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목요일] 음악을 말하다 2. 피아니스트 아비람 라이케르트의 관점
아비람 라이케르트 Aviram Reichert (Piano)
뉴욕 타임즈가 '깊이 있고도 탁월히 음악적인 연주자"라고 찬사를 보낸 피아니스트 아비람 라이케르트는 1997년 세계 최고의 피아노 콩쿠르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동메달을 차지하며 음악계에 그 이름을 알렸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출생으로, 텔아비브 루빈 아카데미에서 아리에 바르디를 사사한 그는 일찍이 쾰른 국제 콩쿠르와 일본 국제 콩쿠르에 입상하고 에피날 국제 콩쿠르, 동아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그 실력을 인정 받았다.
이스라엘 필하모닉, 예루살렘 심포니, NHK심포니, 도쿄 필하모닉, 도쿄 메트로폴리탄 심포니, 포트워스 심포니, 시카고 신포니에타, 사우스 캐롤라이나 필하모닉, 국립 도미니카공화국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정상급의 교향악단과 협연하였으며, 도쿄 현악 사중주단, 차이코프스키 현악 사중주단, 세종 솔로이스츠 등 굴지의 실내악단과 함께 연주 하였고, 가이 브라운슈타인, 다니엘 뮐러 쇼트, 앤 아키코 메이어즈, 바딤 글루즈만 등 동년배의 뛰어난 음악가들과 꾸준히 실내악 연주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라비니아 페스티벌, 클라비어 페스티벌 루르, 길모어 키보드 페스티벌, 베어 벨리 뮤직 페스티벌, 도쿄 뮤직 페스티발, 에피날 뮤직 페스티벌, 콜로라도 Music in the Mountain 페스티벌 등에서 연주하며 미주 전지역과 유럽, 남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를 고루 걸친 성공적인 콘서트 커리어를 구축한 동시에 2001년부터는 미국 미시간 주 그랜드 밸리 주립대학 기악과 부교수이자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로 임명되어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도 지속적으로 심혈을 기울여 왔다.
이를 높이 산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그를 최초의 정식 외국인 교수로 발탁함에 따라 그는 1996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국제 음악 콩쿠르인 제1회 동아국제음악콩쿠르(현 서울국제음악콩쿠르)의 우승자로서 인연을 맺은 한국에 13년 만에 돌아오게 된다. 그 후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코리안심포니, 프라임 필하모닉, 부천 필하모닉, 경기 필하모닉, 인천시향, 대구시향 등과 협연하고 정명화, 송영훈, 이경선, 김수연, 최은식, 채재일, 김영률 등 한국 최고의 솔로이스트들과 호흡을 맞추는 등 왕성한 연주 활동을 소화함과 더불어 수많은 제자들을 국내외 콩쿠르에 입상시키고 미국, 일본, 이스라엘, 남아프리카 등지의 유명 마스터클래스에 초청되어 강의하는 등 교육 활동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1997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당시의 연주 실황을 담은 앨범은 아르모니아 문디에서 출시되었으며 예루살렘 뮤직센터와 슈베르트 소나타, 모차르트 협주곡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스타인웨이 아티스트로도 활동 중이다.
음악을 말하다 - 2.
