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 2013년)

율리아 피셔 & 드레스덴 필하모닉/10.30.수/예술의 전당

나베가 2013. 11. 9. 16:29

 

Lohengrin - Prelude to Act III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
3막 전주곡
Wilhelm Richard Wagner (1813 ~ 1883)


로엔그린은 중세의 독일 전설에 나오는 기사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로엔그린 전설은 영국의 아서왕에
대한 전설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서 왕의 원탁의 기사 중에 퍼시발(Percival)이 있는데, 이 퍼시발기사
가 독일에서는 성배의 기사, 파르지팔(Parzival)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기사에 관한 이야기가 바그너
의 오페라, Parsifal(파르지팔)입니다.

성배의 기사 파르지팔에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이 로엔그린이며 아버지 뒤를 이어 성배
의 수호기사가 되었고, 동생은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아 다스렸다고합니다. 로엔그린의 이름도 몇 차
례 바뀝니다. 처음에는 로에란그린(Loherangrin), 그 다음에는 로엔그렐(Lohengrel), 그러다가 13세
기에 로엔그린으로 되었다고합니다.

이 당시, 중세에는 백조가 끄는 작은 배를 타고 여기 저기에 나타나 어려움에 처하여 있는 처녀들을 구
해주는 내용의 백조의 기사 이야기도 있었는데, 이 이야기와 로엔그린 기사의 이야기가 합쳐져서 지금
의 로엔그린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즉, 로엔그린을 한마디로 말하면 '백조의 기사'입니다.


