨해튼 음대 교수)는 1979년부터 현재까지 뉴욕 필 제1바이올린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이종 사촌 다케베 미키는 뉴욕 필 사무국의 운영감독이다.
앨런 길버트는 커티스 음악원과 하버드대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전공하고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지휘를 공부한 뒤 28세인 1995년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부임했다. 이후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수석 지휘자 겸 예술고문, 산타페 오페라 음악감독, 함부르크 북독일방송교향악단 수석 객원 지휘자를 거쳤다.
뉴욕 필은 길버트와 2009~2010년 시즌부터 2014~2015년 시즌까지 5년간 계약을 맺었다.
1989년 부산 출생의 김다솔은 현재 유럽을 중심으로 화려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인 피아니스트다. 만 11세에 피아노 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그로부터 4년 후 부산예고에 입학,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임종필 교수를 사사하며 2005 나고야 국제음악콩쿠르 우승, 2005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2위 및 오케스트라 특별상의 놀라운 성적으로 국제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만 16세의 나이로 라이프치히 국립음대에 입학하여 게랄드 파우트 교수를 사사한 후, 2009년부터 하노버 국립음대에서 카를 하인츠 캠멀링을 사사하고 현재 아리에 바르디를 사사하고있다. 2011 프랑스 에피날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쥔 피아니스트 김다솔은 그 외에도 2008 슈만 국제음악콩쿠르, 2008 스위스 제네바 국제 콩쿠르, 2010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2011 뮌헨 ARD 국제음악콩쿠르, 2012 스위스 게자 안다 국제 콩쿠르 등 많은 콩쿠르에서 입상하여 주목받은 바 있다. 2008년, 미하엘 잰덜링과 함께 모차르트 협주곡을 레퍼토리로 독일 전역 투어 연주를 가짐으로써 만 19세의 한국인 피아니스트로 크게 주목받았다. 이후 베를린 필하모니, 취리히 톤 할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쾰른 필하모니, 제네바 빅토리아 홀, 콘체르트하우스 베를린, 포츠담 니콜라이 홀, 포즈난 필하모니, 브뤼셀 보자르 홀 등에서 취리히 톤 할레 오케스트라, MDR 심포니 오케스트라,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바바리안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포즈난 필하모니,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 남서독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베를린 실내 관현악단, 뮌헨 실내 관현악단, 도이체 슈트라이커필하모닉, 포츠담 체임버 아카데미를 비롯한 많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한 바 있다. 2010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만나게 된 심사위원 압델 라만 엘 바샤의 추천으로 지난 2011년 여름에는 라 로크 당테롱 페스티벌에서 연주를 가졌으며 그 이후 참가한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국제 음악아카데미에서 발탁되어 잘츠부르크 문화 기금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기도 하였다. 다음 해, 독일 하우크 아우프호이저의 아티스트로 선정되어 활동하며 장학금을 받고 있다.
모차르트, 베토벤 등 고전적인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어린 나이에 청중을 감동시키며 유럽무대를 놀라게 했던 한국인 피아니스트 김다솔은 김다솔은 2011 금호아트홀 라이징 스타 시리즈 독주회를 통해 본격적으로 국내 음악팬들을 만나기 시작했으며 2013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로 선정되어 더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게되었다. 이번 신년음악회를 시작으로 바로크부터 현대음악 그리고 재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그의 음악세계를 독주와 듀오, 피아노 트리오 등 여섯 번에 걸친 다양한 공연을 통해 한국의 관객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갈 예정이다.
