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이전 공연들

화음-2. 죽음과 상실. (화음 챔버 오케스트라)2003. LG아트

나베가 2006. 5. 15. 08:35

 

아침에 주해갔다가 오후에 백석동 반장 교육에 갔다왔다.

다 알고 있는 환경 문제였지만, 그래도 새롭게 우리에게 일침을 가하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일산에 와서 반장되고 첫 교육 갔을 때도 환경교육과 먹거리에 대해서 교육받았었는데...

그때 신부님께서 얼마나 열정적으로, 아니 차라리 안타까움이었어,,,강의를 하셨던 지, 내맘까지 벅차올랐던 기억이 났다.

 

어제 음악회는 '죽음과 상실'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설명도 들으면서, 그림도 보고, 연주를 듣는 ...사실은 아주 편안한 음악회였다.

그러나 주제에서 느껴지듯이 그리 편안한 마음만으로는 들을 수 없는....

자기 성찰의 시간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야나첵과 뭉크....

백병동과 프리다 깔로...

슈베르트와 모딜리아니, 에곤쉴레....

 

평생이 가난과 죽음과  병으로 얼룩진...그래서 하나같이 요절한 삶을 살다간 이들....

음악을 듣는 내내 '상실'이라는 단어가 마음 한 구석을 짓누르고 있었다.

 

'상실감'

그 고통의 크기가 너무 강해서 다 타버려 아무것도 없는, 정말 텅비어 버린....

죽음보다도 더 한없이 긴 공간을.... 아무것도 없어서 설수조차 없는 그 공포에 가까운 공허감....그리고 아무것도 없는데 짓눌려지는 압박감.....

그래서 미쳐버릴 수 밖에 없는.....

그리고....그 살아있음의 끝에서 온몸으로 살려낸 아름다움 !

 

그들의 삶속에서 꽃피워낸 작품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죽음으로 얼룩졌던 야냐첵의  삶속에서 피어난 그 아름다운 선율에 가슴에이었고,  뭉크의 작품에선 진실한 삶의 절규가 전율을 일으켰다.

그렇게 쉽게 말했던 그의 작품에서.....

 

7세때 소아마비가 되고, 그후 교통사고 후 30여 차례나 수술을 받은 '프리다 깔로'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백병동님의 작품은 더우기 초연이었다.

나에겐 매우 난해했지만, 음악가의 초연을 듣는다는거...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역시 가난과 방탕의 삶을 살다가 31세에 요절한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듣는데는

차라리 '힘'이 느껴졌다 .

평상시 아름다운 그의 가곡이나 미완성교향곡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아름답게만 느껴졌던 모딜리아니의 작품에서도 , 에곤 쉴레의 작품에서도 끝모를 그 무엇....삶의 고통,  삶의 깊이가  보이는 듯 했다. 

 

삶의 아름다운 모습만 너무 쉬이 바라보고 살아온 내 삶이 조심스럽게 포개어졌다.

어저께 읽은 신영복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느낌과 함께....

 

레퀴엠이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들을때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의 죽음과 사투하며 곡을 써내려가던...그 흥얼거림이 지치지않고 감동이 되어 가슴을 적신다.

 

극과 극은 어쩌면 같은 것인 지 모르겠다.

 

이 가을엔...

언제나 삶의 밝은 면만을 보고, 그쪽에서 힘과용기를 얻어 그렇게 밝게 살아가라는...

그런 나지만....그 뒷편 어두움속에 가려진 삶도 제대로 볼 수 있는 맑은 눈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애들에 대한 욕심도 그들 자신에게 맡기고....

재물에 대한 욕심도 .....그저 진부 형님네 집 옆에다 통나무 집 짓고 살며,

감자만 먹고 살것처럼 가난하게 먹고 살며,

따듯한 햇살아래 집에 있는 음악 들으며, 책읽으며 살겠다고.....

 

그런 삶이 결코 누구나 그렇게 살수 있는 가난한 삶이 아니라는 걸,

조금 멀리 바라보니, 그들이 왜 자살을 택할 수 밖에 없었는 지....그런 유혹에 시달리며 사는 지....조금은 알것 같았다.

특히 신영복님의 글을 읽고는 더욱 그랬다.

