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오페라

국립오페라단의 '맥베드

나베가 2008. 2. 18. 20:26

<공연리뷰> 국립오페라단의 '맥베드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오케스트라가 의미심장한 전주곡을 연주하는 동안 무대 위에서는 맥베드 부인의 꿈이 펼쳐진다. 흰옷을 입은 채 안개 속에 솟은 높은 계단을 올라가 공중에 걸린 거대한 왕관 쪽으로 두 팔을 뻗치는 레이디 맥베드. 그러나 왕관의 형상은 더 높이 솟아올라 아득히 사라져버린다.

지난 4일 저녁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막이 오른 국립오페라단(예술감독 정은숙)의 '맥베드'는 이런 암시적인 장면으로 시작됐다. 베르디의 초기 걸작이면서도 자주 공연되지 않는 작품이어서, 오페라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무척 반가운 공연이다.

도입부는 완벽하지는 않았다. 전주곡은 팽팽한 탄력이 느껴져야 할 몇몇 부분에서 다소 무겁게 끌렸고, 1막에 등장한 붉은 옷의 마녀들은 그리 충격적이지 않았다. 마녀들의 합창도 움직임도 감탄할 만큼 정확하고 유연하지는 못했다. 맥베드가 코더의 영주가 됐음을 알리려고 나타난 남성합창단의 은빛 의상은 너무 눈을 자극해 주인공이 도리어 빛을 잃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곧 오케스트라 연주에는 탄력이 붙기 시작했고, 합창단의 가창도 갈수록 정교해졌다. 후반부로 갈수록 극 전체에는 긴장감과 활력이 넘쳤다.

오랜 기간 볼로냐 시립극장에서 지휘를 맡았던 마우리치오 베니니의 열정적인 지휘를 감상하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섬세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지휘자와 함께 최선의 연주를 들려줬다. 장면의 피날레마다 타악기의 음량 공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기는 했으나, 전반적으로 극적 효과를 살리는 기교가 뛰어났다.

맥베드 역의 루마니아 출신 테너 알렉산드루 아가케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맥베드의 적역이었다. 맥베드를 종종 소심하고 심약한 공처가로 묘사하는 최근의 연출 경향과는 달리 셰익스피어 원전에서 볼 수 있는 용장(勇壯) 맥베드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풍부한 성량으로 안정적이고 힘있는 가창을 들려준 아가케는 4막의 아리아 '연민도 존경도 사랑도(Pieta, rispetto, amore)' 등에서는 유연한 루바토(rubato. 특정 부분을 원래 음길이보다 길게 늘려 부르는 것)를 구사하며 지극히 섬세한 가창으로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데도 성공했다.

맥베드 부인 역의 헝가리 출신 소프라노 조르지나 루카치는 연기 면에서는 그야말로 레이디 맥베드의 현신(現身)이었다. 최고의 권력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남편을 닦달하는 아내 역을 강렬하고 완벽한 연기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디가 이 작품에서 연극적인 면을 중시했다 하더라도, 루카치의 가창에는 문제가 있었다. 고음은 시원스럽고 저음은 매혹적이지만 중고음역에서 소리가 트이지 않는 루카치는 너무 연기에 몰입한 나머지 상당히 부담스러운 목소리를 들려줬고, 격정적인 가창 장면에서는 음정이 흔들리기도 했던 것.

'
마탄의 사수'의 카스파, '호프만 이야기'의 악마 등 배역에서 매번 탁월한 개성을 발휘했던 베이스 함석헌은 역시 좋은 가창을 들려줬지만, 진지하고 사려 깊은 방코 역에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보다 안정적이고 차분한 음색의 베이스가 불러야 할 배역이기 때문이다. 막두프 역의 테너 박현재는 역할에 적합한 호연을 보였고, 그 밖의 조역들도 모두 극을 탄탄하게 받쳐주었다.

'맥베드'는 특히 합창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오페라다. 여성합창, 남성합창, 혼성합창이 끊임없이 바뀌며 극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두번에 걸친 마녀와 유령들의 예언 장면은 극 전체의 의미를 결정하는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날 공연 3막의 마녀 장면과 4막의 국경 장면, 그리고 피날레에서 국립오페라합창단은 최고의 기량을 과시했다.

'시몬 보카네그라', '
투란도트' 등 걸작 공연에서 이미 국립오페라단과 함께 작업한 경험이 있는 연출가 울리세 산티키는 이번에도 상징적이고 전위적인 무대에 전통적인 의상과 연출을 결합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추상적이지만 설득력 있는 무대, 공들인 흔적이 드러나는 화려한 의상, 대담한 조명 등은 공연의 큰 장점이었다. 특히 유령들이 나올 때마다 마녀들이 양쪽에서 에워싸 데리고 사라지는 등 세심한 장치들을 사용한 3막 마녀 장면은 대단히 효과적으로 연출되었다.

그러나 관객의 기대 지평을 성큼 넘어서는 도발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쉽다. 버남 숲이 움직이는 장면의 아이디어는 그런 대로 신선했지만, 신하나 병사들이 일제히 칼을 쳐드는 장면이 너무 많이 나와 식상한 느낌도 들었다. 원작에 충실한 정품 공연을 보여주는 것도 의의가 크지만, '맥베드'처럼 관객이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는 극의 경우에는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연출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관객을 무대에 집중시키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이번 공연은 음악적인 면에서 제대로 된 베르디의 '맥베드'를 보여주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맥베드와 부인 역에 각각 더블 캐스팅된 바리톤 유동직과 소프라노 서혜연의 열연도 기대된다. 공연은 오는 8일까지 계속된다.

eva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