- | 한국예술종합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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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치히 국립음악대학교 |
- | 부산예술고등학교 |
2008 | 독일 슈만국제콩쿠르 3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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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 일본 아시아 쇼팽 국제 음악 콩쿨 1위 |
2005 | 일본나고야국제콩쿠르 우승 |
2005 | 통영국제음악제 2위 |
2004 | 부산음악콩쿨 피아노부 사상 최연소 입상 |
Tchaikovsky, Symphony No.5 in E minor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E단조 Op.64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오늘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을 들어야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을 딱 한 곡 들었습니다. <내 인생의 클래식 101>의 초반부였던 지난해 11월 1일자에서였습니다. 교향곡 4번이었지요. 아시다시피 차이콥스키의 교향곡들, 특히 후반의 3곡(4, 5, 6번)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사랑받는 레퍼토리입니다. 그럼에도 1년이 넘도록 그의 교향곡을 미뤄뒀던 까닭은 겨울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추운 나라 러시아에서도 가장 추운 지역으로 손꼽히는 북쪽 지역, 한때 죄수들의 유형지로도 유명했던 보트킨스트에서 태어난 차이콥스키의 음악에는 추운 겨울에 들어야 제 맛이 나는 특유의 우울감이 있습니다. 특히 교향곡이 그렇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러시아의 음악적 중심은 오래도록 교회음악이었습니다. 로마의 비잔티움 교회에 반발했던 러시아 정교회의 음악들이 18세기 말까지 러시아 음악을 대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연주됐던 음악은 물론이거니와 서민들이 즐겼던 민속음악에까지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이 뿌리 깊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18세기 중반에 러시아 궁정에 소개됐던 이탈리아 오페라도 왕족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습니다. 물론 당시 음악 산업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었던 영국 런던에서도 상황은 비슷했지요. 그만큼 18세기 중후반의 유럽에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파급력은 대단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탈리아류(流)’라고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이에 대한 반발이 생겨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든 사회문화적 현상에는 나름의 이유와 배경이 있습니다. 러시아인들의 마음속에 민족적 자의식을 갖게 한 계기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시련을 겪은 러시아에는 국가주의적 자의식이 싹트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 속에서 이른바 ‘국민음악파’로 규정되는 다섯 명의 음악가가 등장합니다. 나이 순으로 이름을 불러보겠습니다. 발라키레프, 보로딘, 큐이,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입니다. ‘국민음악파’라는 규정은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고 당시에는 ‘모구차야 구치카’(강력한 소수파)라는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그들을 강력하게 옹호했던 음악비평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가 1868년에 붙여준 이름입니다. 살짝 미안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실 이들 중에서 음악가로서의 독창성과 재능을 확실히 보여줬던 음악가는 두 명입니다. 바로 무소륵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 정도라고 해야겠지요. 차이콥스키는 그들의 바로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거의 동시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구차야 구치카의 멤버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무소륵스키보다 1년 뒤에 태어났으니까요. 