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폴 해기스 |
출연 | 산드라 블록, 브랜든 프레이저, 탠디 뉴튼, 테렌스 하워드, 맷 딜런, 라이언 필립, 돈 치들, 제니퍼 에스포지토, 루다크리스, 라렌즈 테이트 |
롯데 시네마 조조상연을 보면 4000원 이란 할인된 가격에 통신사 카드와 롯데카드까지 중복 할인이 되기때문에 거의 공짜로 영화를 보게 된다는 사실에 흥분하면서 본 영화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가슴속 깊은곳에서 부터 치밀어 오르는 슬픔.... 아니,그 이상의 뭔가가 목젖까지 뜨겁게 하며 나를 감쌌다.
영화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행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아침부터 들떴던 그 기분은 싸악 사라지고 누구랄것도 없이 한동안 말들이 없었다.
"에이~~아침부터 기분이 ....쫌 그러네.. 현실은 이보다 훨씬 심하겠지....어찌보면 접근조차 어려운 주제인 지 모르지... 너무나 오랜 역사를 통해서 깊이 각인되어져 있는것.... 거대한 소용돌이 속의 한 순간뿐일걸 뭐~~"
"영화니까 그나마도 화해로 끝맺음을 해서 쫌 위로가 되긴 하지만....그게 저리 되겠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왜 지나라에서 살지않고 ...."
순간 지구엔 아직도 굶어죽는 사람들이 즐비하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은 채, 너무 쉽게 말이 튀어 나왔다.
그래, 무엇이 더 낳은 삶일까?? 무엇이 더 낳은 삶이길래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모든것이 다른 저 낯선땅에 가서 스스로까지 차별을 하며 힘들게 사는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 것일까
누군가는 자신의 보다 낳은 미래의 삶을 위해, 그리고 누구는 가족을 위해, 심지어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제나라를 떠나 그런 차별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든것을 가지고 부리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끝없이 추구하며 외롭게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다. 이토록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기도 벅찬 현대인들에게 타인의 삶까지 배려할 여력은 전혀 남아있지 않은것 같다. 흑,백...잘살고 못사는 나라..이처럼 눈에 보이는 차별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어쩌면 더 심한 인종 차별속에서 살고있는 지도 모를일이다. 아니, 인종 차별주의를 떠나서 나 자신외에는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는 더 심한 '배타주의'에 젖어있을지 모를일이다.
잠시 우리 애들과 연관지어서 생각을 해보았다. '흑인'과 잠시 연관을 지어보고는...마치 정의파였던 백인 경찰과 꼭같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리도 당하고 있는 인종 차별을 더 심하게 하고 있음을....
나이가 마치 열살 단위로 늘어 가는것같은 즈음에는 그 어느때보다도 깊이 '삶'에 대해서 자주 묵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할 수록 답이 모호해져 '그냥 살기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그것이 때로는 허허롭기도, 슬프기도하지만, 그렇게 결정내리는 순간에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음을 느낀다니 참으로 삶이란, 또한 생각이란 아이러니컬 한것이다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모든것이 '공' 이란 것을 알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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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해 크고 작은 이변으로 관객을 들썩이게 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반전은 [크래쉬]였다. 인종차별에 대해 직설한 [크래쉬]의 강렬한 화법은 작품상 부문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브로크백 마운틴]과의 충돌에서 승자가 되었다. 꾸준한 호평을 얻긴 했지만 미국 내에서도 그 이상의 관심을 얻지 못했던 [크래쉬]는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영화가 되었다. 