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기-뮤지컬

미스 사이공 / 프리뷰

나베가 2006. 6. 6. 14:42

 
뮤지컬 <미스 사이공> 한국초연!

 

 

 

'미스사이공' 英서 다시 열광... 세계투어 2년만에 관객 100만
입력시간 : 2006-04-17 10:53

“그댄 햇살, 난 달빛….”

‘해와 달’의 멜로디가 차갑게 부서졌다. “안 돼…” 하고 울부짖는 크리스의 품에서 킴은 마지막 숨을 놓았다. 비극을 낳은 건, 그녀의 말처럼 딱 하룻밤이었다. 수십 개 홍등을 늘어뜨린 밤으로 열렸던 무대도 이 밤 장면으로 닫혔다.

15일 밤(한국시각 16일) 영국 버밍엄의 히포드롬. 2004년 새로 움튼 뮤지컬 ‘미스 사이공’ 투어 공연이 668번째 감동을 쏘아올렸다. 실물 크기의 헬리콥터를 첨단 3D영상으로 대체하고 무대를 축소한 버전. 또렷해진 건 드라마의 힘과 인물의 부피감이었다. 이미 영국 주요 도시는 물론 포르투갈 리스본, 아일랜드 벨파스트의 총 100만명이 이 투어 공연을 접했다. 이날 2000석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미스 사이공’이 새로 쓰기 시작한 롱런 기록에 올라탄 걸 박수로 자축했다.

160분짜리 비극적 러브 스토리를 밀어올린 지 17년. 1989년 영국 런던 초연 후 19개국 138개 도시에서 3100만여명의 관객을 잡아당겼다. 매표 수입 13억달러(약 1조3000억원). 초연 멤버들의 음반이 출시 3일 만에 15만장이 팔리는 등 11개나 쏟아져 나온 음반도 히트 릴레이였다. 1999년 막을 내린 런던 공연, 2001년 폐막한 뉴욕 공연으로 마침표를 찍은 줄 알았던 ‘미스 사이공’은 몸집을 줄이고 드라마를 강화한 투어 버전으로 거듭났다.

1975년 전쟁 막바지의 베트남 사이공. 나이트클럽 댄서인 열일곱 살 베트남 소녀 킴은 미국 해병 크리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어지는 미군의 비상 탈출과 크리스 아이의 출생. 하룻밤 사랑은 시련으로 곤두박질친다. 새 투어 공연은 정혼자 투이를 죽이고 아이를 위해 자살을 택하는 킴, 아메리칸 드림에 사로잡힌 엔지니어의 흡인력 강한 드라마로 객석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푸치니 오페라 ‘나비 부인’(‘미스 사이공’과 이야기 뿌리가 같다) 팬인데 뮤지컬 음악은 은은하면서도 깊네요. 압축한 무대와 음향효과도 좋았습니다.” 이날 만난 관객 수잔 펠프스(여·51)씨의 말이다. ‘미스 사이공’의 모든 버전을 봤다는 원종원 뮤지컬 평론가는 “병사들이 진짜 동체에 올라타는 것 같은 헬리콥터 탈출 장면도 그 섬세함이 기대 이상”이라고 평했다.

뮤지컬은 규모가 중요한 상업예술이다. ‘뮤지컬 빅4’는 모두 1980년대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움텄지만 그들을 세계시장으로 도약시킨 ‘성공의 인큐베이터’는 브로드웨이였다. 빅4 중 막내로 태어난 ‘미스 사이공’은 20세기 런던에서 뉴욕으로 진출한 뮤지컬 가운데 마지막 히트작. 브로드웨이 역사상 7위의 롱런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개막 전 예매 기록으론 1991년 3700만달러를 올려 ‘맘마미아!’(2001)의 2700만달러를 뛰어넘는 브로드웨이 챔피언이다.

아득한 과거(‘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나 판타지(‘캐츠’)가 아닌 현대의 비극 베트남전이 배경이라는 게 당초 ‘미스 사이공’의 아킬레스건으로 꼽혔다. 이 작품에서 킴은 크리스가 호신용으로 준 권총으로 자살한다. 실패하는 사랑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들춘다는 점에서, 약점은 거꾸로 롱런의 비결이 된 것 같다. ‘레 미제라블’의 작곡가인 클로드 미셸 숀버그, 작사가인 리처드 멀트비 주니어와 알랭 부빌 콤비가 만든 ‘세상의 마지막 밤’ ‘난 여전히 믿어’ ‘내 모든 걸 줄게’ 같은 명곡과 함께 김보경·김아선이 킴을 맡는 ‘미스 사이공’. 한국 초연(6월 28일부터 성남아트센터·티켓 발매 중)까지 이제 일흔두 밤 남았다.