 

쉽게 말하지 말며,

절대 함부로 평가하지 말며,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듯이...항상 감사함으로 살며,

무엇보다 '채움'보다는 '비움'의 자세로 살려고 또다시 맘먹는다.

 

언젠가 스님이 쓰신 '매달려 가지 마라' 는 책을 읽고

'절제'를 삶의 근간으로 삼자고 크게 써서 냉장고 앞에다 써 붙여 놨었든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고통속에서 온몸으로 처절한 삶을 살다간 사람만이

세상에 아름다움을 주고 가는것 같다.

 

2003. 8. 25.


 

화음 2 `죽음과 상실`
2003.8.24(일)
LG 아트센터와 CJ Classic 의 공동기획으로 선보이는 2003 畵音 시리즈의 두번째 공연. 그림과 음악, 해설이 있는 이 음악회는 죽음과 상실이 빚어낸 예술 작품들과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로 꾸며진다.
프로그램 1. 내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야냐첵 – 현악 합주를 위한 모음곡/ 뭉크 ‘병실에서의 죽음’

2. 상실 :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백병동 창작곡/ 프리다 칼로 ‘부러진 기둥’

3. 죽음을 기리다
슈베르트– 죽음과 소녀/
모딜리아니 ‘잔느 에뷔테른느의 초상’ / 에곤 쉴레 ‘포옹’

입장권 R석-40,000 S석-30,000 A석-20,000 (원/WON) **단체구입시 20% 할인**
인터넷 www.lgart.com
티켓예매 02)2005-0114/ 인터넷 예매 www.lgart.com / 티켓링크 1588-7890 / 티켓파크 1588-1555
공연안내 위대한 명작, 그 감동의 이면에 숨겨진 그들만의 이야기

죽음과 상실 Death & Loss’
- 죽음과 상실로 가득찬 예술가들의 삶에 뿌리내린 두려움과 탄식은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 되었을까.
야냐첵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선율 자체로서는 그가 죽음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형제와 아내, 자식의 죽음이 평생을 관통했던 그의 삶이 체념적이고 어두운 감상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수채화 같이 맑고 영롱한 세계를 그려내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죽은 어머니와 누이의 환영으로 평생 절규하듯 그려낸 뭉크의 섬뜩한 그림들은 삶 자체가 공포였던 그의 두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에 버림받고 모진 병에 끝없이 시달렸던 프리다 칼로는 일생동안 상실에 지배당했던, 그래서 그림을 통해 더욱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강인한 화가였다.
슬프지만 강렬한 칼로의 그림 위로 백병동의 창작곡이 초연되는 8월 무대에서는 죽음의 문턱에서 써낸 슈베르트의 음악과 더불어 죽음까지 함께한 모딜리아니의 연인 잔느, 그리고 짧은 인생동안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그려낸 에곤 쉴레의 그림도 함께 만나본다.

 

 ● 작곡가 / 백병동
한국 현대음악의 서정성에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 작곡가 백병동은
서울대 작곡과를 거쳐 독일 하노버 음대에서 작곡가 윤이상을 사사하였다.
날카로운 직관력과 따뜻한 서정성이 실린 한국적 음을 토대로 독주곡, 실내악곡, 관현악곡,
오페라, 칸타타 등 100여곡이 넘는 작품을 발표하며 한국 현대 음악계의 선봉장이 되고 있다.
1961년 신인예술상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작곡상, 대한민국 무용제 음악상, 서울시 문화상,
한국음악상 등을 수상한 백병동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천안대학 석좌교수로서 끊임없는 작품활동과 후진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널리 연주되는 그의 작품은
한국 작곡계가 세계적 흐름에 동참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백병동

음악으로 보고, 그림으로 듣는다

LG아트센터와 CJ Classic 의 공동기획으로 2003년 3회에 걸쳐 펼쳐지는 ‘화음' 시리즈는 국내 공연장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음악과 그림, 이야기’가 있는 음악회이다. 지난 3월에 선보인 ‘투영’편에서는 서로의 작품관에 영향을 주며 예술관을 발전시켰던 화가와 음악가의 이야기를, 8월 ‘죽음과 상실’편에서는 평생 죽음과 고통으로 얼룩졌던 불운한 삶 속에서도 역경을 딛고 빛나는 예술혼을 남긴 예술가들을 소개하며 그림과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 새로운 시청각적 감흥을 선사하였다.

