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클래식(2007년)

미샤 마이스키 첼로 리사이틀/2007.2.2/예당

나베가 2007. 1. 10. 20:27

 

시적인 감성과 폭풍 같은 격정, 눈부신 기교의 조화!
미샤 마이스키 첼로 리사이틀


“그는 비르투오조 첼리스트로 일생을 살아갈 운명이다…”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한국인이 사랑하는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가 3년만에 우리곁으로 돌아옵니다.
발트 3국의 하나인 라트비아 공화국의 수도 리가에서 태어난 미샤 마이스키는 리가의 음악원에서 처음 첼로를 배웠으며, 이후 로스트로포비치와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를 사사하며 이 시대 최고의 두 거장에게 모두 가르침을 받은 유일한 첼리스트로 인정 받아 왔습니다.
2003년 협연과 2004년 리사이틀 모두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화제를 몰고 왔던 마이스키는 이번 공연에서 피아노의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선택하고 후원하는 피아니스트 세르지오 티엠포와 함께 합니다.

◈ BIOGRAPHY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Mischa Maisky, cello
“마이스키의 연주는 시적인 감성과 폭풍 같은 격정, 그리고 눈부신 기교의 조화이다”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그는 비르투오조 첼리스트로 일생을 살아갈 운명이다”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발트 3국의 하나인 라트비아 공화국의 수도 리가에서 태어난 미샤 마이스키는 리가의 음악원에서 처음 첼로를 배웠다.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부속 음악학교, 모스크바 음악원을 마치고 로스트로포비치와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를 사사하며 이 시대 최고의 두 거장에게 모두 가르침을 받은 유일한 첼리스트로 인정 받는다.
1965년 러시아 전국 음악 콩쿨, 1966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쿨, 1973년 가스파르 카사도 국제 첼로 콩쿨에서 차례로 수상하며 말 그대로 혜성같이 첼로계에 등장한 그는 그러나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반체제운동에 관계된 것으로 간주되어 2년간의 옥중생활을 해야 했다. 그 사이 연주도 할 수 없었으며 자유마저 빼앗겼던 마이스키는 마침내 1972년, 24세 때 출국허가가 내려져 이스라엘로 이주하면서부터 자유를 찾게 된다. 이때의 충격으로 잠깐동안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던 그는 이후 그토록 연주하고 싶었던 첼로를 마음껏 연주하며 본령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루돌프 제르킨으로부터 제안 받았던 말보로 음악제 초청 연주를 시작으로, 피츠버그 교향악단,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또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등에 객연하여 마이스키의 음악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마이스키의 강점은 윤기 있는 음색. 지나치게 감성과 기교에 치우친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지만 그의 연주는 훌륭한 성악가의 노래를 연상케 하는 매력을 지녔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인데, 마이스키는 아주 아름답고 서정적인 바흐를 표현하여 바흐 작품의 원류에 취해있던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바하의 서정성을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한 연주',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 음반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연주’ 라는 평을 받으며 바흐 모음곡의 불후의 명반으로 꼽히고 있다.
흔히 미샤 마이스키 특유의 화려한 무대 의상으로 ‘쇼맨쉽’이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가 그런 하늘하늘한 블라우스를 즐겨입는 이유는 단 하나 연주하기에 편하기 때문이다. 음악에 모든 것을 헌신한 사람, “음악은 종교다”라는 신념으로 음악을 대하는 사람, 미샤 마이스키. 그는 분명 우리시대 최고의 첼리스트이다.

피아니스트 세르지오 티엠포 Sergio Daniel Tiempo, piano
세르지오 다니엘 티엠포(Sergio Daniel Tiempo)는 1972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태어나 생후 2년 8개월의 나이에 그의 어머니 릴 티엠포(Lyl Tiempo)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첫 정식 연주회는 그가 세 살 때의 일이었으며, 네 살 때에는 아르헨티나의 텔레비전에 출연했고, 런던과 프랑스의 망통 페스티벌에서 리사이틀을 열었을 때에도 겨우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었다.

그는 런던에서 테사 니컬슨(Tessa Nicholson)과 마리아 커쇼(Maria Curcio), 파리에서 피에르 상캉(Pierre Sancan)과 미셸 베로프(Michel Beroff), 벨기에에서는 자크 드티주(jacques Detiege)와 알란 바이스(Alan Weiss)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열 네 살이 되던 1986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홀에서 `위대한 피아니스트들' 시리즈의 일환으로 데뷔 연주회를 가진 후, 빠른 속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유럽, 남북 아메리카, 일본 등지에서 수많은 독주회와 협연 펼쳐왔으며 세계적인 유명 오케스트라, 지휘자들과 작업해왔다.

