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린 칼송이 말하는 <블루 레이디>
<블루 레이디>는 제 피 속에 흐르고, 뼈 속 깊이 파고들어 있는 작품입니다.
저는 11년 동안이나 이 작품을 춤추었었죠. 이 작품은 아들을 낳은 후에 만들었는데, 그래서인지 그 당시의 기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제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면 마치 나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죠. 마흔의 나이에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삶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생겨나죠. 그러니까 <블루 레이디>는 그 모든 기억으로부터 탄생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이 만들어진 곳은 이탈리아 베니스였는데, 이 도시는 뭔가 신비롭고, 환상적이면서도,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곳이에요. 연습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보면 “오 솔레 미오” 같은 노래나 아코디언 소리가 들려오곤 했답니다. 저는 거기서 즉각적으로 어떤 종류의 열망이나 갈망 같은 것들을 느끼게 되었어요. 기억이란 것은 저로 하여금 어딘가로 되돌아가게 만드니까요.
이 작품 속의 솔로들은 각각 어떤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여성이 점차 다른 단계에 접어들면서 갖게 되는 감정이라고할까.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이와 연결될 수 있어요. 모두가 느낄 수 있죠. 게다가 르네 오브리(René Aubry)의 음악은 뭔가 특별한 차원의 것이라 이를 통해 모두가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인도해줍니다.
<블루 레이디>는 감정적(emotional)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다른 무용수에게 전수할 수 있다면 아주 멋진 일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자 무용수로 하여금 이 작품을 춤추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비교가 될 테니까요. 카롤린 칼송, 그리고 그 이후의 또 다른 여성으로서요. 결국 테로 사리넨에게 이 작품을 전수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테로는 정말 천재적인 무용수에요.
몇 백 명 중에 한 명 존재할 만한…
관객들은 테로가 뿜어내는 놀라운 아우라를 목격하게 될 겁니다. 사실 지금 테로의 나이가 42세이니까 제가 <블루 레이디>를 만들었을 때의 나이와 정확히 같네요. 그러니까 우리는 일종의 특출난 사람들이 아닐까 해요. 마흔 살이 넘어서야 특출함을 드러내게 되는 그런 사람들인 거죠.
공연후기....
시작부터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끊임없이 춤을 추는데,,,무대는 늘 정적이었다. 하나의 완벽한 미술작품 처럼....
잿빛일까...아니, 녹색빛이 감도는 안개에 휩쌓인듯한 무대.... 그리고 매혹적인 블루....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방울 방울 그 무언가를 뽑아 올리는 듯한 기타 선율.... 처절할 정도로 멜랑꼬리한 목소리.... 매혹적인 의상.... 섬세하면서도 강렬하여 무아지경속으로 이끌던 몸짓.... 그래, 처음부터 끝까지 무아지경속으로 빨려들어갔던 짜릿한 순간이었다.
까만 어둠이 공연장에 드리워졌다. 오늘처럼 LG아트센타의 검은색 내부가 이 작품의 분위기와 너무나 잘 어울려 떨어진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무대 전체엔 베네치아 블라인드가 천정부터 바닥까지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천정까지 닿은 커다란 나무등걸 하나만이 우뚝 서 있다. '인생의 나무 (tree of life) ... 나무는 우리의 뿌리를 상징하고, 지구, 하늘, 그리고 인간을 상징한단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상징하는 것은 곧 인간의 지각 (human perception)을 다루고 있다는것. 중요한 것은 각자 자신만의 시적인 미학, 각자의 경험으로 바라보면 된다는 것...
