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17일(금) 오후 7:30
예술의전당
Profile
테너 페터 슈라이어 / Peter Schreier,
Tenor
페터 슈라이어는 마이센에서 음악교사이자 교회 독창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드레스덴 십자가 합창단의 젊은 멤버로서 그는 바흐
오라토리오에서 솔로알토를 포함한 많은 솔로파트를 소화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드레스덴 주립 음대에 입학한 그는 1959년까지 헤르베르트
빈클러(Herbert Winkler), 요하네스 켐터(Johannes Kemter)와 성악을 전공했고, 에른스트 힌쩨(Ernst Hintze)와
지휘공부, 마틴 플레미그(Martin Flämig)와 합창 지휘를 전공했다.
1959년 그는 베토벤의
‘피델리오(Fidelio)’에서의 ‘제1 죄수(Erste Gefagnener)’역으로 작품데뷔를 가졌다. 그는 1961년 드레스덴 주립
오페라(Dresden State Opera)에 참가했으며 다음해 모차르트의 ‘후궁으로 부터의 유괴 (Die Entfürung aus dem
Serail)’에서 벨몬테(Belmonte)의 역할로 매우 성공적인 공연을 가졌다. 1963년 그는 객원 솔리스트로 독일 국립 오페라단과의
계약을 가졌고, 이후 비엔나 국립 오페라단과 계약하였다. 1966년 페터 슈라이어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Bayreuth Festival)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젊은 선원’역을 했고, 다음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가한 이후 25년 동안 매년 공연을 가져왔다.
마술피리(Dei Zauberflöte)의 타미노(Tamino)역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Metropolitan opera) 데뷔
이후, 밀라노의 라 스칼라(La Scala),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떼아트로 콜론(Theatro Colon)에 데뷔했다.
그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은 매우 널리 인정받아 왔는데, 오스트리아, 바바리아주(The State of Bavaria, Austria)와 구 서독(the
former West Germany) 모두 “궁정가수(Kammersänger)”라는 명예타이틀을 부여하며 그의 음악적 공헌을 인정해왔다.
페터 슈라이어는 1981년부터 명예성악교수로 있다. 그는 비엔나 음악협회(the Musical Society of Vienna)와
뮌헨, 베를린 음악 학회(the Musical Academies of Munich and Berlin)의 명예회원이다. 또한 1989년
5월부터 로열 스웨디쉬 아츠 아카데미(the Royal Swedish Arts Academy)의 멤버로 활동 중이다.
1988년, 코펜하겐의 레오니 소닉스 뮤직 어워드(the Leonie Sonnigs Music Award)뿐만 아니라 독일 국립
어워드(German National Award(former GDR))와 퍼스트 클래스(1st Class(1972, 1986))를 수상한 바
있다.
1994년, 그는 막데부르크시의 게오르그 필립 텔레만 상(Georg Philipp Telemann Prize of the
city of Magdeburg)과 바르트부르크 상(Wartburg Prize)를 받았다. 모차르트 오페라에 대한 그의
노력은 그에게 빈 플뢰테누어(Wiener Flötenuhr) 수상과 1988년 레오나르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볼프강 자발리쉬(Wolfgang Sawallisch)와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에게도 수여된 바
있었던 뮌헨 에른스트 폰 지멘스 상(Ernst von Siemens Prize in Munich)을 수상하였다.
긴 음악생활의
초창기부터 페터 슈라이어는 세계적인 모차르트 테너로 군림해왔다. 그는 모차르트 오페라 역할을 그의 생활의 주요한 일부로 여겼다. 물론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에서의 로게(Loge)나 팔레스트리나(Palestrina)에서 주인공과 같은 다른 오페라 역할을 정기적으로 공연을
해 왔다.
그는 고전과 낭만파 칸타타와 오라토리오의 영역을 같은 비중으로 다루며 상당한 레터토리를 소화해왔다. 더구나 그의 큰
열정은 노래하는 공연자로 전세계의 저명한 콘서트홀 곳곳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그는 드레스덴 십자가 합창단 전멤버였었고, 색슨족
개신교의 성가대의 전승으로 연결시켜야 했기 때문에, 바흐의 작품을 그의 예술적 노력의 중심으로 고려했다.
