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 2013년)

베를린 필하모닉 내한공연 첫째날 /11.11.월/예술의 전당

나베가 2013. 11. 10. 02:43

 

 

프로그램

11. 11 MON

 

로베트르 슈만 교향곡 1 B-flat장조, Op.38

Robert Schumann Symphony No.1 in B-flat Major, Op.38 (‘Spring)

Andante un poco maestoso. Allegro molto vivace

Larghetto

Scherzo: Molto vivace. Trio 1: Molto piu vivace. Trio 2

Finale: Allegro animato e grazioso

 

 

I N T E R M I S S I O N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1 D장조, Op.19

Sergei Prokofiev Violin Concerto No.1 in D Major, Op.19

Andantino

Scherzo:Vivacissimo

Finale: Moderato

협연_ 다이신 카지모토(Daishin Kashimoto)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Igor Stravinsky The Rite of Spring

 

Part I.

Introduction

Augurs of Spring

Ritual of Abduction

Spring of the Rival Tribes

Procession of the Sage: The Sage

Dance of the Earth

 

Part II.

Introduction

Mystic Circles of the Young Girls

Glorification f the Chosen one

Evocation of the Ancestors

Ritual Action of the Ancestors

Sacrificial Dance

 

Otto Klemperer
New Philharmonia Orchestra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는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민주적인 자치제도로 운영되고 있어서 지금도 상임 지휘자, 오케스트라 매니저, 오케스트라 단원을 모두 단원들의 투표에 의해 선정한다. 선정된 단원은 1년간의 수습 기간을 거친 뒤에 정단원이 되며, 10년간 일한 단원은 연금 혜택을 받는다. 베를린 필은 1년에 약 100회의 콘서트를 하는데 외국 연주도 많이 한다. 운영은 콘서트 티켓 판매, 음반 녹음, 방송 등을 통해 얻는 수입으로 충당한다.

현재 총 114명의 멤버로 구성된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 속에 작은 단위로 활동하는 악단이 포함되어 있다. 2002년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에서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연주하여 화제가 된 '12 필하모닉 첼리스트'(Twelve Philharmonic Cellists)를 비롯하여 브란디스 쿼텟(Brandis String Quartet), 웨스트팔리안 쿼텟(Westphalian String Quartet), 필하모닉 옥텟(Philharmonic Octet) 등도 들어있다. 또 몇 멤버들은 빈 필하모닉의 멤버들과 비정기적으로 빈-베를린 앙상블을 만들어 활동한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1862년 벤야민 빌제(Benjamin Bilse)가 만든 빌제의 악단(Bilsesche Kapelle)이 그 시작이다. 처음 50명으로 구성된 이 악단은 대단한 인기 속에서 20년간 약 3천 번의 콘서트를 했으나 재정 문제와 지도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882년 폴란드 공연을 하면서 단원들은 빌제에게 불만이 커졌다. 기차 좌석은 약속했던 3등칸이 아니라 4등칸이었고 보수도 깎였다. 이에 대해 단원들은 계약 만기일이던 4월 30일 전까지 보상할 것을 요구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45명의 단원이 빌제에게서 떨어져 나와 5월 1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sches Orchester)라는 새로운 이름의 자치단체를 결성하였고 당시 루빈스타인과 한스 폰 뷜로우를 데리고 흥행하던 에이전트 헤르만 볼프(Hermann Wolff)에게 찾아가서 '몸을 맡기고' 1882년 9월 17일 바그너의 '마이스터징어' 서곡으로 첫 연주를 시작했다. 당시는 음악회에서 가벼운 식사를 주는 것이 관례였고 관객들은 식사하면서 연주를 감상했다. 그러나 베를린 필은 식사를 주지않았다. '음악에 집중하라'는 표어를 내걸었지만 실제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헤르만 볼프가 재정과 운영을 맡기는 했으나 초기에는 그만큼 어려움이 많았다. 순회공연을 갔던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악기가 모두 타버리기도 했고 수입도 형편없었다. 그 시기에 지휘를 맡았던 루드비히 폰 브레너(Ludwig von Brenner)는 힘들게 이 단체를 음악적으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베를린 필의 본 모습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진짜 베를린 필의 시작은 초대 상임 지휘자로 꼽히는 한스 폰 뷜로우(Hans von Bulow) 부터다. 뷜로우는 재능있는 피아니스트로 리스트에게 인정 받았으며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미국에서 초연했다. 그러나 스승이자 대선배인 바그너를 만나면서 피아노를 떠나 지휘자라는 '딴 길'을 걷게 됐다. 결국 그는 바그너 작품의 지휘를 하게 됐지만 그 대신 바그너에게 부인 코지마(Cosima)를 뺏겼다.

