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chestre de Paris & Christoph Eschenbach
◈ 프로그램
Berlioz Carnaval romain
Stravinski L’Oiseau de feu, suite (1919)
-Intermission-
Ravel Ma Mère l’Oye
Ravel La Valse
Ravel Le Boléro
◈ 출연
<파리 오케스트라>
1967년에 창설된 파리 오케스트라(Orchestre de Paris)는 창설되자마자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Société des Concerts du Conservatoire de Paris) – 베토벤, 슈베르드, 베버 등 당시의 작곡가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유명한 최초의 프랑스 오케스트라 - 의 뒤를 이을만한 오케스트라로 평가 받기 시작하여, 프랑스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또한, 첫 음악감독이었던 샤를르 뮌슈의 뒤를 이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게오르그 숄티 경, 다니엘 바렌보임에 이어 2000년 9월에 취임한 크리스토프 에센바흐까지 모두 당대 최고의 지휘자와 함께 연주하여 매 연주 때마다 극찬을 받았다.
파리 오케스트라는 3세기를 뛰어넘는 방대한 레퍼토리와 현대 음악에 대한 탁월한 해석으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데 120여 명의 연주단원들이 매년 80회 이상의 연주회를 열고 있다. 더불어서 루치아노 베리오, 피에르 불레즈, 올리버 메시앙, 앙리 뒤티, 비톨드 루토슬라브스키 등 지금은 저명해진 작곡가들의 작품을 수차례 세계 초연한 오케스트로도 유명하다.
파리 오케스트라는 프랑스의 문화사절로서, 유럽은 물론 미국과 아시아, 남미 등지에서 정기적인 투어 공연을 가져 세계적으로 많은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는데 2004년에는 중국에서, 2005년에는 독일과 일본에서 매우 성공적인 투어를 가졌다.
설립 당시부터 1급 오케스트라로 인정받았던 파리 오케스트라는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 레너드 번스타인 등 세계 일류 지휘자들과도 연주 녹음하면서 화려한 연주와 관악기의 솔로, 현악기군이 어우러진 수준 높은 연주로 사랑을 받았다.
파리 오케스트라는 2006년 9월부터는 새롭게 단장한 파리의 플레이엘 홀 상주 오케스트라로 정기연주회를 갖고 있다. 1984년 지휘자 바렌보임과 함께 내한공연을 하기도 했다.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지휘>
독일에서 태어난 크리스토프 에센바흐는 함부르크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1962년에 뮌헨 국제 콩쿠르에서 1등 없는 2위에 입상하는 쾌거를 이룬다. 1965년에 루체른의 클라라 하스킬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두각을 나타냈고, 그 후 카라얀이 지휘하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무대를 가졌다.
그는 1972년 지휘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여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1975년 첫 데뷔무대를 가졌다. 이후로도 뉴욕 필하모닉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시카고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런던 필하모닉, 드레스덴 슈타츠카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파리 오케스트라 등 세계의 유수 오케스트라들의 지휘를 맡으며 세계 최고의 지휘자 중 한 명으로 그 명성을 알리게 되었다.
1984년에는 코벤트 가든에서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를, 휴스턴 오페라 하우스에서 슈트라우스, 바그너의 작품들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2001년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파르지팔을, 뉴욕 오페라 하우스에서 아라벨라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크리스토프 에센바흐는 1988년부터 11년 동안 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였고 2003년부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 직을 맡고 있으며, 함부르크 NDR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1998-2004)로 활동한 경력도 지니고 있다.
2000년부터 음악감독을 맡아 함께 무수히 많은 연주를 해 온 파리 오케스트라와는 유럽 뿐만 아니라, 미국, 아시아 등지를 돌며 훌륭한 연주를 선보였으며, 특히 중국 투어에서는 베이징, 상하이, 홍콩, 칸톤 등지에서 총 6회의 콘서트를 통해 중국 관객을 감동시켰다.
훌륭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크리스토프 에센바흐는 다수의 음반 작업을 통해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선보이기도 하였는데 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드보르작, 차이코프스키), 함부르크 NDR 심포니 오케스트라(말러, 브람스), 파리 오케스트라(베리오, 베를리오즈, 브루크너, 달바비, 라벨 등)와 녹음한 음반들이 호평을 받았다.