이에 작년부터 엄청난 호평과 흥행을 얻어냈던 [브로크백 마운틴]의 수상 릴레이를 저지한 [크래쉬]의 막판 여세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가 가진 폭발력을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더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보수적인 아카데미위원회가 손을 들어준 이 독립영화가 동성애만큼 민감한 소재인 인종차별을 정면에서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언제나 심심할 정도로 정치적인 안정을 추구했던 아카데미의 이번 선택이 더욱 뜻밖으로 느껴진다. 미국 내 노골적이고도 암묵적인 인종차별을 바라보는 [크래쉬]의 시선은 과감하다. [크래쉬]는 편견과 갈등으로 엉키고 꼬여 거미줄 같은 LA의 치열한 삶으로 바짝 다가간다. 영화는 한 청년이 총에 맞아 죽은 사건에서부터 36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크래쉬]가 따라가는 36시간은 격한 감정들로 가득차 있다. 백인 부부의 거리끼는 눈빛에서 우발적으로 차를 탈취한 흑인 청년들과 가게를 지키기 위해 총기를 구입하려는 이란인에게 퍼붓는 백인 총기상의 증오 섞인 말에는 지독한 편견이 존재한다. 저명한 사회인사인 흑인 부부에게 부당한 몸수색을 하고 흑인에 대한 경멸을 감추지 않는 백인 경찰 라이언(맷 딜런)과 차 강도를 당한 뒤 신경과민에 걸린 백인여성 진(산드라 블록)의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크래쉬]에서 폭력이자 일상이 돼버린 인종차별의 순간들은 여러 인종과 계층 간의 목소리로 나열된다. 하지만 다중 구조를 통해 인종 갈등의 정황들을 포착한 [크래쉬]는 LA라는 대도시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훑어가지만, 실상 바로보는 시선 그 이상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세계적으로 커다란 문제인 인종차별을 다양한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크래쉬]의 의도는 총기 소지라는 거대한 담론을 잔혹하게도 아름다운 교정에 풀어낸 [엘리펀트]와 어느 정도 닮아 있다.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보는 카메라의 눈은 누구의 감정으로도 이입되지 않는다. 철저히 제 3자의 시선을 유지하는 [크래쉬]와 [엘리펀트]의 카메라는 어느 새 집보다 커버린 코끼리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인터넷에서 아무런 인증 없이 자유롭게 매매되는 총기가 푸른 하늘의 교정을 붉게 물들였듯이 모른 척 방치된 인종간의 갈등은 매 순간 사회 전체를 뒤흔든다. 그러나 특별한 하루를 통해 본질을 뚫고 심장으로 파고들었던 [엘리펀트]와 달리 [크래쉬]가 펼쳐놓은 퍼즐의 조각들은 인종문제의 근원을 온전히 형성하지 못한다. [크래쉬]는 시작부터 인종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독설을 거리낌없이 보여준다. 인물들의 강렬한 목소리는 영화 내내 히스테리컬한 음역을 낮추지 않는다. 알고 보면 모두 사연이 있는 그들의 인종차별적 발언과 행동은 가까이 다가가지만 개입하지 않는 카메라 앞에서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각 인종들로부터 골고루 성찰을 얻어내려는 [크래쉬]는 인종차별의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과거 할리우드 영화가 그어놓은 비판의 수위를 충실히 지킨다. 그것은 이리저리 엉겨 붙은 인물들이 36시간 동안 겪는 갈등에 대한 영화의 발언을 반복적이고 무감동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물론 [크래쉬]가 짚어낸 인종차별의 실상은 더없이 폭력적인 일상이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고급 레스토랑의 환대를 받지 못하고, 백인들의 우월감을 증명하기 위해 TV드라마에서 흑인의 지적인 언어 구사력을 저지하는 일들은 얼마나 세세한 곳부터 인종차별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크래쉬]의 파괴음은 깊은 통찰력으로 공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전시되어 있을 뿐 이전 할리우드 영화들이 이미 그어놓은 한계선에서 나아가지도 파고들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표현의 한계선이란 다름 아닌 할리우드 특유의 감상주의다. 흑인 청년들의 노골적인 랩가사처럼 드러내놓고 독설을 내뱉던 인물들은 어느 순간 말랑해진 휴머니즘으로 이 엄청난 갈등의 간극을 메운다. 흑인에게 총부리로 위협당한 백인 여성의 타인종에 대한 혐오증과 남편이 보는 앞에서 성추행 가까운 검문을 당한 흑인 여성의 분노는 갑작스러운 충돌만큼이나 느닷없는 깨달음을 얻는다. 