그런 상태로 뮌헨을 떠난 뒤의 뷜로우는 마이닝겐 궁정극장의 음악감독을 맡은 채 가끔 유럽과 미국까지 다니면서 오직 음악에만 정열을 쏟았다. 마침 그의 에이전트를 하던 볼프는 손에 들어온 베를린 필의 전권을 뷜로우에게 맡겼고 두 사람은 배짱 좋게 고집스런 음악을 시작했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혁신적으로 꼽히던 '혁명 지휘자' 뷜로우는 1887년 상임 지휘자가 된 후 5년간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품을 택하여 음악의 수준을 최고로 올려놓았다. 뷜로우는 협주곡을 포함한 모든 '달콤한 음악'은 과감히 내던지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에서 현대에 이르는 교향곡만 연주했다. 보통 하루 저녁에 교향곡 세 편을 연주했는데, 한 번은 베토벤 9번 연주에 대해 관객 반응이 시원치 않다고 '객석의 출입문을 다 잠그고' 다시 한 번 연주한 적도 있었다. 뷜로우는 그는 당시 브람스, 그리그 등과 교류하며 차이코프스키, 말러, 리하르트 쉬트라우스 등을 객원 지휘자로 초대하여 (원래 롤러 스케이트장을 개조하여 만든)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장을 진정한 예술의 전당으로 바꾸었다. 1892년 뷜로우가 건강이 나빠 은퇴하고 2년 뒤 사망했을 때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의 장례식에서 연주했다.

한스 폰 뷜로우가 떠난 뒤, 헤르만 볼프는 그 후 7년간 한스 리히터(Hans Richter), 리하르트 쉬트라우스(Richard Strauss) 등 여러 유명 지휘자들을 초대하더니 1895년에야 헝가리 출신의 아르투르 니키쉬(Arthur Nikisch)를 상임 지휘자로 선정했다. 성격도 차분하고 지휘봉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조용한 지휘자' 니키쉬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낭만주의 작품들을 연주하며 그 서정성을 잘 표현하여 명성을 더욱 높였고 레퍼토리도 넓혔다. 브루크너, 차이코프스키, 베를리오즈, 리스트 등과 교류하면서 당시로는 혁신적이던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와 말러의 작품도 연주했다. 초대한 독주자 중에는 부소니(Ferruccio Busoni), 바카우스(Wilhelm Backhaus), 카잘스(Pablo Casals), 하이페츠(Jascha Heifetz) 등도 있다. 니키쉬는 27년간이나 베를린 필을 이끌다가 1922년 사망했다.

니키쉬가 사망한 1922년 그 뒤를 이어 지휘봉을 받게 된 것은 베를린 출신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 ngler)였다. '불같은 열정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니키쉬의 전통을 따라 낭만주의 작품들에 주력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제 1차 세계대전과 바이마르 시대, 음악적으로는 후기낭만파와 아방가르드의 갈등 시대를 넘어갔다. 푸르트벵글러는 주로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의 작품들을 연주했으며 특히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의 독특한 해석은 큰 찬사를 받았다. 그리면서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 쇤베르크의 작품에도 정성을 들였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베를린 필은 많은 순회 연주를 했고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오스카 프리트(Oskar Fried),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같은 지휘자들을 초대하였다. 뛰어난 솔로이스트 초대도 아주 활발하여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도 협연했고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은 12살에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하며 음악계에 데뷔하였다.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이 세계를 휩쓸던 어려운 시기에 베를린 필하모닉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 시, 독일 정부, 베를린 라디오 방송국의 후원 덕분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푸르트벵글러는 공개적으로 힌데미트를 두둔하여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Goebbels)와 마찰을 빚었고 그 결과 상임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1935년 다시 지휘대에 서게 된 것은 정치와의 싸움에서 예술이 승리한 사례로 꼽힌다.