슈라이어는 수십 년 동안
가장 재능있고, 감각있게 작품을 해석하는 음악가로 평가되어왔다. 지금까지 모든 음악적 스타일을 섭렵하는 그의 광범위한 디스코그라피를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1990년부터 1991년의 기간동안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András Schiff)와 함께 슈베르트의 3대 가곡을 CD로
제작하였으며 이 레코딩은 잉글리쉬 그라모폰 에이버리 상(English Gramophone Avery Prize)을 받았다.
1979년 이래 페터 슈라이어는 지휘자로서 활동해오고 있다. 그는 바흐의 수난곡(Passions)과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Christmas Oratorio)의 지휘를 맡았으며, 클리블랜드, 로스엔젤레스, 비엔나, 헬싱키, 코펜하겐, 베를린, 드레스덴,
함부르크, 쾰른 ‘전도사(the evangelist)’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 괴르제니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함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로스엔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로 그는 널리 인기있는 지휘자로서도 인정받고 있다..
PIANO 카밀로 라듸케(Camillo
Radicke>
드레스텐 출신으로 1992년 비오티와 마리아 칼라스의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을 계기로 콘서트활동을
시작하였다. 짤츠부르크,드레스덴 등의 음악제에 출연하며 세계적인 지휘자와 성악가들과 다수의 공연을 갖고 있다. 최근에는 슈라이어의 파트너로서
활약하고 있다.
슈베르트와 겨울나그네
슈베르트
'가곡의 왕'이라는 별명의
슈베르트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나 역시 빈에서 31세라는 짧은 생애를 마친 불운한 천재 음악가였다. 27세 연상인 베토벤과 같은 시기, 같은
곳에 살아서인지 그의 일생은 늘 베토벤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당시 음악인들이 신처럼 공경했던 베토벤을 슈베르트 역시 흠모했는데, 베토벤이
사망하자 그의 관을 메고 비오는 빈 거리를 지나가던 음악인들의 행렬 속 에 눈물을 흘리던 슈베르트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리고 베토벤은
슈베르트의 천재성을 죽기 바로 직전에야 인정하게 되었는데, 죽음을 앞둔 그는 '왜 좀 더 일찍 슈베르트를 알지 못했던가'라고 한탄했다고
한다.샘솟는 듯한 아름다운 선율과 로맨틱하고 풍부한 정서를 지닌 이채로운 작곡가인 슈베르트는 19 세기 독일 낭만파 음악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이다. 초등 학교 교장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1 세 때 빈 궁정의 소년 합창단 단원으로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13세 때 작곡을
시작했고 15세 때 최초의 서곡을 쓴 슈베르트는 ≪교향곡 제2번≫,≪교향곡 제3번≫, ≪마왕≫, ≪들장미≫등 주옥 같은 곡들을 18세가 되기도
전에 작곡했다. 슈베르트의 음악 세계는 형식면에서 고전주의를 비교적 충실히 지켰지만 내용 면에서는 샘솟는 음악적 천재성을 발휘, 뒤이어 꽃피는
낭만주의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교묘한 그만의 멜로디 구사 방법은 '그가 10년만 오래 살았다면 서양 음악이 반세기 정도 더
빨리 진전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남긴다. 슈베르트는 그토록 박명했던 모차르트보다도 더욱 짧은 생애를 마쳤다. 가난도
모차르트보다 더 심해서, 거의 굶어 죽다시피 한 그의 죽음의 침상에는 겨우 몇 푼의 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고 한다. 하지만 그 짧은 생애
동안에도 10개의 교향곡과 530곡의 독창곡, 81곡의 합창곡 등 1,000여곡 이상을 작곡해 내서 후세의 음악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슈만,
브람스, 볼프, R. 슈트라우스 등이 슈베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곡가이다.그의 명곡들은 그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세상에 불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금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슈베르트의 작품은 주로 성악곡만 거론되었으나 요즘은 피아노 소나타와 교향곡 등 기악곡들도 숨겨진 보석처럼 재평가
받고 있다.