* '사랑(Love)’ = 10월 '사랑(Love)’편에서는 사랑이 탄생시킨 위대한 음악과 그림을 한자리에 모아본다. 친구의 아내였던 '갈라'와 도피행각을 벌여 결혼을 하고, 평생 그녀를 '여신'으로 추앙하며 창작의 모태로 삼았던 화가 살바도르 달리. 죽을때까지 갈라의 초상화만 수백점을 남겼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던 그들의 사랑과 작품을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과 함께 만나본다. 구스타프 말러의 명작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와 화가 코코슈카의 '바람의 신부'는 같은 여인에 대한 사랑이 빚어낸 걸작이다. '알마 쉬틀러'라는 여인은 작곡가 말러의 아내이자 화가 코코슈카의 연인으로서 두 사람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빚어낸 말러의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는 아름다운 선율 뿐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진 말러의 사랑의 메세지로도 유명하다. 코코슈카는 그녀에 대한 사랑과 집착, 연민을 작품속에 그려냈고 헤어진 후에도 꾸준히 그녀에 대한 사랑을 그림으로서 표현하였다. 말러와 코코슈카의 작품을 통해 사랑이 빚어낸 아름다운 예술혼을 감상해 본다.
한편 일생동안 독신으로 지내면서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에게 끊임없이 맑고 순수한 사랑을 헌신했던 브람스. 클라라의 인생의 항로를 따라 그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위로하기 위해 또 애도하기 위해 많은 작품들을 창작한 브람스의 유명한 현악 6중주를 화음쳄버 오케스트라의 베이시스트이자 유능한 편곡자인 미치노리 분야가 새롭게 선보인다. 화음 10월 공연에서는 화음쳄버 오케스트라의 초대 협연자로 세계 정상의 플루티스트 제임스 골웨이(James Galway)가 함께한다. 카라얀의 지지를 업고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석을 지낸 세계 정상의 플루티스트 제임스 골웨이는 이번 화음 10월 무대에서 메르카단테 플룻 협주곡을 선보일 예정이다.

 

 