베를린 필의 더 어려운 시련은 1944년부터 찾아왔다. 1월의 폭격으로 연주회장이 파괴된 상태에서도 베를린 필하모닉은 다른 장소를 빌려서 연주를 계속했다. 베를린이 함락된 것은 1945년 4월 말이었는데 베를린 필하모닉은 나치 치하의 4월에도 연주회를 했고 연합군 치하의 5월에도 연주회를 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단원들을 모아 두 음악회의 지휘를 맡았던 것은 모스크바에서 출생한 독일인 레오 보샤르트(Leo Borchard)로 알려졌다. 1945년 푸르트벵글러가 나치동조 죄로 억류되자 5월에 보샤르트가 상임지휘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8월 23일 베를린의 한 검문소에서 운전사가 정지 신호를 무시하는 바람에 미군 병사의 총격을 받아 보샤르트는 사망하였다.

푸르트벵글러가 구금되고 보샤르트가 죽자 다음 지휘자로 선정된 것은 루마니아 출신의 33세 청년 세르기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였다. 이때 첼리비다케와 함께 물망에 올랐던 것이 바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무척 견제했으며 그 때문에 첼리비다케를 선호했다고 한다. 울름과 아헨의 오페라하우스를 거쳐 빈 필, 암스테르담 콘체르트헤보, 베를린 국립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하며 무섭게 성장한 신예 카라얀이 자신과 동등하게 취급되는 것을 푸르트벵글러는 참을 수 없는 자존심의 상처로 받아들인 것이다. 카라얀을 제치고 지휘봉을 잡은 '괴팍한 지휘자' 첼리비다케는 히틀러 시대에 단절되었던 외국 음악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그동안 금지되었던 현대작품들을 많이 연주하여 찬사를 받았으며 외국 순회연주도 시작했다. 1947년 푸르트벵글러가 석방된 뒤로 두 사람은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했다. 그런데 첼리비다케는 중요한 수입원인 녹음을 못하도록 거부했고 또 폭군적이고 완벽주의 성향으로 단원들에게 복종을 요구했으며 맘에 들지 않는 단원에게 폭언도 서슴치 않아서 단원들로부터 신임을 잃었다고 한다.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자, 첼리비다케의 놀라운 지휘 능력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은 1955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을 상임지휘자로 선정했다. 빈과 런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얻은 카라얀의 명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음반 녹음에 대해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폴 로빈슨이 쓴 카라얀 전기를 보면 1955년 베를린 필 단원들은 미국 순회연주를 위한 지휘자로 카라얀을 최우선으로 뽑았다고 한다. 그러자 카라얀은 이를 수락하면서 '그 대신 나를 종신 상임 지휘자로 선발해 달라'고 조건을 달았다는 것이다. 그런 거래(?)에 의해 순회연주를 다녀 온 뒤 카라얀은 정식으로 상임 지휘자가 됐다고 한다.