티엠포는 여러 음악 페스티벌에서 환영받는 게스트 연주자이다. 일리노이의 라비니아(Ravinia) 페스티벌, 독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 음악 페스티벌, 스위스의 베르비에(Verbier) 페스티벌 - 이 곳에서 그는 마르타 아르헤리치, 미샤 마이스키, 바버라 헨드릭스,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인 피아니스트 카렌 레히너(Karen Lechner)와 함께 연주했다 -, 프랑스의 툴루즈 페스티벌 - 베토벤 사이클에서 알리샤 데 라로차와 마리아 조앙 피레스와 함께 연주했다 -, `로크 당트롱'(Roque d'Antheron), 콜마르(Cormar), 그리고 몽펠리에(Montpellier) 페스티벌, 뮌헨의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친구들' 페스티벌, 그리고 이탈리아 베르가모의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페스티벌 등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는 열렬한 실내악 애호가로서 여동생인 카렌 레히너와 지속적으로 듀오 연주를 해왔다. 그의 어머니 릴 티엠포와 함께, 그들은 유럽과 남아메리카 순회 연주에서 모차르트의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연주했다. 그는 미샤 마이스키와 같은 첼리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들 성악가들과 함께 순회 리사이틀 열기도 했고, 아르헤리치와 피아노 듀오 연주회를 가졌다.
티엠포는 화려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1986년에 벨기에의 알렉스 드 브리(Alex De Vries) 상을 수상했고, 1980년 런던의 얼링 뮤직 페스티벌(Ealing Music Festival)에서는 네 개의 1등상과 가장 재능 있는 참가자에게 주어지는 특별상 등 다섯 부문에서 수상했다. 2000년에는 독일의 다비도프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세르지오 티엠포 홈페이지 http://www.sergiotiempo.com/

 

공연후기....

오늘 연주회는 크레디아 주최인지라 출발부터 발걸음이 가볍다.

직원들의 한결같은 친절함과 익숙한 반가운 얼굴들도 함께 볼수있음이

언제부터인가 그렇게도 발걸음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은 더우기 우리 발코니식구들 로비모임까지 있다.

 

좀 여유를 가지고 일찍 출발하려 했으나 습관처럼 언제나 시간의 촉박함을 다투는건 어쩔수가 없는것 같다. 다행히 운이 좋아서 버스도 곧바로 탔고, 지하철까지...더구나 예당 셔틀버스까지 떠나기 직전에 타는....기가 막히게 운좋은 날이었던 관계로 30분이나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티켓교부를 받고 만남의 장소인 물품보관소 앞으로 갔다.

익숙한 얼굴들에 한껏 반가움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익숙지 않은 식구들도 있었는데, 좀더 적극적인 인사를 나누지 못했음에 아쉬움을 남기고는

곧바로 일숙언니를 만나 홀안으로 들어갔다.

 

이번 연주는 일숙언니 덕분으로 1층 C블럭 5열...

완전 프리미엄급 자리를 맡았다.

내 옆자리는 주욱...전멸~

이 사람들 지금 얼마나 애간장을 태우며 달려들 오고 있을까.....

 

객석이 어두워지고...

티엠포와 마이스키가 등장을 했다.

오오옷~~~

부풀린 은빛머리와 날카로운 또렷한 이미지...

하늘 하늘한 잔주름이 잡힌 은색 실크쟈켓과 바지..

예상했던것보다 훨씬 패션너블해서 오오~~비명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피아니스트 티엠포와 마이스키의 날카로운 호흡조절 ....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연주와 모습은

모든게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에게서 잠시도 눈을 뗄수가 없게했다.

첫곡은 제목조차도 <"사랑을 느끼는 남자들에게는"....>이었다.

모야~~사랑을 느끼는..???

그리고  두번째곡...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그의 연주는 정말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아니, 연주뿐만이 아니라 연주를 하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곡의 흐름에 빠져 그의 입술은 때론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첼로 연주가 쉬고 있을때는 한쪽팔은 부드럽게 춤을 추듯 했고, 실크쟈켓을 입어 더욱 가녀리게 보였던  활을 긋는 그의 팔은 어쩌면 그렇게도 아름답게 보였는지...아~그뿐만이 아닌 은빛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는 모습까지...