공연 프리뷰*****

음악과 그림의 아름답고도 슬픈 만남

투영, 죽음과 상실, 사랑에 대하여

음악과 미술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 어떤 기대와 설레임을 갖게 한다.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아름다움이 만난다는
사실에, 마치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처럼 약간의 두려움과 설레임이 공존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매우 근사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음악과 미술의 만남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의미는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지 이 두 영역의 예술가들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의지해서 자기의 예술을 완성으로 이끌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양, 특히 유럽에서 바로크 시대 예술가들이 주로 종교를 주제 삼았다고 한다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예술가들은 자연을 주제 삼고, 자신의 감정과 환상을 영감으로 삼았다. 그러나 또한 그들 화가와 음악가들은 서로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화가들은 그림에서 받은
감동을 화폭에 옮겼고, 음악가들은 그림에서 받은 감흥을 바탕으로 작곡을 하기도 했다. 낭만주의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다채로운 감정의 스펙트럼뿐만 아니라, 동시대 혹은 이전 시대의 화가들의 그림에서 음악의 자양분을
얻었다. 리스트가 그러했고, 라흐마니노프가 그러했다.
그러나 음악과 미술의 만남이라는 형식의 공연이 우리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영화가 아무리 발전하고, 쏟아져 나오고 있어도 그것과는 별개로 음악과 미술은 고유의 영역과 본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 만나서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피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기획 공연이 없었던 것도
그 이유이다. 음악과 미술의 만남은 어쩌면 완벽한 결합이 될 수도 있다. 이미 바그너 이래로 종합예술은 시도되어왔고 그러한 시도의 결과로서 우리는 다양한 모습의 오페라나 공연을 만났지만, 순수한 음악과 미술의 만남은 여전히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음악과 미술의 만남은 서로의 본성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를 흡수하고, 서로를 상승시키는 그러한 성격의 것이
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보고 듣는 이의 상상력이 필요함은 다시 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0세기초에 들어오면서 음악과 미술은 본격적으로 각자의 벽을 넘어서 서로의 영역에 스며들기 시작했으며, 또한 새로운
창작을 위해 함께 고개를 맞대기 시작했다. 그런 대표적인 예를 쇤베르크와 칸딘스키의 만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쇤베르크는 음렬기법으로서 새로운 현대음악어법을 창시했지만, 한때는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일도 있었던 화가로서 생활을
한 적도 있으며, 표현주의 화가들과 함께 전시도 했다. 칸딘스키는 쇤베르크의 음악과 그림을 높게 평가했으며, 특히 음악을 조형언어로 구현하는데 열정을 기울였던 칸딘스키는 쇤베르크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는 음악가들과 화가들의 이러한 만남을 첫번째 공연인 ‘투영’에서 만날 수 있다. 쇤베르크와 칸딘스키 뿐만 아니라, 사티와 피카소, 그리고 스트라빈스키와 샤갈의 만남도 공유해 볼 수 있다. 이들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어떻게 이들의 세계가 어우러졌는지를 이번 기획공연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두번째 공연의 주제인 ‘죽음과 상실’, 세번째 공연의 주제인 ‘사랑’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예술가들이 이러한 주제 속에서 어떤 가슴앓이를 했고, 어떠한 진주를 품었는지 만날 수 있다. 가장 커다란 상실 앞에서 예술가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자신도 언제 숨겨두었었는지를 알 수 없는 그 존재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공연에서 만나게 될 현악 사중주 ‘죽음과 소녀’를 작곡한 슈베르트는 이런 글을 썼었다.
“내가 사랑을 노래하려고 하면, 사랑은 슬픔이 되었고, 내가 슬픔을 노래하려고 하면 슬픔은 사랑이 되었다. 사랑과 슬픔은 내 안에 공존하면서 나를 이루는구나.”
예술가로서의 슈베르트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 글로서, 사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영역의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슬픔이나, 사랑이나 모두가 아름답게만 느껴질 뿐이며, 죽는 날까지 빛을 잃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숨쉰다. 우리는
그런 아름다움을 ‘죽음과 상실’, ‘사랑’에서 만날 수 있다.
조금은 단순한 생각이지만,음악이나 미술이나 모두 심상(心象), 즉 마음의 이미지이다. 그것이 상호작용을 갖는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필연적인 일일 것이다. 음악가는 그림이 주는 마음의 이미지를 다시 음악으로 구성하고, 화가는 음악으로부터 받은 마음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서로 독립적인 아름다움을 갖게 된다. 그림이 마음에 남기는 이미지는 연주 영역에 있는 음악가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다. 과거 대작곡가들의 작품에 대한 해석은 수 백년이 지난 근대에 와서야 제대로 성숙되고 무르익었으며, 그들 중 대개의 연주자들은 작품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오랜 시간 여러 영역에 걸쳐서 노력을 기울였다는 공통적인 언급들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음악이 하나의 뚜렷한 심상
이미지로 자리잡을 때에 깊이 있는 해석이 나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규모있는 현악 작품들을 꾸준하게 연주하고 있는 화음쳄버 오케스트라는 이번에 야심적으로 음악과 미술의 만남을 기획했다. 그 동안 화음쳄버 오케스트라는 자주 연주되는 현악 작품들 이외에 새로운 현악 작품들을 국내에 많이 소개해오고 있다. 특히 이들의 서정적이며, 풍부함과 풍요로움을 지닌 사운드는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쉽게 청중은 제각각 신선한 심상의 이미지를 만날 수가 있었다.
화음쳄버 오케스트라의 미술과의 만남은 이번이 첫번째 시도이지만, 화음쳄버의 전신인 실내악단 화음(畵音)은 이미 오랫동안 갤러리에서의 연주와 작년부터 시작해서 꾸준하게 이어가고 있는 ‘자화상 시리즈’를 통해 음악과 미술의 연결고리를 이어오고 있으며, 그러한 살아있는 경험이 연주자들에게도 녹아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투영’, ‘죽음과 상실’, ‘사랑’이라는 세 주제로 진행될 공연은 음악과 미술의 만남인 동시에 새로운 심상의 이미지를
청중들에게 심어줄 것이라고 기대된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연주되는 음악에 대해서, 그림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예술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로 나아가는 ‘온전한 심상’을 이번 기획공연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김동준/음악평론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오스카 코코슈카와 함께 세기말/세기초의 가장 뛰어난 오스트리아 화가 3인에 포함되는 에곤 쉴레는 1890년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비엔나 근교의 이 소도시에서 소년기의 대부분을 소묘 하는 일로 보냈다. 그가 14살때 사망한 아버지는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한 처벌로써 쉴레의 소묘들을 태워버렸고 16살 때 쉴레는 가족의 무관심 속에 비엔나 미술학교로 보내졌다.
1년 후, 구스타프 클림트는 그의 비상한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을 했는데 클림트의 아르 누보 양식과 소재의 영향은 1909년까지의 쉴레의 작품에서
현저히 드러난다. 스승의 우아하고 장식적인 형상을 떠나서, 쉴레 자신의 표현적인 스타일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경에 이르러서 였다.