남편의 무관심에 더욱 예민해졌던 진의 공포가 우연한 사고로 유색 인종인 가정부를 통해 위안을 받고, 라이언에게 모욕적인 검문을 당했던 흑인 여성이 불길 속에서 자신을 구하는 라이언의 용기에 감화되는 해법은 영화의 전형적인 갈등만큼이나 단순하다. [크래쉬]의 인물들은 그렇게 자신의 편견을 극복해 나간다. 서두른 화합에 덧붙여 영화는 정의로운 백인 경찰 핸슨의 우발적 흑인 살해를 통해 인종차별의 악순환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하지만, 인류에게 가장 무거운 주제인 인종간 갈등을 엮어내기에 그 고리의 힘은 너무나 미약하다. [크래쉬]의 연출을 맡은 폴 해기스는 작년 [밀리언 달러 베이비]을 통해 대단한 휴머니즘의 감동을 전해준 각본가이기도 하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고통과 희열로 범벅된 삶을 숭고하게 내어 보였다. [크래쉬]에서도 몇몇 인물을 통해 삶을 조망하려는 그의 의지가 느껴진다. 잔인한 차별과 충돌의 실상을 말하면서도 그것 또한 인생의 일부이기에 빛날 수 밖에 없는 기적 같은 순간들을 폴 해기스는 포착한다. 그러나 일상에 스며든 인종 문제가 어떻게 충돌을 일으키고 삶을 파괴하는지에 대한 그의 해부는 순간적이고 표피적이다. 타인종의 총을 맞은 아이가 되살아나는 영화 속 판타지는 삶이 파괴되고 찢어지는 진짜 현실에 비해 동화에 가깝다. 인종차별의 결과가 인류에게 어떤 재앙을 가져왔는지는 작년 태풍 카트리나로 잠식된 뉴올리언스의 비극에서 명료해진다. 평소 정부의 무관심으로 재난에 적절한 대비책을 갖추지 못한 뉴올리언스는 몰아친 태풍으로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냈다. 뉴올리언스 주민의 2/3는 흑인이고 속수무책으로 자연재해를 당한 이 지역 이재민들의 90%는 모두 유색 인종이었다. 뉴올리언스의 엄청난 피해에도 늑장 대응한 미국 정부의 태도는 인종차별에 대한 해묵은 분노와 절망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크래쉬]가 더듬는 일그러진 도시의 표면은 어느새 우리의 인식을 벗어나 버린 인종문제라는 거대한 실체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크래쉬]의 충돌은 거대한 코끼리의 살갗만 스치고 지날 뿐 크기를 감지하지 못한다. 영화는 다짜고짜 인물 속으로 카메라를 들이댔던 초반처럼 어리둥절한 희망을 남겨놓고 퇴장한다. 충돌과 화합의 교향악을 연주하는 [크래쉬]와 달리 현실은 우리의 청각으로도 감지하지 못하는 비명으로 가득차 있다. [크래쉬]의 격정적이고 아름다운 연주는 현실의 깊은 고통과 절망까지 울려내지는 못한다. 결국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울타리 안에서 수용할 수 있는 비판에만 관대했던 아카데미는 이번에도 그들만의 리그에서 안전한 화제의 주인공을 택한 것이다. |
2006 아카데미 작품상!
2006 아카데미 각본상!
2006 아카데미 편집상!
<밀리언 달러 베이비> 폴 해기스의
두 번째 프로포즈
8커플의 충돌, 8색의 상처와 만나다
LA 교외의 밤, 무엇을 본걸까? 현장에 도착, 시체를 본 흑인형사의 표정은 일순간 당혹과 슬픔으로 일그러진다. 그리고... 영화는 36시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이제 그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게 되는걸까? 그러나, 영화는 길을 헤매다 그 죽음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15명 - 8커플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흑인형사와 라틴계 여형사, 흑인청년과 백인부부, 이란인 부녀와 히스패닉... LA에 살고 있다는 공통점 말고는 피부색도 나이도 모두 다른 그들. 이제 관객은 우연한 시간, 우연한 장소에서 서로 부딪히는 이들 여덟 커플의 일상을 보게 된다. 마치 <펄프픽션>이나 <러브 액츄얼리>의 그것처럼, 거리에서 침실에서 서로 교차하고 얽히는 그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의 충돌이 그들의 마음속에 남기는 서로 다른 색깔의 상처를 그려가기 시작한다. 병든 아버지로부터 받는 아픔은 백인경찰인 아들을 폭력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그는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렵다. 백인경찰로부터 모욕을 당한 여자는 남편을 비난하지만, 흑인인 남편은 세상의 시선이 두렵다. 분노, 소외, 편견, 집착, 두려움과 외로움... 도시에서 만난 다양한 모양의 상처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헤집는다. 그리고 관객은 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8가지 색깔의 상처에 동화되며 각 인물들의 예측할 수 없는 결말을 향해 함께 달려가기 시작한다.