가곡<겨울나그네>
슈베르트는 빌헬름 뮐러라는 시인의 시를 바탕으로 ≪겨울
나그네≫와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이라는 두 개의 가곡집을 작곡했다. 이 가곡집은 물레방앗간에서 일하는 날품팔이 청년의 비극을 20곡의
슬픈 노래로 표현했던 전작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 ≫보다도 더 어둡고 답답 해진 24곡이 담겼다. 현실과 환각 사이를 방황하는 외로운
사나이의 마음이 그려진 뮐러의 시 ≪ 겨울 나그네≫는 비애를 처리할 방법도, 장소도 이 세상에서는 찾지 못하고 그대로 영원히 고통 들을 등에
업고 가야 한다는 사나이의 운명이 처절하게 담겨져 있다. 사나이의 마음이 가는대로 대로 쓰여져서 줄거리도 명확치 않은 쓸쓸한 이 시들에,
슈베르트가 붙인 음악은 한술 더 떠서 음울하기까지 하다. 이는 슈베르트가 병마에 시달리면서 끼니도 못 챙길 정도로 가난한 상황에서 쓴 곡 이여서
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20대 후반의 겨우 성숙해진 인간에게 당시의 어려운 사회가 얼마나 큰 중압감을 지워 주었는지에 대한 슈베르트의
성찰임과 동시에 그 자신 또한 이 가곡집의 주인공과 다를 바 없는 당시 사회의 희생자였다는 해석이 이 곡을 듣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우울 하게
만든다. 24곡 중 가장 유명하면서 단독으로도 노래되는 곡은 다섯 번째 곡 '보리수'이고, 이 곡은 민요풍의 가락이 '거의
노래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더 없이 인상적인 노래이다. 반주는 보리수나무의 이파리들의 움직임까지 느끼게 하고,
격렬하게 바람이 부는 장면도 압권이다. '보리수 그늘 밑에서 단꿈을 꾸었던 나그네가 자신에게 평안을 주는 보리수에 애정을 가지지만 차가운 바람이
모자를 날려 버리고 결국 그는 보리수를 떠난다'는 내용의 가사가 애절함까지 느끼게 한다.≪겨울 나그네≫에서의 노래의 선율은 극히 유연하고
자유스러우면서도 가사와는 불가분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반주도 묘사적인 수법보다는 심리적인 의미 깊은 울림이 담겨 있는 이 가곡집 은 작곡된
지 1년 후 슈베르트가 죽은 후에야 세상에 공개되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의
경우 대부분 슈베르트의 가곡을 전부 다 들어보는 것이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슈베르트의 슬픔이 너무나 순수하고 진지하고 아름다워서 위안이 되고 또
힘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 가곡집에 담긴 그의 슬픔은 너무나 처절해서 어떤 힘이나 희망도 사라지게 만드는 것 같다.