NBC Symphony / Arturo Toscanini, conductor

Seattle Symphony / Gerard Schwarz, conductor

브람스:바이올린 협주곡

Johannes Brahms (1833 - 1897)
Concerto for Violin & Orchestras in D major, Op.77
1악장은 용량이 커서 파일을 3개로 잘라 저장
1. Allegro non troppo
2. Adagio
3. Allegro giocoso, ma non troppo vivace
Anne-Sophie Mutter , violin
Kurt Masur . conductor
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
Live Rec. Avery Fisher Hall, New York, 07/1997
이 곡은 많은 명반들을 남기고 있지만, 소피 무터의 연주는 브람스의 협주곡 음반들중에서 인지도가 조금은 뒤진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브람스의 곡 중에서도 평온, 온화한 서정성이 뛰어난 선율미를 가진 이 협주곡을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의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잘 표현되고 있는것 같다. 물론 오이스트라등의 비루투오적인 깊은 느낌은 없다. 그의 보잉과 활의 터치에서 나오는 바이올린 소리는, 첼로나 비올라를 무색하게 할만큼 풍성한 울림을 들려주며 강렬함과 여리고 세심한 서정성이 동시에 느껴진다. 오이스트라의 이런 서정성은 그의 이미지와는 상반되게 보일 수 있는, 모차르트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오이스트라흐의 모차르트 협주곡 음반들도 그 만한 명반을 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곡의 심포닉한 웅장함과 상반되어 공존하는, 평온하며 목가적인 한가로움까지 느끼게 하는 이 협주곡의 서정적인 선율에서 본다면, 여성 바이올리니스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감성의 무터의 연주는 이를 잘 표현해주고 있고, 편안히 빠져 들을 수 있는 연주인 것 같다. 개인적 느낌이겠지만 음악도 청취시의 환경과 심적 상태, 그리고 시각, 이미지적인 면도 조금은 있다고 본다. 어린 시절 천재성을 나타내며 캬라얀의 열열한 지지를 받으며 성장한 무터의 아름다운 외모도 연주자로서, 또한 상업적인 그녀의 성공에 한 몫을 했을 것이고.. 가끔 무터의 음반에 손이 가는 것도 그녀의 출중한 외모에서의 매력에서 찾는 것일 수도 있다. ^^*
브람스 -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77
베토벤, 멘델스존의 작품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 불려지는 걸작인 바이올린 협주곡은 브람스가 이탈리아 여행 후에 휴양지 페르차하에서 창작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1978년 봄에 브람스는 처음으로 동경하던 신중한 준비까지 하며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 돌아온 후 여름에는 마음에 드는 페르차하에서 창작에 몰두했고, 이탈리아 여행에서의 음악적 영향은 이 바이올린 협주곡과 무관치 않으며, 이탈리아 여행중에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려고 생각하여 스케치도 시작하였지만 결국은 바이올린 협주곡에 집중했다. 처음으로 다룬 작품이자 그의 단 하나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곡의 초연은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 1879년 라이프치히의 게스트반하우스 관현악단의 제11회 예약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이 협주곡의 작곡에 브람스와 논의를 지속했던 요하임의 바이올린을, 지휘는 브람스가 했고다. 초연에 사용된 악보는 논의와 수정을 거치며 초연 논의 등의 사정으로 인해, 손으로 씌여진 악보로 행해졌다. 초연은 대성공으로 대부분의 비평가로부터 절찬을 받았다. 초연 이 후에도 부다페스트. 빈, 런던, 프랑크푸르트 등으로 급속하게 각지로 퍼져나가며 절찬 속에 재현되었다.
이 협주곡은 페르차하에서 완성된 D장조의 협주곡은 제2교향곡과 마찬가지로 D장조의 조성이다. D장조의 조성의 이 밝고 낭만적인 색채는 브람스가 이탈리아 여행 후 머물며 창작에 몰두하던 페르차하의 아름다운 풍경과 여유로운 생할이 담겨져 있는 온화하고 평온하며, 전원적인 면을 가진 서정적인 선율을 담아내고 있다. 이런 아름다운 선율미의 강조는 1877년. 막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의 초연 현장에서 브람스가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1844~ 1908)의 탐미적인 감미로운 음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며 받았던 인상을 이 곡에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클라라 슈만의 표현처럼 - '오케스트라는 독주자와 완전히 융화되었고, 1 악장의 정서는 마찬가지로 D장조의 제2 교향곡의 그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클라라의 표현에서 보듯이, 이 협주곡은 오케스트라와의 조화가 완벽히 이루어지며 구성적으로도 완벽함을 보여주는 곡이다. 곡의 구성은 특별히 새로운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고, 베토벤의 협주곡과 비슷하며 보수적이다. 이 협주곡은 이탈리아 여행 후의 작품으로 바이올린이라는 선율악기를 주역으로 하게 되면서 선율미를 중시하고 있다. 사라사테는 제2악장의 오보에 주제를 전곡에서의 유일한 선율이라고 했지만, 실은 노래하는 선율은 이 곡의 곳곳에 펼쳐져 있어 매우 서정적인 감미로움을 주고 있는 곡이다.
제1악장은 보수적인 고전 협주곡에서처럼 관현악의 제시부만으로 시작되고 있지만, 제3악장은 론도로 독주 바이올린이 먼저 주제를 제시하는 이례적이고, 당시의 협주곡으로서도 진귀한 것이다. 특히 이 곡의 특히한 점은 제1악장에 다른 사람의 손에 카덴자를 삽입할 여지를 남기고 있는데 이것은 브람스와 오랜 교분을 가지며 바이올린 협주곡의 작곡 뿐 아니라 바이올린에 관한 여가가지 조언과 논의를 하던 요하임의 체면과 명분을 세워주기 위한 배려 일 수도 있다. 이 곡은 많은 카덴자를 남기고 있다. 요하임이 쓴 것이 가장 인기를 얻고 있고, 이것과 나란히 사랑받고 있는 카덴자는 크라이슬러가 1928년의 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거장적인 기교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하이페츠의 것이라 할 수 있다.
-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의 카덴자를 만든 주요 바이올리니스트 -
레오폴드 아우어(Leopold Auer, 1845~1930), 아돌프 부슈(Adolf Bush, 1891~1952), 후고 세르만(Hugo Hernamn, 1844~1935), 토르 아우린(Tor Aulin, 1866~1914), 앙리 마그리트(Henri Marteau, 1874~1934), 야사 하이페츠(Jascha Heifetz, 1902~1987)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과 의견을 주고받은 작곡과정
브람스의 최초의 음악친구는 레메니(Eduard Remeni,1830~1898)이며, 레메니의 소개로 '요하임 Joseph Joachim (1831~1907)'과 알게 된 요하임은 브람스가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며 많은 조언과 논의를 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두터운 교분을 맺으며, 아래 글에서 보듯이, 브람스는 요하임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감명을 받았고,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의 집시 양식으로의 접근은 요하임의 곡과 얼마간의 관계가 있기도 하다. 브람스가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에서 과장된 것도 있지만, 실제로 브람스와 요아힘이 교환한 편지를 보면, 이 두 사람은 활발하게 의견을 주고 받았다.