피아니스트 아비람 라이케르트의 관점 “Sonata”
Program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Domenico Scarlatti
건반악기를 위한 소나타 b단조, K.87, L.33 Sonata for Keyboard in b minor, K.87, L.33
건반악기를 위한 소나타 C장조, K.132, L.457 Sonata for Keyboard in C Major, K.132, L.457
건반악기를 위한 소나타 C장조, K.159, L.104 Sonata for Keyboard in C Major, K.159, L.104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30번 E장조, Op.109
Ludwig van Beethoven Piano Sonata No.30 in E Major, Op.109
Vivace, ma non troppo
Prestissimo
Andante molto cantabile ed espressivo (Variations 1-6)
알렉산더 스크랴빈 피아노 소나타 제5번, Op.53
Alexander Scriabin Piano Sonata No.5, Op.53
I N T E R M I S S I O N
알렉산더 스크랴빈 피아노 소나타 제9번 ‘검은 미사’, Op.68
Alexander Scriabin Piano Sonata No.9 ‘Black Mass’, Op.68
프란츠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제19번 c단조, D.958
Franz Schubert Sonata No.19 in c minor, D.958
Allegro
Adagio
Menuetto: Allegro
Allegro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30번 E장조, Op.109/듣기
http://tlstmfrl1207.blog.me/140054382082
스크리아빈 피아노 소나타 9번 <검은 미사>/듣기
http://blog.naver.com/preghiera7/140092821093
피아노 소나타 제5번 작품53
이 작품은 스크랴빈의 소나타 중에서 결정적인 국면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이 소나타 이래 소나타 형식을 가진 작품(교향곡도 포함해서)을 모두 1악장제로 하였고, 또 화성 어법을 확대하여 기능 화성법을 극도로 약하게 했다. 이 소나타에 연속되는 교향곡 '법열의 시'(1907∼1908년)에서는 '제5소나타'가 아직 남기고 있는 기능 화성의 세계도 대부분 잃어가고 있다. 그는 '제5번 소나타'를 쓴 직후 제자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자신에 넘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쓰고 있다.오늘 나는 제5번 소나타를 거의 다 썼습니다. 이것은 피아노를 위한 긴 시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쓴 피아노곡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입니다.
작곡 연대: 1907년에 스위스의 로잔에서 불과 6일(12월 8일-14일)만에 완성하였다. 그 때의 광경을 애인 타티아나는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 소나타는 그에게서 마치 샘물처럼 넘쳐 나왔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초연: 1909년 1월 31일,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작곡자 자신에 의하여 연주되었다. 연주시간은 약 11분.
해설
1악장, 서주, 알레그로 2/4박자-랑귀드 5/8박자, 주부, 프레스토 콘 알레그레짜 6/8박자. 소나타 형식. 이 곡에 있어서의 구조상의 현저한 변화는 통일적인 조 관계가 상실되고 있는 점일 것이다. 조표는 F#조를 나타내고 있지만, 첫머리(12마디)와 코다(6마디)는 E장조로 되어 있다. 서주는 전반의 충동적인 격렬함과 후반의 황홀한 분위기가 대비되어서 이 곡의 기본적인 내용이 나타난다. 특히 후반의 주제는 제3주제로써 발전한다. 주제는 3개가 있지만 중심은 제3주제로, 모두가 그 곳을 향해서 고조해 간다. 제1주제와 제2주제는 말하자면, 이 법열적인 제3주제를 인도하는 발걸음인 것이다. 제3주제는 교향곡 '프로메테(불의 시)'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작품의 구성상의 현저한 특징은 전개부(157∼328)의 현저한 확대이다. 여기서도 제3주제를 정점으로 해서 전개되고 있지만, 이 전개부는 종래의 힘이 맞붙는 장소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고 망아적인 어둠 저 편에 있는 카오스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구성 그 자체는 신비 사상과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Alexander Nikolayevich Scriabin(1872∼1915)
알렉산더 스크랴빈(=스크리아빈)은 1872년 1월 6일, 법률가를 아버지로, 피아니스트를 어머니로 하여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 얼마 안가서 어머니가 별세하여 숙모의 슬하에서 자라면서 피아노를 배웠다. 그의 어머니는 안톤 루빈스타인과 테오도르 레셰티츠키의 제자로 러시아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중 한사람이었는데, 알렉산더가 두살때 죽었고, 그의 아버지도 그의 곁을 오랫동안 떠나 있었기 때문에 숙모의 손에서 키워졌으나, 숙모는 일찌기 알렉산더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격려했다고 한다.