(버밍엄=박돈규기자 (블로그)coeur.chosun.com)


 

 

미스 사이공>의 기록들

2006년 6월. 드디어 한국에서 그 첫 번째 공연을 앞두고 있는 뮤지컬 미스 사이공은 17년 전 1989년 9월 20일 런던의 로열 드루어리 래인 극장에서 초연한 후 1999년 10월 30일까지 총 4,263회 공연을 가졌으며 그 후 21개 기획사가 19개국 138개 도시에서 공연하였다.
미스사이공은 3개의 Tony Award, 4개의 Drama Desk Awards, 3개의 other Critics Circle Awards, 1개의 Theatre World Awards를 포함한 29개 주요 극장상을 수상하였다.

10개 국어로 번역되어 공연한 미스사이공은 1991년 미국 브로드웨이 진출 시 개막전에 이미 3,700만 달러의 예약티켓이 팔려 기네스북에 수록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19,000번의 공연으로 3,100만 사람들이 관람하였다.
그리고 미스사이공 공연은 전 세계에서 9억 5천만 파운드의 수익을 올렸다.

이번 한국 공연에서 진행한 오디션에는 1,100명의 지원자가 몰리고 마닐라에서 실시한 오디션에도 500명이 지원하여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으며 2주간 하루 10시간의 빡빡한 오디션 일정을 진행하였다.
주요배역과 앙상블 등 40여명이 출연하는 미스사이공 한국공연은 100억원 정도의 제작비가 소요된다.
새로운 미스 사이공(New Production)은, 기획단계만 5년이 걸렸고, 공연을 제작하고 무대를 만드는데 3년이 더 걸려서 완성하였다.

 

 

 

 

 

 

 

“미국에서 아시아계 배우로 살아남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그냥 의사로 살았다면 걱정도, 한계도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매일 하죠. 하지만 전 마음속 부름을 따를 수밖에 없는 배우인걸요.” 오는 28일 개막하는 뮤지컬 ‘미스 사이공’은 한국 초연 무대답게 혜성처럼 등장한 얼굴들이 많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브로드웨이에서 활동 중인 재미교포 2세 마이클 리(33)다.

올해 초 1100명의 지원자가 몰려 치른 오디션에서 끝내 적역을 찾지 못했던 크리스 역은 결국 싱가포르에서 공연 중이던 마이클 리를 만나 임자를 찾았다. 처음 밟은 고국 땅에서 연습에 여념이 없는 마이클 리는 “고국의 첫 무대에 나의 브로드웨이 첫 데뷔작인 ‘미스 사이공’을 선보이게 돼서 너무 기쁘다”고 말문을 열었다.

“의사의 길을 접고 뮤지컬배우가 됐을 때 부모님이 갈등을 많이 겪으셨죠. 하지만 부모님을 제 가장 열렬한 팬으로 만든 무대가 바로 ‘미스 사이공’이었어요. 특히 미국 무대에서는 동양인이라 맡을 수 없던 미군병사 크리스 역이라서 흥분됩니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마이클 리는 의사인 아버지와 형을 따라 스탠퍼드 의대 재학 중이던 10년 전 뮤지컬배우로 데뷔했다.

1995년부터 ‘투이’ 역을 맡아 2년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했고, 1999년 톈안먼사태를 다룬 록 오페라 ‘베이징의 봄’, 2000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2002년 뮤지컬 ‘알라딘’을 거쳐 리아 살롱가와 함께 2인극 뮤지컬 ‘듀엣’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캐츠’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과 함께 뮤지컬 빅4로 불리는 ‘미스 사이공’은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미군 병사 크리스와 베트남 여인 킴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작품. 미군 남성(크리스)을 구원자로 바라보는 것 아니냐는 불편한 시각도 있다. 이에 대해 마이클 리는 “크리스는 미군과 미국인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라면서 “전쟁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 크리스가 역시 길 잃은 여인 킴과 만나 서로에게 위로와 사랑을 구하는 이야기가 ‘미스 사이공’”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공연은 실제 헬리콥터가 등장하던 장면을 3D영상으로 처리한 버전이라 아쉬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헬기 장면이 “낭비”라고 잘라 말한다.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1만5000명이 들어찬 공연장에서 ‘미스 사이공’을 본 적이 있어요. 실제 헬기가 날아와 착륙했다가 비상하는 공연이었는데, 헬기 때문에 스토리의 여운이 다 날아가버렸죠.”

뮤지컬의 매력으로 “드라마가 있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꼽은 그는 “‘레미제라블’의 클로드 미셸 숑베르가 작곡한 ‘미스 사이공’ 노래는 듣기만 해도 감정이 자연스럽게 나와 사람 마음을 움직인다”고 말했다. 공연은 8월 20일까지 성남아트센터, 9월 1일∼10월 1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김은진 기자 jisland@segye.com

 
   

06. 존은 개과천선한 바람둥이다!?