2003년 1월에 그는 쉬락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최고 훈장인 레종 도뇌르(Chevalier de la Légion d’Honneur)를 수여받았다.
크리스토프 에센바흐가 이끄는 파리오케스트라_역사는 단절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할 뿐이다 | |||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 |
크리스토프 에센바흐가 이끄는 파리오케스트라 역사는 단절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할 뿐이다 파리오케스트라Orchestra de Paris는 공식적으로 1967년에 창단되었다. 올해로 불혹이 된 셈이다. 이 자체로도 만만찮은 연륜이지만, 그들의 실제 출생기록은 그로부터 한참 뒤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주민등록상의 나이와 실제 나이가 다른 경우, 혹은 잘 살고 있다가 개명을 하여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개명 이전의 파리오케스트라의 역사는 개명 이후만큼이나 중요하다. 개명 이전의 한 세기 반이라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은 오늘날 ‘파리오케스트라’를 넘어서 오케스트라의 역사 그 자체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파리오케스트라의 모태는 파리 음악원의 교수와 학생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Orchestre de la Societe des Concerts du Conservatoire’으로, 프랑스 최초의 오케스트라이다. 이 악단이 창단된 1828년을 전후로 수많은 관현악 걸작과 더불어 유럽 오케스트라는 총체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베토벤은 1826년 ‘합창’ 교향곡을 작곡하고 이듬해 사망하였으며 슈베르트 또한 ‘미완성’ 교향곡을 남기고 바로 이해 사망했다. 또한 베를리오즈는 1829년 ‘환상교향곡’을 작곡했다.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은 「음악원 음악회Concerts du Conservatoire」를 개최하여 이들 동시대 오케스트라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연주했다. 초연 프로그램이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이었을 만큼 이 악단은 오히려 프랑스보다 독일 레퍼토리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었으며, 특히 하이든과 베토벤 교향곡은 이들의 연주가 곧 유럽의 모범으로 통할 정도였다. 오늘날 독일 작품을 연주하는 프랑스 오케스트라에 대한 편견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역설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프랑스 왕정이 폐지되고,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세계 대전을 두 차례나 겪으면서도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은 동시대 관현악의 전통을 유지하며 살아남았다. 1949년 앙드레 클뤼탕스를 상임지휘자로 위촉하면서 역사상 최고의, 그리고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다. 오늘날 파리오케스트라를 대표하는 역동적이면서도 세련되고 색채감 넘치는 사운드는 실은 이 시기의 클뤼탕스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클뤼탕스는 음악적 욕심이 많은 지휘자였다. 그는 1년에 10회 이하였던 콘서트를 30회 이상으로 늘렸으며 악단의 규모도 키웠다. 이러한 시도는 악단을 성장시킴과 동시에 재정악화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1967년 클뤼탕스의 서거와 더불어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의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소설가이자 당시 프랑스 문화성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악단의 해체와 동시에 ‘헤쳐모여’를 시도했다. 말로와, 당시 파리 음악원 교수였던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 지휘자 샤를르 뮌쉬의 노력으로 본래 50명의 단원에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60명의 단원을 추가해 파리음악원 관현악단은 1967년 오늘날의 ‘파리오케스트라’로 새롭게 거듭났다. 파리오케스트라가 창단된 그 순간부터 일류 오케스트라로 명성이 드높았던 이유는 앞서 언급했던 대로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초대 상임지휘자였던 샤를르 뮌쉬는 이 전통과 명성을 그대로 물려받아 한층 굳건히 다졌다. 이 콤비가 창단원년인 1967년에 녹음한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은 오늘날까지도 이 레퍼토리에 관한 한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손꼽힌다. 