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골레시의 생애와 주요 작품
청취자 박숙경 님께서는 바로크 음악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페르골레시의 생애와 작품에 관심이 많으시다면서,
그의 대표적인 두 작품 ‘마님이 된 하녀’와
‘스타밧 마테르’를 감상하고 싶다는 의견 올려주셨는데요.
신이 내린 재능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스물여섯 이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한 비운의 작곡가,
페르골레시는 어린 시절을 비롯한 생애의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어 더욱 신비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죠.
1710년 ‘제시’라는 도시에서 태어난 그는
열다섯에 나폴리로 가서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합니다.
페르골레시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통했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는데, 어린 페르골레시가
바이올린으로 즉흥 연주를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을 넘어서 경악의 경지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죠.
페르골레시는 스무살 때부터 본격적인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1731년에 완성한 희극 오페라
‘사랑에 빠진 수도승’은 처음으로 그에게
큰 성공을 안겨다 줍니다. 이 작품에 연이어 1733년에는
오페라 세리아‘콧대 높은 죄수’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페르골레시는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스타덤에 올랐는데요.
특히 ‘콧대 높은 죄수’에서는, 막과 막 사이에 연주된
짧은 막간극인 인테르메초가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내며
오페라 흥행을 도왔는데, 이 작품이 바로 오늘날
오페라 부파의 시초로 알려진 ‘마님이 된 하녀’입니다.
오페라보다 더 큰 인기를 끌었던 이 작품은
페르골레시가 세상을 떠난 뒤 유럽으로도 진출했는데,
특히 1752년, 파리에서 륄리 오페라의 막간극으로
이 작품이 공연된 이후, 프랑스 예술계는
프랑스의 궁정 오페라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이탈리아의 희극 오페라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 논쟁이 바로 부퐁 논쟁이죠.
국왕과 왕비, 귀족과 젊은 지식인들까지 가세해
2년 넘게 열띤 공방전을 벌인 이 논쟁은
1754년, 이탈리아 오페라 단이 프랑스를 떠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는데요. 하지만, 이탈리아 오페라가 훗날
프랑스의 희극 오페라인 오페라 코미크가 탄생하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오페라 작곡가로 한창 성공가도를 달리던 페르골레시에게는
‘스피넬리’라는 아름다운 연인이 있었는데요.
하지만 신분이 높은 영주의 딸이었던 스피넬리와의 사랑은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로 끝나고 말죠.
슬픔을 이기지 못한 스피넬리는 수녀원에 들어갔다가
1년도 못 되어 세상을 떠났고,
이 소식을 들은 페르골레시 역시 깊은 상심에 빠져 있다가
1736년, 스물여섯의 나이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합니다.
짧은 생애를 살다갔지만 페르골레시의 명성은
그가 남긴 작품들을 통해서 오늘날까지고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글: 정주은(새아침의 클래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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