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강국’ 영국 시장에서 굴지의 명문 오케스트라로 우뚝 솟은 BBC 필하모닉이 7년 만에 두 번째 내한공연(2008년 자난드레아 노제다)을 갖는다. 2000년대 들어 악단의 연주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전임 감독 노제다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이어, 2011년부터 악단의 음악감독을 맡아 오케스트라에 놀랍도록 다채로운 라틴 컬러를 입히고 있는 스페인의 마에스트로 후안호 메나의 한국 데뷔이다.
빌바오 심포니 음악감독 시절부터 요즘의 여타 오케스트라에서는 감지하기 어려운 화려한 색채로 무명 오케스트라를 일약 변방의 다크호스로 주목 받게 한 메나는 오케스트라 안에 숨겨진 기능을 살려내 작품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는 감각적인 지휘로 특히 보스턴 심포니, 뉴욕 필하모닉 등 미국 메이저 오케스트라에서 호평 받고 있다. 라파엘 프뤼벡 데 부르고스의 타계 이후 소리에 영혼을 불어넣는 스페인 지휘자가 귀한 시대에 숨겨진 거목이 드디어 한국 팬과 만난다.
협연에는 1983년 서방 세계 망명 직후부터 한국을 꾸준하게 찾아온 빅토리아 뮬로바가 자신의 일곱 번째 내한 공연에서 개인적으로 특별한 레퍼토리인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연주한다. 30년 전, 러시안 스쿨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주목 받던 시절의 시벨리우스와 비교해, 세월의 풍화를 온 몸으로 견뎌내고 어느덧 50대 중반에 이른 뮬로바가 선보일 시벨리우스는 어떤 모습일지, 맨체스터의 문화적 아이콘 BBC 필하모닉과 함께 한국 클래식팬과의 귀중한 만남을 고대하고 있다.
[프로그램]
브리튼 심플 심포니,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슈베르트 교향곡 9번 (더 그레이트)
Britten Simple Symphony, Sibelius Violin Concerto, Schubert Symphony No. 9
[프로필]
후안호 메나 Juanjo Mena
1965 년 스페인 바스크 태생인 후안호 메나는 첼리비다케의 지휘 컬러를 지향하는 강력한 지휘로 유럽과 미주에서 현재 한참 각광받는 대표적인 라틴 지휘자 중 선두에 있다.
메나의 음악교육은 고향이 비토리아 가스테이스의 헤수스 구리디 음악원에서 시작되었다. 마드리드로 건너가 왕립음악원에서 작곡과 지휘를 배웠고 구리디-베르나올로 장학금을 받아 뮌헨에서 첼리비다케를 사사했다. 빌바오 오케스트라 신포니카를 거쳐 제노아의 테아트로 카를로 펠리체 수석 객원지휘자, 베르겐 필 수석 객원 지휘자를 역임했다. 2004년 볼티모어 심포니 지휘로 북미에 데뷔했고 네덜란드 방송교향악단, 예테보리 심포니, 드레스덴 필하모닉,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LA 필하모닉, 보스턴 심포니, 시카고 심포니 등에 정기적으로 객원 지휘를 나서고 있다. 2010년 7월 BBC 필하모닉의 9대 수석 지휘자로 선임됐고 2016년까지 BBC 필하모닉과 같은 직위로 계약이 체결되어 있다.
HJSO 2011 - Benjamin Britten, Simple Symphony Op. 4
Sibelius, Violin Concerto in D minor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Jean Sibelius
1865-1957
Jascha Heifetz, violin
Walter Hendl, conductor
Chicargo Symphony Orchestra
Orchestra Hall, Chicargo
1959.01
Jascha Heifetz - Sibelius, Violin Concerto in D minor, Op.47
올해는 시벨리우스 탄생 150주년
올해는 핀란드의 작곡가 얀 시벨리우스의 탄생 150주년입니다.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무대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3월 13일 예술의전당에서 펼쳐지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내한 연주회에 애호가들의 기대가 쏠려 있습니다. 거장 마렉 야노프스키(76)가 지휘봉을 듭니다. 이 지휘자에 대해서는 제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2012년, 돌베개)라는 책에서도 길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제는 몇 차례 내한공연을 통해 한국에도 꽤 많은 팬들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 지면에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덧붙이고 싶은 사실은 이날 연주회에서 협연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프랑크 페터 치머만(50)이라는 점입니다.