'황제 지휘자' 카라얀의 길고 화려한 재임기간 중 베를린 필하모닉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품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주요 20세기 작품들을 빠트리지 않았고 매 시즌 중 다섯 번의 콘서트는 20세기 작품으로 연주하며 10여 편의 현대 작품들을 초연하였다. 카라얀과 함께 순회공연과 음반을 녹음하면서 베를린 필하모닉은 세계적 명성과 베를린 필하모니커(Berliner Philharmoniker)라는 애칭도 얻었다. 새 연주회장도 지었다. 1963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 세워진 켐퍼플라츠의 필하모닉 홀(Philharmonie on Kemperplatz)은 건축가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이 디자인한 것으로 좌석 2천 석에 인상적인 슈케(Schuke) 오르간까지 설치되었으며 1987년에는 챔버 뮤직홀이 증축되었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2년 여성 클라리넷 주자 자비네 마이어 사건 때문이다. 카라얀은 최초로 이 여성 주자를 정식 단원으로 뽑자고 했으나 보수성향이 강한 단원들은 이에 반발하였다. 화가 난 카라얀은 '종신 상임 지휘자의 역할을 수행하되 녹음을 비롯한 수익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1년간의 수습으로 자비네 마이어를 활용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지만 카라얀과 단원들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35년 가까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끈 카라얀이 1989년 지휘대에서 내려와 세상을 떠나자 지휘봉은 그 해에 이탈리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로 넘어갔다. 아바도는 전통적인 고전 낭만 작품들과 함께 20세기 작품을 더 많이 연주하였고 '파우스트', '고대 그리스 드라마', '셰익스피어' 등 주제가 있는 콘서트를 시작했으며 처음으로 오페라도 콘서트에 포함시켰다. 아바도 시기에 유럽의 클래식 유행 중 하나는 원전악기와 정격연주였다. 이것은 통상적인 연주에서 벗어나 작곡가의 의도와 작품 자체에 더욱 접근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움직임은 아바도에게 영향을 주었고 베를린 필은 작품에 대해 더 세밀하게 분석하고 그에 맞는 연주법을 찾아내어야 했다.

12년을 이끈 아바도에 이어 2002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봉을 잡도록 선정된 것은 영국 출신의 사이먼 래틀 경(Sir Simon Rattle)이다. 오케스트라를 철저히 통제하여 좀 더 세밀한 음악을 표현한다는 사이먼 래틀이 12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베를린 필하모닉과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음악을 들려줄 지는 세계의 모든 음악 팬들이 궁금하게 기다리고 있다.

 

 

사이먼 래틀 경(Sir Simon Rattle) 소개 사이먼 래틀 경(Sir Simon Rattle) 소개

'사이먼 래틀 경'은 2002/03 시즌,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부임했다. 1955년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난 '사이먼 래틀 경'은 런던 왕립 음악원에서 지휘를 공부했다. 1974년 존 플레이어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번머쓰 심포니 앤 신포니에타의 부지휘자로 취임하였으며, 1980년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 겸 예술 고문으로 지냈으며, 이후 1990년 9월부터 1998년 8월까지 음악감독으로 재직했다. 1992년 10월부터 계몽시대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 버밍엄 현대음악단의 예술 고문으로 있다. 1979년 로스엔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북미 데뷔 무대를 가진 이래, 1981년부터 1994년까지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이 외에도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시카고 심포니,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토론토 심포니, 보스톤 심포니 등을 지휘했다.
'사이먼 래틀 경'은 2004/05 시즌, 베를린 필하모닉을 그들의 본거지인 베를린에서 지휘하며, 유럽과 일본 투어, 2005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벤자민 브리튼의 "피터 그라임스(Peter Grimes)"를 최초로 지휘하였다. 영국 왕실은 음악에 대한 그의 공헌을 인정하여 C.B.E.를 수여했으며, 1994년 Birthday Honours List에서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그는 BC Music Magazine Outstanding Achievement Award를 최초로 수상하였으며, Loyal Society of Arts Albert Medal을 수상했다. 또한, South Bank Show Awards 오스트리아의 1등급 십자 문화예술 명예 훈장을 수상했다

 

 

사이먼 래틀 경(Sir Simon Denis Rattle, CBE, Hon DMus, 1955년 1월 19일~)은 영국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다.

