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 2013년)

서울시향 심포닉 시리즈-2/ 베토벤 어게인/5.24.금/예술의 전당

나베가 2013. 5. 24. 00:30

 

 

곡목 :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Beethoven, Violin Concerto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Beethoven, Symphony No. 3 "Eroica"

 

베토벤이 교향곡 장르에서 최초로 이룩한 혁신은 “영웅” 교향곡에서 나왔습니다. 낭만주의 시대 교향곡을 훌쩍 넘는 길이와 탄탄한 형식, 깊은 정서적 충격, 그에 어울리는 부제 "영웅“은 나폴레옹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작곡가의 혁명 선언입니다.

 

 

 [출연자]
 
지휘 정명훈 Myung-Whun Chung, conductor
세계 정상의 지휘자 정명훈은 1974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5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피아노 부문 준우승을 차지하며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뉴욕 매네스 음대와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공부한 그는 1978년 거장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상임지휘자로 재직하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가 되었다.
 
정명훈은 독일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1984~1990), 피렌체의 테아트로 코뮤날레 수석객원지휘자(1987~1992),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1989-1994)을 역임했다. 2000년부터 현재까지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음악감독을 맡고 있으며, 1997년부터 2005년까지 로마 산타 체칠리아 아카데미의 수석지휘자를 맡기도 했다. 또한 도쿄 필하모닉의 특별음악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으로 활동중이다.
 
정명훈은 그동안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런던 심포니,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뉴욕 필하모닉, 시카고 심포니,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등 세계 최정상의 교향악단을 지휘했으며, 뉴욕 메트로폴리탄과 파리 바스티유를 비롯한 전 세계 오페라 극장에서 오페라를 지휘했다.
 
1990년부터 세계적인 음반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DG)의 전속 아티스트로서 20여 장의 음반을 레코딩하며 음반상을 휩쓸었으며, 특히, <사중주를 위한 협주곡>을 그에게 헌정하기까지 한 메시앙의 음반들(<투랑갈릴라 교향곡>, <피안의 빛>, <그리스도의 승천> 등)과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 베르디의 <오텔로>,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 등은 최고의 음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8년 이탈리아 비평가들이 선정한 '아비아티 상'과 이듬해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상'을 받았으며, 1991년 프랑스 극장 및 비평가 협회의 '올해의 아티스트 상', 1992년 프랑스 정부의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95년 프랑스에서 '브루노 발터 상'과, 프랑스 음악인들이 선정하는 '음악의 승리상'에서 최고의 지휘자상을 포함 3개 부문을 석권한 데 이어, 2003년에 다시 이 상을 수상했다.
 
일본에서는 1995년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가진 일본 데뷔 공연이 '올해 최고의 연주회' 에 선정되었고, 이듬해 런던 심포니 공연 역시 최고의 공연으로 기록되었으며, 2001년 도쿄 필하모닉의 특별예술고문 취임 연주회 등으로 열광적인 찬사와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1995년 유네스코 '올해의 인물' 로 선정된 바 있는 정명훈은 음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문화훈장인 '금관 훈장'을 받았고, 1996년 한국 명예 문화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한 바 있다. 2002년 국내 방송사에서 실시한 문화예술부문 전문가 대상 설문조사에서 음악분야 최고의 대표예술인으로 선정되었다.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Clara Jumi Kang, Violinist 
타고난 천재성과 끝없는 노력으로 불운의 사고를 극복하고 이 시대 새로운 음악 퀸의 존재를 알린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은 한국인 부모 사이에 1987년 독일 만하임에서 태어났다. 세 살에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시작하였고, 네 살에 최연소 나이로 만하임 국립음대 예비학교에 입학해 발레리 그라도프를 사사했다. 다섯 살에는 함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데뷔연주를 가졌고 그 해 뤼베크 음대에서 자크하크 브론을, 일곱 살에는 줄리어드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해 이착 펄만과 나이젤 케네디, 사라 장을 길러낸 도로시 딜레이를 사사하였다. 이후 베를린 한스아이슬러 국립음대에서 크리스토프 포펜을 사사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을 사사하며 예술사와 전문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2012년 뮌헨 음대에서 크리스토프 포펜을 다시 만나 최고연주자 과정을 밟는 중이다.
 