제1곡
안녕히 (Gute Nacht)
제2곡 풍신기 (Die Wetterfahne)
제3곡 얼어붙은 눈물 (Gefrorne
Tränen)
제4곡 동결 (Erstarrung)
제5곡 보리수 (Der Lindenbaum)
제6곡 홍수
(Wasserflut)
제7곡 냇물위에서 (Auf dem Flusse)
제8곡 회상 (Rückblick)
제9곡 도깨비 불
(Irrlicht)
제10곡 휴식 ( Rast)
제11곡 봄의 꿈 (Frühlingstaum)
제12곡 고독
(Einsamkeit)
제13곡 우편마차 (Die Post)
제14곡 백발 (Der greise Kopf)
제15곡 까마귀
(Die Krähe)
제16곡 최후의 희망 (Letzte Hoffnung)
제17곡 동네에서 (Im Dorfe)
제18곡 아침의
번개 (Der stürmische Morgen)
제19곡 환상 (Tanschung)
제20곡 도표 (Der
Wegweiser)
제21곡 숙소 (Das Wirthshau)
제22곡 용기 (Mut)
제23곡 그림의 태양 (Die
Nebensannen)
제24곡 길가의 악사 (Der Leiermann)
크리스털처럼 깨끗한 목소리
모방할 수 없는 톤과 확고한 지성을 가진 위대한 리트 테너
내가 페터 슈라이어의 공연을 처음 본 것은 지난 1966년 함부르크 오페라단이 새들러스 웰스 극장 무대에 올린 〈코지 판
투테〉 공연을 통해서였다. 독일풍의 무대는 감정이 절제된 형태였으나, 슈라이어의 흠 없는 페르난도는 단연 돋보였다. 그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한 해 전 사망한 프리츠 분덜리히를 대신해 타미노 역을 노래한 것 또한 바로 그 당시 - 1967년 - 였다. 슈라이어의 해석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드레스덴 출신의 이 젊은 테너를 일약 국제 무대로 성큼 도약시켰으며, 특히 모차르트에 관한 한 ‘분덜리히의 후계자’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후 그는 거의 대부분의 주요 모차르트 작품에서 테너 역할을 맡아 노래하고 녹음했다. 이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를 꼽자면 아마도 카를 뵘 반의 벨몬테와 콜린 데이비스 반의 타미노일 것이다(타미노 역은 오트마르 주이트너, 볼프강 자발리슈와도
녹음한 적이 있다). 슈라이어는 공연 기회가 적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작품을 널리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모차르테움 파운데이션(Mozarteum
Foundation)으로부터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모차르트 전문가인 슈라이어의 노래를 듣고 싶은데 모차르트의 모든 오페라를 이미
다른 버전으로 갖고 있기에 주저하는 사람이라면, 얼마 전 베를린 클래식스에서 재발매한 슈라이어의 잘츠부르크 데뷔 리사이틀 음반을 권한다. 음반은
자연 그대로의 신선한 목소리를 들려주며(벨몬트의 아리아에 등장하는, 오페라 전체에 걸쳐 테너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부분인 빠른 장식 악구들을
슈라이어는 쉽게 완성하고 있다), 음악에 가사를 입히는 뛰어난 재능과 더없이 유려한 테크닉을 담고 있다. 슈라이어의 남달리 뛰어난 음악성은
드레스덴 크로이츠 합창단의 교습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나무랄 데 없이 완전한 연주력을 습득했다. 이 당시의 경험이 지금도 계속되는
그의 오랜 활동 기간 내내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윌리엄 린(William Lyne)의 고별 시즌의 일부였던 올해 초 위그모어 홀의
리사이틀에서 매우 건강한 모습으로 많은 가곡을 불렀다.
슈라이어는 많은 면에서 카를 에르프(Karl Erb)부터 시작해서 율리우스
파차크와 안톤 데르모타를 거쳐 에른스트 헤플리거에 이르는 독일 테너의 전통을 잇고 있다. 이들 중 누구도 최고의 목소리를 지니진 못했지만, 다들
커뮤니케이션의 힘과 예술성을 통해 승리했다. 사실 에르프의 옛 음반을 듣다 보면 종종 슈라이어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며,
마찬가지로 슈라이어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에르프를 떠올리게 된다. 에르프와 파차크처럼 슈라이어 역시 뛰어난 ‘모차르티언’일 뿐만 아니라 잊을
수 없는 바흐의 복음사가이다. 이들 모두는 확고한 신념과 은방울처럼 높은 음색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이런 자질은
바흐 작품에서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다. 슈라이어가 젊은 시절에 녹음한 바흐의 수난곡과 다른 많은 칸타타 음반을 통해 판단할 수 있듯이,
바흐는 초창기의 그에게 더없이 중요한 작곡가였다.