'나의 오랜 친구인 당신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얼마나 마음이 설레였는지. 더군다나 4악장의 협주곡이라니……. 독주 부분을 세심하게 보고 있는데 몇 군데는 손을 좀 봐야할 것 같더군요. 물론 총보가 아닌 파트보만을 보고서 판단하기는 좀 어렵지만 말입니다. 이 협주곡은 대단히 독창적인 것 같습니다. 실제 연주할 때의 효과가 어떨지는 지금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이 삼일 내로 함께 만나서 여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습니다.'

1878년 10월 23일, 브람스는 요아힘에게 '지금 아다지오와 스케르초 부분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라는 편지를 보낸다. 한 달 후에는 '원래 계획했던 2개의 중간 악장을 빼버리기로 결심했고 대신 아다지오를 넣었어요. 이렇게 하는 것이 전체적인 구성에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요아힘의 역할은,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그러나 브람스가 요아힘의 기술적인 조언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요아힘은 너무 어려운 기교적인 부분을 수정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결국 완성된 판본은 브람스의 굳은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아힘의 역할은 비록 한정된 부분이지만, 분명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탄생에 하나의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영향을 비친 작곡가, 연주자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비오티(Giovanni Battista, 1831~1902)'의 [바이올린 협주곡 22번 a단조]에서도 영항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브람스가 바이올린 협주곡을 스케치하고 있던 1878년 6월. 뒤셀도르프 연주회에서 요함임의 지휘와 바이올린에 의해 브람스의 신작인 교향곡2번과 비오티의 협주곡등의 연주를 들은 후, 페르차하에서 클라라 슈만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찬사를 보내고 있다. '나를 완전히 사로잡은 것은 비오티의 '협주곡 22번'입니다. 대단히 독창적인 상상력이 인상적이었고 요아힘의 연주도 최고였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훌륭한 작품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이것은 이탈리아인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비루투오의 요소가 짙은 풍부한 환상성과 정열적인 솔직함에 사로 잡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이러한 것이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비오티 외에 브람스가 젊은 시절에 매료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는 '요하임 Joseph Joachim (1831~1907)'의 것이 있다. 이것은 1861년에 완성된 [1악장의 협주곡 g단조,Op.3]과 [헝가리조의 협주곡(Konzert in ungarischer Weise,Op.11)]으로 브람스에게 헌정된 두 곡 이다. 이 곡의 완성 과정에서도 두 사람은 두터운 교분으로 악보를 주고 받으며 의견을 주고 받은 것으로 보이며, '헝가리조의 협주곡'의 요하임의 곡에서 바이올린의 기교적이 패시지 기법과 집시 양식의 음악 처리를 익힌 것 같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의 집시 양식으로의 접근은 요하임의 곡에서의 영향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브람스는 같은 시대의 '막스 브루흐(Max Bruch, 1838~1920)'의 3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에도 주목하고 있다. 이 곡중에서 제1번과 3번을 특히 높히 평가했는데, 3번은 1981년에 출판된것으로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이 후의 것으로 특별히 관계는 없다. 제1번에 관해서는 1879년 가을의 요하임과의 연주 여행 프로그램에 이 1번을 넣을 것을 요하임에게 권했다. 그러나 이 두 협주곡은 브람스에게 강한 영항을 주지는 않은것 같다.
하지만 1877년 여름 바덴바덴에서 파블로 데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1844~ 1908)'가 연주하는 막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의 초연 현장에 있던 브람스는 이제까지 친하게 지내던 요하임의 바이올린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사라사테의 탐미적인 감미로운 음에 상당한 매력을 느겼던 것 같다. 그것과 동시에 브람스는 권위적인 거장 연주의 본질에 의문을 품으며, 재인식한 바이올린의 음과 협주곡의 모습을 자기나름대로 살린 협주곡을 쓰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다.