클라라 주미 강이 최근 2년 동안 보여준 성과는 실로 놀랍다. 2010년에 9월, 세계 3대 바이올린 콩쿠르라 불리는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의 우승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 해 6월에는 일본 센다이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함으로써 이미 그녀의 실력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2009년 4월 제 5회 서울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의 우승 이후 참가하는 콩쿠르마다 1위 자리를 놓치지 않는 저력을 보여줬다. 2009년 하노버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2위, 2007년 티보르 바르가 콩쿠르에서 3위 입상 등 꾸준히 좋은 성적을 유지하면서 얻어낸 결과이다.
 
클라라 주미 강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니스 필, 애틀란트 심포니, 서울시향, 부천시향, 경기 필, 광주시향, 강남 심포니 등 국내외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다. 한국에서는 8살에 처음 예술의 전당에서 코리아 챔버 앙상블과 모차르트 협주곡 5번으로 데뷔 무대를 가졌다.
 
그는 이미 몇 장의 음반 녹음 경험이 있다. 9살에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녹음한 베토벤 3중 협주곡을 텔덱 레이블로 발매하였다. 1998년 봄, 12살 생일 직전, 거장 다니엘 바렌보임는 클라라의 연주를 듣고 매료되어 협연 약속까지 하지만 불의의 손가락 부상으로 모든 일정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었다. 유니버설 뮤직과 음반 계약을 맺고 2011년 11월 데뷔 앨범으로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비르투오조 작품집, 모던 솔로>를 발매하였다.
 
2011년 1월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에번스 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고, 4월부터 미국 8개 도시 투어를 마쳤다. KBS교향악단, 부천 필과 협연하였고, 11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드레스덴 카펠졸리스텐과 협연하였다. 이어 2012년에도 미국과 아시아를 오가며 히로시마 심포니, 뉴저지 심포니, 인디애나폴리스 심포니, 나고야 필, 큐슈 심포니, 산타페 심포니, 타이완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하였고, 도교와 센다이 등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특히 5월에는 뉴욕 카네기홀 (스턴 오디토리움)에서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함께 리사이틀을 가졌다. 10월에는 예술의전당 콘서트 홀에서 블라디미르 페도셰프가 지휘하는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심포니와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연주하였다. 한편 2013년 1월에는 제 7회 대원음악연주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그는 조세프 깅골드가 사용했던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사용하고 있다.

 

 

 

글 : 황장원 (음악칼럼니스트)