이 시점은 가족으로부터 경제적 후원이 끊어져 고립감과 자기도취적 연민에 빠져있던 때로서, 쉴레는 일련의 심리적, 성적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
했다. 1911년 작품제작에 몰두할 은둔처를 찾아 모친의 고향인 보헤미아 크라마우로 이주했으나 그곳 사람들이 쉴레와 여자 모델들과의 관계를 말
삼고 분개하여 그를 추방하였다. 비엔나와 뮌헨, 퀠른, 그리고 부다페스트에서의 전시와 함께 화가로서의 명성이 높아가던 참에, 쉴레는 노이렝바하 감옥에 투옥되는데 죄명은 '부도덕과 유괴'로, 모델이었던 가출 소녀가 그를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재판과정에서 판사는 쉴레의 드로잉 한 점을 불에 태워, 일찍이 그의 부친이 쉴레에게 가한 '모욕'을 일깨우게 했다. 수감의 경험은 쉴레에게 지워
지지 않는 상처를 남겨 그후로 쉴레의 성격과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수감의 고통을 겪은 이후 그는 거의 은둔하게 되었고 자신이 수도승이나 은둔자로 표현된 초상화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후 경제적인 안정과 명성을 차차 얻게 되지만 제 1차 대전 말기에 번진 악명 높은 독감이 10월 비엔나에 퍼지자 당시 임신 6개월이던 쉴레의 아내가 먼저 독감에 걸려 사망했고, 쉴레는 그 사흘 뒤인 10월 31일 밤에 아내 뒤를 따랐다. 쉴레가 최후로 남긴 작품은 죽어가는 아내를 그린 소묘였다. 사망 때까지, 에곤 쉴레는 선과
색채를 남 다르게 다루었고 3천 여 점에 이르는 드로잉과 약 3백 점에 이르는 회화를 남겼다. 서른 해 남짓 사는 동안 그의 억눌리고 상처 받은 예술
혼은 반항적이고 폐쇄적인 표현을 만들어 내었는데 특히 그의 요절을 암시하는 듯한 여린 나무와, 죽어가는 아내를 그린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강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노르웨이 뢰텐 출생으로 아버지는 의사였으나 심한 이상 성격자였으며, 일찍이 어머니와 누이를 결핵으로 여의고, 그 자신도 병약하였다. 그와 같은 환경과 육체가 그의 정신과 작풍에 영향을 끼쳤다. 오슬로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급진적인 그룹의 영향을 받았는데 초기작품 《병든 아이》에서 볼 수 있는 삶과 죽음의 응시는, 그 후의 작품에서 일관하고 있다.

1889년 한여름을 바닷가의 마을에서 보내고, 신비스러운 밤의 불안을 잡아 《별이 있는 밤》 《백야》등을 그렸다. 1890년 파리로 가서 레옹 보나의 아틀리에에 들어갔으나 파리에서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일본의 목판화와 피사로와 로트렉의 작품이었으며, 고갱과 고흐의 매력이었다. 1892년 가을,
베를린 미술협회전에 출품하였는데 그것들은 초기의 애수 어린 서정적 성격을 더욱 내면화하고, 생과 사, 사랑과 관능, 공포와 우수를 강렬한 색채로 표현하고 있어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여기서 뭉크의 독자적인 세계가 확립된 것이다. 게다가 베를린에서의 스트린드베리와의 만남은 그
깊이를 더하게 하였다. 그 후 파리에서는 말라르메 등과 사귀고 입센을 알게 되었으며, 명작 《생명의 프리즈》 연작을 완성하고, 1894년부터 판화를 시작하였다. 1908∼1909년에는 신경병으로 코펜하겐에서 요양하였으며, 그 후부터 색채가 밝아지고, 문학적 ·심리적인 정감이 두드러졌다.