<크래쉬>는 미친 듯 덩치를 키운 대도시 속에서, 스쳐 지나는 사람들과 그들이 감추고 있는 상처를 아픈 시선으로 그린다. 그러나 그들은 왜 자신이 아파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들의 파괴적인 연쇄 충돌의 결말 또한 알지 못한다. 과연 이 영화 <크래쉬>가 관객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 힘, 그리고 이 작품에 쏟아진 그토록 수많은 찬사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아픔의 밑바닥에서 묻다
“어떻게 해야, 당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폭발적 반향을 일으켰던 2005년 미국 개봉 당시, 영화 <크래쉬>는 인종 갈등을 다룬 영화로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흑인, 백인, 히스패닉, 아랍인, 한국인... <크래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서로 다른 표정의 얼굴들. 그러나 영화 <크래쉬>가 단지 정치적이거나 논쟁적 영화라면 그처럼 함께 느끼고, 함께 아파하며 사랑과 감동이라는 보편적 정서에 다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속, 그들이 찾고 싶어 하는 희망에 그처럼 함께 목말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기 한 경찰(맷 딜런)이 있다. 그는 늙고 병든 아버지의 간호에 지쳐 있다. 마음속에 응어리진 아픔은 타인에 대한 그의 배려를 앗아간다. 그리고 그는 알지 못한다. 자신의 일탈적 충돌이 전혀 뜻밖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신의 인생이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그렇게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는 것을. 관객은 또 다른 여자(산드라 블록)를 만난다. 그녀는 정치적 야심에 목마른 남편(브랜든 프레이져)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녀의 아픔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의심하고 소리치고 스스로 상처 입히는데, 왜 아파야 하는지 그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 직전의 사고현장에서, 몸을 가눌 수 없는 고통의 극한에서, 아픔의 밑바닥에 이르러서야 깨닫기 시작한다. 당신과 친밀하고 싶고, 당신과 소통하고 싶고,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을 받아들이고 싶었다는 것을! 충돌(Crash)이란 접촉(Touch)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며,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처 한가운데에서 그들은 스스로 묻게 된다. "어떻게 하면 당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까?...”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Stranger)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공포가 그들 사이에 가로 놓여 있다. 그 공포와 단절, 몰이해가 한 젊은 청년의 죽음을 결정하는 충격적 반전을, 영화는 침착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폴 해기스는 화해의 손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상처난 당신의 마음에 관계와 사랑의 의미를 되묻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 영화이자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알려줄 큰 충돌이 2006년 봄, 당신을 찾아온다.
“L.A.에서는 아무도 서로를 건드리지 않아.
모두 금속과 유리 안에 갇혀 있지.
서로에 대한 느낌이 너무 그리워서, 서로를 느끼기 위해서
그렇게 서로 충돌하게 되는 거야.”
- 흑인 수사관. 그레이엄 워터스의 대사 中
성급하게 도출해낸 인종간 화해 <크래쉬> | |||||||||||||
2006-04-12 | 오마이뉴스 | |||||||||||||
[오마이뉴스 하성태 기자] *이 글은 스포일러로 보일 수 있습니다. “LA에서는 아무도 서로를 건드리지 않아. 모두 금속과 유리 안에 갇혀 있지. 서로에 대한 느낌이 너무 그리워서, 서로를 느끼기 위해서 그렇게 충돌하게 되는 거야.” 흑인 형사 그레이엄(돈 치들)은 플롯으로는 첫 번째이자 스토리상 마지막인 자동차 사고 후 이렇게 중얼거린다.