통상 ‘영웅 교향곡’으로 불리는 <교향곡 제3번 E♭장조>는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 베토벤의 교향곡 중에서도 특별히 중대한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베토벤은 30대 중반에 발표한 이 작품을 통해서 하이든, 모차르트 등 선배들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특성을 확립했고, 나아가 교향곡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특히 이 교향곡의 제1악장을 보면, 우선 그 소나타 형식의 규모가 유례없이 장대하다. 투입된 선율적 소재의 수도 당시로써는 이례적으로 많은 7개에 달하며, 그 소재들의 유기적인 조직에 따라 발전부가 크게 확장되어 제시부의 길이를 넘어서고, 종결부 역시 확대되어 재현부와 대등한 비중을 가진다. 또 재현부로 진입하는 대목(호른 신호)에서는 종전까지의 통념을 파괴하는 대담한 화성수법이 사용되어 지금까지도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은 낭만주의 시대에 성행하게 될 교향곡의 대형화 및 표제화의 물꼬를 텄으며, 여러 모로 미래를 향한 혁신과 진보의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베토벤은 이 곡에서 자신의 이상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했다. 이전까지의 교향곡에서 어떤 메시지가 이처럼 선명하게 드러난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곡의 유래와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나폴레옹에 관한 것인데, 실제로 베토벤은 한때 나폴레옹을 추앙했다. 그에게 있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인물은 낡고 부조리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을 이상적인 영웅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영웅을 그린 교향곡을 썼으리란 추측은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그는 자필악보의 겉표지에 ‘보나파르트’라는 단어를 손수 적어 넣기도 했고, 완성한 작품을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04년 12월,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제자 리스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베토벤은 실망하고 분개한 나머지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그도 결국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군! 이제 그는 인간의 권리를 짓밟고 자신의 야망만을 충족하려 하겠지.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올라서서 독재자가 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표지의 ‘보나파르트’라는 단어를 지워버렸다. 대신 제목을 ‘신포니아 에로이카(Sinfonia Eroica)’로 대체했고, 후원자인 로브코비츠 후작에게 헌정했다.
<영웅 교향곡>은 장대하고 강력하며 건축적이다. 제1악장은 앞서 언급한 거대한 소나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에 강력한 화음이 두 번 울려 퍼진 후 제1주제가 첼로 파트에서부터 엄숙하게 등장하며, 제2주제는 클라리넷에서 바이올린으로 옮겨지며 부드럽고 온화하게 제시된다. 발전부는 짜임새 치밀한 대위법으로 진행되면서 힘차고 당당한 극적 박력을 부각하게 되는데, 아울러 그 유장한 흐름은 대하(大河)를 연상시키는 도도한 풍모를 지닌다. 보통 영웅의 행적 혹은 투쟁을 그린 악장으로 간주한다. 제2악장은 유명한 ‘장송 행진곡’이다. 깊은 슬픔과 고뇌가 서린 듯한 장중한 발걸음이 끈질기게 이어지는데, 중간에 음악이 C장조로 밝아지며 장렬하게 치솟아 오르는 극적인 장면이 자리하고 있다. 이 악장에 대해서 베토벤의 제자였던 체르니는 넬슨 제독, 혹은 애버크롬비 장군의 죽음을 추도한 것이라고 증언했고, 베토벤 자신은 훗날 나폴레옹의 몰락과 죽음을 예견하며 썼다고 했다지만, 정확한 연원은 알 길이 없다.
제3악장은 3부 형식으로 구성된 스케르초 악장이다. 주부는 연속되는 스타카토의 빠른 움직임으로 시작되어 점차 힘을 증대시켜 가며 전진하는 태세를 유지하며, 중간부에서는 세 대의 호른이 앙상블을 이뤄 늠름한 팡파르를 울려 퍼뜨린다. 일명 ‘사냥의 스케르초’ 혹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 악장은 짧은 경과부와 푸가의 발전부를 지닌 자유로운 변주곡이다. 이 고도로 건축적이면서 기법적으로 다채롭고 변화무쌍하기 이를 데 없는 악장에서, 베토벤은 변주곡의 주제로 자신의 발레 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의 마지막 곡에 사용했던 선율을 가져와 한바탕 호화로운 축제의 장을 펼쳐 보인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야말로 베토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영웅의 표상이 아니었을까? <연주시간 : 약 50분>

 

 

 

Symphony No.3 in e major, OP.55 - Eroica

베토벤 교향곡 3번 마장조 영웅

Ludwig van Beethoven (1770 - 1827)

1. Allegro con brio

 

Bela Drahos - Budapest Nicolaus Esterhazy Sinfonia

     