리버풀에서 태어나 런던왕립음악원(Royal Academy of Music)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본머스의 본머스 관현악단과 리버풀왕립 리버풀 필하모니 관현악단 부지휘자를 거쳐, 1980년 버밍엄버밍엄 시립 교향악단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그 곳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을 영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로 발전시켰다. 특히 현대음악과 말러의 교향곡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눈길을 끌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지휘자 중 한명으로서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87년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을, 1994년에는 Knight Bachelor(기사작위)를 받았다.

2002년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후임으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으며, 2010년의 투표를 통해 임기가 2018년까지 연장되었다.<위키백과>

 

 

 

 

 

 

경력/ 2003 ~ 베를린 필하모닉 재단 지휘자
2002 ~ 2006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1999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
1980 ~ 1998 버밍햄시 오케스트라 지휘자, 음악감독
1980 ~ 영국 버밍엄시 교향악단 수석지휘자, 음악고문
1977 ~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보조지휘자
1974 ~

본머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보조지휘자

 

수상/ 2000 그라머폰상 올해의 음반상
- 영국 CBE 훈장
1993

그라머폰상 올해의 예술가상

 

 

 

Schumann, Symphony No.1 Op.38 "Spring"

슈만 교향곡 1번 '봄'

Robert Schumann 1810-1856

 

 

 1840년 로베르트 슈만은 나이 서른이 되어 천신만고(한때 피아노 스승이었던 장인의 결혼 반대) 끝에 법정 소송까지 불사하여 클라라와의 결혼에 성공하고 이는 자신의 작곡 인생에 있어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데 두해에 걸쳐 가곡과 교향곡의 절반을 작곡하게 됩니다. 슈만이 1832년 손가락을 다쳐 그 이후 작곡과 평론에 전념하게 되었지만 대부분 피아노 독주를 위한 소품이나 소나타에 치중하여 작곡을 해왔던 것에 비하면 이와 같은 창작력의 엄청난 분출은 당시 자신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던 장애물이 제거되어 결혼에 성공했다는 행복이 그 원천이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좀처럼 착수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머뭇거렸던 교향곡에도 본격적으로 손을 대어 그 결과 1841년 3월 슈만의 교향곡 1번 '봄'(Spring, B장조)이 친구인 멘델스존의 지휘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연주로 초연되고 큰 호평을 받게 됩니다.  물론 신혼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슈만과 그의 아내 클라라도 참석하여 감격에 젖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했겠죠. 슈만의 일기에 의하면 1841년 1월 23~26일 나흘 사이에 경이로울 정도의 속도로 교향곡 전체 스케치가 완료되었다고 명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역시 가족의 행복과 평화로움이 인간에게는 목표이자 힘의 원천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께도 어느새 우리 주위에 머물며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는 ‘봄’이 빨리 느껴지고 즐길 수 있는 행복한 나날이 찾아오기를 바라며...

작곡가 슈만, 음악으로 봄을 노래하다

1악장 : 안단테 운 코포 마에스토소-알레그로 몰토 비바체

‘안단테 운 포코 마에스토소’(안단테로 조금 장엄하게)로 지정된 B플랫 장조 4/4박자 도입부는 두 대의 호른과 트럼펫이 나란히 연주하는 팡파르로 시작한다. 주부의 1주제와도 연관이 있는 이 악상은 총주로 다시 한 번 반복되며, 이후 점차 템포가 빨라져 주부로 들어간다. ‘알레그로 몰토 비바체’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경우 ‘비바체’는 템포 지정이라기보다는 그냥 ‘활기차게’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즉 ‘알레그로로 매우 활기차게’가 된다. 제시부는 현악기 중심으로 연주되며 기교면에서 다소 까다로우면서 상쾌한 느낌을 주는 1주제와 함께 시작한다. 곧이어 등장하는 2주제는 목관 위주이며 서정적이고 느긋한 표정을 띠고 있어 좋은 대비를 이룬다. 발전부는 1주제를 구성하는 각 동기가 각자 다채롭게 발전하면서 진행된다. 주의할 점은 서주 팡파르의 재현은 엄밀히 말해 재현부의 첫머리가 아니라 발전부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이어 재현부를 거친 다음 코다로 이어져 도입부 음형을 약간 변형한 악구와 더불어 마무리된다.