2001년과 2008년에도 한국에 다녀간 적이 있는 치머만은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안네 조피 무터 등과 더불어 현재 독일의 간판급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봐도 괜찮습니다. 게다가 아내가 한국계인 까닭에 한국에 대해 매우 우호적 감정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2008년 저와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돌솥비빔밥 마니아”라고 소개하기도 하더군요. 음악적으로는 범(凡)유럽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독일에서 나고 자랐지만 러시아 음악가들의 영향을 적잖게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나는 유럽에서 자랐고 유럽의 모든 자양분을 흡수했다. 또 러시아 선생님들에게 음악을 배우면서 러시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1908~1974)는 내게 신과 같은 존재”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서두에서 바이올리니스트 프랑크 페터 치머만 이야기를 길게 꺼내는 까닭은 그가 내한 무대에서 연주할 곡이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이기 때문입니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음악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곡입니다.
물론 대중적인 인기로 따지자면 1899년 작곡한 교향시 <핀란디아>를 먼저 언급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곡은 매우 ‘정치적인 음악’이지요. 알려져 있다시피 핀란드는 13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1809년부터 1917년까지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공국(公國)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식민지적 지배는 1894년 니콜라이 2세가 차르(러시아 황제)에 즉위한 이후 한층 노골화합니다. 당연히 핀란드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부채질했겠지요. 그런 운동의 일환으로 1899년 11월에 핀란드의 언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행사가 열렸고, 그 행사의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마련된 것이 연극 <역사적 정경>의 상연이었습니다. <핀란디아>는 바로 이 연극을 위해 작곡한 음악의 일부였습니다. 말하자면 핀란드 사람들의 애국적 열정을 고취시키기 위한 음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음악은 때때로 선동적입니다. 어느 순간 가슴으로 확 밀려 들어와서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온통 뒤흔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악용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유럽의 현대사에서 이미 그 장면을 목도했거니와, 바로 히틀러와 나치가 바그너의 음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활용한 것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시무시한 장면이지요. 유태인들이 죽음의 가스실로 끌려가는 그 순간에, 수용소의 스피커에서는 바그너의 음악 ‘순례자의 노래’가 울려 퍼졌으니 말입니다.
물론 세밀히 들여다보자면 꼭 바그너의 음악만은 아니었지요. 히틀러와 나치는 이른바 독일풍의 웅혼한 낭만음악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춘 ‘독일정신의 정화’로 포장해 악용했습니다. 베토벤과 브람스의 음악도 이 정치적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나치 이후의 독일 음악은 ‘감정의 배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감성적 음악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뼈저리게 겪은, 아울러 그 시대의 과오를 철저히 반성했던 독일인들은 스스로의 전통을 부정하고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이른바 음렬주의, 조성에서의 탈피 등 쇤베르크(1874~1951)에서 발원하는 음악이 바로 그렇습니다.
또 샛길로 빠져 말이 길어졌습니다. 다시 시벨리우스로 돌아오겠습니다. 자, 시벨리우스의 음악 중에서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음악을 또 한 곡 꼽아본다면 뭐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극음악 <쿠올레마>에 삽입된 ‘슬픈 왈츠’라는 곡입니다. 연주시간 5분이 조금 넘는, 아주 짧은 곡이지요. 채널예스 편집자가 이 음악을 링크해줬으면 좋겠군요. ‘슬픈 왈츠’에 대해 설명하려면 시벨리우스의 아내인 아이노 예르네펠트(1871~1969)를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벨리우스는 26세 때(1892년) 아름다운 외모의 아이노와 결혼하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핀란드의 유명한 장군이고 위로 세 명의 오빠가 있었습니다. ◀시벨리우스의 부인 아이노 예르네펠트. 결혼 1년 전인 1891년 20살 때의 모습이다.