프랑스 특유의 신비로운 색채감에 역동성과 생기를 겸비하고 있는 이 음반은 프랑스의 연주 전통이 단지 몽환적인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또 그것만으로 완성될 수 없음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샤를르 뮌쉬와 파리오케스트라의 관계는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창단 이듬해인 1968년 거장이 미국 순회 연주 도중 심장발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후 파리오케스트라는 카라얀, 프레트르, 숄티, 바렌보임, 비슈코프 등을 음악감독으로 불러들인 한편, 스토코프스키, 번스타인 등과 음반을 녹음하며 유명세를 지속했다. 카라얀 시대에는 메시앙의 ‘예수 그리스도의 변용’이란 작품을 가지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당당히 입성하였으며, 숄티는 이 악단의 레퍼토리를 무려 3배나 늘려놓았다. 특이한 점은 이 오케스트라가 조르주 프레트르를 제외하고는 자국 출신의 지휘자를 단 한 번도 수장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프랑스 음악’을 넘어서겠다는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 시절부터 내려온 전통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1974년부터 약 15년간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던 다니엘 바렌보임은 특별히 이 악단의 레퍼토리를 다시 한 번 확장시켜 동시대 음악에까지 이르게 한 공로자이다. 바렌보임은 당시 절친했던 작곡가 겸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의 지원 아래 여러 동시대 작곡가에게 작품을 위촉하고 연주했다. 불레즈, 메시앙, 루토스와프스키 등의 음악이 이 악단을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되면서 파리는 현대음악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이후 불레즈가 파리에 유명한 현대음악 연구실 ‘Institut de Reherche et de Coordination Acoustoque / Musique (IRCAM)’를 설립하게 된 계기도, 파리가 유럽 현대음악의 메카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파리오케스트라의 시도가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파리오케스트라는 슬럼프에 빠져들었다. 오케스트라계에 불어 닥친 민주화 바람은 그렇지 않아도 개인주의적이고 자유분방한 프랑스인의 기질을 더욱 자극했고, 이러한 단원들의 분위기 속에서는 조화와 통일이라는 오케스트라의 미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오케스트라를 든든히 받쳐주던 음악원 교수들은 솔리스트로 독립하여 떠났고, 남은 젊은 학생들은 신세대의 개성 그 자체였다. 실랄하기로 유명한 비평가 마누엘 브뤽은 이러한 오늘날의 파리오케스트라를 가리켜 ‘2류’라고 폄하기까지 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크리스토프 에센바흐이다. 에센바흐는 자신을 주장하기보다 악단의 전통을 존중하는 지휘자이다. 밀레니엄의 시작과 더불어 파리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에센바흐는 이 악단의 장점과 약점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 “지금 이 악단의 평균연령은 35세입니다. 가장 나이 어린 단원은 18세에 불과하지요. 내가 파리오케스트라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악단이 가진 개인주의와 난점에 대해 경고해 주었지만, 오히려 그런 점들이 내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만큼 남들과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요. 그들은 잠재력은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줄 모를 뿐이었습니다. 제가 할 일은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바렌보임과 마찬가지로 에센바흐는 현대음악에 남다른 공을 들였다. 처음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마르크 앙드레 달바비를 상주 작곡가로 초청해 4년 동안 데리고 있으면서 파리오케스트라만을 위한 작품을 위촉했다. 또한 베를리오즈, 라벨, 드뷔시 등 본래 오케스트라가 가지고 있던 프랑스 레퍼토리를 균형미 넘치게 다듬었다. 특히 지난해는 파리오케스트라로서는 분수령으로 기록될 만한 해이다. 2006년 9월에 열악했던 음향 시설을 총체적으로 개선하며 재개관한 파리 플레이엘 홀의 상주악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떠돌이 신세를 면하고 멋진 보금자리가 생기면서 파리오케스트라는 더더욱 안정적인 연주활동을 펼치고 있다. 