자, 어쨌든 당시 러시아의 문화적 분위기를 크게 둘로 나눠본다면 슬라브주의자들과 서구주의자들의 분열과 대립이라고 할 만한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슬라브의 전통적 정신과 문화를 옹호하는 쪽이었고, 또 다른 한쪽은 서구의 발달한 제도와 문화를 빨리 수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지요. 그런 러시아의 상황 속에서 모구차야 구치카의 5인방은 슬라브주의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던 음악가들이었습니다. “내 음악은 러시아의 노래에서 나왔다” 그러면 차이콥스키는 어느 쪽이었을까요? 여러 정황으로 추정컨대 차이콥스키는 서구를 지향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그가 이탈리아를 동경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결혼에 실패한 그가 쫓기듯이 도피했던 곳도 바로 이탈리아였지요. 그런데 차이콥스키의 이런 서구 지향은 아주 어린 시절에 뿌리를 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그가 유년기에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웠던 가정교사가 프랑스 여성 파니 뒤르바흐였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좀 산다 하는 집에서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우는 것이 상당히 유행이었지요. 한데 차이콥스키는 이 여자 선생님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합니다. 4년간 함께 공부한 그녀와 헤어지고는 매우 힘들어했다고 전해지지요. 또 차이콥스키가 16살 무렵에 만났던 성악 교사는 이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 덕분에 차이콥스키는 서유럽을 친숙하게 느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울러 그가 서유럽의 음악가들, 예컨대 베를리오즈와 바그너, 리스트 등의 음악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 음악의 독특함을 만들어내는 지점은 역시 러시아적 정서입니다. 차이콥스키가 겪었던 그 모든 교유 관계와 음악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에서 근간을 이루는 정서는 역시 ‘러시아의 노래’입니다. 교향곡에서도 물론 그렇지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들은 베토벤처럼 구조를 쌓아올리기보다는 모차르트처럼 선율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입으로 따라 부르기 좋은 선율이 빈번히 등장합니다. 게다가 그 선율들은 매우 러시아적이어서, 한국인이나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가슴으로 쉽게 밀려오는 본능적인 선율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동양적 정서’를 공유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내 음악은 러시아의 노래에서 나왔다”라는 차이콥스키의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생전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조용한 곳에서 자라났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러시아의 대중적인 노래들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었다. 그리하여 러시아 정신의 모든 표현에 정열적으로 빠져 들어갔다. 간단히 말해 나는 철저히 러시아 사람이다.” 이화여대 출판부에서 십여 년 전에 번역ㆍ출판했던 <음악의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차이콥스키가 동생 가운데 한 명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문구라는데, 어떤 동생에게 보낸 편지였는지는 제가 미처 확인하질 못했습니다. 아마 막내인 모데스트가 아닐까 추정합니다. 차이콥스키는 형제 가운데 모데스트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썼지요. 하지만 정확하진 않으니 그냥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앞의 인용 구절은 제가 이런저런 강의에서 차이콥스키 음악의 요체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하는, 아주 좋아하는 문구입니다. 한데 이 책은 요즘 절판돼 구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읽을 수 없어 안타깝군요. 이 기회를 빌어 이화여대 출판부에 재판 발매를 권해봅니다. ▶<음악의 즐거움> 표지. “시작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영감이 온 것 같습니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은 번호가 붙은 것이 모두 여섯 곡(1번부터 6번까지), 번호 없이 표제로 출판한 곡(만프레드 교향곡)이 한 곡입니다. 그중에서도 교향곡 5번 E단조 Op.64는 4번을 작곡하고 11년이나 세월이 흐른 뒤에 작곡했습니다. 