한데 그 세 오빠들이 하나같이 핀란드의 유명한 예술가들입니다. 첫째 아르비드는 극작가, 둘째 에로는 화가, 셋째 아르미스는 작곡가였지요. <쿠올레마>는 ‘죽음’이라는 뜻인데 바로 아르비드가 극본을 섰던 연극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시벨리우스는 처남이 쓴 연극의 음악을 맡았던 것이지요. ‘슬픈 왈츠’는 그렇게 만들어진 짧고 아름다운 곡입니다. 왈츠는 왈츠인데, 왠지 스산한 북유럽의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한국에도 몇 차례 내한했던 빡빡머리 지휘자 파보 예르비(1962~ )가 이 짧은 곡을 앵콜로 자주 연주하는 편입니다. 아마 인터넷 동영상으로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시벨리우스의 협주곡을 특히 애호하는 까닭은?
하지만 대중적 인기와는 별도로, 시벨리우스의 음악적 생애를 대표하는 곡들은 7개의 교향곡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중에서도 2번이 가장 많이 연주됩니다. 그리고 시벨리우스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걸작이 바로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입니다. 이 곡은 청중도 좋아하지만 사실은 바이올리니스트들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음악입니다. 제가 몇 해 전 만났던 사라 장도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이 곡을 손꼽았습니다. 또 최근에(사실은 며칠 전에) 만났던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신현수)도 자신이 애호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의 작곡가로 “브람스와 시벨리우스, 프로코피예프”를 꼽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시벨리우스 협주곡에 많은 애착을 보이는 걸까요? 신지아의 말 속에 그 단초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예를 들어서 차이콥스키의 협주곡 2악장은 선율이 굉장히 아름다워요, 하지만 그걸로 그냥 끝이죠. 반면에 시벨리우스의 2악장에는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가슴이 아릿한 정서 같은 것이 있어요. 말로 설명하긴 좀 어렵지만요.”
신경숙의 소설 제목을 잠시 빌려온다면 그것을 ‘깊은 슬픔’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한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이 곡을 애호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3악장이지요. 바이올린의 기교가 매우 화려하고 리드미컬한, 이른바 비르투오소 풍의 악장입니다. 연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짜릿한 쾌감을 느낄 만한 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지닌 기량을 마음껏 펼쳐내면서 알레그로 템포로 달려 나갈 수 있는 것이지요. 아마도 그런 이유들 때문에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사랑을 받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그것은 청중이 이 곡을 좋아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핀란드의 국민음악가’로 규정되는 시벨리우스는 20세기 초반에 주로 활약했지만 음악적으로는 전통적 어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온음계적 선율과 조성적 화성을 즐겨 사용했지요. 비슷한 시기의 유럽 작곡가들이 혁신적인 음악 어법을 찾느라 골몰했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그를 종종 보수적인 작곡가로 설명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의 음악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혹은 프랑스의 음악에서는 만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아마도 핀란드의 하늘과 바람과 바다에서 영감을 얻는 듯한 개성, 또 내용적으로 보자면 그 땅의 설화에서 건져 올린 듯한 회화성과 신화성 같은 요소들을 느끼게 합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슬픈 왈츠’와 같은 해에 작곡됐지요. 38세였던 1903년이었습니다. 이듬해 2월에 작곡가 본인의 지휘로 헬싱키에서 초연하지요. 하지만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시벨리우스 본인도 뭔가 미진했던지 퇴고를 거듭해 1905년에 개정판을 내놓지요. 일설에는 1905년 베를린에서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창작의 자극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날 주로 연주되는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는 바로 1905년의 개정판입니다.
시벨리우스 조각상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음악적으로 가장 빼어나다는 평을 듣는 것은 1악장이지요.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듯한, 북유럽의 신화적 분위기를 풍기는 악구들로 문을 여는데 시작부터 바이올린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이어서 독주 바이올린이 애상적인 선율의 첫 번째 주제를, 또 파곳이 두 번째 주제를 연주합니다. 협주곡의 일반적 작곡 방식과 달리, 악장의 중간에 카덴차(cadenza, 독주악기가 무반주로 기교적 연주를 펼쳐내는 부분)가 있는 것도 1악장의 특징입니다.