1. Andante Poco Maestoso-Allegro Molto Vivace

2악장 : 라르게토

E플랫 장조 3/8박자. 3부 형식인데 실질적으로는 단일 주제가 지배하고 있다. 독특한 당김음을 지닌 이 주제는 매우 온화한 느낌을 주며, 1악장 1주제와도 관련이 있다. 1바이올린이 옥타브로 주요 주제를 연주한 다음 경과구(중간에 B플랫장조로 조바꿈한다)를 거쳐 다시 원조로 복귀한다. 코다에서는 트롬본이 3악장을 암시하는 악구를 연주하면서 G단조로 바뀌고 쉼 없이 3악장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2. Larghetto

3악장 : 몰토 비바체

D단조 3/4박자. 두 개의 트리오를 지닌 스케르초이다. 현이 주요 주제를 거칠게 연주하는 스케르초 섹션에 이어 등장하는 1트리오는 D장조 2/4박자이며, 다시 스케르초 섹션을 거쳐 2트리오(B플랫장조 3/4박자)로 접어든다. 세 번째 스케르초 섹션은 단순히 원래 스케르초를 반복하지 않고 새로 작곡된 것으로, 주요 주제가 한 번 나타난 뒤 코다로 이어진다. 코다는 D장조로 1트리오를 회상한 뒤 끝난다.


3. Scherzo (Molto Vivace)

4악장 : 알레그로 아니마토 에 그라치오소

B플랫 장조 2/2박자. 짧은 서주 후 소타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주부로 들어간다. ‘알레그로 아니마토 에 그라치오소’는 ‘알레그로로 생기 있고 우아하게’라는 뜻이다. 서주의 상승하는 음형은 2주제부와 발전부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주부는 1바이올린이 연주하는 나긋나긋하고도 낙천적인 1주제로 시작된다. 2주제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슈만의 피아노곡 <크라이슬레리아나>의 마지막 곡 주제와 동일하며, 후반부는 서주부 음형을 차용하고 있다. 2주제가 D단조로 되풀이된 후 1주제가 재등장하고, 2주제 후반부 음형이 전개되면서 제시부가 끝난다. 이것이 한 번 되풀이된 다음 발전부로 넘어간다. 비교적 짧은 발전부에 이은 재현부는 제시부와 비슷하게 진행되지만 2주제는 C단조와 G단조로 두 번 연주된다. 힘찬 코다와 함께 전곡이 마무리된다.


4. Allegro Animato e Grazioso

 

프로코피에프 /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D장조 op. 19

 

아이작 스턴,유진 오먼디,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Isaac Stern

 

Isaac Stern의 명언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
그를 만난 어떤 사람이

"당신처럼 연주할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

고 말하자 스턴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한 일이 바로 그겁니다."

 

스트라빈스키//봄의 제전 (Le Sacre du printemps (The Rite of Spring))

 

 

음악듣기/ http://blog.daum.net/wonskim5223/4993

Part 1: L'Adoration De La Terre: Introduction  08'01
- Les Augures Printaniers - Danse Des Adolescentes - Jeu De Rapt  
Part 1: L'Adoration De La Terre: Rond Printanières  06'16
- Jeux Des Cités Rivales - Cortège De Sage 
Part 1: L'Adoration De La Terre: Le Sage - Danse De La Terre  01'33
Part 2: Le Sacrifice: Introduction   04'26
Part 2: Le Sacrifice: Cercles Mystérieux Des Adolescentes  03'27
Part 2: Le Sacrifice: Glorification De L'Élue  06'02
- Évocation Des Ancêtres - Action Rituelle Des Aancêtres 
Part 2: Le Sacrifice: Danse Sacrale (L'Élue)  05'01