에센바흐의 예술적, 행정적 공로를 높이 산 프랑스 정부는 2003년 그에게 ‘레종 도뇌르 훈장(문화적 공로를 인정하여 대통령이 내리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번 파리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은 다른 오케스트라의 공연과 여러 경우의 수로 비교가 가능하다. 같은 도시 파리에서 정명훈과 함께 둥지를 틀고 있는 라디오프랑스오케스트라와의 비교도 그렇고, 에센바흐의 또 다른 악단인 필라델피아오케스트라와의 비교도 그렇다. 이들 두 오케스트라는 시간차를 두고 앞서 내한한 바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비교는 바로 이 악단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이다. 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데는 이유와 노력이 있다.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 문화계에는 커다란 교훈이 될 것이다. 글 _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_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 |||
| |||
|
마에스트로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 |||
박용완 (월간「객석」기자) |
소통할 수 있어 소년은 울지 않는다 한 소년이 있었다.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그를 낳던 중 세상을 떠났다. 음악학자 겸 교수였던 아버지는 나치에 의해 전장으로 끌려가 결국 전사했다. 이후 소년을 키우던 그의 친할머니마저 난민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는다. 소년의 나이 여섯 살 때의 일이다. 1946년 1월, 어머니의 사촌 발리도레가 난민 수용소에서 소년을 구한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장티푸스를 얻은 아이는 병이 완쾌된 후에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침묵의 시간, 이모이자 양어머니인 발리도레는 소년을 위해 끊임없이 피아노를 쳐주었다. 말을 할 수 없는 소년에게 음악만은 끈질기게 말을 걸어왔다. 아이도 마음속으로 음악을 향해 크게 소리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어느 날 양어머니가 물었다. “너도 음악이 하고 싶니?” 소년은 1년 만에 어렵게 입을 뗐다. “네”라고 힘주어 대답했다. 아이의 이름은 크리스토프. 열세 살이 되어 양부모의 성을 따라 링만에서 에센바흐로 성을 바꿨다. 당시를 회상하며, 육십 대 중반을 훌쩍 넘긴 마에스트로는 음악을 향해 아낌없는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유년기의 작은 파편이 평생 아물지 않는 커다란 생채기를 남긴 것 또한 사실이다. 실어증을 극복한 뒤, 에센바흐는 오직 ‘소통’하기 위해 살았다. 수많은 작품 속에서 작곡가와 함께 어제를 여행했다. 음악축제에서는 젊은 인재들을 발굴해 내일에 닿을 끈을 이었다. 6개 국어로 된 자신의 홈페이지에서는 반갑게 세계인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에센바흐가 가장 ‘뜨겁게’ 소통할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무대이다. 나를 낮춰 내 음악을 높이다 오는 6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한국을 찾는 에센바흐는 지휘자이기 전에 피아니스트로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이다. 양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던 그는 곧 함부르크로 건너와 엘리자 한젠의 제자가 된다. 무엇이든 크고 위대하게, 쓰리고 아프게 비춰지던 십 대의 어느 날. 에센바흐는 푸르트뱅글러를 보았다. 베를린 필을 지휘하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헨으로 이사해서는 당시 독일 최연소 지휘자였던 자발리슈를 보며 성장했다(훗날 에센바흐에게 포디엄을 넘겨준, 필라델피아의 6대 음악감독이 바로 자발리슈다). 한스 오토 슈미트 노이하우스를 사사하던 에센바흐는 이후 함부르크에서 대학에 진학,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익힌다. 푸르트뱅글러와 자발리슈의 인상을 안고 지휘도 함께 공부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본격적인 삶은 22세 젊은 나이에 독일 라디오 콩쿠르(ARD)에서 우승하면서 시작되었다. 2년 뒤인 1964년, 에센바흐는 도이치 그라모폰(DG)과 계약한다. 1960~1970년대, 그는 DG에서 모차르트와 슈만, 베토벤 등을 녹음했는데 이 중 지금까지도 명반으로 꼽히며 피아니스트로서의 에센바흐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모차르트 소나타이다. 1999년, 5장 CD의 박스세트로 재발매된 그의 모차르트 소나타를 들어보면 앞서 말한, ‘작품 속에서 작곡가와 함께 어제를 여행’하는 에센바흐를 만날 수 있다. 겸손히 자신을 죽여, 그는 모차르트를 살려낸다. 더도 덜도 없는 담백한 해석이 그 어떤 ‘파격’보다 세련됐다. 