2악장: 아다지오 디 몰토
아다지오 템포로 느릿하게 막을 여는 2악장에는 북유럽 특유의 서정이 확연하지요. 독주 바이올린이 어떤 표정을 띤 채 노래하는 느낌의 악구들을 연주하다가 관현악이 합세하면서 음악이 규모가 점점 확장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바이올린이 애조 띤 노래를, 앞에서보다 조금 빠른 템포로 부릅니다. 마지막에는 다시 원래의 템포로 느려지지요.
3악장: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3악장은 팀파니와 저음 현악기들이 둥둥거리는 느낌으로 시작해서 곧바로 독주 바이올린이 첫 번째 주제를 연주합니다. 그 주제 선율 밑에서 독특한 리듬 패턴이 계속해 반복됩니다. ‘빰바밤빰 밤밤밤’하면서 반복되는 그 패턴을 몸으로 기억하면서 음악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3악장의 바이올린 테크닉은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짜릿합니다.
추천음반
1. 야사 하이페츠, 월터 헨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1959, SonyMusic. 하이페츠가 연주한 시벨리우스 협주곡은 필청반이다. 토머스 비첨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도 있으나 1930년대의 녹음이어서 음질이 난감하다. 보편적으로 들을 수 있는 음반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미국 지휘자 월터 헨들(1917~2007)이 이끄는 시카고 심포니와의 협연이 연주력과 음질에서 나무랄 데가 없다. 하이페츠 특유의, 차갑고 날카로운 마력을 느끼게 하는 연주다. 특히 비르투오소 풍의 악구들이 빈번히 등장하는 3악장이 눈부시다. 국내에서 두 가지 음반 중에서 구할 수 있다. <Jascha Heifetz plays Great Violin Concerto>는 6장의 CD에 하이페츠의 중요한 협주곡 연주들을 모두 담았다. 낱장 음반으로도 구입이 가능하다. 시벨리우스 외에 글라주노프와 프로코피에프의 협주곡을 함께 수록했다.
2. 정경화, 앙드레 프레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70, Decca. 22세 정경화의 신선한 에너지가 오롯이 담긴, 데카(Decca)에서의 데뷔 음반이다. 1970년 영국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유럽 데뷔 무대를 치른 정경화는 곧바로 음반사 데카에 발탁됐다. ‘동양에서 온 마녀’라는 별명은 그 연주회와 이 음반에서 비롯했다. 시벨리우스와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을 함께 담았다.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그러면서도 애틋한 분위기가 살아 있는 연주다. 특히 노래의 느낌을 머금은 2악장이 좋다.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의 호흡도 나무랄 데 없다. 이 음반을 듣다보면 정경화에게는 유럽인들은 흉내 내기 어려운 독특한 감성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국내에서 두 가지 음반을 구할 수 있는데, 이 지면에서는 오리지널 음반을 권한다.
글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경향신문 문화부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문화웹진 채널예스에 음악 칼럼 ‘내 인생의 클래식 101’, 서울시향의 기관지 SPO에 ‘20세기 음악 산책’ 등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에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돌베개, 2013), <더 클래식: 바흐에서 베토벤까지>(돌베개, 2014)가 있다.
출처 : 문화웹진 채널예스>칼럼>음악>‘내 인생의 클래식 101’ 2015.02.02
Symphony No.9 in C major D.944 'The Great (Die Grosse)'
슈베르트 / 교향곡 9번 C장조 '더 그레이트'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Riccardo Muti / Wiener Philharmoniker (Scala-LIVE)
1악장 C장조 2/2박자: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서법으로 시작한다. 첫 부분에서 2대의 호른이 단독으로 주제를 연주하는 것이다. 이같은 스타일은 교향곡 8번 ‘미완성’도 그러하지만 이 주제가 포함돼 있는 동기가 1악장 제2주제, 2악장과 4악장의 제1주제, 3악장의 트리오 주제 등에 포함돼 있고, 전곡에 걸쳐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면서 전곡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대규모의 서주는 고전파적인 성격의 서주를 넘어서서 독립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고 하겠다. C장조와 같은 순수하고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 선율적이고 화성적인 부분이 모습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악장이다. 마지막 부분에는 피우 몰토(매우 더욱)로 템포를 빠르게 하여 등장하는 서주부 주제가 장대한 코다로 끝을 맺는다.