성악가로서 또 지휘자로서 바흐의 작풍을 철저하게 포착하는 그의 능력은 성장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칸토르의 아들인 슈라이어는 1945년
드레스덴 크로이츠 합창단에 합류했고, 곧이어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했다. 동시에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에서 오페라를 배우다가, 1961년
〈피델리오〉의 첫 번째 죄수 역으로 데뷔 무대를 가졌다. 슈라이어는 이후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에 입단했다. 이곳에서 그는 빠른 속도로 레퍼토리를
확장해 나갔다. 알마비바, 펜톤(베르디와 니콜라이), 〈보리스 고두노프〉의 광대, 〈다프네〉의 로이키포스,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의 춤 선생,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다비트, 〈반지〉의 미메 등이 이 시기 그가 섭렵한 배역이었다.
베를린 클래식스에서 이전에 발매한 적 있는
그 시절의 기념품과도 같은 음반을 들어보면, 슈라이어는 알마비바의 도입부 아리아(독일어)에 나오는 유려한 레가토를 허공에 띄우듯이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니콜라이의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에 나오는 펜톤의 사랑스러운 솔로를 도도하고 젊은이다운 해석으로 들려준다. 당시의 연주를 이후에
나온 그의 음반과 비교해 보면, 슈라이어의 노래에 담긴 일종의 연속성이 분명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잘츠부르크 데뷔 무대를
가진 지 6년이 지난 후, 카라얀이 그를 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에서 상연될 〈라인의 황금〉의 로게 역으로 캐스팅했을 때, 슈라이어는 자신의
다재다능한 면모를 유감 없이 보였다. 여기서 자신을 얻은 슈라이어는 이 배역을 곧바로 녹음했다. 곧 이어 야노프스키 지휘로 〈반지〉의 미메 역도
녹음되었다. 두 역할 모두 그는 어설픈 성격 묘사가 아니라 진정한 음악성에 의지한 인물 투사법을 선보였다. 두 음반 모두에서 슈라이어는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 작품 속의 일부로서 훌륭히 기능하는 자신의 방식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또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음반사에 적어도 세 편의 기념비적인 공헌을 남겼다. 카를 뵘의 유명한 〈카프리치오〉 스튜디오 녹음에서 그가 노래한 플라만드는 낭만주의적 열정의
축소판이었다. 또한 하이팅크 녹음의 〈다프네〉에서는 우울한 로이키포스 역에 페이소스가 담긴 적절한 아우라를 더했다. 이제는 확고한 반열에 오른
켐페의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에서는 춤 선생 역할을 맡아 자신의 인물 묘사 재능의 보다 가볍고 또 다른 면모를 드러냈다.
이후 그가
무대에 섰던 역할 중 하나는 피츠너 오페라의 팔레스트리나 역이었다. 이 역할은 순수한 선율로 강도 높은 표현을 전달하는 슈라이어의 능력에
정확하게 들어맞은 레퍼토리였다. 에르프부터 시작되어 파차크를 거치면서 줄곧 높은 수준을 유지하던 팔레스트리나 해석자의 계보는 이들과 동급인 한
예술가를 통해 더욱 높은 곳으로 뻗어나간 것이었다.
슈라이어는 오페라와 콘서트 무대를 아우르는 폭넓은 경력을 자랑하고 있지만, 많은 이들은 가곡 해석이야말로 고귀한 테너 가운데 슈라이어를 독보적인
자리에 앉힌 영역이라 여기고 있다. 그는 동독에서 보낸 초창기 시절부터 다수의 가곡 음반을 녹음했는데, 지금도 이들 중 많은 음반이 베를린
클래식스에서 새 빛을 보고 있다. 안드라스 시프와 함께한 소중한 리사이틀 시리즈(Decca)와 그레이엄 존슨의 슈베르트 전집에 들어 있는 뛰어난
음반(Hyperion)만 놓고 보더라도, 이 분야에서 그가 남긴 공헌도가 피셔-디스카우만큼이나 중대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많은 면에서
그의 노래는 동시대에 활약한 연장자들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훨씬 더 정확한 음역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많은 선배들이 그러했듯, 듣는 이가
음악을 사적인 차원에서 느낄 수 있도록 곡에 긍정적으로 개입하며 해석하고 있다는 점 또한 지적해야 한다. 나는 슈라이어가 지난 1980년대 런던
퀸 엘리자베스 홀에서 가진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리사이틀을 현장에서 들었는데, 인물의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는 바람에 내 감정이 다
소진되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시프와 함께한 음반에도 이러한 특질이 담겨있으나, 발터 올베르츠(Walter Olbertz)와 함께 녹음한 훨씬
이전의 음반이 자신만의 덕목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슈베르트의 세 가지 버전은 현재 모두 구입해서 비교해 볼 수 있다.