교향곡의 새 기원을 이룩한 베토벤 교향곡 3번 에로이카

베토벤이 고향을 떠나 빈의 음악계에서 어느 정도 확고하게 기반을 닦은 시기가 26세 때였다. 이 무렵 그 보다 불과 한 살 위인 코르시카의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미 군 사령관으로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불란서 대혁명 이후 홀연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나폴레옹의 과감한 행동을 베토벤은 놀라움과 존경의 눈으로 지켜 보았다. 그는 나폴레옹이 인류에게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 줄 인물이라고 믿었다. 당시 빈에 주재하고 있던 불란서 대사 베르나도트 장군에게서 나폴레옹의 사람됨과 용기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듣고는 더욱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1803년 여름에 베토벤은 5년 전부터 준비해 온 교향곡을 코르시카의 영웅에게 바치려고 본격적으로 작곡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완성했다. 그의 나이 34세 때이다. 그는 완성된 악보 표지에 "보나파르트 교향곡"이라고 써 넣고 헌정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5월 18일,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당장 헌사를 쓴 표지를 찢어 버리며 "그 역시 속인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폭군이 되려는가!"하고 외쳤다. 그 후 그는 이 곡에 "신포니아 에로이카-한 위대한 인물을 추념하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고쳐 출판했다.

17년 뒤에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죽었을 때 "나는 17년 전부터 오늘을 예상해 왔다."고 하며 제2악장 "장송 행진곡(Marcia Funebre)"을 가리켰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 청중은 괴물 같은 교향곡과 마주쳤다. "이전에 작곡된 어떤 교향곡보다도 길고 작법이 복잡했다. 미묘하게 얽힌 화성, 거인 같은 힘, 흉포한 불협화음, 사람의 마음을 마비시키는 듯한 긴장감 넘치는 장송 행진곡을 지닌 교향곡"이었기 때문이다.

교향곡 제1번과 제2번에는 아직 선배 작곡가 하이든과 모짜르트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으나 제3번부터는 놀라운 큰 비약을 이루고 있다.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고 도처에 독창적인 수법이 번뜩이면서 베토벤의 개성이 앞으로 불쑥 튀어나온다. 가령 제1악장의 크기는 18세기 중기의 고전 교향곡 한 곡 전부가 그대로 쏙 들어가 버릴 정도의 규모이며 또 제2악장에는 전혀 상식 밖의 장송 행진곡을 담았는가 하면 마지막 악장은 크고 웅장한 변주곡으로 채운 점 등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또 전체의 구성도 강철처럼 단단하고 악기 편성 역시 확대되었다. 호른을 세개나 쓰고 있는 점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여러가지 면에서 이 교향곡은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개설

이 곡은 1804년 봄에 완성 되었다. 신들러의 「베토벤 전」에 의하면 베토벤은 프랑스 초대 집정관이었던 나폴레옹에게 바치는 이 곡의 부본을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내려고 하던 차에 나폴레옹이 5월 18일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해서 그 악보의 표지를 찢어버린 후 악보를 마루바닥에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그 표지에는,

Bonaparte
Ludwing van Beethoven
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일어났다. 코르시카 섬 태생의 일개 포병 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은 1795년 10월에 의회군을 지휘, 이 대혁명에 참가하여 반란군을 평정함으로써 일약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르고, 마침내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이 되어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신출귀몰의 위력을 떨친 나폴레옹이야말로 베토벤의 눈에는 자유정신과 인간 해방의 기수로서 새 시대를 고하는 세기적 영웅으로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1798년 2월부터 4월까지 빈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베르나도트 장군이 베토벤과 개인적 친분을 가지게 되면서 그는 베토벤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게 되고, 베토벤은 그를 통해 영웅 나폴레옹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혁명의 풍운아, 영웅에게 바치는 교향곡이 탄생된 것이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리스(Ferdinand Ries,1784-1838)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그 녀석도 결국 속물이었군. 그 녀석도 역시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민중의 권리를 짓밟고 그 누구보다도 더 지독한 폭군이 되겠지!』하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2년이 지나서 출판된 파트 악보에는 「신포니아 에로이카」라고 이탈리아어로 쓰여져 있었으며 역시 이탈리아어로 된, 「한 사람의 영웅에 대한 추억을 기리기 위해서」란 부제가 붙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곡을 나폴레옹 일대기의 표제악으로 생각하고 들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교향곡 「제2번」까지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던 소위 희유성은 이 「제3번」에서는 그 자취를 감추고, 한층 더 진실한 도덕성이나 윤리성 같은 그 어떤 상한 힘을 이 「제3번」은 지니고 있다. 베토벤 자신도 「제9번」이 완성되기까지는 이 곡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