1937년 나치스는 독일에 있는 그의 모든 작품을 퇴폐예술이라 하여 몰수해버렸다. 만년에는 은둔생활을 하였다. 한편 판화가로서도 근대의 대작가
이며 표현파의 선구자이자, 노르웨이 근대회화의 선구자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밖의 《인생의 춤》《절규》 《뱀파이어》《저녁시간》《병실에서의 죽음》 등의 작품이 있다.


1907년 멕시코시티에서 독일인 아버지와 유태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독일인인 프리다 칼로의 아버지는 그에게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한다. 그녀의 어머니가 멕시코 혁명 당시 농민 지도자인 자파의 부하들을 보살펴 준 것을 계기로 멕시코 청년공산당에 가입하여 죽을 때까지 골수 스탈린주의자였다.

7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게 되었고, 1925년 18세 때 교통사고로 척추,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는 등
이 사고는 그의 삶 뿐만 아니라 예술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사고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그의 작품 세계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1939년 르누와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출품하여 피카소, 칸딘스키, 뒤샹 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 받았으나 프리다 칼로 자신은
자신의 작품 세계가 유럽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멕시코적인 것에 뿌리를 둔 것이라며 정체성을 강하게 지켰다.

삶은 매우 연극적이었고 항상 여사제처럼 전통 의상과 액세서리를 착용하였으나 사회 관습에는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에게는 20세기 여성의 우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작품으로는 사고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고자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심리 상태를 관찰하고 표현했기 때문에 특히 자화상이 많다.

가장 심각한 것은 세 번에 걸친 유산과 남편의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으며, 이는 고통스러운 재앙으로 받아들여져 《헨리포드 병원》(금속에 유채, 38×30.5㎝, 1932), 《나의 탄생》(캔버스에 유채, 173.5×173㎝, 1932),《프리다와 유산》(종이에 리소그래피, 31.7×23.5㎝, 1932) 등과 같은 작품들로 형상화되었다. 이 작품에서 프리다 칼로의 모습은 탯줄과 줄 혹은 뿌리 같은 오브제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친 사슴》(나무에 유채, 22.4×30㎝, 1946) 속의 그녀의 모습은 비록 여러 개의 화살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매우 투명하고 강한 빛을 발하는데 이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의 고통이 오히려 예술로 승화되었음을 나타낸다.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면서
그녀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였다.

 


이탈리아 리보르노 출생으로 유대계 명문의 아들로 태어나,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미술학교에 다닌 뒤 1906년 이후는 파리에서 살았다. 1908년 처음으로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였고, 다음해에는 브랑쿠시의 권유로 조각제작을 시도하여, 니그로조각과 브랑쿠시의 영향으로 간결한 조형양식을 발전시킨 독자적 조각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후 다시 회화로 돌아가 세잔, 피카소 등의 감화를 받은 독창적인 작풍을 수립하였다.

에콜 드 파리의 뛰어난 작가로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걸작을 남겼는데,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 등이 특색이다. 1917년, 베르트 베유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초기에는 풍경화도 몇 점 그렸으나, 파리로 온 후부터는 초상화와 누드화가 대부분이다. 특히 긴 목을 가진 단순화된 형태의 여인상은 독특하여,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며, 보티첼리나 베네치아파의 작풍과도 이어지는 섬세하고 우아한 이탈리아적 개성을 보여준다. 시인적 자질이 풍부한 다감한 미남자로 일화가 많으며, 만년에 잔느 에뷔테른느와의 사이에 딸을 두었다. 생전에는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해서 가난했으며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1920년 초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짧은 일생을 마쳤다.
그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잔느 에뷔테른느는 모딜리아니의 장례식을 치른 바로 다음 날, 임신한 몸으로 친청집 옥상에서 몸은 던져 자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