왜 이렇게 늦어졌을까요? 객관적 사실로는 차이콥스키가 그 중간의 기간에 오페라 작곡에 많은 신경을 썼고 유럽 각지를 다니면서 여러 음악가들과 친교를 나눴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동분서주하느라고 교향곡을 작곡하지 못했다는 것은 왠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보다는 교향곡 작곡에 대한 자신 없음 때문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잘 짜인 구성, 미묘한 관현악법을 적절하게 구사해야 한다는 교향악의 작곡 수법에 그는 매우 중압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1888년에 후원자였던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음악에 대한 형식을 파악하고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나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때문에 평생 괴로워했습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스스로 “선천적 약점”이라고까지 털어놓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독일-오스트리아의 고전주의 혹은 낭만주의적 수법에 대한 열등감이었을 겁니다. 교향곡 작곡의 대세이자 표준은 바로 그 지역이었으니까요. 말하자면 차이콥스키의 예술적 유전자였던 러시아적 감성, 자신의 음악이 “러시아의 노래에서 나왔다”는 고백은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었던 동시에 콤플렉스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차이콥스키는 1888년에 러시아로 돌아오지요. 그 이전에는 주로 서유럽에 머물렀습니다. 연주여행이 많았던 까닭입니다. 러시아로 돌아오기 직전까지도 라이프치히, 함부르크, 베를린, 프라하, 파리, 런던을 한 바퀴 도는 연주여행을 치렀지요. 그 과정에서 브람스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로 돌아온 차이콥스키는 모스크바 북서쪽의 도시 클린((Klin) 근교의 전원마을 프롤로프스코예에 집을 마련합니다. 숲에 둘러싸인, 넓은 정원을 가진 저택이었다고 합니다. 차이콥스키는 그해 5월 동생 모데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여름에 교향곡을 한 편 쓸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한 달 뒤에는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향곡을 한 곡 쓸 생각이라고 말씀드렸는지요? 시작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영감이 온 것 같습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Franz Welser-Möst/GMJO - Tchaikovsky, Symphony No.5 Op.64 Franz Welser-Möst, conductor Gustav Mahler Jugendorchester Musikverein, Wien 2009.09.19 자, 교향곡 5번 E단조 Op.64를 듣기에 앞서 교향곡 4번을 잠시 복기해보겠습니다. 제가 이미 말했다시피 교향곡 4번의 1악장은 호른과 파곳이 연주하는 격렬한 팡파레로 시작합니다. 차이콥스키는 그것을 “이 교향곡 전체의 핵심이며 정수”라면서 “운명”이라는 말로 폰 메크 부인에게 설명했지요. 한데 차이콥스키의 ‘운명론’은 11년 뒤에 쓴 교향곡 5번에서 한층 짙어집니다. 이번에는 아예 장송행진곡 풍의 어둡고 무거운 운명을 첫머리에 등장시킵니다. 1악장 서주에서 클라리넷이 연주하는 음울한 선율이 그것입니다. 게다가 그 운명은 불가항력적으로 인생 전반을 지배합니다. 이 음울한 선율은 교향곡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악상으로 계속해 얼굴을 비춥니다. 2악장은 안단테 칸타빌레(느리게 노래하듯이)로 시작하는 악장입니다. 현악기들이 이끄는 도입부에 이어 호른이 노래하는 인상적인 선율이 등장합니다. 뭔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애상감이 가득한 선율입니다. 여기에 다른 악기들이 가세하면서 선율이 점점 강력해지다가 다시 고즈넉해집니다. 이어서 클라리넷이 등장해 중간부의 선율을 이끌다가 드디어 운명의 악상이 강렬한 음향을 뿜어내며 작열합니다. 1악장의 첫머리에서 만났던 바로 그 암울한 선율입니다. 그렇게 폭발했다가 다시 원래의 고즈넉함으로 회귀하지요, 마지막 코다는 잦아들듯이 끝납니다. 반면에 3악장은 따뜻합니다. 왈츠 악장입니다. 차이콥스키가 즐겨 작곡했던 발레음악이 연상되는 몽환적인 느낌의 왈츠입니다. 3악장에 느닷없이 왈츠가 등장하는 것에 대해 초연 당시에도 이런저런 비판들이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는 아주 적절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 2악장이 춥고 암울했던 까닭에 3악장에서라도 뭔가 따뜻한 것을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혹독하게 추운 겨울, 성냥팔이 소녀가 그리워했을 따뜻한 불빛이 느껴지는 악장입니다. 