「제3번」은 확실히 장대한 곡이다. 시간적으로도 종래의 상식을 벗어나 50분이나 소요되는 긴 곡이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는 작곡자 자신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으며 1806년에 출판된 악보 중의 제 1 바이올린 파트에는, 『이 교향곡은 일반 다른 곡들보다 길므로 연주회에서 후반부 보다는 가능한 전반부에서 연주하는 것이 좋겠다. 즉 서곡 1곡에다 아리아 1곡, 또는 협주곡 1곡 다음에 연주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청중들은 앞 부분에서 이미 지쳐버리게 되므로 이 곡의 효과는 그만큼 상실하게 된다』라고 기술했을 정도다. 심지어 전술한 클레멘트 주최의 초연에서는 제2부의 첫 곡목으로 되어 있었다.

작곡 : 1803~4년
초연 : 비공개 초연은 1804년 12월 로프코비츠 후작의 사택에서,

         공개 초연은 1805년 4월 7일  비엔나의 안 데어 빈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짐.

출판 : 1806년
헌정 : 로프코비츠 후작
편성 :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2, 호른 3,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
연주시간 : 약 50분

1st movement: Allegro con brio
2nd movement: Marcia funebre (Allegro assai)
3rd movement: Scherzo (Allegro vivace)
4th movement: Finale (Allegro molto)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던 베토벤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는 곡이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의 혁명에서는 코르시카 섬 출신의 일개 포병 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이 반란을 평정하고 국내 최고 사령관 이 되었다.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유의 정신에 불타 있던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을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빈에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 대사와 대사관의 비서이자 바이 올리니스트였던 루돌프 크로이쩌로부터 프랑스에 자유와 질서를 가져온 나폴레옹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플라톤의 '공화국'을 숙독한 바 있었던 베토벤은 이 시대의 영웅의 자태를 보여준 나폴레옹을 자신의 작품으로 찬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33세 때인 1803년 여름 이 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하여 1804년 봄에 완성시켰다. 스코어의 표지에는 '보나파르트'라고 썼으며 밑에 자신의 이름 '루비트비히 반 베토벤'이라 적어 이를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 내려고 할 무렵,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빈에 퍼졌다. 

이 소식에 분개한 베토벤은 그 사본의 표지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저 사나이도 역시 속된 사람이었어. 그 역시 자기의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민중의 권리를 짓 밟고 누구보다도 심한 폭군이 될 것이야."

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이후 다시는 나폴레옹에 대해 언급도 안 했다는 그는 2년 뒤 이 곡을 출 판하면서 '한 사람의 영웅을 회상하기 위해 작곡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17년 후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다는 보도를 듣고 비로소 '나는 그의 결말에 어울리는 적절한 곡을 써 두었다' 라고 했다는 베토벤. 이는 이 작품의 제2악장에 있는 '장송 행진곡'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작품해설 각 악장별 분석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의 영향이 엿보이는 「제1번」이나「제2번」과는 달리 이 「제3번」부터는 음악적으로 일대 비약을 보여준다. 즉 규모가 엄청나게 방대해졌고 독창적인 수법이 대담하게 구사되어 베토벤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1악장의 길이만 하더라도 종전 교향곡의 전곡과 거의 맞먹는다. 또 제2악장에 장송행진곡을 사용했다던가 종악장에 장대하고도 호화장려한 변주곡을 넣은 것 따위는 당시로서는 커다란 모험이었다.

 

1악장 : 생기 있는 빠르기로 Allegro con brio 내림 마 장조 3/4

장대한 제1악장은 우선 그 당당한 구성에 압도된다. 이것은 소나타형식으로 쓰여졌지만 전개부들은 종래의 관념을 완전히 깨뜨리고 제시부의 배나 되는 규모를 갖는다. 소나타 형색의 권화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악장은 주제의 새로운 활용법, 활발한 운동성, 극적인 수법 등 그의 종횡무진한 테크닉과 다채로운 악상이 넘쳐 흐른다.