스크리아빈은 청년기와 유년기에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노트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전설, 생생한 상상력, 종교적인 것에 대한 사랑, ...고대의 성약과 선지자에 대한 소박한 믿음"
12세때 코누스에게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우고, 그후 한때 군인을 지망하여 유년 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시금 뜻을 바꾸어 피아노를 즈베리에프에게, 이론을 타녜에프에게 배웠다. 1888년 모스크바 음악원 피아노과에 입학, 피아노를 사포노프, 작곡을 타녜에프와 아렌스키에게 사사했다. 20세가 되던 해, 무리한 연습으로 인하여 그의 오른손에 부분적인 마비가 왔다. 이 사건은 종교적인 열정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자신감을 얻었고, 창작 세계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인간에게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철학자들과 친교를 맺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자각을 하게 된다. "나는 밝은 빛, 가장 위대한 태양이 되고 싶다. 나는 나의 빛으로 세계를 밝히고 싶다. ...나는 내가 창조한 것일 뿐이다."
오른손 염증에도 불구하고 금메달상을 타고 피아노과를 졸업, 그대로 음악원에 남으면서 아렌스키에게 푸가를 배웠는데 시험에 실패하여 작곡과를 졸업하지 못한채 음악원을 나왔다. 그러나 이 무렵 이미 자작의 피아노곡만으로된 리사이틀을 열고 있었다. 그것이 출판업자 벨랴에프에게 인정되어 작품 출판의 편의를 받는 한편, 1896년에는 벨랴에프의 후원으로 베를린·파리·브뤼셀·암스테르담·헤이그에 연주여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주: 동문 라흐마니노프와는 달리 스크랴빈은 오직 자신의 곡만을 연주했고, 다른 작곡가의 음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스크랴빈과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로서의 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작품에 대하여 존경을 지닌, 서로를 정말 좋아하는 건전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스크랴빈의 급작스런 죽음 후에도 라흐마니노프는 먼저 간 작곡가의 음악만을 위한 음악회 시리즈를 여는 등 그의 음악에 대한 높은 추앙을 표명했다고 전합니다.)
1897년 젊은 피아니스트 베라 이바노브나와 결혼, 1897∼98년 파리에서 조인트 리사이틀을 열었다. 귀국 후의 1898∼1903년까지 모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사임한 1903년부터 부유한 제자 모로조바의 원조도 있고 해서 스위스로 갔고, 1905년에는 다시 파리로 옮겼다. 그리고 1903년에 완성된 <신성한 시>는 니키시의 지휘로 1905년 5월 29일에 초연되었다. 그 무렵 아내 베라는, 사포노프의 진력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 교사가 되었고 스크랴빈의 작품에 의한 연속 리사이틀을 열었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스크랴빈은 베라와 별거하고, 애인 타티아나 시뢰더와 동거 생활을 했다.
1906년 12월, 뉴욕의 러시아 교향악협회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열고, 다시 시카고·신시내티·와싱턴·디트로이트 등에서 연주, 1907년 1월 뉴욕에서 타티아나와 합류했는데 그 스캔들 때문에 <법열의 시> 초연을 예정한 연주회는 취소당했다. 1908년 당시 베를린의 러시아 음악 출판협회의 리더였던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쯔키와 알게 되었다.
1908∼1910년을 브뤼셀에서 보낸 스크랴빈은 신지학(theosophy)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910년 쿠세비쯔키의 오케스트라와 볼가 지방을 연주여행하고, 1911년 3월 2일 <프로메테우스, 또는 불의 시 -The poem of fire>를 초연, 이어서 멩겔베르크와 콘세르트헤보우를 대동하고 네덜란드를, 1911∼12년 다시 러시아를 여행했다. 1914년 초, 처음으로 런던을 방문하고 헨리우드의 지휘로 <프로메테우스>를 재연해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후 다시 러시아 국내의 연주여행을 뜻했는데, 병으로 이루지 못한채 입술에 생긴 악성 종양이 악회해서 1915년 봄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스크랴빈은 후기 낭만파의 가장 개성적인 작곡가였다. 니키시·쿠세비쯔키·멩겔베르크 등 당대의 지휘자들의 원조 아래 세계적 명성을 차지했는데, 너무나도 개성적 혹은 개인적인 양식과 신비사상에 뒷받침된 과장된 작풍 때문에, 그후 한때 거의 망각된 상태로 있었다. 그러나 사후 반세기를 거친 오늘날 마땅히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평으로 되어 있다. 스크랴빈은 처음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출발하고, 수많은 피아노 소품을 썼다. <녹턴>, <에튀드>, <전주곡>이라는 표제가 보여 주듯이 거기에는 쇼팽의 영향이 강하게 보이는데, 이미 후년의 스크랴빈의 색채감의 경향을 엿볼수가 있다. 다시 그후 리스트나 바그너의 영향을 받는것과 동시에 인상주의적 작품을 썼다.