2악장 A단조 2/4박자: A-B-A-B-A 형식으로 슈베르트의 초기 6개 교향곡과 동일한 형태의 느린 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양식적으로는 밀도 있고 한층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제부는 저음현과 목관이 이어지는 선율로 휴양지 그문덴과 가스타인 지방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단조와 장조의 빈번한 교대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뉘앙스도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후 바순에 더블베이스가 이끄는 주제가 만들어지지만 첫 주제와 정서는 동일하다. 호른의 3도 하행에 의한 연결구를 두고 슈만은 ‘하늘의 천사가 숨어있는 듯하다’고 말한 바 있다. 후반부는 미묘한 변화를 주면서 마지막 부분에는 첫 주제가 반복돼 덧붙여진다.
3악장 C장조 3/4박자 - Trio A장조 : 베토벤과는 다른, 슈베르트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쓴 스케르초다. 단순하고 접근하기 쉬운 춤곡 성격을 스케르초 안에 잘 융화시켰다. 작은 3부 형식의 주요부는 대조적인 두 개의 악보로 구성돼 있다. 화성적으로 미묘한 차이가 돋보이는 것은 A장조 트리오에서 3도 관계의 조바꿈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슈베르트 특유의 유려한 선율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4악장 C장조 2/4박자 : 슈베르트는 자신의 '교향곡 2번' 4악장 등에서 보여준 바 있는 음형과 리듬의 오스티나토(일정한 음형을 같은 성부에서 같은 음높이로 계속 되풀이하는 기법) 처리를 소나타 형식과 근사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C장조와 A단조를 오고가는 제1주제에 포함돼 있는 두 개의 음형이 전체를 통해 쉬지 않고 반복되고 G장조의 음형적인 제2주제가 중복된 발전부, 재현부에서 반복되고 있다. 발전부에서는 제2주제와 관련된 새로운 소재가 중첩되며, 제1주제가 C단조로 다시 등장하고 Eb장조와 교차한다. 제2주제는 C장조중에 재현되고 마지막에는 제1주제가 다시 연주된다. 간명하지만 장대한 코다는 마치 슈베르트 교향곡 전체의 피날레와 같이 감격적으로 다가온다.
슈베르트의 9번 교향곡은 다른 C장조 교향곡인 6번 'Little C Major'(소교향곡)과 구분하기 위해 '그레이트'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데 전 슈베르트 교향곡에 비해 한 차원 높은 힘과 무게감이 표현되어 있다. 이는 모든 9번 교향곡의 위대함에 걸맞으며, 제목만큼 장대한 선율로 꽉 찬 포만감에 젖게 한다.
특히 1악장은 첫 부분에 호른이 솔로로 제시한 주제가 계속 변형되어 연주되어 가는데 끝에 치다를수록 다양한 악기가 합주되어 웅대한 선율을 뽐내 듣는 이에게 희열을 보게 한다. 또한 4악장 피날레는 1악장부터 품고 있던 모든 힘을 쏟는 듯 명쾌하고 화끈한 악장이다. 이와 같은 '그레이트 교향곡'은 슈베르트 사후 10년이 지난 후에야 슈만에 의해 빛을 보게된다. 슈만은 원고를 라이프치히로 가져갔고, 그 곳에서 멘델스존에 의해 초연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스케치만 남아있는 '교향곡 D장조'(D936A, 1828년)를 제외하고는 슈베르트 최후이자 최대의 교향곡이다. 출판 당시인 1849년 시점에서는 '교향곡 7번'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까지 슈베르트 교향곡은 1~6번까지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7번째 교향곡 번호를 받았던 것이다. 1884~1885년 구 전집이 출판됐을 때에도 이 사실은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 후 단순한 스케치 상태였던 'E장조 교향곡'(D729, 1821년)을 어떻게 슈베르트의 작품 목록 속에 위치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불거졌다. 그래서 다시 작품의 성립 연대순으로 번호가 재배치 되었다. 따라서 성립 연대순에 따라 'E장조 교향곡'을 7번, '미완성 교향곡'을 8번, '더 그레이트 교향곡'을 9번으로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보편적으로 일컬어지는 슈베르트의 교향곡 번호로 정착되었다. 현재는 슈베르트 교향곡 중 '미완성 교향곡'과 함께 유명작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교향곡은 전에는 제7번으로도 불렸고, "더 그레이트(The Great)"라는 별도의 호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슈만이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잠들고 있는 비인의 벨링 묘지를 찾은 것은 1838년의 일이었다. 그 해는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지 11년,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10년째 되던 해였다. 그 때 슈만은 28세였다. 존경하는 대선배님들의 묘는 나란히 있었다. 그리고 베토벤의 묘에는 장미가 심어져 있었지만, 슈베르트의 묘에는 꽃 한 송이 없었다.