P.I.Tchaikovsky

Symphony No.4 in F minor,Op.36

Leningrad Philharmonic Orchestra

conductor - Evgeny Mravinsky

Recording - London,Wembley Town Hall 1960,9 

 

1,Andante sostenuto-Moderato con anima-Moderato assai,quasi Andante-Allegro vivo

2,Andantino in modo di canzone

3,Scherzo.Pizzicato ostinato.Allegro

4,Finale.Allegro con fuoco

 

 

 

[교향곡 4번]은 차이콥스키가 38세 때인 1878년 1월 7일 이탈리아에서 완성했다. 차이콥스키는 그 1년 전인 37세 때 제자이며 부인이었던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이혼한 뒤 그 쓰라림을 잊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 호반에서 요양하기도 했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상당히 힘든 상태였다. 이때 후원자 폰 메크 부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교향곡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36세 때인 1876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시절, 차이콥스키는 [백조의 호수]를 발표하며 러시아 음악계에 큰 화제를 몰고 왔다. 이때부터 9살 연상의 부유한 미망인 폰 메크 부인의 경제적 원조를 받게 됐다. 폰 메크 부인은 러시아 최초의 철도를 건설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남편이 6남 6녀의 열두 자녀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자, 자녀들의 교육에 전념하며 조용하게 살아가던 부유한 미망인이었다.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재정 원조를 받기 시작한 이듬해인 1877년 28세의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결혼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제자인 안토니나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는 안토니나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러시아 사회에서 끊임없이 그를 따라 다니며 괴롭혔던 ‘동성애자’라는 소문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런 마음에 안토니나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원하지 않던 결혼 생활은 2개월 만에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이후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의 재정적 지원으로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에서 요양을 하며 실패한 결혼으로 생긴 극도의 신경쇠약을 치유하면서 작곡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차이콥스키는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 아닌 조건으로 자신을 도와주었던 폰 메크 부인과 13년간 12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우게 되지만 끝내 사랑의 결실로는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폰 메크 부인이 보내 주는 연 6천 루블의 연금으로 서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 있었다. 1891년에는 미국의 초청을 받고 뉴욕 카네기 홀에서 지휘를 하는 등 많은 도시에서 공연해 갈채를 받았다.

 

파국을 맞은 결혼의 상처 

 