그의 음악기법의 변천은 1892∼1913년에 걸쳐 쓰여진 10곡의 피아노 소나타에서 똑똑히 더듬어 볼수 있다. 제6번 이후의 소나타에 있어서는, 사상적으로는 신지학에 입각한 신비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기법상에서는 <신비화음>이라 불리는 특유한 화성법에의 방향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제9·제10번의 소나타에서 정점에 이른다. 관현악 작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리스트·바그너의 영향으로부터 차츰 독자적인 양식에 이르는 경과를 더듬는 것이 가능하며, 1903년의 교향곡 제3번 <신성한 시>에서 <법열의 시>를 거쳐 최후의 <프로메테우스>에 이르는 작품에 있어서는, 관현악의 대편성화에서, 드디어는 <프로메테우스>에 있어서의 <색광 피아노> (7색의 무지개가 건반에 의해 스크린에 투사)의 사용에까지 도달하고, 신비주의적 사상과 독자적인 화성법과의 일체화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실현되지 못한 채 끝난 <신비>에 있어서는, 음악, 색광뿐만 아니라 무용이나 더 나아가서는 '향기'까지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신비화음>또는 <프로메테 화음>이라 불리는, 변격 하행을 수반하는 4도 겹침에 의한 특유한 화음을 포함해서, 기능화성에서 벗어난 화성법은, 무조음악에의 접근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 <신비화음> 및 그 화성법은 단순히 구성 수단으로서 중요했을 뿐만 아니라, <신비주의 사상>의 음악적 표현의 상징적 수단이기도 했다. 이 점이 뒤에 그를 등한시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스크랴빈의 음악생애 요약
1872 모스크바에서 탄생
1882-87 모스크바 육군유년학교 재학
1883 코누스에게서 피아노 레슨 시작
1884 타네예프에게서 화성 대위법 사사
1885-87 타네예프의 충고로 라흐마니노프의 스승인 저명한 N.즈베레프에게로 옮김
1888-92 사포노프, 타네예프, 아렌스키가 있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 오른손 염증에도 불구하고 금메달 수상.
1893 첫 작품의 출판, 몇달간 손 치료 받음
1894 1907년까지 그의 작품을 출판해준 M.벨라예프를 만남
1895 벨라예프의 후원으로 첫 연주회 개최(페테르스부르그)
1897 피아니스트 베라 이사코바와 결혼, 마주르카 작품3과 알레그로 작품4로 글링카상 수상
1893-03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서 교편, 그러나 작곡 시간이 여의치 않아 교직을 그만둠
1904 파리체류, 부인과의 결별 후, 타티아나와 재혼
1907 알트슈러의 도움으로 미국 연주여행 시작
1908 후에 그의 가장 견실한 지지자가 되는 쿠세비츠키와 만나 5년 계약을 맺음
1908-10 브뤼셀에 머물러 신지학회와 친분을 가짐.
1909년 황실 음악회의 초청으로 러시아에서 연주회를 갖고 격찬을 받음. 볼가 연주여행에 참가.
1911 <프로메테우스>로 글링카상 획득, 러시아 유럽으로 연주 여행
1913 결국은 미완성으로 끝나는
1914 영국 연주회, 신지학회와의 친분교류
1915 러시아 연주회, 종양으로 4월 14일 절명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제19번 c단조, D.958/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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