조명이 비추어 지고 ...그 블라인드 뒤에서 지극히 평범한 의상을 입은 한 남자 (테로 샤리넨)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무대 전체에서 느껴져 오는 모호함.... 시작부터 춤이라는 강한 실체감 보다는 인간 내면 탐색이라는 어렵고도 아스라함이 느껴져 왔다. 거기에 방울 방울 울려퍼지는 기타 선율은 그런 인간 내면의 심성을 건들기에 충분했다. 습관처럼 망원경을 들이댔다가 선명하게 보여짐이 그 모호함과 아스라함을 깨뜨리는것 같아 얼른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아~ 이 작품은 뭔가를 꿰뚫어 보려고 하면 안되는거구나~ 그냥.... 보는게 아니라 저 너머로 아련하게 풍겨져 나오는 이미지를 느끼는 거구나!!
한켠의 블라인드가 서서히 올라갔다. 그리고 테로 샤리넨의 정체는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는 섬세하고도 모호한 몸짓으로, 그러나 한편으론 강한 몸짓으로 마치 모순된 존재를 보듯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었다. 잠시 망원경으로 그를 들여다 보았다. 그만 ..너무나 동그랗게 떠 떨어져 버릴것만 같은... 동경에 가득 찬...허공속의 무언가를 끊임없이 잡으려고 하는것도 같은 ... 그의 슬프고도 깊은 우수에 어린 눈동자가 시선을 잡아 끌었다. 다시 망원경을 내려 놓았다. 무대 전체에서 느껴져 오는 그 아름다움과 멜랑꼬리함이 너무나 매혹적이었기에....
음악이 바뀌고 잠시 나무뒤에 있던 그는 의상이 바뀌어져 나왔다. 이렇듯 쉬지 않고 75분동안 그는 춤을 추었고, 잠시 무대를 비우기도 하면서 의상을 끊임없이 가라입고 나왔다. 아니, 무대에서 의상을 벗고, 또 입기도 하면서 그 동작 하나 하나까지도 완벽하게 작품으로 연결지었다. 모자가 바닥에 던져진 채 그는 춤을 추었다. 그 모자...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구도의 일부가 되어 미술작품이 되어버린..... 화가가 거대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 무대 뒤로 영상이 쏘아지고, 블라인드가 수시로 오르락 내리락,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면서, 완벽한 입체조명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주었고, 그리고 옷가지들의 소품들 조차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 모습들이... 그리고 지금 테로 샤리넨이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에서 춤을 추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때마다 완벽한 작품들이 탄생되었다.
잠시도 멈추어져 있지않고 테로 샤리넨 뿐만이 아니라 무대위의 모든 것들이 계속 움직이는데도 무대는 매 순간 정지된 하나의 회화작품 처럼 느껴졌다. 분명 춤을 보는데, 나는 뉴욕의 최첨단 현대미술관을 거닐고 있는것만 같았다. 한 순간, 한 치의 부조화도 못견디어 완벽을 추구했다는 것에 정말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였다. 거기에 울려 퍼지는 음악은 사람의 감성을 극한까지 올려놓았다.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며 내 자신의 내면 깊숙이로 탐닉해 들어가게 했다. 막연한 통증...그리움....에 휩싸이기를....
블루 레이디..... 제목에서 느껴지는 여성성...카롤린 칼송이 직접 안무를 했던 작품을 이번엔 남자 무용수에게 스커트를 입히기까지...춤을 추게 한 것이다. 여자 남자를 가릴것 없이 인간 내면이 가지는 원초적인 감정을 표현해내고 서로 소통하고 공유하는 인식의 문제이기에... 어쩌면 남자이기에 더 강렬하고도 극적인 이미지를 창출해 내지 않았을까....
강한 근육의 상체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며 스커트를 두루고 춤을 출때는 그 상반된 모순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이 더욱 극적이었으며 그 치마폭이 만들어 내는 그 아름다움은 그래서 더욱 판타스틱했고, 더 극적인 이미지를 안겨주었다고 생각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전율을 일으켰던 순간은 기인....마치 인간의 굴레를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을것만 같은 안깐힘이 느껴졌던.... 무대 끝까지 당겨졌던 붉은 치마를 입고 나오는 장면이었다. 와아~~ 정말 팜플릿에서 이미 본 이미지였는데도 음악과 함께 테로 샤리넨이 춤을 추는 장면을 보니 그 판타스틱함에 소름이 다 돋았다.