차이콥스키는 [교향곡 4번]을 1878년 이탈리아 산 레모에서 완성했다. 지금은 산 레모 가요제로 유명한 이탈리아 북서부의 휴양지이다. 차이콥스키는 [교향곡 4번]의 작곡 도중 폰 메크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저는 이 곡을 당신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이 속에서 당신이 익숙한 생각과 느낌이 반영된 것을 반드시 찾아내리라 믿습니다.” [4번 교향곡]의 표지에는 ‘나의 가장 좋은 벗에게’라고 적혀 있다. 이 벗이 폰 메크 부인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교향곡 4번]의 초연은 1878년 2월 22일, 모스크바의 러시아 음악협회 연주회에서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지휘로 행해졌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초연의 성공 소식은 당시 피렌체에 머물고 있던 차이콥스키에게도 전보로 전해졌다. 이후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친구 작곡가 타네예프에게 “이 곡은 내가 작곡한 작품 중 최고”라는 말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한 마디 한마디 내가 진실히 느낀 것을 표현했고 깊게 숨겨진 마음을 반영 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내용에서 이 작품에 쏟은 차이콥스키의 열의가 느껴진다. 변화무쌍하며 정열에 차있는 이 작품은 외로움을 비롯해 운명 앞에서 어찌할 도리 없는 인간의 감정이 묻어나기도 한다. 2악장은 애상적이지만 밝은 전원풍 춤곡의 분위기를 보여주며,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느끼는 적적한 기분, 정신적 피로에 지친 분위기도 엿볼 수 있다. 불행한 결혼이 자신의 운명을 할퀸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있는 듯 애상적이다.

 

 

1악장 - Andante sostenuto - Moderato con anima
서주는 소나타형식이다. 호른과 바순만의 최강주로 격렬하게 나오는 선율은 전곡의 중심적인 운명을 나타내며 이것이 반복되면서 확장된다. 주부로 들어가서 모데라토 콘 아니마로 시름에 잠긴 듯한 괴로움을 표현하는 제1주제와 클라리넷으로 표현하는 감미로우면서 서정적인 제2주제가 이어진다. 2개의 주제가 여러 갈래로 발전하면서 인간의 괴로움, 그리고 이와는 상반된 꿈에서 맛볼 수 있는 행복한 분위기가 교차한다.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1악장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들의 교향곡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주는 이 교향곡 전체의 핵심과 정수입니다. 이것은 '운명'입니다. 즉, 행복의 추구가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막고 평화와 위안이 성취되지 않는 것이라든지, 늘 구름이 끼어 있는 하늘 같은 숙명적인 힘입니다. 머리 위에 언제나 달려있는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흔들리며 영혼에 끊임없이 독을 부어 넣는 운명의 힘입니다. 이 힘은 압도적이며 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복종하여 잠잠히 불운을 슬퍼할 길밖에 없습니다.”

 

 

2악장 - Andantino in modo di canzona
차이콥스키 특유의 애상적이지만 밝고 북방적인 전원 춤곡의 분위기다. 한편,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적적한 기분과 아울러 피로에 지쳐있던 분위기도 엿볼 수 있다. 오보에가 처량하고 외로운 선율을 내고 이것이 발전되며 흥분에 가득 찬 부선율로 이어진다. 점점 강하게 밀어붙이는 현과 관의 조화가 선명하다. 플루트의 춤추는 듯한 선율과 농밀한 현의 대화 가운데 선율은 여전히 쓸쓸함을 드러낸다. 이어 거친 농민의 춤 혹은 러시아 무곡이라고 할 만한 소박하면서 쾌활한 주제가 중간부를 이루며 거칠고 단단한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후반부에는 느리고 목가적인 주제로 어두운 색조를 표현해주면서 조용히 끝난다. 차이콥스키는 2악장에 대해 "일에 지쳐 쓰러진 자가 밤중에 홀로 앉았을 때 그에게 감도는 우울한 감정입니다. 읽으려고 든 책은 그의 손에서 떨어지고 많은 추억이 샘솟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가 모두 지나가 버렸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것이겠습니까?“라고 폰 메크 부인에게 썼다.

 

 

3악장 - Scherzo - Pizzicato ostinato Allegro
기 전체의 피치카토시작되는데, 몽상적이면서 거칠고 황량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이어 현악기는 침묵하여 목관악기만이 러시아 민속무용과 같은 유쾌한 가락을 탄다. 그것이 멈추고 금관만이 행진곡풍의 고른 음을 낸다. 목관은 도중에 들어와 두 번째 부분과 중첩된다. 이어 첫 부분과 같이 현악기만이 피치카토로 으뜸선율을 내다가 목관이나 금관이 참여하여 지금까지의 선율을 단편적으로 전개시켜 종결부로 발전하다가 끝난다.