유난히도 부풀려진것 같은 그의 은발과 은빛 실크쟈켓과 갈색 첼로가 지독하리만치 멋지게 어울렸다.

아니...첼로를 연주하고 있는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가

마치 로댕의 작품같다고 느껴졌다.

맞아!! 작품이야!!

 

휴식시간에 커피를 한잔마시고 들어왔다.

2부에 나온 마이스키는 여늬 남자 연주자에게선 볼수 없는 의상이 바뀌어져 있었다.

디자인은 똑같으나 색상이 1부와는 상의와 하의가 바뀐...정말 너무나 마이스키와 잘어울리는...아니,

마이스키만이 소화해낼수 있을것만 같은 의상...

 

2부 첫곡 엘레지를 연주하면서 마이스키는 또 객석을 사랑에 빠뜨렸다.

이어지는 그렇게 어렵다는 라흐마니노프 첼로 소나타....

마이스키의 격정적인 연주는 그도 우리도 숨을 쉴수가 없게 만들었다.

와아!!

잠깐 일숙언니...가 웅얼거렸다.

'숨을 쉴수가 없어...'

으잉? 숨???

그러고 보니 내가 언제 숨을 쉬었나...이제껏 숨쉬고 있었나 하는...의아함 마저 들었다.

완전 몰입...

티엠포와 마이스키는 객석을 완전몰입에로 달려들게 했다.

그렇게 본 연주는 끝이 났다.

우뢰와 같은 박수..함성...을 뒤로 한채 마이스키와 티엠포는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무대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이...연주자 그들도 자신들의 연주에 만족한것 처럼 느껴졌다.

이어지는 함성에 앵콜의 행렬은 우리들을 또 얼마나 열광케 했는지...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의 환상적인 연주...

장한나 연주회때도 들었던 객석을 미치게 만드는 열정적인 쇼스타코비치의 곡...

쇼팽의 라르고로 흥분을 가라앉히더니, 프로코피예프로 완전히  반하게 만들었다.

마치....

키신때가 재연될것 처럼...

쉽사리 흥분이 가라앉을것 같았는데, 출입문을 닫으며 끝을 알렸다.

나의 기립박수도 이제 끝을 내었다.

 

재빨리 나온다고 나왔는데도 팬사인회 줄은 출입문까지 닿아 있었다.

그래도 싸인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 뒷줄의 아가씨는 흥분을 가라않히지 못하고 누구에겐가 계속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너무 멋졌어...너무 환상이었어...나 완전히 반했어....사랑에 빠졌어..."

상대방이 몇살이냐고 물은거 같았다.

쉰몇살이라고 하면서 까르르 웃었다.

ㅎㅎㅎ

 

크레디아에선 워낙이 통재를 잘해주어서 가끔은 너무나 아쉽기도 하지만 이렇듯 끝자락에서 줄서있을땐 또 너무나 다행스런 맘이 들기도 한다.

끝모를것 같았던 차례가...어느덧 마이스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뒤에 서있던 그녀의 어머니에게 내 CD에 사인을 받아줄것을 부탁했더니 쾌히 응해주었다.

ㅎㅎㅎ

싸인받는데 난 고수임에 틀림없다.

 

화장실에 들렀는데 또 어느 아가씨 귀엽게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저렇게 멋진 남자도 있네~ 아이~ 이럴줄 알았으면 예쁘게 하고 오는건데...."

허걱!! 예쁘게까지 ??

"아유~티엠포가 내게 윙크를 할줄 누가 알았어~~"

호들갑을 떨만 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 모습조차 귀엽고 이쁘게 보였다.

ㅎㅎㅎ

CD를 사는데도 티엠포 CD가 불티나게 팔렸었는데...아무래도 조만간 티엠포 피아노 리사이틀이 열릴것만 같다.

나도 그 바램에 예외는 아니다.

지난 장한나 연주후부터 그의 팬이 되었으니까....

 

일숙언니 한마디 한다.

"도대체 왜 그렇게 티엠포에게 반하는 거지?

 귀여워서??? "

 

하긴 앵콜연주할때 쇼팽의 라르고 연주 시작전에 쌩긋하고 미소지음에...정말 미소가 이쁘다고~

ㅎㅎㅎ

언니도 별수없지. 하하핫<<<

어디 그뿐인가?