슈만은 그 때의 일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근대의 예술가들 가운데서 가장 존경하는 이 두 사람의 예술가를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생존 중에 그들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 즉 그들의 형제를 만나보기로 했다. 마침 슈베르트의 친형 페르디난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안 나는 묘지에서 나오는 길로 곧장 페르디난트를 찾아보기로 했다."
페르디난트는 동생 때문에 왔다니까 매우 반가워하면서, 슈만에게 동생의 유품을 이것 저것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맨 나중에 간직해 두었던 보물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책상 위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 있는 미발표의 초고였다. 순간 슈만의 눈은 그 초고에 고정되었다. 슈베르트의 만년의 교향곡 제9번은 이렇게 해서 발견된 것이었다. 슈만은 페르디난트에게 초연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뒤에 그 초고를 즉시 라이프찌히로 보냈다. 라이프찌히에는 그 당시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지휘자로서 친구 멘델스존이 있었기 때문이다. 멘델스존을 비롯하여 악단 관계자들은 그 초고를 받아 들고는 날듯이 기뻐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1839년 3월 21일, 멘델스존의 지휘로 역사적 초연이 이루어진 것이다.
슈베르트에게 있어서 마지막 교향곡에 해당하는 이 제9번은 그가 가난 속에서 세상을 뜨기 9개월 전에 작곡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1828년 3월이다. 슈베르트는 이 곡에 대해 상당한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에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이제 가곡을 그만 쓰기로 했네, 이제부터는 오페라와 교향곡에 주력할 작정일세,...." 이런 일은 좀 드문 일인데, 그는 이 곡이 완성되자 곧 초고를 가지고 오스트리아 음악협회에 그 상연을 부탁하러 갔다. 그런데 협회 돌대가리들은 그 상연을 거절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내용이 너무 꼬였고 거창하며, 게다가 너무 길다는 이유였다. 만약 베토벤이나 베를리오즈 같으면 흔쾌히 상연을 주선했을 것이다. 기질이 약한 슈베르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곡이 초연된 직후에 슈만은 "신음악시보(新音樂時報)에 "솔직히 말해서 이 곡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슈베르트를 안다고 할 수 없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슈베르트가 이제까지 세상에 내놓은 것을 염두해 둘 때, 지나친 찬사 같아서 수긍이 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교향곡을 한 번 들어 보라, 그 속에는 당당한 음악상의 작곡기술 말고도 갖가지 다채롭고 비할 데 없는 생명이 나타나 있으며, 도처에 깊은 의의가 담겨져 있으며, 각각의 소리가 날카로운 표현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슈베르트 고유의 로맨티시즘이 넘쳐 흐른다. 게다가 마치 장 파울의 4권으로 된 장편소설처럼 천국적으로 길다....." 라는 글을 실었다.
이 제9번이라면 반드이 인용되는 것이 이 "천국적인 길이"라는 말이다. 분명히 이 교향곡의 규모는 크고 길다. 그러나 그 "천국적으로 길다"는 것은 단지 그 시간적 길이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지루함이 없이 계속되는 거룩할 만큼 아름답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제8번-미완성"과 이 "제9번"과의 사이에는 약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그 사이에 그는 인간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크게 성장했다. 이처럼 장대한 작품을 이렇다고 할 스케치도 하지 않고 단숨에 써내는 것만 보아도 그 성장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런데 전작인 "미완성"은 아주 내성적이고 서정적인데, 이 "제9번"은 외향적이고 밝고 당당하며, 슈만도 지적하고 있듯이 전체적으로 로맨티시즘으로 넘치고 있다. 서두의 호른의 목가적 선율부터가 우선 그러한데, 이제까지의 교향곡에서는 엿볼 수 없었던 것이다.