<크래쉬>는 LA의 복잡한 인종적 지형도와 권력관계를 8커플, 15명이 36시간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촘촘하게 그려낸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얽혀 있는가 하는 것이다. <크래쉬>를 날카로운 시각으로 현실을 비판한 웰메이드 영화, 그리고 인종간의 화해를 모색하는 텍스트로 읽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분명 이 관계망을 꼼꼼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5명과 가장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은 영화의 끝과 시작에 등장, 의미심장한 대사와 표정을 짓는 흑인형사 그레이엄이다. 그는 인종화합적인 이미지로 표를 얻으려는 지방검사 릭(브랜든 프레이저)의 차를 강탈했던 흑인 청년 앤소니의 형이다. 그의 어머니는 앤소니를 찾지 않는 그레이엄을 질타하면서 따로 살고 있다. 이 도난사건 때문에 곤경에 처한 릭은 그레이엄에게 앤소니의 범죄기록을 삭제한다는 조건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수사를 할 것을 의뢰한다. 릭의 부인 진(산드라 블록)은 도난사건 후 날카로워져 어쩔 줄 몰라 열쇠를 수리한 멕시칸 대니얼을 도둑으로 몰아붙인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외로움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편에게 전화를 하고 히스패닉 가정부에게 짜증을 내는 게 전부다. 대니얼이 열쇠를 수리해줬던 슈퍼마켓 주인인 이란인 파라드는 자물쇠가 아니라 문에 문제가 있다는 대니얼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날 밤 강도에게 가게를 털리자 대니얼에게 총을 겨눈다. 후반부 앤소니에게 총구를 겨누는 신참 백인 경찰 핸슨(라이언 필립)의 파트너 라이언(맷 딜런)은 아버지의 병수발에 힘겨워하면서 인종적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 릭의 차와 같은 차종이라는 이유만으로 검문한 흑인 카메론의 아내 크리스틴(탠디 뉴튼)에게 성적 모욕을 주지만 다음날 자동차 사고를 당한 크리스틴의 목숨을 구해준다. 그리고 마지막, 앤소니의 친구 피터는 동양계라는 외모만으로 중국인으로 오해한 한국인 조진구를 치고 달아난 후, 다시 그 차를 훔치지만 안에 있던 동남아시아 난민가족을 팔아 넘기지 않고 LA 거리에 놓아준다.
가장 높은 권력에 있는 백인 릭은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인종주의자였던 라이언은 결국 크리스틴을 구하는 휴머니즘을 보여준다. 인종문제에 진보적인 것 같던 핸슨 또한 편견에 사로잡혀 앤소니를 죽음으로 내몰지만, 차를 불태우면 그만일 뿐이다. 방송국 PD인 카메론은 백인경찰과 상급프로듀서에게 굽신거릴 수밖에 없다. 이미 LA 토박이며 수시로 총을 들이대는 흑인 피터는 동양인 난민 가족을 놓아주는 자비를 베푼다. 영어 실력 부족으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이란인 파라드는 모든 사건의 결과를 대니얼에게 돌리지만 자신과 대니얼의 딸로 인해 천사를 영접한다. 역시 마지막, 인종적 편견을 반영하는 대표적 인물인 피터가 중국인으로 오해했던 한국인 조진구는 가까스로 살아난 후 부인을 보자마자 수표를 주며 현금으로 바꿔오라고 시킨다. 이처럼 <크래쉬>는 신랄한 대사와 거미줄처럼 엮인 관계망을 통해 인종적 계급 관계를 조망하지만 성급한 화해와 역시 인종적 편견에 쌓인 '사는 게 그런 거지'라는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다. <크래쉬>는 이 수직적 인종 관계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 그리고 백인을 절대 선으로 묘사하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기에 모양새와 주제의식면에서는 모자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충돌(crash)은 접촉(touch)이다'라는 대사처럼 자동차 사고를 중요한 모티브로 삼았다. 그레이엄은 차 사고 이후 이 모든 허망함을 깨닫고 동생의 죽음을 마주하며, 크리스틴은 자동차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남편과 화해를 하고 핸슨을 용서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또 진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나서야 멕시칸인 가정부가 자신을 걱정하는 유일한 사람임을 깨닫고, 라이언과 파라드는 기어코 총을 발싸한 후에야 자신의 편견을 깨닫는다. 이러한 성찰은 분명 미국의 현재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하지만 예술적 또는 정치적 성취에 까지는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중 플롯과 여러 등장인물을 등장시켰던 <숏컷>이나 <매그놀리아>가 지진이나 개구리 비를 통해 삶의 우연성과 극복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성찰의 순간을 제공하지만 <크래쉬>는 성급한 화해를 모색할 뿐이다. 이는 현실에 대한 냉정한 시각에서 어떻게든 변화와 화해를 이끌어 내려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36시간 동안 일어나는 운명적인 한 사건들로 이 복잡다단한 인종문제에 화해를 이끌어내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 그 보수적이라는 아카데미 회원들이 <브로크백 마운틴>을 버리고 <크래쉬>를 택했겠는가? 프랑스 파리에서 여전히 폭동이 일어나는 21세기, 거시적 관점을 포기하고 인간군상들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냉철함이 요구되야 한다는 것을 <크래쉬>는 입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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