〈겨울 나그네〉의 경우, 리흐테르와 함께 녹음한 인상적인 실황이 음반으로 녹음되었는데, 물론 최고 수준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는 음반이다. 슈라이어와 시프의 〈백조의 노래〉도 마찬가지이다. 이따금씩 이 작품의 테너는 하이네의 암울한 가사를 바리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비극적으로 부르곤 한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가곡에 바친 음반들을 포함해서 시프와 함께한 나머지 시리즈 역시 추천할
만하다.
텔덱에서도 슈라이어의 족적을 찾을 수 있다. 크리스토프 에셴바흐와 함께 녹음한 〈시인의 사랑〉과
〈리더크라이스, Op 24〉를 포함한 방대한 분량의 슈만 가곡이 음반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탁월한 반주자인 노먼 셰틀러(Norman
Shetler)와 함께 녹음한 초기의 기록은 두 장짜리 CD로 구할 수 있다. 모든 음반이 하나같이 슈라이어야말로 흠 없는 레가토와 시적 서정성
그리고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슈만이 펼친 상상의 나래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가장 이상적인 해석자임을 보여준다. 〈시인의 사랑〉이 가장 설득력 있는
예가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볼프강 자발리슈 반주의 1984년 뮌헨 실황 음반(Philips)은 지금 구입할 수가 없다. 이
음반에서 슈라이어와 그의 파트너는 슈만 가곡의 모든 면을 완벽하게 포착하고 있다.
슈라이어는 언제나 휴고 볼프의 설득력 있는
옹호자였다. 〈Song on Record〉 1권(CUP: 1986)에 글을 실은 필자들은 하나같이 이 분야에 관한 그의 노력을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카를 엥겔과 함께 1998년에 녹음한 〈뫼리케 가곡집〉(Orfeo)과 펠리시티 롯, 그레이엄 존슨과 함께 1994년에 녹음한 〈이탈리아
가곡집〉 모두 일청을 권한다. 밀도 높기로 이름난 슈라이어의 가곡 해석은 괴테의 곡을 담은 초기 CD에서처럼 이 음반들 속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의 합창 음반은 대부분 위대한 지휘자들과 함께 녹음된 것이다. 여기에는 쿠벨리크가 지휘한 감동적인 〈장엄
미사〉(Orfeo)도 포함된다. 슈라이어는 역시 오르페오에서 발매된 슈미트의 〈일곱 개의 봉인이 된 책〉에서도 중요한 테너 파트를
맡았다.
슈라이어의 음색이 모든 사람들의 취향에 들어맞는다고 볼 순 없다. 어떤 이에게는 그의 음색이 너무 ‘날카롭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날카롭다’는 말은 ‘번쩍번쩍 빛나는’이라는 형용사와 일맥 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내가 듣기에 이러한 특질은 슈라이어의 목소리
짜임새에 개성을 더하고 있다. 어쨌든 이런 특질은 포르테 부분에서 관찰되며, 이상하게도 아름다운 메차 보체 악구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슈라이어가 말 그대로 마음으로뿐만 아니라 머리로도 음색을 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악가로서도 그토록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슈라이어는 바흐·하이든·모차르트의 많은 합창 음악을 극히 공감적인 자세로 지휘하는 지휘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바흐와
모차르트 그리고 위대한 가곡 작곡가들의 작품을 뛰어난 지성과 탐구력으로 해석한 테너로서 기억될 것이다. 나는 슈라이어의 많은 음반이 그 분야의
표준일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기쁨과 영적 소생의 원천을 제공하고 있음을 아직도 목격하고 있다.
글|Alan
Blyth·번역|김희숙
-그라모폰 코리아 2003년 9월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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