이어서 1악장 서주의 주제 선율이 다시 등장하면서 마지막 4악장이 문을 엽니다. 애초에는 단조였던 선율이 장조로 모습을 바꿔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현악기들이, 이어서 관악기들이 웅장한 느낌으로 연주합니다. 팀파니가 으르렁대는 소리를 배경에 깐 채 광포한 분위기의 첫 번째 주제가 연주되고, 잘게 부서지는 음형들로 표현되는 두 번째 주제는 목관이 연주합니다. 무거운 1주제에 비해 두 번째 주제는 환한 분위기를 구사합니다. 그리고 잠시 뒤 1악장 서주에서부터 이 교향곡을 관통해 온 음울한 주제 선율이 당당하게 모습을 바꿔 다시 등장합니다. 아주 늠름한 행진곡풍입니다. 그래서 4악장에 내려진 일반적인 해석은 ‘운명을 극복한 승리의 행진’이라는 식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차이콥스키의 맨얼굴이었을까요? 어쩌면 차이콥스키는 이 마지막 악장을 쓰면서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추천음반 1.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60, DG. 50년이 넘은 녹음이지만 언제 들어도 좋다. 호쾌하고 섬세하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악단의 호응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지는 명연이다. 구소련이라는 정치ㆍ사회적 배경 속에서나 가능했던 연주이니, 이제는 ‘역사적 녹음’이라고 규정해도 될 성싶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을 연주한 음반들은 지천으로 널려 있지만, ‘이 한 장의 음반’을 꼽는다면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이 연주야말로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2.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75, DG. 음질을 중시하는 경우라면 카라얀의 1970년대 음반을 권한다. 생전의 카라얀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을 일곱 차례 녹음했는데, 1971년에는 EMI에서, 1976년에는 DG에서 녹음했다. 모두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한 녹음이다. 어느 것을 선택해도 무방하나 오늘은 DG의 음반을 권한다. 치밀한 합주력이라는 측면에서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버금갈 만한 연주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하고 세련된 연주다. 하지만 러시아적 야성이라는 음악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P.S.] 개인적으로 즐겨 듣는 음반은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가 소련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한 1990년 녹음(Pony Canyon)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두 번 들었습니다. 도쿄 산토리홀에서 가졌던 실황입니다. 질풍처럼 내달리는 연주입니다. 스튜디오 녹음과는 맛이 다른 흥분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마지막에 터져 나오는 ‘브라보!’와 박수소리도 음악입니다. 음질도 좋습니다. 현재 절판 상태이지만, 눈에 띄면 망설이지 말고 구입해도 좋은 음반입니다.
글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 시절에는 음악을 멀리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 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출처: 채널예스 칼럼>음악>내 인생의 클래식 101
Valery Gergiev/MTO - Tchaikovsky, Symphony No.5 Op.64 Valery Gergiev, conductor Mariinsky Theatre Orchestra Salle Pleyel, Paris 2010.01 1악장: 안단테 - 알레그로 콘 아니마 서주가 붙은 소나타 형식. ‘콘 아니마’는 직역하면 ‘영혼을 담아서’라는 뜻이다. 보통 ‘활기차게’ 정도로 해석되지만 악상 전개를 들어보면 여기서만큼은 달리 파악될 여지가 많기 때문에 그냥 직역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E단조 4/4박자의 서주 첫머리에 등장하는 어두운 클라리넷 선율은 교향곡 전체를 지배하는 핵심 악상이다. 이것을 ‘운명의 동기’라고도 부르는데, 굳이 추상적인 것을 꼭 주관적인 개념의 틀에 맞춰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이런 식의 고착화된 해석은 주로 일본 쪽에서 넘어온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그냥 되돌려주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서주 악상이 별다른 발전 없이 몇 차례 반복된 후 주부로 들어가면 6/8박자로 변한다. 