매너도 좋고, 무엇보다 연주도 기막히잖아!!

으음~~

근데 마이스키는 죽음이야!!

ㅎㅎㅎㅎ

 

나도 내 뒤의 아가씨처럼 사랑에 빠져버렸는 지도 모르겠다.

내나이???

하하핫<<<

 

 

 

 

 

 

 

 

  

  

 

 

◈ 참고자료

[현역 라이벌 열전] 미샤 마이스키 Vs. 요요 마 (96년 10월 객석발췌)
언제부턴가 클래식 음악회에서도 팬 사인회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4년 전쯤이던가.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회에서 사인을 받으려는 팬들이 장사진을 이룬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연주회가 끝나자 마치 대중음악의 스타가 뜬 것처럼 예술의전당 로비는 금세 들뜬 분위기로 변했다. 요요 마의 연주회에서도 그러기는 매한가지였다. 주로 젊은층들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나이 지긋한 팬들도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인기가 남다른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연주 외적인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두 사람은 이른바 ‘스타’가 될 수 있는 충분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스타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또한 기존의 규범을 일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마이스키를 보자. 그는 팝 스타처럼 긴 곱슬머리를 뒤로 살짝 동여매고 멋진 수염을 기르고 있다. 체구는 아담하지만 재규어처럼 날렵하고 당당하다. 표정은 늘 우수에 차 있고 깊은 눈매를 갖고 있다. 그가 첼로를 연주하면 특유의 분위기가 감지되어온다. 일종의 경건함이다. 마치 러시아 정교회의 사제 같은 풍모를 풍긴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는 단조롭지 않은 분위기를 연출할 줄 안다. 그의 연출은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아직도 파격으로 받아들여진다. 무대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을 보라. 연미복 대신에 주름잡힌 실크 블라우스라니! 게다가 곡이 바뀔 때마다 블라우스의 색깔도 매번 덩달아 바뀐다. 바흐를 연주할 땐 흰색,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할 땐 보라색, 슈베르트를 연주할 때는 검정색, 그런 식이다. 처음에는 패션쇼라는 비아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거부감을 표시하는 청중은 없다. 오히려 환호한다.

요요 마 역시 클래식 아티스트의 전통적 이미지와는 얼마간 거리가 있다. 그의 옷차림은 예의를 갖춘 정중한 연미복 차림이지만 그의 무대 매너는 마치 마음씨 좋고 얼굴 잘생긴 이웃집 총각 같다. 청중을 대하는 그의 얼굴엔 늘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여느 클래식 아티스트들처럼 격의를 갖춘 의례적인 미소는 아니다. 타고난 천성인 듯하다.

연주가 시작되면 또 어떤가. 요요 마의 표정은 마임을 하는 배우처럼 드라마틱해진다. 얼굴을 찡그리는가 하면 웃고,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넋이 나간 표정을 짓기도 한다. 이 역시 클래식 음악계에서 그리 흔한 풍경은 아니다. 중국인 특유의 오버액션, 혹은 미국적인 쇼맨십으로 치부될 소지가 크지만 그는 그런 시선에 개의치 않는다. 오로지 음악 만들기에 열중할 뿐이다.

이러한 일탈이 청중에게는 늘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클래식 음악계의 보수적인 성향에 대한 반발심리일까. 그러나 그러한 일탈 행위가 단순히 인기에 영합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연주가로서 그들의 생명은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탈이었다. 음악 자체를 위한 일탈이었다는 이야기다.

마이스키의 질곡의 삶과 승화된 음악세계
마이스키는 인터뷰에서 늘상 제기되곤 하는 자신의 옷차림에 대해 일관적인 견해를 밝히곤 한다. “연주회는 패션쇼가 아니다.” 그가 인터뷰어로부터 의상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먼저 못박는 이야기다.

그에게는 무대에서의 연주 행위가 일단은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육체적 노동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힘겨운 노동을 하는데 연미복에 타이라니 당치도 않다는 논리다. 그런 편치 않은 옷으로는 좋은 연주가 나올 리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과감히 연미복을 벗어던지고 헐렁한 실크 블라우스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땀을 유난히 많이 흘리는 체질을 가진 그로서는 한 곡의 연주가 끝날 때마다 무대 뒤에서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있었다. 길지 않은 휴지 시간에 실크 블라우스는 갈아입기에도 간편하다. 이왕에 갈아입는 것이니 의상의 색깔을 달리하는 것이다. 대단히 합리적인 생각이다.