소나타 형식. 그러나 규모가 크고 두 개의 주제가 의외로 다양하고 풍부한 악상을 지니며 이들 재료를 낱낱이 구사하고 있다. 1주제는 첫 부분의 강력한 두 개의 화음 후에 저음역의 현악기에서 엄숙하게 등장한다. 2주제는 부드럽고 온화하게 클라리넷으로 연주되며 바이올린으로 옮겨간다.

발전부는 매우 정성스럽게 대위법적으로 짜여지며, 극적인 힘을 지니고 커다란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공식적으로 제시부의 재료를 다시 출현 시키는 재현부 후에 또 다른 새로운 발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충실한 코다가 나오고 이 당당한 악장을 마무리한다.

     

2악장 : 대단히 느리게 Adagio assai 다 단조 2/4

베토벤 교향곡 3번 마장조 영웅 2악장

Sergiu Celibidache, cond.

Munchner Philharmoniker

 

유명한 제2악장은 영웅의 이미지와 죽음이 합치된 서사시로서 종교적 정화를 느끼게 해준다. 또 장중한 장송 행진곡 부분도 훌륭하지만 마지막 심판 나팔을 연상케 하는 듯한 시그널로 시작되는 웅대한 푸가 부분도 마음을 울렁거리게 한다.

자유로운 3부 형식. {장송 행진곡}의 악장이다. 현의 주제가 나타나며 장중한 걸음걸이로 나아간다. 중간부는 다장조로 밝아지며, 영웅의 생전의 업적을 기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제1부의 주요 선율이 다시 나타나며 그에 토대를 둔 푸가토가 차례대로 펼쳐진다. 마지막으로 다시 주요 선율이 모습을 보이며 슬픔과 체념을 품은 채 곡을 중단하고 인상 깊게 마무리한다.

     

3악장 : 스케르초. 빠르게 생기있게 Allegro vivace 내림 마 장조 3/4

Bela Drahos - Budapest Nicolaus Esterhazy Sinfonia

A - B - A의 3부 구조를 취했으며, 「제 9 교향곡」제 3악장의 선구를 이루는 것으로 되어 있음, 본격적인 스케르쪼인 제3악장엔 트리오 부분에 호른이 사용되는 등 베토벤 특유의 발랄한 주제가 구사되어 있다. 3부 형식. 1부는 빠른 스타카토의 움직임으로 시작하며, 차츰 힘을 증대시켜 간다. 중간부 트리오는 호른의 선율로 매우 아름답다. 그리고 다시 1부가 반복된다.

     

4악장 : 매우 빠른 속도로 Allegro molto 내림 마 장조 2/4

베토벤 교향곡 3번 마장조 영웅 4악장

Klaus Tennstedt, cond.

The London Philharmonic

 

4분의 2박자의 짧은 도입에 이어서 현의 피치카토로써 저음 주제가 제시된다. 이것이 변주된 후에 목관 악기로써 주제 멜로디가 나타나는 것은 작품 35의 「피아노 변주곡」에 있어서의 주제 제시와 동일한 방법에 의한 것이다.

이 주제는 방금전에 언급했듯이 1795년에 작곡된 「12개의 콘트라탄쯔」의 제 7곡에 사용되었고, 이어서 1800년경에 작곡된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종곡에, 또한 작품 35의 「변주곡」 주제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제 3의 교향곡」 종악장에 사용된 것이다. 제4악장(종악장)은 이 주제를 기초로 하여 일곱 개의 변주를 하며 그 후에 긴 코다를 두는 형태로(8개의 변주)로 이루어진 웅대하고 호쾌한 악장으로 이것은 <영웅>이란 이름에 어울릴 만큼 힘차고 늠름하다. 같은 베이스의 선율형을 자유롭게 몇 차례 반복하여 그 위에 변주를 쌓아나가는 파사칼리아와 비슷한 형태를 취한다. ff로 격렬히 연주되는 서주 후에 피치카토의 1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베이스에서 몇 차례 반복된다.