클라리넷과 바순이 옥타브로 연주하는 1주제는 서주 악상과 마찬가지로 어둡지만 한층 생동감이 있으며, 이 주제가 여러 가지로 변화해 등장한 뒤 B단조의 유려한 경과구 주제를 거친 뒤 D장조의 온화한 제2주제로 넘어간다. 발전부는 주로 1주제에 기초하고 있는데, 대부분 전개라기보다는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재현부에서는 경과구 주제가 C샤프단조, 2주제가 E장조로 등장한다. 코다는 강렬한 1주제 동기로 클라이맥스를 구축한 뒤 조용히 끝난다.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 콘 알쿠나 리첸차 괴상한 암호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악장의 악상지시어는 ‘안단테로 노래하듯이, 다소 자유롭게’라는 뜻이다. 박자 역시 악상지시까지는 아니더라도 특이한 편이어서 12/8박자이다. 조성(D장조)과 형식(세도막 형식)은 상대적으로 평이하다(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현의 간단한 도입에 이어 호른이 주선율을 노래한다. 매우 달콤하면서도 그리움에 찬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선율은 앞서 말했듯이 대중음악에 차용되었을 정도로 유명하다. 얼마 후 오보에가 연주하는 F샤프장조의 부주제가 부드럽고 밝은 표정을 띠고 나타난다. 이 주제는 확대되어 정점에 이른 뒤 가라앉고, 이어 F샤프단조 4/4박자의 중간부로 넘어가면 클라리넷이 새로운 악상을 연주한다. 이것이 점차 고양되어 악상이 다시 정점에 이르면 서주 악상이 강렬하게 덮어씌우듯이 연주되며, 여기서 중간부가 끝난다. 세 번째 섹션은 첫 번째와 거의 동일하지만 오케스트레이션 등에 약간의 변화가 있다. 코다에서 서주 악상이 다시 한 번 활약한 뒤 조용하게 끝난다. 3악장: 왈츠. 알레그로 모데라토 A장조, 3/4박자. 보통 교향곡의 3악장에는 미뉴에트(고전파 교향곡)나 스케르초(낭만파 이후)가 오지만 차이콥스키는 왈츠를 사용하는 파격을 감행했다(이 시도는 당시 꽤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유려하고 몽환적인 느낌의 왈츠 섹션과 민활하게 움직이는 무궁동 풍의 악상을 지닌 중간부가 멋진 대비를 선보인 뒤 다시 왈츠 섹션으로 돌아간다. 말미에 서주 악상이 다시 등장하는데, 바순으로 연주되어 음색 면에서 원 악상과 상당히 이질적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알아차리기 힘들다. ‘북방의 왈츠 왕’으로 불리기도 했던 차이콥스키의 왈츠 가운데서도 손꼽을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곡이다. 4악장: 안단테 마에스토소 - 알레그로 비바체 ‘안단테 마에스토소’(안단테로 장엄하게)로 지정된 긴 서주(악장 전체의 1/3 가량을 차지한다)는 E장조 4/4박자이며 론도의 요소가 가미된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는 서주 악상이 장조로 바뀌어 처음에는 현악 합주로, 그 다음에는 현이 반주하는 관악 합주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갑자기 팀파니와 더불어 현악기군이 강렬하게 질주하기 시작하는 1주제가 주부의 첫머리를 장식하며, 이를 받는 8분음표+점4분음표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오보에 독주가 경과구를 형성해 잠시 전개된 뒤 목관이 연주하는 희망에 찬 느낌의 2주제가 연주된 뒤 금관이 서주 악상을 다소 거칠게 연주하면서 발전부에 접어든다. 여기서는 1주제와 2주제 모두 발전하며, 재현부 말미의 강렬한 팀파니 연타 뒤 전 관현악이 잠시 침묵에 빠졌다가(여기서 박수를 치는 것은 공연장 예절을 이야기할 때 실수로 흔히 거론되는, 아주 ‘고전적’인 예이다) 다시 트럼펫이 서주 악상을 당당하게 연주하면서 코다로 접어드는데 여기서부터는 일종의 행진곡으로 볼 수 있다. 악상은 점차 고조되어 잠시 프레스토로 휘몰아친 다음 1악장 1주제가 6/4박자로 변형된 채 당당하게 연주되면서 끝난다.
4악장 피날레는 ‘어둠에서 광명으로’ 솟아오르듯 위풍당당하게 끝을 맺는다. 브람스는 이 곡의 연주를 듣고 나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피날레에 대해서만큼은 뭔가 부족한 것 같다면서 의구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사실 이 마지막 악장은 듣기에 따라서는 베토벤 이래 교향곡의 역사에서 빠지는 일이 없었던 ‘암흑에서 광명으로’라는 모토에 충실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종의 허장성세에 불과한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허세가 불안감이나 두려움을 감추고자 할 때 부리게 되는 것임을 감안하면, 당시 작곡가의 내면에서 어떤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을지 대체 누가 알겠는가. 차이콥스키는 이 곡이 초연된 지 거의 정확히 5년 뒤, 저 유명한 ‘비창 교향곡’을 초연한 지 불과 아흐레 만에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베토벤 피델리오 서곡 듣기/http://blog.daum.net/lorenzokim/10993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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