Schubert: Symphony No. 9 in C major 'Great', D 944 - BBC Proms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베토벤이라는 거인이 길고도 당당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빈의 고전시대를 마감해 가고 있을 때, 슈베르트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 떠돌이 생활을 영위해가며 선율미가 넘쳐 흐르는 작품들을 속속 써내고 있었다. 천재성이라는 점에서 볼 때, 슈베르트는 모짜르트에 못지 않으면서도 당시 빈의 음악계를 지배하고 있던 베토벤의 그늘에 가리어 생전에는 결코 빛을 보지 못한 채 31년의 짧은 생애를 마쳐야만 했다.
슈베르트 음악의 본질은 그 무궁무진하게 솟아 오르는 가락에 있다. 이러한 특성에 가장 완벽하게 제자리를 잡은 것은 그의 900여곡에 달하는 가곡이며, 따라서 가곡을 떼놓고서는 슈베르트를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흔히 '슈베르트는 관현악도 가곡처럼 썼고 베토벤은 가곡도 관현악곡처럼 썼다.'는 말은 이 두 작곡가가 음악적 본령이 어디에 있는가를 단적으로 풀이해 주고 있다.
슈베르트의 관현악 작품에는 확실히 가곡적이고 멜로디에 풍부한 악상이 넘쳐 흐른다. 31세라는 짧은 생애 동안에 남겨 놓은 9개의 교향곡 작품들 역시 이러한 윈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교향곡을 가곡처럼 음미할 때에 그 아름다움은 비로소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년의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같은 구축력이 강한 작품들을 써보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결국 삶의 여백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은 채 절필해야만 했다. 31세라는 나이를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음악사에는 슈베르트만한 업적을 남긴 작곡가가 없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우리의 가슴을 메이게 한다. 슈베르트가 음악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그 방대한 가곡에 있을 것이다. 슈베르트 없이 가곡을 생각할 수 없고 가곡을 얘기할 때 슈베르트를 떼어 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이루어져 이들 양자의 의미를 함축시키고 있다. 따라서 슈베르트 음악의 기본은 가곡에 입각한 가락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특수성을 기악곡이나 관현악곡에서도 그대로 침투되어 있어서 모든 메세지를 아름답게 노래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그 결과 '슈베르트에게 있어서 관현악곡도 가곡적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것은 '베토벤에게 있어서 가곡도 관현악적이다'란 말과 아주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 두가지 비유는 베토벤과 슈베르트라는 두 작곡가의 기질적 차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생관과 음악관을 모두 함축시킨 단적인 표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만년의 슈베르트는 가곡 위주의 작곡생활에서 크게 전향하여 대편성 교향곡이나 오페라에 몰두해 있었다. 특히 1821년에 손을 댄 E장조 교향곡 D.729가 제 1악장의 첫 부분만을 악보로 남기고 그 이하는 스케치에 그친 데다가, 곧 이어 착수한 여덟번째 교향곡 b단조 D.795도 2악장만으로 그쳐버린 '미완성'이어서 그는 대편성 교향곡에 대한 작곡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1823년 슈베르트가 쓴 편지에 의하면, 그는 이미 소편성의 실내악적 교향곡은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다. 또한 뒤따라 작곡된 두 곡의 4중주, 그리고 관과 현을 위한 8중주 등도 대편성 교향곡을 쓰기 위한 연습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이 편지는 시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슈베르트가 의도하는 대편성 교향곡의 작곡은 그의 뜻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심이 실행에 옮겨진 것은 1828년 3월, 죽음을 불과 3개월 밖에 남기지 않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가곡은 이제 그만 쓰겠다'고 스스로 심경을 밝힌 뒤에 본격적인 교향곡을 쓰기 위해서 벼르고 벼르다가 착수한 작품이었던 만큼 슈베르트는 이 교향곡을 마무리하는 데 온 힘을 다 바쳤다. 그 결과 착수한지 한 달만에 '장대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교향곡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이 곧 <그레이트>라고 불리는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C장조인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베토벤의 교향악적 정신을 이어 받기 위한 생각으로 슈베르트는 이 대곡에 손을 댔지만, 결과는 베토벤이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로까지 접근시켜 가지는 못하고 말았다. 