십 대 때부터 지휘에 관심을 보여온 에센바흐지만, 청년시절의 대부분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커리어를 다지는 데 할애했다. 30대가 되어서야 그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지휘자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지휘자 에센바흐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카라얀과 조지 셀이다. 그의 일생에서 유일무이했던 피아노 오디션은 카라얀 앞에서 이뤄졌다. 카라얀, 베를린 필과 함께 에센바흐는 베토벤 피아노 콘체르토 1번을 녹음했고(1966, DG) 그 인연은 카라얀이 세상을 뜰 때까지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조지 셀과의 첫 만남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1969년에 이뤄진다. 협연자로 만났지만, 셀의 눈에 에센바흐는 특별한 피아니스트였다. 이후 1년 동안 그는 조지 셀에게서 지휘를 배웠다. 오케스트라와 관련된 중요한 회동 때마다 셀은 에센바흐를 데리고 다니며 행정가로서의 감각도 가르쳤다. 그러나 1970년, 1년 간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조지 셀은 세상을, 에센바흐를 떠났다. 필라델피아 사운드를 고수한다 이후 에센바흐는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 휴스턴 심포니, 함부르크 북독일 방송교향악단 등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의 상임을 맡으며 지휘자로서 탄탄대로를 이어간다. 1988년 9월 음악감독으로 취임, 11년의 세월을 함께 해 온 휴스턴 심포니는 지휘자 에센바흐에게 각별한 악단이다. 에센바흐와 휴스턴 심포니는 Koch 레이블을 통해 브루크너 교향곡 2, 6번, 말러 교향곡 1번 등을 발매했는데 존스 홀 실황으로 녹음된 브루크너는 국내 음악 애호가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은 음반이다(에센바흐의 지휘자 공식 데뷔 작품 역시 브루크너 교향곡 3번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번 내한공연을 위해 에센바흐는 브루크너가 아닌, 말러의 ‘거인’을 선택했다. 2008년까지 이어질 필라델피아의 말러 사이클에 비춰볼 때, 더욱 기대되는 레퍼토리다. 필라델피아는 이번 한국 나들이를 위해 보헤미안 기질이 물씬 묻어나는 작품들을 준비했다. 6월 6일, 드보르작 ‘카니발 서곡’을 시작으로 피아니스트 랑 랑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바르톡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 공연된다. 7일은, 최초의 비유태인 출신 악장으로 1999년부터 재임 중인 데이비드 김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앞서 말한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이 연주된다. “필라델피아 사운드, 그것은 바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나 자신이다.” 라고 서슴없이 천명하고, 그 유려한 사운드로 19세기 후기 낭만파 레퍼토리에 집중했던 오먼디(1978, 1981년 내한) “더 이상의 오먼디 사운드는 없다.” 며 악단의 체질개선을 꾀한 무티(1985년 내한), 독일 정통성을 강화하고 고전으로의 영역확장을 꿈꿨던 자발리슈(1996년 내한) 등 한국은 스토코프스키를 제외한 필라델피아의 큰 별들과 꾸준히 대면해 왔다. 그리고 새 천년 들어 만나는 이 낭만적인 악단의 수장은 다시금 ‘필라델피아 사운드의 고수’를 외치며 우리를 설레게 한다. 지휘자로서는 처음이지만, 에센바흐는 사실 1970년대에 피아니스트로 한국을 찾은 적이 있다. 너무도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하는 사람보다 기억 못하는 이가 더 많다. 지금과는 참 많이 달랐을 1970년대의 어느 날, 에센바흐는 브람스 소나타로 우리를 위로했다. 마에스트로는 그 기억을,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 중 하나로 꼽는다. 2005년의 초여름 밤, 에센바흐가 별무리 같은 ‘필라델피아 사운드’를 몰고 다시 우리 앞에 선다. 그 밤은 과연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글 : 박용완 (월간 『객석』 기자) |
'공연후기-클래식(2007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렉상드르 타로 Alexandre Tharaud/2007.10.14/예당 (0) | 2007.09.06 |
---|---|
브람스 프로젝트, “브람스는 누구인가?”/2007.11~/금호아트홀 (0) | 2007.09.02 |
카로스 타악기 앙상블과 함께하는 “리듬의 매력”/2007.9.1/예당 (0) | 2007.09.02 |
피아니스트 이은정의‘순수, 그리고 열정...’ /2007.8.30/세종체임버 홀 (0) | 2007.08.31 |
예술가와 만나고 싶다-해금연주자<강은일>/2007.9.11/아람새라새 (0) | 2007.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