제 1 부: 대지에의 찬양
1. 서곡  / 2. 봄의 싹틈과 젊은 남녀의 춤   / 3. 유괴의 유희  / 4. 봄의 론도 
5. 적대하는 도시의 유희  / 6. 현인의 행렬   / 7. 대지에의 찬양   / 8. 대지의 춤  
      
제 2부: 희생의 제사 
1. 서곡    / 2. 젊은이의 신비한 모임   / 3. 선택된 처녀에의 찬미  
4. 조상의 초혼    / 5. 조상의 의식   / 6. 신성한 춤, 선택된 처녀  



1부. 대지에의 예배
막이 오르면 원시시대의 황량한 고원이 나타나고 깍아세운 바위 둘레에 원시부족이 모여든다.
그들은 바위를 숭배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지를 두드리며 봄이 오는 것을 축하하는 젊은 남녀의 춤
이 이어진다. 흥분한 청년들은 마음에 드는 처녀들에게 달려들어 약탈하는 춤을 추다 쌍쌍이 된
남녀들의 춤이 이어진다. 이들은 모의 전쟁과 경기의 춤을 추는데 이때 부락의 장로들이 나타나
이들을 진정시키고 대지를 경배하는 예식을 행한 뒤 대지의 춤을 추게 한다.

2부. 희생
젊은 남녀들의 신비로운 모임이 열리고 여기서 봄을 맞이하기 위해 한 처녀를 희생시키는 의식
을 시작한다.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를 한사람 선출하고 뽑힌 처녀가 여신인 것 처럼 그 주위를 돌며
젊은 남녀들이 봄의 영광을 찬송하는 춤을 춘다. 그런 다음 선택된 처녀는 신에게 바쳐지는 희생
의 춤을 추기 시작하고 광란의 춤으로 남녀들을 흥분으로 몰아간다. 그 순간 선택된 처녀는 숨을 거
두고 여섯명의 남자들이 그녀의 시체를 들고 나가며 막이 내린다.

 
스트라빈스키 / 발레음악 봄의 제전

스트라빈스키 작곡의 발레음악. 러시아발레단의 S.P. 디아길레프의 의뢰로 만들었다. 제1부
<대지예찬>과 제2부 <회생>의 14곡으로 되어 있으며, 러시아의 대지와 태양신을 찬미한 토속
적이고도 이교적(異敎的)인 내용이다.

음악적으로는 리듬이 지닌 원시적인 에너지를 생생하게 표현한 데 큰 특징이 있다. 이것은
고도로 복잡화한 예술을 파괴하는 도전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1913년 W. 니진스키 안무에 의한
파리의 샹젤리제극장에서의 초연은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 스트라빈스키의 대표작일 뿐
만 아니라, 20세기 음악의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Igor Stravinsky, 1882~1971)  

소련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스트라빈스키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면서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서 작곡 개인지도를 받았다. 1908년 관현악곡 《불꽃》으로 러시
아 발레단의 디아길레프에게 인정을 받고, 그의 의뢰로 발레곡 《불새》(1910), 《페트루시카》
(1911)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둠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913년 발표한 《봄의
제전》으로 파리악단에서 찬반 양론의 소동이 일어났으며, 이 곡으로 당시 전위파 기수의 한
사람으로 주목받게 되었고,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조국을 떠난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신고전주의 작풍으로 전환하였다. 그
리고 고전 시대와 바로크 시대 음악의 정신을 부흥시키려고 한 음악풍조는 제1·2차 세계대전 사
이에서 유럽 음악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는 이 시기의 풍조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1934년 프랑스에 귀화했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45년 미국으로 망명, 귀화하여,
한때의 침체기를 거쳐 3악장의 교향곡(1945)과 미사(1948) 등으로 재기, 다시 제2의 전기(轉機)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만년에는 종교음악에 관심을 두어 《설교, 설화 및 기도》(1961), 칸타타
아브라함과 이삭(1963), 합창곡 케네디의 추억을 위하여(1965) 등의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