3악장에 대한 차이콥스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3악장은 이렇다 할 뚜렷한 정서나 확정적인 표출도 없습니다. 술을 마시고 얼큰히 취했을 때 우리들의 뇌리에 스며들어 오는 어렴풋한 모양입니다. 이 공상 속에 취한 농부와 흙냄새 풍기는 민요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멀리서 군악대가 지나가는 울림이 들립니다. 이것은 모두 잠자는 사람의 머리 속의 상상입니다. 현실과는 관계없는 혼란입니다.”

 

4악장 -Finale, Allegro con fuoco
자유스러운 론도 형식으로 힘찬 박력과 빛나는 색채감이 나는 오케스트라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숨 가쁜 강렬한 제1주제가 나오고 이어지는 제2주제는 러시아 민요에 의한 소박하고 아름다운 선율이다. 다시 1주제가 격렬하게 등장하고 난무하는 제3주제가 나타난다. 이 세 주제는 교대로 나와 각각 서로 얽혀 발전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1악장의 서주에 나온 주선율이 안단테를 위협하듯이 나타난다. 다시 원래의 알레그로로 돌아가서 3개의 주제가 광적이고 강렬한 종결부를 형성하며, 희열이 극에 달한 클라이맥스로 끝난다.

 
4악장에 대해 차이콥스키는 “자신 속에 환희를 찾지 못한다면 주위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겁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즐거워하고 환락에 몸을 던질까요. 그들의 감정은 소박하고 단순한 것입니다. 행복은, 단순하고 소박한 행복은 아직 존재합니다. 사람들의 행복을 기뻐하십시오.” 불행한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에 있었지만 행복을 느끼고 싶어 했던 인간 차이콥스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왠지 마음이 짠해진다.

 

 
글 류태형 / 음악 칼럼니스트

전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 전 <객석> 편집장 역임.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누비길 즐겨 한다

 

 
출처 : 네이버 캐스트

공연후기...

꼭 가고 싶은 공연이라서 기인 히말라야 여행직후 바로 다음날임에도 불구하고 예매를 했었던 공연이었는데....

폭설에 갇혀서 일정이 늦춰지는 바람에 우리 딸아이가 대신 간 공연이다.

 

얼마나 감동적이었으면, 해외에 있는 내게 공연이 끝난 후 감동의 문자 메시지가 날라왔다.

 

기막힌 공연이었다고...

연주 후 율리아 피셔의 싸인회가 열렸는데 줄이 끝을 모르고 이어져 있다고...

사람들이 그녀가 팬 사인회장으로 나오자, 꺄약 소리를 내며 '요정이야~~' 했다고... ㅎㅎ

 

이 몇 마디에 그날의 공연장 분위기가 싸악 파악이 되고도 남는다.

2곡의 앵콜 연주도 대단했었나 보다.

그야말로 그녀의 비르투오소적인 테크닉을 완전히 보여준....

이 역시 그 느낌이 파악 온다. ㅎㅎ

 

암튼...

집에 돌아온 내게 팜플릿을 내밀며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실물도 이렇게 이뻐??"

"훨씬 더 이쁘지~"

ㅎㅎ

 

여자들의 반응도 이런데 이날 남자들의 느낌은 어땠을까....

역시 연주와 더불어 연주자의 아름다운 미모는 감동의 깊이와 환상을 더 크게 심어주기에 충분한 거 같다.

 

욕심을 내서 예매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딸아이에게 이렇게 큰 행복감과 감동을 느끼게 해주었으니...

늘 시간이 없어 연주회 티켓을 그냥 날려보내기도 했는데, 모처럼의 딸아이의 여유로움을 보니 더욱 좋다.

 

나는 딸아이의 이야기와 팜플릿을 보며 그날의 연주를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다음에 또 볼 기회가 있겠지~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듣기/http://blog.daum.net/beutiful_life/15710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