이것은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끝 곡에 베이스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윽고 가볍고 평온한 2주제가 등장한다. 전체적으로는 푸가토와 그 밖의 대위법적인 기교들이 나타나며 커다랗게 정점을 향해 진행한다. 거기에 긴장이 풀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한 번 압도적인 코다로 전곡을 마무리하게 된다.

베토벤이 음악계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모방적인 음악을 만들던 시기를 벗어난 첫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곡은 그만의 강한 개성과 힘의 균형이 훌륭하게 나타나는 곡이다. 후에 바그너는 이 곡의 4개의 악장을 '활동, 비극, 정적의 경지, 사랑'이라고 평하면서 참된 베토벤의 모습이 이 곡 안에 다 있다고 했다.

     

영웅 교향곡

빈의 제19구의 데부링에 있는 베토벤 하우스는 특히 [영웅]의 집으로서 알려져 있으며, 그 가까이에는 '[영웅]의 거리'라고 명명되어 있는 도로가 있다. 베토벤은 33세의 1803년 여름, 데부링에서 교향곡 제3번 영웅]의 작곡에 몰두했다. '[영웅]의 거리'는 그것을 연관지어 명명한 것이다.

베토벤은 전부 9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그 중 [교향곡 제3번]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뜻하고 있는 작품의 하나로 그는 이것을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것을 생각하고 작곡했던 것이다. 자유의 정신에 불타 민중의 권리를 옹호한 인간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자기보다 1세 연상의 '코르시카의 영웅'인 나폴레옹이 인류에게 자유와 평화를 초래할 구세주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교향곡 제3번]은 그와 같은 나폴레옹을 포함한 영웅들의 행위를 교향곡의 형식으로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악보가 완성하자 [제3번 E장조 교향곡] 총보 속표지 상에 '보나파르트' 아래에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라 적어 헌정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하자 베토벤은 크게 실망하였다. "그 놈도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가, 머지 않아 그 놈은 틀림없이 온갖 인권을 짓밟고 자기의 야심을 만족시킬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고 그는 총보의 속표지를 찢었으며 그 뒤에 영웅의 추억을 기리기 위해 [영웅 교향곡]이라고 적었다. 그 이래로 베토벤은 나폴레옹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이 [영웅]은 연주시간이 약 50이 걸리는데, 그때까지 그렇게 긴 곡이 없었으므로 너무 길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에 베토벤은 "50분이 길다고? 두고 보게, 너무 짧다고 불평들 할걸세" 하며 자신있게 말했다고 한다.

이 곡은 나폴레옹과 매우 관계가 깊은 작품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나폴레옹의 생애나 업적을 그린 것은 아니다. 다만 17년 후에 나폴레옹이 몰락해서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토벤은 "나는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미리 결말에 적절한 음악을 써 두었다"라고 했다. 그것이 이 곡의 2악장에 있는 [장송 행진곡]이다.

이 곡은 1805년 4월 7일 빈에서 초연 되었을 때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 당시 전례가 없던 장대한 음악이었으므로 청중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 이 작품에서는 지금까지 그의 선배들의 영향인 모방기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것으로 그의 감정을 나타내는 강한 개성의 힘과 양식의 균형으로 훌륭한 곡임을 증명하였다. 전부 4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제2악장의 [장송행진곡]은 유명인이 죽었을 때 흔히 단독으로 연주되는 일이 많다.

 

 

Beethoven,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61

베토벤 /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Kyung-Wha Chung violin

Klaus Tennstedt conductor

Royal Concertgebouw 1989

 

            1st Movement (part 1)


             1st Movement (part 2)


             2nd Movement


              3rd Mov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