사실 더운 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는 연주가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그 때문에 연주는 물론이고 감상에 방해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목도하게 되지 않는가.

마이스키의 일탈을 심층심리학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또 다른실마리가 발견된다. 그리고 그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는 그의 아픈 과거사를 들춰보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옛 소련의 라트비아 공화국 태생이다. 유태인 가정. 양친이 음악을 좋아한 덕분에 일찍이 첼로를 배울 수 있었다.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중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입상해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 입상자들 중 심사위원이었던 로스트로포비치의 제자가 아닌 사람으로는 그가 유일했다. 예사롭지 않게 본 로스트로포비치는 그를 모스크바로 데려와 자신의 집에 기거시키며 가르친다.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따르는 불행도 만만치 않았다. 2년 여의 수용소 생활, 정신병원 입원, 그리고 마침내는 이스라엘로의 망명.

망명으로까지 이어진 경위는 실로 드라마틱하다.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 동기는 두 가지로 엇갈려 전해지고 있다. 69년에 누이가 이스라엘로 망명했기 때문에 체포되었다는 설. 그리고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을 앞두고 암시장에서 녹음기를 사다가 체포되었다는 설. 2년 여의 복역 끝에 그는 민족의 본향 이스라엘의 품에 안긴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24세. 진저리쳐지는 전체주의의 악몽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한 구레나룻은 수용소 시절의 산물이다. 수용소에서 그의 머리는 빡빡 깎여졌으나 반대로 수염은 자를 틈이 없어 그냥 기른 채 생활해야 했다. 무엇보다 참기 힘들었던 것은 2년 동안 그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첼로와 격리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머리를 기른 것은 옛 소련의 전체주의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발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스스로의 심리를 분석하기도 한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그의 자유로운 의상도 획일화된 전체주의에서 해방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이 연주가로서의 삶에 밑거름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어려운 시절이 없었다면 오늘의 마이스키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솜씨좋은 첼리스트는 되었을지언정… ‘삶의비애와 고뇌를 승화시켜 인간 혼의 연주를 한다’는 평가는 이제는 그를 이야기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의례적인 수식어가 되어 버렸다.
‘삶의 희열과 생활 속의 깊은 번뇌를 함께 융화시킨 조화로운 선율을 만들어낸다’는 표현도 진부하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만큼 그가 구축해 놓은 음악세계는 음영이 깊고 풍부하다.

신동으로 출발, 바흐에서 재즈까지 넘나드는 자유주의자 요요 마
마이스키에 비해 요요 마는 퍽이나 순탄한 삶을 살아왔다. 이 중국계 미국인이 태어난 곳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스러운 도시 파리다. 1955년생이니까 마이스키보다는 7년 연하가 된다.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와 성악을 전공한 어머니… 온통 음악적인 분위기였다. 아버지의 교육은 퍽 엄격하고 고지식했던 것 같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매일 두 소절씩 연습하게 해 다섯 살이 되었을 때는 완전히 외워서 연주할 수 있게 했으니! 여섯 살에 파리 대학에서 공개 리사이틀을 가진 아이는 ‘신동’으로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것이 7세 때의 일이다. 이차크 펄만이 그랬던 것처럼, 자니 카슨 쇼에 출연해 또 하나의 신동이 신대륙에 당도했음을 알린다. 줄리어드에서 레너드 로즈를 사사하는 동안 카잘스의 추천을 받아 ‘미국 음악 페스티벌’에서 번스타인과 협연한다. 15세에 카네기홀에서 공식적인 미국 데뷔. 미국 국적의 아티스트에게만 주는 에이버리 피셔상이 그에게 주어진다. 이때가 23세. 그렇듯 승승장구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조만간에 슬럼프의 시기가 닥친다. 줄리어드를 마치고 콜럼비아 대학에 진학할 무렵이었다. 우울증에 빠져 첼로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게 된다. ‘왜 나는 음악을, 첼로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회의에 빠진 것이다. 그것은 곧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오이디푸스적인 반발이며, 동시에 진정한 자아 찾기에 돌입했음을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콜럼비아 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누이가 공부하고 있던 하버드 대학으로 옮겨 독문학과 인류학을 공부한다. 첼로 연주회는 갖지 않는다.