오히려 그가 7년전에 써 두었던 제8번 <미완성>의 세계로 더더욱 파고 들어가 그것을 대폭 확장시켜 버린 결과가 되고 말았다. 바로 거기에 슈베르트적 관현악법의 장점이자 한계점이 공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이 작품이 베토벤의 교향악적 세계로까지 진입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 이후 슈베르트를 뒤따르는 낭만주의 교향곡 작곡가들에게 하나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히 슈베르트의 관현악 세계를 총결산하는 대작업이었고, 어찌보면 슈베르트라는 하나의 인간을 종결짓는 클라이막스이기도 했다. 슈베르트는 이 곡을 쓰고 난 9개월 후인 1828년 12월에 31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교향곡 제9번의 1, 2, 3악장은 연이어 나타나는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찼다가 4악장에 이르러 소나타 형식의 장대한 악장으로 발전한다. 극것이 힘차고 생명력이 넘치는 격렬함으로 고양되는 데서 베토벤적 의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슈베르트의 관현악이 내뿜는 정신의 열기는 한도를 갖고 만다. '고뇌를 뚫고 환희로' 끝없이 비상하는 베토벤이 아니라 적당한 선에 멈추어 서서 스스로 자지러지는 슈베르트의 특유의 격렬함이다.
당초 이 곡은 빈악우협회에서초연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로부터 악보를 받아 본 빈악우협회는 이 곡이 너무 장황하고 길다는 이유로 연주를 거부했다. 본래 섬세한 기질을 타고나 심성이 여리기만 했던 슈베르트는 악우협회의 결정에 한 마디 불평도 못하고 악보를 되돌려 받은 채 연주를 포기하고 말았다. 만약에 베토벤이었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악우협회와 맞서서 연주를 강행했을 테지만 슈베르트는 그렇지를 못했다. 이 곡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슈만의 공이 있었다. 이 곡이 작곡된 지 10년 후인 1838년, 그러니까 슈베르트가 31세의 짧은 생을 마친지 10년 후인 당시 28세의 청년 작곡가 슈만은 빈으로 가서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묻혀 있는 베링중앙묘지를 참배했다. 슈만이 가장 존경했던 이들 두 선배 작곡가는 그가 한번도 상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슈만으로서는 무척 감개가 깊었다. 비록 그들이 이미 땅에 묻혀 말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진 해후였으나, 슈만은 오랫동안 잠재해 있던 마음 속의 열망을 조용히 풀어헤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선배 작곡가의 무덤을 참배하고 나서 곧 슈베르트의 형인 페르디난트의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상당량의 슈베르트 유고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슈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얻어 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간 것이다. 슈만의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슈만의 방문을 받은 페르디난트는 동생 슈베르트의 유품들을 이것 저것 뒤적이다가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묶여 있는 악보 뭉치 하나를 보여 주었다. 그 악보를 받아 본 슈만은 깜짝 놀랐다. 아직까지 발표되지 않은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C장조였기 때문이었다.
슈만은 페르디난트로부터 이 곡을 초연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후 악보를 즉시 멘델스존에게 보냈다. 당시 멘델스존은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슈만과는 각별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악보를 받은 멘델스존은 곧 연습에 착수하여 다음 해인 1839년 3월 21일 역사적인 초연이 이루어진다. 그 자리에는 물론 슈만도 참석해 있었고 페르디난트도 빈에서 달려와 동생의 마지막 교향곡의 초연을 감명 깊게 지켜봤다. 작곡된 지 꼭 11년 만의 일이었다. 그렇게해서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차츰 여러 교향악단들에 의해 연주 레퍼토리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아름답고 리드미컬한 여운은 때때로 우수를 불러 오기도 하지만, 어느 곳에서나 슈베르트적 명선율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낭만주의 교향곡 역사의 첫페이지를 장식하는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모든 연주자와 애호가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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