가깝게 지내는 몇몇 지인들과 미스 사이공을 보고 극장을 나서며 대화 꽃이 피었다. 무대도 멋있고 음악도 훌륭한데, 공통으로 지적되는 내용상의 불만은 왠지 존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용인 즉, 첫 장면의 사이공 술집 드림랜드에서 베트남 여인과 방탕한 모습을 보이던 그가, 또 함께 미국에 가자며 비자 이야기를 꺼내는 술집작부 지지를 바닥에 팽개치듯 떠밀며 성을 내던 이기적인 미군이었던 그가 오히려 2막에선 ‘부이 도이(Bui Doi, 먼지 같은 인생)’를 외치며 아메라시안(Amerasian, 미군과 베트남 여인간의 혼혈아)을 위한 자선 단체에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왠지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특히 영국에서 공연 중인 투어 버전의 존은 우리 일행의 공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존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그의 변신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존의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군 기자로 유명한 에반 토마스의 ‘사이공 최후의 날들(The last days of Saigon)’이나 국내에서도 출간된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곳에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정보분석 요원이었던 프랭크 스넵에 관한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이공의 많은 비밀 공작원들과 마찬가지로 스넵은 최후의 탈출이 있기 수개월 전부터 전쟁이 이미 미국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여러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사이공 함락이 가까워오면서 스넵은 비밀리에 대사관의 기밀문서를 태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그레이엄 마틴 주 베트남 미국 대사로부터 자신의 자동차와 대사관 수영장이 온통 태워진 서류의 재로 더렵혀졌다는 불평을 들어야만 했다. (아마도 뮤지컬에서 존이 크리스의 전화를 받으며 무언가 끊임없이 대사관 아래층 드럼통으로 서류를 던져 태우는 모습도 스넵에 대한 기록에서 착안된 장면일지 모른다)

스넵은 훗날 회고에서 상황의 심각성을 마틴 대사에게 보다 일찍 더 진지하게 보고했어야 했던 것 같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상황에 대한 인식과 판단, 그에 따른 행동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이자 거대한 압박이다.


특히 사이공 함락에 관련된 기록들은 CIA 정보원이었던 그에게도 얼마나 당시 상황이 긴박하게 전개됐는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스넵에게는 한때 내연의 관계였던 베트남 찻집 아가씨 마이 리와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도 있었다. 헬기 탈출이 임박했을 무렵 마이 리는 스넵에게 연락을 취했다. 한 시간 뒤 다시 전화하라고 말했던 스넵이 대사에게로의 보고 관계로 연락이 닿지 않자 그녀는 “당신이 이럴 줄은 몰랐어”라는 메모를 남긴다. 헬기 탈출이 시작된 직후 스넵은 평소 안면이 있던 사이공의 한 경찰로부터 마이 리와 아이가 피가 흥건히 고인 바닥에 자살한 채 발견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전쟁이 끝난 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스넵은 마이 리 모자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미국으로 돌아온 스넵은 CIA에 의해 방콕에 파견돼 보트 피플을 포함한 베트남 남민들을 심문하는 역할을 맡는다. 1976년 그는 사이공 함락에 대한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이 책에서 당시 자신의 상관들이 철수 작전에 실수를 저질렀다는 비판을 담아 CIA 내부로부터 큰 반발을 일으켰다. 언론의 자유에 관한 논란으로 관심을 끌었던 1978년 소송에서 스넵은 기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깬 혐의로 CIA에게 고소당해 책의 판매 수익을 환수 당했다.

이제 TV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는 그는 1991년 우연히 사이공을 다시 찾는 기회를 얻게 된다. 마이 리와 함께 지내던 초라한 집을 지나면서 그는 문득 아들이 살았다면 지금 18세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는 에반 토마스의 마지막 기사 문장은 오래도록 씁쓰름한 뒷맛을 남겨준다.


‘미스 사이공’에서 존은 대사관에서 일하는 정보 장교이다. 이번 공연의 연출자인 로렌스 코너는 베트남 술집 드림랜드에서의 상황을 두고 전쟁의 막바지에서 패전이 될지도 모른 전시 상황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다루어야 했던 존에게 드림랜드는 극도의 스트레스에서 그리고 암담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고 설명한다. 그의 행동이 정당화 될 순 없을지 몰라도 나름대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전쟁이 사람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로렌스의 해석은 어느 정도 공감할 만한 지적이다. 결국 미국으로 돌아와 부이 도이에 대한 자선 활동에 집착하는 존의 모습은 마이 리와 죽은 아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일생을 후회하며 살아가는 프랭크 스넵에 투영해 이해해 볼 수 있다. 전쟁은 가해자에게나 피해자에게 모두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 현실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는 등장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