이 시기는 오로지 근원적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 바쳐진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이 공백기가 오히려 다행스러웠다고 그는 회고한다. 왜 음악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문학과 철학 등 풍부한 인문 지식을 쌓음으로써 음악에 한정되었던 시야를 넓힐 수 있었던 것은 훗날 그의 음악을 살찌우게 한 큰 소득이 되었다. 이 시기에 로스트로포비치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로스트로포비치 역시 마이스키 이후 발견된 특별한 재능에 기뻐했을 것이다.

요요 마의 연주는 요컨대 행복한 음악 만들기이다. 슬럼프 시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마이스키에 비하면 순탄한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이다. 음악하는 양친을 두었고, 파리의 자유스런 공기를 마시며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줄리어드에서 좋은 스승을 만났고, 최고의 명문 하버드에서 인문을 배웠고, 카잘스와 로스트로포비치를 만났고, 에이버리 피셔상을 받고, 카라얀이 지목하고… 그의 연주에서 ‘생의 행복’이 우러나오는 것은,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그의 첼로 소리는 우선 풍요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참으로 우아하다. 르네상스 시대의 명화에 나오는 여인처럼… 로맨틱하고 부드러운 톤, 풍부한 감성은 이전에 없었던 그만의 특징이다.

그가 스물다섯 살 때 녹음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 대한 반응은 흑과 백처럼 상반되어 엇갈려 나타났다. 한쪽에서는 ‘연주가 너무수월하고 유려해서 바흐다운 깊이를 잃어버렸다’는 비판이 거셌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바흐 해석의 획일성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었다’는 호의적인 평가도 만만치 않았다.

하기야 바흐는 그에게 알파와 오메가였지 않은가. 어릴 적부터 주기도문을 외우듯이 바흐를 외웠다. 바흐는 그에게 늘상 일용할 양식이었다. 4세 때 첼로를 처음 시작한 것이 바흐, 6세 때의 첫 리사이틀도 바흐다. 바흐는 그렇듯 그에게 지극히 일상적인 음악이었다. 그러니 호흡을 하듯 바흐는 수월할 터였다. 녹음도 비교적 일렀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이순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조심스럽게 자신의 바흐를 온전히 고해성사한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요요 마의 음악세계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 그는 스스로를 한정된 카테고리에 가둬두려 하지 않는다. 늘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는 그에게서 미국적인 자유로움이 느끼하지 않게 배어난다. 각 나라의 민속음악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그는 지난해 내한했을 때는 한국의
민속악기 연주자와 함께 연주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그렇듯 고정관념이란 그의 사전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재즈 뮤지션과 어울려 이른바 크로스오버 음악을 만드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미 클로드 볼링?스테판 그라펠리와 호흡을 맞춘 바 있는 그는 재즈에서
바로크 시대의 음악과 유사한 점을 발견한다. 베이스 라인만 갖고서 즉흥적으로 음악을 만들어가는 폼이 영락없이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닮아 있었던 것이다.

92년 흑인 가수 바비 맥퍼린과 함께 녹음한 ‘허쉬’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빌보드 크로스오버 차트 1위를 그해에 가장 오래도록 고수했다. 맥퍼린과의 체험은 각별했다. 두 사람은 88년 탱글우드에서 번스타인의 고희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그러고 나서 두사람이 의기투합해 함께 무대를 만든 것이 샌프랜시스코에서 가진 맥퍼린의 40회 생일 기념 음악회다. 맥퍼린은 대중음악가로는 유례없이 교향악단을 지휘했고, 요요 마는 난생 처음으로 즉흥 연주를 펼쳤다. 요요 마로서는 아찔하고 짜릿한, 별난 체험이었다.