테로 샤리넨이 잠시 의상을 갈아 입느라고 무대뒤로 들어가고 무대엔 음악과 무대뒤 영상과 블라인드만이 있을때에도 테로 샤리넨은 계속 춤을 추고 있다고 착각이 들정도로 작품의 완성도는 그대로 이어졌다. 아니,,,그 비움이 마치 카롤린 칼송이 추구했던 동양의 불교와 선 사상에 딱 들어맞는 듯한... 비움, 정지...그런 편안한 여백의 미를 느끼게 했다. 그래 그랬어~ 그녀가 추구한다던 시각적인 시(visual poetry)라는 표현... 뭔가 많이 등장시켜서 뭔가 많은 표현을 하려고 한게 아니라, 단 한사람....색채도 모노톤으로... 음악도 너무나 단순하고 담백한..... 그렇게 직관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작품은 점점 형태를 취해가는거.... 험난하고도 복잡한 이 시대에 삶의 단순성과 순수성을 일깨우는 강한 메시지를 전파하며, 관객들의 영혼에 희망과 긍정의 에너지를 불어 넣어주고 있는 거....
무아지경으로 빙빙 돌면서 춤을 추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춤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움직임... 영혼을 부르는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당이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면서 영의 세계로 들어가 죽은 영혼들과 교감을 하기도 하고, 문명이 존재할까 싶은 미지의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원초적인 소리를 내며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는 것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아니, 우리들도 리듬이 있으면 저절로 몸이 움직여 지는것과 같은..... 하지만 우리들은 그 춤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과는 달리 천재적인 무용수들은 춤으로 말하고 춤으로 모든것을 표현하고 기억한다는게 문득 놀랍다고 생각들었다.
화가는 보이는 것을 표현하고 ...물론 현대는 보이는 것을 내면의 묘사로 표현해 내지만.... 음악가는 보이는 것을 소리로 만들어 내고... 무용수는 보이고 느끼는 것을 몸으로 춤을 춘다. 그렇게 자연과 인간이 서로 소통할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낸다는게.... 갑자기 이들의 이런 행위가 너무나 위대하고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춤을 통해서 나는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으며, 규정할 수 없는 것들에 다가가보고 싶었다," 는 테로 사리넨의 말처럼... 어쩌면 춤은 인간이 추구하는 것중에서 가장 본능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 모든 걸쳤던 옷을 다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마치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어둠속으로 걸어들어가며 조명이 스러져 가던 .... 그 피날레 장면도 짜릿했다.
와아!! 나는 감탄에 감탄을 하느라 자리에서 바로 일어날 수 없었다. 한참을 그대로 앉아있다가 마지막으로 자리를 떴다. 그래, 오늘 나의 자리(2층 가운데 블럭 중간)는 정말 환상이었어. 적어도 오늘의 무대는 1층 앞자리에서 보면 제대로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었을것이다. 오묘한 색감들,,,특히 블라인드를 통해서 빛과 색감을 조절해 나갔던 전체적인 그 모호함과 슬픔을 제대로 느낄수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바닥의 그림자 효과는 더더욱....
로비에서 소희를 만났다. 인터미션도 없었고, 공연시간도 짧았었기에 우린 간단하게 맥주를 한잔 마시면서 감동을 추스렸다. 아사히 생맥주....너무 맛있었는데 넘 비쌌다는... 내 차마고도 여행 감동스토리도 당근.....ㅎㅎ 흥분된 하루였다.
아~~ 벌써 다음 작품 '아크림 칸'의 '버티컬 로드'가 기대된다. 올해는...10월에 개최되는 현대무용축제인 SIDANCE를 맘껏 즐겨볼까나.... 생각만으로도 정말 익사이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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