‘혼’이 깃든 종교적인 연주의 마이스키 vs. 따스하고 친근한 인간적인 연주의 요요 마
재즈에 대한 마이스키의 견해는 요요 마의 입장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마이스키 역시 재즈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첼로로 재즈를 연주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우선 이 악기의 소리가 재즈에 어울릴 성싶지 않다는 것이다(마이스키에게 있어 첼로라는 악기는 오묘하고 신비한 대상이다. 그가 생각하는 첼로의 소리는 악기를 잘 다룬다고 울려나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인 것이다. 그가 자신의 영적인 느낌을 첼로를 통해서 표현하면 이 악기는 영혼의 사운드를 표출해낸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첼로의 소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재즈를 연주해낼 재간이 없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재즈를 연주하기에는 첼로가 너무 신성한 악기’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첼로라는 거룩한 악기로 바흐도 연주하고 재즈도 연주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이스키의 연주에서 ‘혼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이리라. 반면에 요요 마의 연주에서는(아무리 그가 신들린 듯이 연주한다 하더라도) ‘혼’의 느낌을 감지하기란 쉽지 않다. 따스하고 친밀한 정서를 느낄지언정.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마이스키의 연주가 종교적이라면 요요 마의 연주는 인간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대조적인 인생 역정과 이질적인 음악 스타일을 보이는 두 사람에게도 공통점은 있다. 그리고 그 공통점은 청중이 그들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되고 있다.
두 예술가의 성실하고 겸손한 태도가 그것이다. 그들을 한번쯤이라도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모에 또한 번 감동하게 된다. 그들이 첼로를 통해 만들어내는 음악과 다르지 않다는, 언행일치의 감동이다.

마이스키를 가까이에서 대하면 소년 같은 감수성과 순수함이 느껴져 온다. 그리고 무척 진지하고 겸손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 겸손이란 어쩔 수 없는 미덕이며, 따라서 스스로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위대한 음악가의 작품을 연주할 때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작고 무가치한 존재인가를 느낀다고 한다. 바흐나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에 비추어볼 때 연주가들이란 참으로 한 마리의 모기만도 못한 초라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늘 자각하고 자신의 모습을관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늘 아마추어라는 심정으로 연주에 임하곤 한다. 오히려 프로페셔널리즘이란 자만심을 심어주거나 자칫 매너리즘에 빠뜨릴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요요 마 역시, 인생의 큰 목표를 훌륭한 현악 4중주단의 첼리스트가 되는 것에 두었으며 다른 것은 모두 덤으로 얻은 것이라고 할 만큼, 신동 출신답지 않은 겸손함을 보이는 예술가이다. 그의 성실성 또한 유별나다. 죽을 때까지 매일 연습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악기를
완전히 극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항상 마음에 새겨두는 말이 있다. 생전의 카잘스가 90세의 고령에도 매일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을 연습하면서 “오늘 나는 근육을 풀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깨달았다”고 한 이야기다. 그는 또 카잘스의 인생 태도에서도 큰 감명을 받은 바 있다. 카잘스가 “나는 첫째는 인간이고, 둘째는 음악인이고, 마지막이 첼리스트”라고 한 말이다. 그런 까닭에 “카잘스는 음악을 사랑했지만 그 음악 때문에 세상과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았다”고 그는 파악한다.

늘상 행복한 미소를 보이는 요요 마가 두려워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자신의 음악세계가 진부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예술가로서의 그에게 죽음을 의미한다. 그는 모든 도전을 사랑하고 음악을 새롭게 창조해내려 애쓴다. 요요 마가 근자에 와서 옛음악의 편곡과 더불어 동시대의 창작음악에도 큰 애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여러 창작곡들을 초연하고 레코딩으로도 남기고 있다. 인류학도 출신답게 음악으로 인류에게 봉사하고 싶다는 그는 보스니아 내전을 소재로 한 창작곡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도 즐겨 연주하고 있다. 이 불안한 세기말에 그의 음악은 큰 위안이 되리라.

마이스키의 근황도 희망적으로 들려온다. 옛소련 체제하에서 푸르른 청춘을 짓밟혔던 그는 내심 이렇게 다짐했었다.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92년 우리나라에 왔을 때도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붕괴된 조국 소련에 가서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고 말했던 그다. 그러나 귀소본능은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는 귀향 연주회를 갖는다. 94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을 녹음(DG), 존경하는 스승 쇼스타코비치에게 헌정했다(그는 쇼스타코비치에게서 직접 이 곡을 배운 바 있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5월에는 크레믈린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내한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이제야 그는 비로소 전체주의에 가위눌렸던 악몽에서 자유로워진 듯하다.

공윤조/음악 칼럼니스트

 

                                                                           라흐마니노프/ 첼로소나타


I. Lento - Allegro moderato - Moderato
Gary Hoffman, Cello / Jean-Philippe Collard, Piano


II. Allegro scherzando
Gary Hoffman, Cello / Jean-Philippe Collard, Piano


III. Andante
Gary Hoffman, Cello / Jean-Philippe Collard, Piano


IV. Allegro mosso - Moderato - Vivace
Gary Hoffman, Cello / Jean-Philippe Collard, P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